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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일자: 2002년12/21-22 산행코스: 유일사 매표소-유일사-천제단-문수봉-당골 산행시간: 5시간 20분
(휴식포함) 산행기 새벽부터 움직이는 나의 일과, 전적으로 내 가족을 위한 가사노동인데 전에 없이 보람을 느끼지 못한다. 어느 때엔
한여름 땡볕에 푹 삶아진 파초 잎처럼 삶이 시들해지기도 한다. 그리고 생활속에 쌓여만 가는 나른한 권태.... 이런 것이 躁鬱症(조울증) 이라는
건가.... 정신집중을 요 할 때, 피로회복에, 또는 기분전환에 Aroma therapy (향기요법) 가 있다는 말이 문득 생각나 꽃집에서
검붉은 장미를 한 아름 안고 들어와 거실에, 주방에 집안곳곳에 꽃아 놓았다. 향기로 기분전환을 기대했지만 웬일인지 향이 풍기지 않아 장미꽃
가까이 다가가니 그제야 微微 하지만 향이 전해져 온다. 바람이 일지 않아도 향기가 십리 간다는 십리 향(蘭香), 백리 향, 천리향(들
장미라 하는 찔레꽃)의 내음이 그립다. 우리의 산과 들에 지천으로 피어나는 풀꽃, 들꽃의 향기가 새삼 그리워진다. 지리산의 봄 꽃,
소백산의 여름 꽃, 영남알프스의 가을 꽃, 태백의 겨울 꽃 이산 저산 산길을 누비던 어제의 모습이 빛바랜 활동사진으로 오버랩 되어온다. 산
증후군 중에.... 건물 벽에 그어진 선만 보여도 붙잡고 기어오르고 싶어진다더니 한국의 산하 산행기에 글과 함께 올려진 산 사진만 봐도 그 산에
가고 싶어 병이 날 지경이었다. 40여일 쉬는동안 산병이 나도 단단히 났다. 산병이 더 깊어지기 전에 눈꽃의 나라, 온 산이 白雪 로 뒤
덮여있을 태백산에 가자고 친구들과 약속을 했었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밤 태백으로 길을 떠난다.
추전 역을 지날 때 검은 차창으로
비친 겨울나무에 핀 화사한 눈꽃을 볼 수 있었다. 청량리 역을 출발할 때 엔 서울의 밤하늘에 휘영청 滿月이 떠있었기에 어쩜 환상의 달빛산행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눈이 오고 안개도 끼어있어 우린 날이 밝으면 산행하기로 하고 3~4시간동안이라도 잠을 자기위해 모텔로 들어갔다.
몸은 피곤한데 정신은 더욱 또렷해진다. 눈꽃 세상에대한 옅은 흥분으로 쉬이 잠들 것 같지 않다.
이른 아침, 유일사 매표소 앞에
도착하니 간간이 뿌려지는 눈과 함께 희뿌연 안개가 온 산을 휘감고 있다. 유일사 오르는 초입 오르막길엔 눈이 다져져 조금 미끄럽다. 아이젠
착용이 더 위험하다는 산친구 님 말에 우린 그냥 오르기로 한다. 하늘을 찌를 듯 솟아있는 낙엽송 숲길을 지나 산 속으로, 산 속으로 들어갈수록
온통 하얀색, 켜켜이 쌓인 눈뿐이다. 숨 한번 고르며 올려다본 숲은 눈꽃세상을 펼치며 幻想을 부른다. 흰빛이 주는 純潔함, 神靈함, 高潔함에
연신 감탄사를 쏟아내다가 나무 생김새에 따라 다른 눈꽃의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큰나무 밑에서 올려다보면 일제히 滿開한 벚꽃 같고
소나무위에 앉은 탐스런 꽃은 장미꽃 같고 어찌 보면 목단 꽃 같기도 하다. 굵은가지 가는가지, 衰盡(쇠진)해진 풀잎위에, 키가 큰 나무 작은
나무에 내려앉은 눈 꽃송이들....여름 산 못지않은 琪花瑤草들로 이곳 천제단 가는 길은 원색의 꽃동산을 이루고 있다. 눈(白雪)이 없었다면
廣闊하기만한 뭉긋한 산이 얼마나 荒凉했을까 생각하니 ....자연의 경이로움에 畏敬心이 인다..섬세한 느낌만큼 글이 따르지 못함이 안타까울
뿐이다. 五感이 살아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축복이라 여기며 완만한 능선길을 오른다.
한 무리의 산객들이 큰소리로 숲의 고요를,
숲의 신비를 깨뜨리며 지나간다. 설산의 아름다움마저 반감되는 것 같다. 우린 감동의 시간을 좀더 지속하기위해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 까지
기다린다. 산행은 대개 마음 맞는 친구 둘, 셋과 떠난다. 여럿이 왁자지껄 산을 오르는 것도 즐거움이 있겠지만 풀꽃 한 송이와 기기묘묘한
바위틈에 낙락장송과의 遭遇를자칫 놓칠 수 가있다. 자연의 소리에 귀기우리며 산속을 걷다보면 나무와 풀, 눈과 바람 이런 자연에게서 배우는 일이
많다. 오늘 함께한 님 들은 이런 나의 생각과 같이하는 친구들이다. 우린 산을 아끼고 좋아한다는 점이 같다. 자연에게서 받는 감동지수 또한
비슷하다. 길동무로 이 이상 더 무엇을 바라겠는가..! 산이 있어 행복하고 자연이 주는 풍광에 취할 수 있는 가슴이 있어 행복하고 이 아름다움을
公有할수 있는 님 들이 있어 행복하다.
바람 한점 없는 포근한 날씨에 잿빛하늘에선 이따금 햇살이 비추어 설경에 신비로움을 더해준다.
고사목과 주목이 눈에 자주 뛴다. 죽은 나무에서도 겨울이면 흰 꽃을 피워내는 고사목. 겨울 한철 꽃이 피는 고사목 설화에서 찰나를 보며,
꽃을 피워내는 겨울에서 영원을 생각한다. 찰나와 영원이 존재하고 있는 자연. 풀잎에 맺힌 영롱하던 이슬도 아침햇살에 스러지는 것처럼 榮華도
찰나인 것을 .... 인생사 貪慾이란 얼마나 부질없던가... 산에 들면 不滅의 영혼을 생각하게 된다. 세속에 절은 마음을 흰 눈으로 정갈하게
씻어 낼 따름이다. 태백산 산정엔 천왕단, 장군단, 하단이란 3개의 제단이 있다. 왕이 직접 제례를 올린 것은 물론 무속신앙인들의 기도처인
신령스런 산이라 한다. 산을 오르내리며 감지되던 신령스러움.....나만의 느낌만은 아니니라. 산전체가 제단인 듯한 느낌은 받으며 우린 서로 아무
말 없이 성스런 제단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 천제단에서 문수봉으로 가기위해 오른쪽 능선 길로 접어들었다. 산마루엔 강한 바람으로 인해
철쭉나무들은 키를 낮추고 서 있다. 잘 손질된 분재처럼... 그 위에도 백설이 爛漫하다. 함백산, 월악산은 안개 속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호쾌한
능선과 봉우리, 그 원경을 볼 수 없는 대신 안개바다가 끝 간 데 없이 펼쳐 저 있어 미풍에 흔들리는 흰 가지들은 산호초를 연상케 한다. 또
다른 겨울 정취에 잠시 젖어본다. 좀 전 같이 있던 단체 산행객들 모습은 보이지 않고 또다시 숲 속엔 우리들뿐이다. 능선 길 좌우로
눈꽃터널이 이어져있어 자석에 이끌리듯 저절로 발길이 움직인다. 蠱惑的 (고혹젹)인 눈꽃터널 속으로 깊이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발걸음이
멈추어지기를 여러 번 천지사방 눈꽃들의 향연은 아름답다못해 마음이 시려 온다. 주고받는 말은 없어도 태백산에 함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우린
추억을 享有할수 있으리라. 값진 인연이 아닐 수 없다.
수많은 바위로 이루어진 문수봉을 지나려다 보니 우뚝 서있는 돌탑 (태백산에
명물)이 눈에 들어 온다. 거친 바람에도 쓰러지지 않는 것은 쌓은 이의 神技이까? 그의 염원이 하늘에 닿아서 일까? 돌탑 쌓기가 자기수련을
위해서라고 한다지만 토속신앙지인 민족의 영산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문수봉을 조금 지나 편편한 돌 위에 우리들은 자리 잡고 앉았다. 눈꽃에
둘러싸여 술 한 잔과 먹는 점심은 또 하나의 즐거움이다. “술은 입으로 오고 벗은 눈으로 오나니 술과 벗이 함께 있으니 이 아니 기쁠소냐”
포도주의 선홍색이 흰색을 배경으로 더욱 선명하게 비친다. 산상에서의 술맛이 이렇게 감미로울 줄이야...옛 시인들의 풍류를 조금은 알 것
같다. 태백산 들머리에 섰을 때 신선한 산 내음으로 맑았던 정신은 온 데 간 데 없어지고 눈꽃에 취하고, 술 한잔에 취하고.......계속
취하고 있을 수만은 없어 아쉬움을 두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 다시 눈길을 간다. 산기슭에는 적설이 제법 많다. 도심에 쌓인 눈하고는 감흥이
다르다. 행복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드는 것이라 했다지만 태백산 눈꽃 속에서 느끼는 행복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니고 거저 받는
은혜이다. 이 無數 無量함.... 비경에, 과실주에, 행복에, 취해 가다보니 가파른 내리막길이 우리 앞을 가로 막는다.밧줄을 잡고
내려오니 군데군데 빙판길이 이어저 있다. 태백산이 우리에게 준 선물..... 무릉도원이 아닌 ‘무릉설원’ 환상의 눈꽃, 눈꽃터널의
황홀경... 이 모두를 가슴에 담는다.
이제 산을 내려가면 적당히 피로해진 몸을 이끌고 내 가족이 반겨줄 보금자리로 돌아갈
것이다. 배낭을 풀며 산행에서 땀에 절은 빨래감은 세탁기에 집어넣고 태백눈꽃에서 영근 추억들은 나만의 추억의 寶庫에 꼭꼭 들여 넣을
것이다. 삶이 또다시 시들해질 때 꺼내어 회억 할 수 있을 테니까....
*한국의 산하 가족 여러분! 새해에도 늘 건강하시고
소망 이루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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