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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 나홀로 산행기(12/8)

올린이 : 전민경 , 2002/12/19(올린날)
게시판 : 
한국의 산하 | 산행기 게시판

1. 여행은 떠날때의 설레임이 반이다.

늦은 산행후기다. 항상 이렇다.
이상하게 산행을 하고 나면, 후기를 써야지 ...하면서도
막상 그 여운이 다 가라앉기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차일피일 미루게 된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루도 그 날의 느낌이 머리 속을 떠난 적은 없건만,
난 마치 글을 쓰고나면 그 느낌이 휘발되어 버리기나 하는 양
그것을 아끼고 된다.

이주일 전부터 태백을 가고 싶었다.
김도연의 소설집 '0시의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읽으면서
'내가 태백을 안 가 봤구나! 사북도...정선도...'
'아! 정말 그렇구나. 여행을 좋아하여 웬만한데는 한두번씩 가봤는데
거길 안 가 봤다니!'
하는 마음과 함께... 한때 떠들썩하였던 사북사태에 무지한 나를 책망이라도 하듯
서둘러 떠나야만 할 것 같은 조급증이 나를 휘감았다.
또한 거기에선 눈산의 대명사인 태백산이 있다!

나름대로 코스를 짰다.
일요일날 가족 송년모임(점심)을 참석한 후,
청량리에서 밤기차(10시)를 타고 떠나는 거야.
새벽에 도착하면 대충 사람들과 합류해서 택시합승을 하고...
태백산을 일출을 겸한 오전산행을 해야지.
그리고 오후는 사북을 보고...우리나라에서 가장 고지대에 위치한다는 추전역도 가보고...
교통편이 되면 고한의 카지노(강원랜드)에도 들러 블랙잭 한 판만 해봐야지...
아냐, 것도 도박이니까 나뻐. 달랑 입장료 5천원만 내고 구경만 할 거야.
그리고 6시 18분, 태백발 기차를 타고 오면 11시쯤 청량리 도착.
시청까지 지하철을 타고...다시 심야버스로 갈아타면 오케이~!
월요일날 아침만 남편이 커버해주면 난 갈 수 있다.
그래... 나는야 간다, 태백으로~!

그렇게...설레이는 마음으로 열차표를 예약하고
매일 인터넷을 들락거리며 태백의 눈소식을 고대하였다.

출발하기 전 날, 강원산간지방에 대설주의보, 경보가 내려졌다.
12월의 눈치고는 폭설이다.
은근히 걱정이 되기 시작하였다.
그래도 초행길인데....더구나 아직은 본격적은 산행(눈산행)시즌이 시작되기 전이고
또 월요일인데...사람들이 있을까? 길은 났을까? 이런저런 걱정...
남편 또한 걱정이다.
"꼭 가야만 되니? 가면 뭐가 좋은데? 위험하지 않겠어?"
누군가 그랬다. 취미는 설명할 수 없다고...
남편의 염려스런 질문이 이해가 안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가야만 되는 이유를 똑 부러지게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나는 가야만 할 것 같았다.
아니 대설경보가 내려졌다니까, 더더욱 가야만 했다.

모임을 참석하고 오니 전날 잠을 못 잔 탓에
피로가 몰려들었다. 잠시 침대에 눕는다는 것이 그만 잠으로 이어지고...
어스름녘 잠이 깼을 때는 한기가 몰려들었다.
영 컨디션이 안좋다. 뉴스는 여전히 대설경보를 해제하지 않고 있다.
다행히 산행을 하기로한 월요일은 날씨가 맑다는 예보다.
인터넷에 들어가 기차표를 변경했다.
당일 아침 출발로!

아침 4시. 알람 소리보다 먼저 잠이 깨었다.
이런저런 준비를 하고...혼자하는 초행의 눈산행에서 발생할 지도 모르는
난제에 대비한 만반의 장비를 챙겼다.
아이젠, 스패츠, 바라크라바, 털모자, 장갑 두벌, 고글, 여벌 양말과 여벌 옷. 오버트라우저. 카메라, 비상식
커피와 귤 몇 개. 만약의 날씨를 대비해 우산도 넣고 쫄내의도 하나 챙겨 넣었다.
늘 나서던 대로 배낭은 내 믿음만큼이나 든든한 무게를 어깨에 실어주었다.

자, 이제 출발이다.
예정했던 시각, 정확히 6시 10분에 집을 나서다.



2. 혼자가는 길

미리 인터넷으로 확인해둔 지하철 시간과 소요시간은
시간에 맞게 대어야 할 경우, 교통편이 안좋은 이 곳 일산으로서는 참으로 유효하다.
(지하철시간표 참조 :
http://www.seoulsubway.co.kr/index.htm)

6시 10분 출발, 주엽역까지 도보, 3호선을 타고 종로3가에서 1호선으로 환승, 청량리역에 도착하니
정확히 예정했던 시간 7시 40분이다. 8시 기차시간까지는 20분의 여유가 있다.
롯데리아에 들어가 아침으로 먹을 햄버거를 하나 사고, 점심 비상식으로 도우넛을 두 개 더 샀다.
커피를 한 잔 마시고 나니, 개찰할 시간.
이내 기차는 청량리역을 미끌어져 태백을 향해 출발하였다.

하창수의 '함정'과 차창 밖의 설경을 오가던 눈길은
어느덧 영월에 가서 멎었다. 영월...

언젠였던가, 무더운 한여름이었어. 아마 피서철이 채 끝나기전인 광복전 연휴였을 거야.
무작정 친구 하나와 밤기차에 올랐었다. 당연히 입석표까지 매진되었더랬는데...
후후...그때 난생처음으로 무임승차라는 걸 해봤어.
그때만 해도 역무원이 객차내를 오가며 승차권을 점검하였었는데
사람으로 빽빽한 통로, 슬쩍 한 발을 뒤로 빼내는 것만으로도
우린 참 노련한 무임승차자의 역할을 해내었었지.
그리고 영월에서....무얼 했었지?
단종 묘가 있는 장릉에 갔었던 것 같아.
이른 새벽시간이라 매표소조차 문을 열지 않았었는데, 훌쩍 월담하여 능 주위를 어슬렁거렸지.
그리고 호수가에서 식빵에 잼을 발라 먹었어. 난 굽 높은 슬리퍼를 신고 있었고...
후후...여행에 슬리퍼라니! 지나고 보니, 요즘 아이들 말로 정말 엽기야~.
무더운 날씨 탓인지... 아니면 서툴렀던 나이 탓인지...
고씨 동굴을 보기 위해 쪽배를 나고 강을 건넜던 것 같은데
그런데 그때 걔가 왜 강물에 뛰어 들었을까? 웃통을 벗고 수영을 하던 모습이 기억나.
아니 환영인가? 과연 그런 일이 있었나? 잘 모르겠어. 기억나지 않는 것도 같고...
이런저런 생각으로 기차는 영월을 지나가고 있었다.

낯시간의 여행은 바깥경치를 감상하며 상념에 젖을 수 있어서 또한 좋다.
사북을 지나면서부터 차창에 코를 밖고 시선을 놓을 수 없었다.
폐광이 되고 많은 시간이 흘렀어도 여전히 지붕낮은 집들과
사람 하나가 겨우 비비고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좁은 골목들.
아직도 흙탕물과 붉은 녹을 드러내며 흘러가는 시냇물은
고산준령에서 발원하는 상류의 물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탁했다.
여기에서 사북사태가 발생했고 노조위원장 부인을 린치하는 끔찍한 일이 있었단 말이지.
아, 맞어! 대학 새내기 시절... 은근히 주위를 맴돌던 국민윤리과 그 애의 고향도 사북이랬어.
이름이 뭐였더라? 그저 같은 강원도라는 것만으로 선선히 대해주긴 했더랬는데...

기차가 추전역을 지날 때에는 차창에 박고 있던 코가 유리창을 뚫고 나갈 지경이었다. ^^
해발 855미터. 우리나라에서 가장 고지대에 위치한 역.
주 목적이 채취한 무연탄을 수송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감안한다하여도
과연 저것이 역인가? 싶을 정도로 썰렁하였다. 실망.
둘러보아도 언뜻 민가 한 채 눈에 띄지 않았으니...글쎄...혹시 가장 높을 뿐만 아니라,
가장 적은 수송인원을 기록하는 역이지도 않을까?

강원랜드 카지노로 가는 이정표를 곁눈질로 일별하고 있는데
어느덧 열차는 태백에 도착하였다.
그런데...사람들이 눈에 띄지 않는다.
시내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대합실 입구에 서니, 예상했던 등산객들은 눈에 띄지 않고
두께를 이루며 다져진 눈길만 스산하게 앞에 펼쳐져 있었다. 어쩐다?
마침 40대로 보이는 아저씨 한분이 등산복차림으로 빠져 나온다.
망설이다 다가갔다.

"산에 가시나요?"
"네"
"어느 코스로 가시죠? 전 유일사로 오를 건데...그쪽이면 같이 합승하게요"
"아, 그 쪽 길이 좋은가요?"

앗~ 이런~!
이 아저씨 완전 초자잖아?
암튼 뭐 일행이 더 있다는 그 분을 잠시 뒤로하고 난 옆에 위치한 관광안내소로 향했다.
어차피 택시를 합승하려면 그 일행이 와야 할 것이고, 또 버스를 탄다고 해도
사전에 알아본 시간까지는 여유가 있었다.

나는 여기서 그때 내게 관광안내를 해준 관광안내소의 여직원(아가씨)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글쎄...그런 일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지금까지 내가 만나본 사람 중에 가장 친절한 분이었다고 하면
말이 될까? 20대의 그 아가씨는 너무도 성심성의껏 내 미진한 욕구를 충족시켜 주었다.
유일사 가는 차시간표(시내버스)를 건네주고,
다시 당골로 하산하여 돌아올 예정이었던 내게 당골버스시간표를 챙겨주고,
혹시나 빠듯한 시간 탓에 기차시간을 못댈까 염려하자
철원에서 12시 쯤에 출발하는 기차가 있다는 말과 함께 어딘가로 전화를 걸어 정확한 시간을 확인해주고
친절하게도 여기 태백에서 철원가는 버스시간(막차)까지 알려주었다.
거기에 미안한 마음을 덧붙여 현금인출기가 주위에 있느냐는 나의 물음에
그녀는...자상하게도 제1, 제2의 근거리 위치를 알려주었다.
지나고 나서 생각하니, 내가 왜 그때 그녀의 이름을 알아두지 못했나 하는 후회가 된다.
좋은 일은 자랑해도 좋지 않은가?

남자의 일행은 다름아닌 아내였다.
사업을 하는 이들의 월요일 여행. 부부동반의 산행나들이는 내 부러움을 사기에 충분했다.
그들은 식사를 하고 출발한다고 했다. 나야 먹는 것에 별 뜻이 없는 사람이긴 했지만
이 참에 점심을 해결하자, 싶은 생각도 있어서 그들과 같이 했다.
선지해장국으로 근처에서 아침을 먹고나니, 어느덧 버스 출발시간이다.
택시합승이고 뭐고 할 것 없이 우린 버스에 올라탔다.

난 버스를 타면 앞자리를 선호한다. 가장 앞자리에 앉아 앞유리를 통해
내다보는 경치감상이 좋다. (실제로 버스사고는 그리 빈번한 것이 아니니까.
또한 인명재천이라는 것이 내 소신이니까, 이 대목에서 행여'안전'운운하지 마시길...^^)
두어 정거장쯤 더 가자 한 사내가 타더니 내 옆자리에 와 앉는다.
앉자마자서부터 질문이다.
산을 가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복장부터 어정쩡한 사내.
그러나 태백산을 가기 위해 나선 걸음이었는지 산에 대해 묻는다.
어느 코스가 좋은지..어디로 오를 것인지.. 혼자 왔느냐는 둥.
몇 번 대답해주다 보니 꼬리를 물고 돌아오는 질문.
짜증도 나고 괜히 모르는 남자 가까이 할 것도 못된다는 생각에
나중에는 '몰라요!' 매정한 어투로 잘라버리고 썬그라스를 꺼내 껴버렸다.
그 다음부터 사내도 머쓱했는지 더이상 말을 걸어오지는 않았지만,
행여 산행에서도 귀찮게하면 어쩌나, 하는 기우는 여전히 남았는데...

35분쯤 가니, 당골입구 지나고 백단사입구 지나고... 마침내 산행들머리 유일사입구다.
식사를 하면서 자꾸만 호기심이 발동하는지 이런저런 사적인 질문을 해대던
40대 남자의 아내는 드디어, 내가 일산에 살고...거기다가 몇단지인지이며
아이가 몇이고 또 몇 살이며...어느 학교를 다니는지 등등
혼자하는 여행의 자유로움을 뭉텅 반이상 잘라먹기에 충분한 정보를 가져가 버렸다.
정말로 대단한 호기심이라고 내심 생각하면서도
우리 아줌마들...일단 그렇게 시작하는 대인관계에 익숙하지 않나 하는 이해도 하면서...
암튼 그 덕인지, 이웃사촌 만났다며 좋아하는 그들은 선뜻 식사값을 내려했고
극구 사양하며 '제 것은 제가 계산할게요'하며 잘랐었지만,
동작 빠른 그 아저씨, 매표소에서만은 막을 길 없었다.
어느결에 덜렁 세 장을 끊어와 내미는데야 장사 있으랴....물러 달라 할 수도 없고..
속으로 '에고...이번 산행은 어쩔 수 없이 떼거리산행이다. 나홀로? 호젓? 물 건너 갔다!'
아쉬움 반, 억울함 반이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산행인원이 형성되었다.
40대 일산사는 부부와 나, 그리고 어정쩡한 사내 하나. (그는 끈질기게 우리 주위를 맴돌았다.
아니 끈질기게하니! 자연스레라고 해야 옳다.)
그 시각에 그 코스로 오르는 사람들 전부가 한 팀이 된 셈이다.
암튼 뭐....그렇게 우리 넷은 유일사로 오르는 산행을 시작했다. 2시 정각.

식사를 하는 탓에 시간이 많이 지체되어 제대로된 산행이 힘들게 생겼다.
조금 오르다 보니 적설량이 많아(30센티가량 왔다) 아이젠을 착용하면서
그들을 먼저 보내고 슬레이트 처마에 매달린 고드름을 찍었다.
그야말로 1미터는 넘는...내 키만한 고드름이 일렬도 정열해 있는 모습. 장관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나중에 사진을 뽑아보니, 별루였다. ㅠ.ㅠ)
여차하면 나는 일행에서 처져 랜턴을 켜고 하산하리라, 그래서 철원발 12시 기차로 상경하리라,
하는 생각이었기에 내심 느긋함을 보였는데...

그들을 앞서 보내고...천천히 오르는 길.
난 설국 속으로 들어간다.
하산하는 이들도 고작 서너팀이 전부.
길은 러셀은 되어 있지만, 많은 인원이 지나간 것 같지는 않은
훼손되지 않은 눈길. 나뭇가지 마다 쌓여 있는 눈.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해 축 늘어진 주목군락.
눈 속으로...눈 속으로...처음의 백지 속으로...들어가는 거야..



3. 태백산이 준 만남

쓰다보면 글이 늘어지고(길어지고) 시작할 때의 설레임은 사라지게 된다.
내게 있어 여행은 그 과정의 화려함 보다는 준비하고 떠나기까지의 설레임.
내용물을 감춘 채 화사한 포장으로 변죽만 울릴지언정
장면장면으로 남아 오래 각인되는, 그런 의미인 것 같다.
하여 그 과정에서 시시콜콜 무엇을 했으며 무엇을 보았으며 누구를 만났는지 등등을 반추해보는 것은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찾아올 기억상실을 보완해주는 의미 이상은 아닌 것이다.
중요한 것은 기록 이전에 이미 내장되어 있으니까.

*

굳이 사람들을 먼저 보내고 혼자 오르는 길.
유일사로 오르는 오른쪽 갈림길은 러셀이 되어 있지 않았다.
넓은 포장도로보다는 소로를 선호하는 취향탓에
처음 예정했던 코스는 그 길이었는데... 자신이 없다.
초행이고, 시간에 쫓기는 입장이고...
하여 할 수 없이 앞서간 사람들이 택했음직한 좌측도로를 택하기로 했다.

태백산! 하면 일차적으로 떠오르는 오궁썰매. 이른바 오리궁둥이 썰매.
나도 비닐푸대를 준비할까? 하는 마음이 없던 것은 아니었으나,
그건 나중에...나중에 아이들이랑 같이 왔을 때 해야지, 하고 남겨놓고 왔더랬는데
넓은 포장도로를 달려 내려 오는 등산객 몇,
썰매를 타며 깔깔거리는 그들의 즐거움.
아버지 하나는 어린 아들을 태우고 앞에서 끌고 있다.
아들는 더이상 호사스러울 수 없는 대접에 흐뭇하기만한 표정.

500년 된 수령을 자랑하는 표지판과 함께 늠름하게 뻗어올린 주목 한 그루가
태백산에 오심을 환영한다. 찰칵! 기념컷 하나. 피사체는 주목.

본격적인 등산로가 시작되는 언덕에 이르자 앞서간 이들이 기다리고 있다.
"일찍 오셨네요!" 건네주는 인사가 정겹다.
좌측으로 난 오르막 등산로. 그림 같이 아름다운 풍경이다.
그냥 갈 수가 없지. 부스럭부스럭 카메라를 꺼내니 예의 어정쩡한 사내가 다가온다.
"한 장 찍어 드릴까요? 이런 건 곧잘 찍어요."
오는 길에 젊은 여자에게서 받은 구박에 은근히 기분이 상하기도 하였으련만
선선한 표정으로 찍사를 자청하시는 배려가 고맙다.

정면 포즈 하나, 뒷모습 하나...이렇게 두 장을 맡기고 다시 오름길 시작.
함께 왔던 부부는 이미 기념촬영까지 마친 상태.
아내가 앞서서 걷기 시작한다.
나도 뒤따라 오르기 시작. 제법 숨이 차 온다.

눈 앞의 풍경풍경이 감탄이다.
숨을 돌리기 위해 뒤를 돌아보면 아스라히 폎쳐진 순백의 능선이요,
고개를 들어 앞을 쳐다보면 송글송글 눈꽃이라.
활짝 개인 날씨가 컴포우즈 블루의 바탕에 흰구름떼를 몰아대고 있다.

두어번...일행을 만나거니 앞서보내거니 하면서 천제단에 섰다.(4시)
제법 바람이 차다. 그래도 오르면서는 겨울날씨 답지 않게 큰추위를 몰랐었는데
역시 천제단 바람은 태백의 정수인가보다. 오래 머무를 수 없다. 되는대로 기념컷 하나 찍고
하산 시작.
배낭 속에 꺼내보지도 못한 커피랑, 귤... 특히 커피 생각이 간절하다.
어정쩡 아저씨는 어느결에 좋은 위치가 나오면 아쉬워한다.
내가 뒤처진 탓에 사진을 못찍어주어서 아쉽다는 표정...고맙기도 하셔라.
부부는 6시 18분 기차시간에 대기 위해 서둘러 떠나고
어정쩡아저씨와, 산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 머뭇거리고 있는 나,
둘이 몇발짝 처져있다.

"커피 드실래요? 배낭안에 보온병이 있거든요."
"아우~! 그래요? 좋죠...커피."
"그럼 조금만 내려가다 바람막이 된 장소에서요...."
적당한 곳에서 커피 한잔씩은 나눠마시고 담배도 한대 피고...
나쁜(?) 나는 또 그 아저씨마저 먼저 내려보냈다.

바스락바스락 배낭 패킹하는 소리에 누군가 고개를 들고 보고 있다.
올라오면서 눈구덩이 사이로 짐승이 지나간 굴이 있기에,
막연히 들쥐나 다람쥐구멍이거니 했었는데...담비였다! (이건 나중에 인터넷으로 확인한 것이다.
그 당시에만 해도 난 저것이 족제비인지 담비인지 아리송했으니까.)
1700미터 이상에서만 서식한다는...최고의 모피를 자랑한다는 아름다운 황금색털의 담비.

녀석은 긴 황금색 꼬리를 늘어뜨리고
예의 그 구멍으로 달음질쳐 가다가 나를 본 것이다.
아마 제 딴에는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나니, 뭔가 먹을 것을 얻으려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여름 설악의 서북릉에선 몇 번 다람쥐를 내 손바닥까지 유인하지 않았던가?)
그러다가 다시 몸을 돌려 고개를 빼고 쳐다보는데... 거리는 불과 7-8미터.
움직일 수 없었다. 내가 움직이면 달아나 버릴 것만 같아
그 말끔하고 예쁜 표정을 놓쳐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마음이야 카메라를 들이대고 싶은 굴뚝같은 심정이지만,
그러면 저 해끗한 표정마저 놓치고 말아.

녀석은 한참을 멀뚱히 쳐다보더니 구멍 속으로 쏙. 영영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서둘러 배낭 속에서 내 점심끼니로 준비해왔던 도우넛을 꺼내 보지만
담비는 이제 보이지 않는다. 구멍 입구에 가만 놓아주고 돌아서는 길.
'네가 좋아하는 것인진 모르지만...이걸 먹으렴. 그리고 사람들에게 잡히지 말고
그 황홀한 모습, 함부로 보이지도 말고...잘 살아.'

나 또한 기차를 타야할 입장... 이제 결정을 해야 한다.
랜턴을 켜고 느긋하게 하산을 하며 여유를 부릴 것인가? 아니면 그들처럼 종종 달음질쳐 내려갈 것인가?
담비와 이별하고 미련없이 배낭을 들춰멜 때,
자, 가자... 가 보자. 하산길 하면 전민경 아니더냐?
5시 반 당골버스를 타려면 이제 남은 시간은 고작 1시간 10분.
한번 가보는 거야.

망경사를 지나며 그 유명한 용정의 물을 한바가지 마시고(용정은 물 좋기로 유명하여
천제단 제례 때에도 이 물을 쓴다고 한다.) 다시 하산시작.
앞서간 이들이 보이지 않는다. 혹시 그들이 망경사 초입, 화장실 앞으로 난 반제길을 택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언뜻 스쳤으나, 난 처음 예정대로 그냥 당골로 하산하기로 한다.(4시 20분)

그 다음부터는 어떻게 내려왔는지 모른다.
이정표가 자주 없어 처음에는 느긋한 마음이었으나,
'당골 2.6키로' 푯말을 보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었다.
시속 6키로를 가정하고 달음질쳐 내려온 것 같다.
여전히 일행은 안보이고...
그쯤되니 그들은 틀림없이 반재로 하산하였으리라 확신이 섰다. 포기.

다 왔다. 당군성전이다.
그런데 이것은 또 뭔가?
온통 하늘을 새까맣게 덮고 있는 까마귀떼.
요즘에는 흔한 짐승이 아닌데, 수천마리의 까마귀떼가 어스름 하늘을 비상하고 있다.
무섭기도 하고 불길하기도 하다.
예전에 진주 살 때, 혼자 금산 보리암을 올랐을 때 그때에도 그랬었는데...
거기도 단군을 모시는 곳이었던 것 같은데...무슨 연관이 있는건 아닐까?

어둠 탓인지, 혼자인 탓인지...
자꾸만 불길한 쪽으로 마음이 가 닿는 것을 애써 도리질치며 상가입구까지 도착.
상가에 물으니 버스 타는 곳까진 좀 더 내려가야 한단다.
달리다시피 내려오다 아이젠과 스패츠를 벗고 ...미처 패킹할 시간도 없이 한 손으로 거머쥐고
버스타는 곳을 향해 질주(?). 저만치 버스가 들어온다. 5시 31분.
버스 또한 연착이었다. 정확히는 5시 28분 버스니까.
휴....다행... 첫손님으로 승차.
앉지도 못하고 아이젠과 스패츠 정리, 스틱 정리, 나뭇가지가 뿌려놓은 눈 털어내고
오바트라우저를 벗고 파일자켓으로 갈아입기, 모자도 바꿔쓰고...때깔나게...^^

터미널에 도착하니 5시 55분.
기차시간까지는 20분 밖에 안남았다. 어정쩡한 시간이다.
혼자 하산주 한 잔 하고 싶었는데...들어갈 곳도 마땅해보이지 않고 시간도 너무 없다.
할 수 없이 기차역으로.

대합실을 들어서는데...어? 아는 얼굴이다.
예의 앞서간 부부와 어정쩡한 아저씨. 반갑다.
그들도 방금 막 도착한듯 편의점에서 기차에서 먹을 먹거리를 사고 있었다.
역시나, 그들은 반재로 하산했다고 했다.
소주도 보이고.... 반가워라~ 내가 빠질 수야 없지.
하산주가 아쉬웠던 차에, 난 잘됐다 싶어 마른안주 몇점과 소주 한병을 챙겼다.
그리고는 함께 합석하여...아기자기 화기애애한 시간.

자리 주인이 나타나 참 매몰차게도 제 자리 내놓으라고 할 때까지 이런저런 얘기.
어정쩡아저씨는 여행업을 하시며...특히 자긴 강원도가 좋다고...
50이 넘은 나이에 안맞게 참으로 소탈하시고 겸손한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에 대한 경계가 없어 붙임성있게 하는 것이
유일사가는 버스안에서 젊은 여자 한테 구박받는(?) 요인으로 작용하였을 것이지만,
참으로 보기드물게 순수한 성정을 지켜온 분이라는 느낌.

할 수 없이 자리를 내어 주고 내 자리로 돌아오니,
이번에는 아줌마 한분이 앓고 있다.
허리가 너무 아파 앉을 수도 없다는 그 분은
아예 좌석을 돌려놓고 드러누워 있다. 그리고서도 끙끙 앓는 소리.
옆자리로 비켜 앉았다가 보기에 안돼서 허리지압을 몇번 해주다.
그래도 여전히 고통스러운 모습. 마침 그쪽도 자리 주인이 나타나고...
의자 하나에 쪼그리고 누운 모습이 너무 안돼보여
지나가는 승무원을 불러 상황을 말하니, 좀 더 편한 자리로 안내해준다.
그제서야 나는 내 자리로 착석.
또다른 만남이 기다리고 있는 내 자리로...

역시 50대로 보이는 아저씨.
등산복차림이라 산에 다녀오는 길이겠거니 했는데, 아니란다.
산은 그야말로 신물나게 다니시는 꾼이고..(산행경력 20년에...북한산만도 120번..)
지금은 단양적성에 폐교를 얻어 운영하고 있는 중고서적을 보간하기 위해 작업차 다녀오시는 중이라했다.
이런저런...끊이지 않는 얘기. 산얘기, 책얘기.
나중에 시간되면 가족과 함께 놀러오라시며(거긴 금수산이 있다고 했다) 명함을 건네 주신다.
관사 세 채을 정비하여 지금 서점으로 맺은 인연들을 위해 무료개방할 예정인지라,
먹을 것만 싸들고 오면 얼마든지 묵을 수 있다는 말씀과 함께.

이쯤되면 난 참 복도 많은 사람이다, 하는 생각이 든다.
짧은 여행에서 ...어쩌면 오래...새로운 인연이 될 것 같은 좋은 사람들을
이렇게 듬뿍 만났으니 말이다.

원주에서 내리신다던 어정쩡 아저씨는 일부러 객차에 들러 작별인사를 건네시고...
예의 허리통증으로 고통스러워하시던 아주머니는 새댁덕분에 헐 낫다시며
내려서 저녁을 굳이 사야한다하시고...(물론 난 시간을 핑계로 사양했지만.)
중고서적을 하시는 50대 아저씨는 다시 한번, 가족과 함께 꼭 오라 당부하시며 청량리를 빠져나가시고...
일산사는 부부. 그들은 이미 광장에 나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큰 맘 먹고 떠난 혼자만의 산행.(지리산 백무동코스, 남해금산의 보리암에 이어 이번히 나홀로산행은 세번째)
비껴갈려고 꾀도 부려봤건만, 자연스럽게 찾아든 만남들 덕에 또한 따뜻하고 풍성한 여행이었다.
만지작 만지막 주머니 속에서 만져지는 세 장의 명함을 느끼며...
일산 사는 부부와 함께 전철, 버스 갈아타고 단지입구까지 오다.
그들은 바로 우리 옆단지에 살고 있었으니까. ^^

* 요약 : 태백산 - 1566 m. 강원도 태백위치
산행코스(유일사입구- 천제단- 망경사- 당골)
소요시간 3시간 30분. 약 10키로
참고한 싸이트 : 한국의 산하
http://www.koreasanha.net/index.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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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득히 솟아오른 저산정에, 구름도 못다 오른 저 산정에, 사랑하던 정 미워하던 정, 속세에 묻어두고 오르세
저 산은 우리 마음, 산사람 넓고 깊은 큰 뜻을, 저 산은 우리고향, 메아리 소리되어 흐르네
사랑하던 정 미워하던 정, 속세에 묻어두고 오르세 [아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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