백두 대간-10(우두령-황악산-추풍령)
구간


 


산행일자 : 2004년 1월
24일∼25일(무박2일)


참가인원 : 최승원, 잔디밭
산악회 8차 종주대원(합20명)


산행코스 :  우두령-삼성산-바람재-황악산-백운봉-여시골산-궤방령-가성산-장군봉-눌의산-추풍령


산행거리 : 도상거리 =
20.6km,  실 거리 = 26.80 km


산행시간 : 12시간 26분
(02:34-15:00)


face="굴림" size="2">--------------------------------------------------------------------------------------------



지난해
9월 27일 대간 산행을 시작한지 4개월, 8번째 산행으로
우두령에서 황악산을 거쳐 추풍령을 잇는 산행이다.


민속
최대의 명절인 설날 연휴로 집사람과 작은놈이 처가에 가고
큰아이와 둘이 남아있어 자양동의 동생 집에 큰아이를 부탁하고,
동대문으로 향한다. 명절연휴의 끝자락인 관계로 산행인구는
급격히 줄어서 동대문종합시장 주차장도 아주 썰렁하기만
했다.


빠지지
않고 참석했던 많은 분들이 명절 탓에 보이질 않았고, 먼저
나와 계신 몇 분의 선배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산행지로
출발을 한다.


남부
지방으로 눈이 만이 내렸다는 말에 대장님의 걱정이 태산같다.
눈이 내린 후의 명절연휴로 대간에는 러셀도 되지 않았을
것이며, 우두령으로 차량 접근은 가능한지?


그러나
대간 산행이 진행되어 북으로 올라갈수록 산행 기점으로
이동하는 시간은 점점 빨라진다. 다행히 우두령으로 가는
도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죽암 휴게소에서 1시간을
쉬어서 산행기점인 우루령에 02시 20분 경에 도착하여 산행준비를
한다.


영하
10도를 내려간 온도에, 바람마저 거센 날씨는 오늘 산행의
힘든 여정을 예고하고 있었다.  











 


산행을
마치며 추풍령에서




스패츠를
매고, 어떤이들은 처음부터 아이젠을 하고 02시 34분 우두령에서
산행을 시작한다. 시작부터 급경사의 등산로를 따라 한
걸음씩 걷는 발걸음은 추위와 불어오는 강풍으로 얼굴이
얼기 시작하며 질리기까지 한다. 그러나 상당히 가파른
경사 길은 등줄기가 후끈해져 오는 것을 느낄 수 있게 하여
주며, 호흡이 거칠어지기 시작한다.


오늘산행의
도상거리는 20km가 넘는 거리로 아직까지의 대간 산행 중
최장거리다. 일부 다른 팀들은 중간지점인 궤방령을 깃점으로
2구간으로 나누어 산행을 하는 경우도 있다.


1000m의
고산 줄기가 가까워질수록 음지쪽에 쌓인 눈은 그 깊이를
더해간다. 예상보다 적은 눈으로 양지쪽과 바람을 맞는
방향은 쌓인 눈이 많지 않았으나 반대편에는 그 깊이가
매우 깊었다. 허벅지를 지나 허리까지 차 오는 듯한 눈에
길조차 찾기 어려운 산행은 홀로 선두에서 러셀을 하는
김 대장님에게 죄송스런 마음으로 가득하게 한다.



 우측으로
불빛이 환한 마을을 가리키며 김천시내를 두고 황악산으로
전진한다. 연일 이어지는 음주로 인하여, 술로 찌든 산행은
거친 숨소리와 동반하는 고통 뿐...  


그러나
어이하랴, 20년을 넘게 항상 술과 함께 하던 인생이 아니더냐



1시간 정도의 산행으로 삼성산에 도착한다. 그러나 거센
바람으로 정상에서 휴식을 취한다거나 후미를 기다리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다시 산행으로 바로 이어진다. 어둠을
비추는 랜턴은 추위에 배터리가 얼어 불빛이 희미해진다.
그러나 추위에 배터리를 갈아 낄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불빛으로 산행을 한다.


얼굴은
얼어붙고 풀어진 스패치 사이로 한줌의 눈이 등산화 안으로
들어온다. 그 들어온 눈은 녹아 물이 되어 발바닥을 적신다.
1030고지를 넘어 바람재로 가는 길은 긴 여정의 산행길의
거리를 더해 준다. 어둠에 눈 쌓인 대간의 마루금은 길조차
흔적이 없어, 이곳에서 빼앗긴 1시간은 갑자기 나를 지치게
한다. 우여곡절 끝에 임도가 나타난다. 바람재가 가까워짐을
알 수 있었다. 임도를 따라 약 1km 정도를 내려가다 왼쪽의
대간길로 들어서자 헬기장 이 나오고 바람재 안부에 도착한다.


 


과거에도
수많은 혹한기의 겨울산행이 있었지만 이번 산행의 추위는
특히 더한 것 같았다. 얼굴이 얼어붙는 것은 물론 산행
중에도 추위를 느껴 다시 오버트로즈를 껴입고도 추위를
느끼고 있으니 말이다.


랜턴의
배터리를 갈아 끼우고 황악산으로 오르는 가파른 대간 능선은
아침여명이 일기 시작한다. 가쁜 숨으로 형제봉에 오르고
나니, 날이 완전히 밝아오고 있었다.


선두를
앞으로 보내고 뒤로 조금 처진다. 알바로 인한 심리적 부담
때문일까? 무척이나 지치고 힘이 든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어 황악산 정상으로 향한다. 능여계곡 입구의 삼거리가
나온다. 오전 8시경, 안간힘을 쓰며 오른 황악산 비로봉정상에는
정상표지석이 두 개가 서 있었다.



옛날 집사람과 결혼하기 전에 열차를 이용해 이곳을 산행했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여름장마가 막 끝나고 맑은 날씨에
고추잠자리가 많았었는데 오늘의 이곳 산행은 혹한과 강풍으로
얼굴이 얼어붙는 날씨다.


 


선두그룹은
벌써 정상을 벗어났고 나도 이내 길을 재촉한다. 30여분을
하산하여 벤치에 도착하니 선두에 나선 일행들이 식사를
하고 있다. 나도 이곳에서 멈추어 섰다. 배낭을 내리고
, 컵라면을 꺼내 뜨거운 물을 붇는다. 그러나 차가운 날씨로
라면은 제대로 익지 않고....


김치를
꺼내서 덜 익은 라면을 그냥 먹는다. 그래도 막은 일품이다.


시간이
많이 늦었다며, 길을 나서자고 재촉한다.


백운봉과
여시골산을 통과하고 10시 15분경 궤방령에 도착하여 막걸리
파티가 이루어진다.


앞에
보이는 가성산은 대간꾼들의 기를 꺽기에 충분해 보였다.
궤방령에서 보는 가성산은 그 자태가 매우 웅장하여 710m의
산으로 보기는 시각적으로는 무리가 있는 듯 하였다.


그러나
어이하랴! 대간 마루금이 그리 쉽게 나에게 다가오지는
않을 것을!


 


심기일전하여
가성산으로 안간힘을 쓰며 발길을 옮기어 간다.


지루하고
지쳐간다. 황악산 쪽에는 눈이 많이 쌓여 있었으나 이곳에는
눈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많이 지쳐있는 발길은 산행 속도를 아주 더디게 만들었다.


더구나
궤방령을 출발한 후부터 왼쪽발목이 시끈거려 오고 있었다.
 


같이
가던 선두의 일행을 먼저 보내고 천천히 발길을 옮기며
주위를 들러본다.


아직
오지 않은 후미의 일행이 많은데 너무 바쁘게 움직일 필요도
없는 것 같았다.


작은봉우리
몇 개를 넘고 가성산으로 오르는 마지막 오르막길에서 홀로
잠시 휴식을 가진다. 뒤에서 인기척이 일더니 대장님의
모습이 보인다. 궤방령에서 후미를 기다리다 이제야 오는
모양이다.


 


12시
30분, 지루하였던 가성산을 오르고 나서 약간 안도의 한숨을
쉰다. 궤방령부터 왼쪽발목이 시끈거려서 산행이 자연스럽지
못했는데 최대의 고비를 넘긴 것 같았다.


기념사진을
찍고 바로 눌의산으로 향하여 간다. 가파른 경사길을 조심스럽게
내려서기 시작한다. 한참을 내려서다 다시 오르막길로 접어들어
가뿐 호흡으로 606봉인 장군봉에 올라선다.


특징도
없이 그냥 밋밋한 장군봉을 지나 오르막길을 계속 올라
683m봉을 지난다.


눌의산으로
가는 길은 편평한 길을 지나 다시 오르막길로 접어들어
한참을 다시 올라야 한다.  


14시05분경에
홀로 외로이 눌의산 정상에 도착하여 물 한모금을 마신다.


사방의
시야가 확 트여 조망이 아주 좋아 보인다. 멀리 경부고속도로가
보이고 추풍령의 마을도 보인다. 정상 헬기장을 뒤로하고
추풍령을 향한 하산길이 시작된다.


급경사의
길을 조심스럽게 나뭇가지를 잡고 내려서기를 30여분, 선두로
산행하던 일행의 모습이 보인다. 하지만 선두권에서 이탈한
일행이었다.


양보
받은 길을 서둘러 내려서니 송리 마을의 포도밭이 나타난다.
고속도로가 눈앞에 빤히 보이는데 발걸음은 여전히 마음
같지가 않다. 포도밭 옆으로 나있는 길을 지나 고속도로
아래로 나 있는 굴다리를 지나 15시00분, 경부선 철로를
건너선다.



 


추풍령(秋風嶺)
- 구상(시인)


--------------------------      


추풍령(秋風嶺)


산비탈에


이름도
모를 산꽃 한 무더기가


눈에
스친다.


 


모시
치마 저고리 차림의


옆자리의
아리따운 여인이


정겨운
목소리로


 


`아이
저 꽃 좀 봐!


아름답기도
하여라!'


 


수로부인(水路夫人)의
탄성(嘆聲)을 발한다.


 


나는
흰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천삼백년
전 그 노인을


오늘
이 자리에다 떠올리며,


 


오늘의
나를 천삼백년 전


동해(東海)
산기슭 그 자리에다 떠올리며


달리는
고속(高速)버스 속에서



혼자 섭섭해하고



혼자 히죽거린다.


 








황악산


높이
1,111 m. 예로부터 학이 자주 찾아와 황학산으로
불리웠고, 지도상에도 그렇게 표기되어 있으나,
직지사의 현판을 비롯, 택리지등에 황악산으로
명기되어 있다.


서남쪽에
연봉을 이룬 삼도봉(三道峰:1,177 m) ·민주지산(珉周之山:1,242
m)과 함께 백두대간의 허리부분에 솟아 있다.
암봉(岩峰)이나 절벽 등이 없고 산 전체가
수목으로 울창하다. 직지사(直指寺)로 내려가는
동쪽 비탈면에는 능여(能如) ·내원(內院)
·운수(雲水) 계곡의 경관이 뛰어나다.
북쪽의 괘방령(掛傍嶺)과 남쪽의 우두령(牛頭嶺)을
통해 영동과 김천시를 잇는 지방도가 지난다.


 


 


직지사


대한불교
조계종 제8교구 본사로 신라 눌지왕(訥祗王)
2년(418) 아도 화상(阿道和尙)에 의하여 도리사(桃李寺)와
함께 개창(開創)되었다. 그 사명(寺名)을 직지(直指)라
함은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이라는
선종(禪宗)의 가르침에서 유래되었다 하며,
또 일설에는 창건주(創建主) 아도 화상이 일선군(一善郡,
善山) 냉산(冷山)에 도리사를 건립하고 멀리
김천의 황악산을 가리키면서 저 산아래도 절을
지을 길상지지(吉祥之地)가 있다고 하였으므로
하여 직지사(直指寺)라 이름했다는 전설(傳說)도
있다.


또는
고려의 능여 화상이 직지사를 중창할 때 자를
사용하지 않고 직접 자기 손으로 측지(測地)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란 설도 있다.  


이는
모두 창건설화와 연관된 직지(直指)의 미화(美化)된
전설에서 유래되고 있지만, 실은 불교 본연의
직지인심(直指人心)을 상징하는 의미로 풀이
될 수 있다. 즉 창건 설화의 직지(直指)와
선가(禪家)의 직지(直指)가 둘이 아니라고
볼 때, 이는 곧 불교의 본질을 나타내는 이름이라
하겠으며, 또한 사명 (寺名)에 불교의 본지(本旨)를
이처럼 극명(克明)하게 나타내는 사찰도 흔치
않으리라 본다.


직지사
사적에 따르면 금자대장경(金字大藏經)을 서사(書寫)하여
신라 조정(朝廷)에 헌상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는 현존 유품(現存遺品)이
전해지지 않아 그 내용을 자세히 알 수 없지만,
다음에 언급하게 될 금자대장경비(金字大藏經碑)가
이를 입증(立證)하고 있다. 다만 이제 지난날
직지사의 찬란하였던 사격(寺格)을 밝히면서
신라시대에 이미 금자대장경을 제작하였다는
이 놀라운 사실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
우리들은 대장경이라고 하면 해인사(海印寺)의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을 그 대표로 삼아
왔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서 이미 신라시대에,
그것도 금자대장경을 만들었다는 사적기의
내용은 진실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더구나
이를 접한 경순왕은 어찰(御札)로써 점제(點題,
經名을 쓰는 것)하였다고 하였으므로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에 대한 현품이
전래되지 않아 그간의 사정을 잘 알 수 없지만,
왕조(王朝)가 바뀐 고려시대 초기에 본사(本寺)에는
금자대장경이 봉안되었고, 또한 대장당비(大藏堂碑)가
건립되고 있다. 즉 고려 태조(太祖) 왕건(王建)은
직지사의 고승 능여 조사(能如祖師)의 도움으로
후백제(後百濟)와의 불리한 싸움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고, 이로 인해 직지사는 국가적
비호(庇護)를 받았으며, 이후 능여 조사(能如祖師)의
제자들 역시 대대로 본사를 중흥(中興)하더니
광종 원년(光宗元年, 950)에는 3월 1일부터
약 50일 간 법회(法會)를 개설(開設)하여 경찬회(慶讚會)를
성대히 베풀었다고 한다.


 


추풍령


높이
221 m. 금강과 낙동강의 분수령이며, 예로부터
영남지방과 중부지방을 잇는 중요한 교통로였다.
지금도 경부선 철도의 추풍령역이 있고, 4번
국도가 통하며, 경부고속도로의 중간점으로
추풍령휴게소가 있다. 임진왜란 때에는 군사적
요충이 되어, 의병장 장지현(張智賢)이 의병
2,000명을 이끌고 왜군 2만 명을 맞아 분전
끝에 물리쳤고(1차 전투), 다시 밀려온 4만
명의 왜군에게 패하여 장렬히 전사한 곳이다.


 


직지사에
관련된 설화


직지사
금강문


옛날
떠돌이 승려가 전국을 돌아다니다가 경남 합천
어느 곳에 도착하였 는데, 그 마을은 예로부터
대처승 마을로 촌장이 그를 보는 순간 사람
됨 됨이가 예사 사람이 아니라고 여겨 사위로
삼기로 했다.


그러나
그는 비구승이라며 한사코 결혼하기를 반대했으나,
바랑과 승복 을 빼앗고 강제로 결혼시킨 뒤
신랑 승려가 도망칠까 봐 장삼과 바랑을 깊숙이
숨겨 두었다. 아들을 낳고 살기를 삼 년이
지난 어느 날 아내는 장삼과 벼랑이 있는 곳을
가르쳐 주었더니, 다음난 아침 부인이 눈은
뜨 자 옆자리엔 남편이 없었다.



후 부인은 남편을 찾아 전국의 사찰을 모조리
찾아 다녔으나 헛탕이 었는데, 어디선가 그와
비슷한 승려가 직지사로 갔다는 소문을 듣고
이곳 에 찾아와, 그가 장계다리 아래 방앗간집에
묵고 있음을 알고 그 집에서 기다렸으나 사흘이
넘도록 오지않으므로 남편을 찾아 직지사로
들어가다 가 일주문을 지나 지금의 금강문
자리에 이르러 갑자기 피를 토하고 죽어 버렸다.


그후
매년 부인이 죽은 날이 되면 직지사의 승려들이
누가 부른 듯이 쫓 아 나가 부인이 죽은 자리에서
피를 토하고 죽어갔다. 이에 직지사에선 부인의
원귀를 위로하고자 그 옆에 사당을 짓고 그녀의
원혼을 달래기 위 해 매년 제사를 올렸다.
어느 해 이름있는 고승이 찾아와 사찰 안에
사당 이 웬말이냐고 나무라니, 승려들은 사당을
세우게 된 사유를 애기했던 바 , "그러면
이곳에 금강문을 지어 금강역사로 하여금 여인의
원혼을 막도 록 하라." 고 하여 지금의
금강문이 세워졌다고 한다.


 


직지사
호랑이꿈


황악산
직지사 아래 마을에 장생(張生)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이 사람은 오래전부터 호랑이
잡는 일을 계속해 왔는데, 하루는 함정을 파고
덫을 놓아 큰 호랑이 한 마리를 잡았다.



뒤에 아들이 갑자기 고함을 지르며 땅에 넘어지더니
한참 있다가 일 어나서 말하기를 "웬
사람이 나타나 내 등을 심히 매질하면서 '왜
내 말 을 죽였나' 하더라." 고 말하였다.
아들이 매 맞았다는 곳이 자꾸 헐어 터지고,
그 아들은 미친 사람이 되고 말아, 장생은
그 후부터는 다시는 함정을 파서 호랑이 잡는
일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 운영자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5-03-04 16: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