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주암은 경기도 과천시 중앙동 85-1번지인 관악산 연주봉 남쪽에 자리하고 있다. 관악산을 즐겨 찾는 이들에게는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사찰이며,
해발 629m의 기암절벽 정상에 위치한 연주대와 함께 관악산의 명소로 손꼽힌다.
연주암은 『연주암중건기』 등의 자료에 의하면 의상대사가 관악산에 의상대를 세우고 수행하였으며, 677년에 그 아래에 관악사를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대웅전 앞에 있는 3층석탑이 고려 후기 양식을 나타내고 있음을 볼 때, 창건 연도가 꽤 오래된 고찰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연주암이라는 사찰 이름에 대해서는 두 가지의 유래가 전해지고 있다. 그 첫 번째는 고려말의 충신이었던 강득룡·서견·남을진 등이
고려가 멸망하자 관악산 의상대에 숨어 살았으며, 여기서 멀리 개성를 바라보며 고려왕조를 그리워했으므로, 연주대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조선 태종의 맏아들인 양녕대군과 둘째 효령대군이 태종이 셋째인 충녕대군, 즉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자
유랑길에 나섰다가, 관악사를 찾아와 수행을 하면서 40칸 규모의 건물을 새로 지어 궁궐이 잘 보이는 현재의 위치로 거처를 옮겼다는 것이다.
이후에 사람들이 두 대군의 심정을 기리는 뜻에서 의상대를 연주대로, 관악사를 연주암으로 각각 부르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연주암에는 현재 대웅전과 삼성각, 그리고 종각 등의 전각과 2동의 요사가 세워져 있는데, 대부분 근대 이후에 들어와 세워진 것이다.
절벽 정상에 자리하고 있는 연주대는 경기도 지방기념물 제20호로 서울 근교에서 보기드문 절경을 자랑하는 곳이다. 처음 이름은
의상대사가 이 곳에서 수행하였다고 하여 의상대라고 불리었다가, 이후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조선시대에 연주대로 이름이 바뀌어진 듯 하다고 한다.
삼막사 [三幕寺]
삼막사는 연주암·염불사와 함께 이른바 관악산 3대 사찰로 꼽히고 있으며, 또한 조선시대에 서울 근교 4대 명찰 가운데 하나였다.
특히 서울 남쪽 지역에서 가장 이름난 수찰(首刹)이기도 하였다.
삼막사는 신라 문무왕 17년(677)에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신라의 원효·의상 두 고승과 윤필거사(潤筆居士, 또는 尹弼이라고도 함)등
세 분이 이 곳에 띠집을 엮어 수행처를 마련한 것이 그 시초라는 것이다. 이는 1771년 설암이 작성한 『삼성산삼막사사적』에 기록되어 있다.
한편, 『범우고』의 금천조에는 고려말에 지공·나옹·무학이 삼막사를 창건하였으며, 이들의 상이 사찰에 봉안되어 있었다고 되어 있다.
여하튼 이 지역 일대의 다른 사찰에서도 원효·의상·윤필거사, 또는 지공·나옹·무학 등과 얽힌 설화가 널리 전승되고 있다는 사실은
삼성산이라는 역사지리적 배경이 관계된 것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삼막사는 창건 후 신라말에 도선국사가 잡초만 무성하던 빈 터에 사찰을 중건하고 관음사라 이름하였다가, 후에 도선국사의 문도들이
삼막사라고 불렀다. 고려 충목왕 4년(1348)에 나옹선사가 이곳으로 거처를 옮겨 머물렀다. 충정왕 1년(1349)에는 중국에 있던 지공스님이
제자인 나옹을 만나기 위해 이곳에 찾아온 이후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와 선풍(禪風)이 크게 일어났다. 조선 태조 때 나옹의 제자인
무학대사가 동서남북의 각 방향에서 서울을 외호하는 4개 사찰을 선정할 때 삼막사는 남쪽에 해당하는 사찰로 지정되었다.
임진왜란 때는 사찰이 거의 불에 탔으나 대웅전만 소실을 면하였다. 그후 중건·중수가 계속되었으나, 1990년에 화재가 발생하여
대웅전이 전소되고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것으로 평가되던 범종을 비롯하여 불상·불화 등도 모두 소실되었으며, 이후 계속 중창불사를 일으켜
규모를 갖추어 가고 있다.
삼막사 경내에서 서북쪽으로 약 700m 거리에 칠성전이 세워져 있으며, 칠성전의 내부에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94호인
마애삼존불상이 봉안되어 있다. 이 삼존불은 1763년이라는 조성 연대가 뚜렷하여 조선 후기의 불상 및 조각연구에 있어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기도 하다. 또 칠성전 서북편에는 경기도 민속자료 제3호로 지정된 남근석과 여근석이 있어 출산과 관련된
민간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다.
염불사 [念佛寺]
염불사는 삼성산 남쪽 중턱 수십폭의 돌병풍을 둘러친 듯 웅장하고 가파른 암벽 아래에 자리하고 있다. 관악산의 명소 가운데 하나이다.
염불사의 창건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전한다. 첫째는 고려 태조가 926년에 후백제를 공격하러 가기 위해 삼성산 밑을 지나던 중,
산모퉁이에 오색구름이 영롱하게 서려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사람을 보내 그 연유를 알아보았더니 그곳에 능정대사가 앉아 좌선삼매에
들어 있었다는 것이다. 태조는 대사의 법력에 몹시 탄복하여 그곳에 사찰을 세우도록 명하였으니, 절 이름은 안흥사로 이 절이
염불사의 전신이라는 것이다. 두 번째는 원효·의상·윤필 등의 세 성인이 창건하였다는 설로, 세 분이 염불을 하던 정토였기 때문에
염불암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이후 염불사는 1407년 조선 태종이 풍수지리상 관악의 지맥을 누르기 위해 관악산 내의 사찰을 중건할 때 중창되었다.
그후 여러 전각이 중건되었고 1956년에 이르러 6·25전쟁을 겪으면서 퇴락했던 사찰을 중수하였다. 현재의 염불사는 모두
1910년 이후에 지어진 건물들이다.
관음사 [觀音寺]
관음사는 관악구 남현동 519-3번지 관악산 북동 기슭, 남태령 서쪽에 자리하고 있다. 예로부터 서울 근교 사찰 가운데
영험있는 관음 기도도량 중의 하나였다.
관음사는 1943년 이후에 쓰여진 『봉은사본말사지(奉恩寺本末寺誌)』에 의하면 신라 진성여왕 9년(895) 도선대사가 세운
비보사찰(裨補寺刹) 중의 하나라고 전한다. 조선 초기에 쓰여진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변계량이 관음사의 절경을 읊은 시가 수록되어 있어,
이 무렵까지 관음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영조 때 쓰여진 『여지도서』에도 관음사가 보인다. 예로부터 관음사 아래에 있는
승방벌이라는 마을과 그 앞에 승방교가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관음사는 작은 규모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철종 14년(1863) 8월에 행념이 당시 철종의 장인인 영은부원군 김문근의 시주를 받아 다시 고쳐 지었다.
1975년에 중창을 발원하여 7년여 동안 여러 건물을 차례로 중수하였다. 관음사 입구에는 수령 300여년의 느티나무가 있어
지정보호수로 관리되고 있다.
자운암 [紫雲庵, 慈雲庵]
관자운암은 관악구 대학동 194-1번지 관악산 북쪽 기슭 서울대 북쪽 산중턱에 자리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서쪽에서
관악산 연주봉을 향하여 올라가는 계곡을 자하동(紫霞洞)이라 한다. 신위는 “시내를 따라 백옥같은 언덕으로 가는 길은 익숙하여,
시와 선으로 자운암에서 입정하네"로 시작하는 「자운암」시를 남기기도 하였다.
호압사 [虎壓寺]
호압사는 금천구 시흥동 관악산의 한 봉우리인 호암산의 동쪽 산중턱에 위치해 있다. 이 절은 태종 7년(1407)에 태종이
이 절이 있는 삼성산이 호랑이 형국을 하고 있어 과천과 한양에 호랑이로 인한 재난이 많다는 술사의 말을 듣고, 호랑이의
살기를 누르기 위하여 절을 창건하고 호압사라 하였다 한다.
호압사 창건에 대해서는 또 다른 설화가 전해진다. 조선 태조가 경복궁을 건설할 때 호랑이 형상에 가까운 한 괴물이 나타나
궁궐 건설을 방해하였다. 어려움을 겪고 있는 태조에게 한 노인이 나타나 한강 남쪽 관악산의 한 줄기를 가리켜서 바라보니,
바로 호랑이 형상의 한 산봉우리가 한양을 굽어보고 있었다. 그 산봉우리의 기운을 누르기 위해 태조가 그 꼬리 부분에 절을 지은 것이
바로 호압사라는 것이다.
헌종 7년(1841) 4월에 의민이 상궁 남씨와 유씨의 시주를 얻어 법당을 중창하였고, 1935년에 주지 만월이 약사전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자료출처 : 관악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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