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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년 6월 초 한계령, 중청, 천불동 산행을 다녀와서 9월경에는 마등령을 넘겠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이건 저런 이유로 9월을
그냥 보냈고, 그러면서 내심 마등령등정을 내년으로 미루던 중에 우연히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친구들 모임에서 원래 계획하였던 서해안
바다낚시를 속초 산행으로 변경하였다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봄에 보았던 공롱릉선의 장엄한 자태가 눈에 어른거렸고, 혼자서라도
먼저가서 마등령을 넘어야겠다고 마음먹게 되었습니다.
2002년 10월 25일 금요일 저녁, 친구 2명과 같이 선발대로 속초로
출발. 대관령을 넘으면서부터 이슬비가 뿌리기 시작. 밤 12시 속초 도착, 속초항 24시간 영업하는 횟집에서 회 한접시를 먹고,
아침 식사용으로 미역국을 얻음. 바로 옆의 야식가계에서 아침과 점심용 김밥을 준비. 제법 빗줄기가 거세어졌으나, 우리의 희망을
꺾을 정도는 아님. 숙소에 도착하여 짐을 풀고 자리를 펴니 밤 2시. 빗소리를 들으면서 잠을 청하나, 내일 등산을 생각하니 가슴이
부풀어서 잠이 잘 오지 않음.
토요일 새벽. 시계를 마쳐놓았던 6시보다 30분 전에 눈이 떠짐. 일어나서 얼른
창밖을 보니 빗줄기가 제법 굵어져 있음. 간단히 세면을 하고 미역국을 데워 김밥을 먹으면서 텔레비젼 뉴스를 들으니, 어제 설악산에 첫눈이
왔고 오늘은 더 많은 눈과 강풍이 불 것이라는 예보. 눈도 눈이지만 당장 이 비는?
그러나 날씨가 장애물이 되기에는,
설익었기 때문에 더욱 강렬할지도 모를 우리 등산초보자들의 산사랑은 깊었습니다. 40대 중반에 사춘기의 풋사랑이라.
차를
운전하여 미시령을 넘으니 비는 완전히 눈으로 변하여 흩날리고 있습니다. 백담사입구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관리사무소에 확인하니
중청방면으로의 수렴동계곡은 물이 불어서 입산이 통제되나, 마등령쪽 등반은 가능하답니다. 주차해둔 차는 그날 후발대로 서울에서 출발하는
친구들에게, 오는 길에 설악동으로 운전해 줄 것을 미리 부탁해 놓았습니다. 셔틀버스를 타니 승객이 우리 3명뿐입니다. 셔틀버스
창밖으로 계곡을 바라보다보니 갑자기 울컥하고 눈물이 날 것같습니다. 오랜기간 떨어져있던 어머니를 찾아가면서 멀리 고향집이 보이기 시작할
때 이런 감정이 들지 않을까? 내가 그 동안 세파에 시달리다보니 센티멘탈해졌구나 생각하면서 혼자 웃음을 날려봅니다.
아침
8시 드디어 산행의 시작. 비닐 우비가 그 정도의 비는 충분히 막아주고, 오후부터 갠다는 일기예보를 믿으니 걱정이 없습니다. 또
비가 심해지면 수렴동대피소나 오세암으로 들어가고,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어디서든 되돌아오면 되고. 산에 오니 마음이 넓어지고 걱정도
없어집니다. 백담사로 향하던 길에 물줄기가 굽히쳐 돌아가는 언덕배기 위에서 내려다보니 백담사계곡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복주머니
모양으로 돌아내려가는 물줄기와 건너편 산의 바위와 단풍. 아름다운 경치를 사진보다는 마음 속에 담아가겠다는 생각으로 사진기를 두고왔는데,
벌써부터 아쉬운 생각이 듭니다. 백담사의 한적함을 즐기고 영시암으로 향하는데, 동행하는 사람은 없고 산에서 내려오는 사람들 뿐입니다.
수렴동 대피소에서 자고 봉정암으로 가려고 하였는데 입산통제로 돌아내려온다는 설명입니다. 대청봉에는 눈이 10쎈티미터 이상 싸였다는
이야기를 전해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빗줄기는 점점 약해지고 있고, 우리는 입산통제구역이 아닌 마등령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불어난 백담사 계곡의 물줄기와 그 위를 떠가는 낙엽. 계절은 나무의 단풍에서 한 여름 녹음의 추억보다는 곧 물 위를 떠가게
될 낙엽의 운명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렇더라도 마지막으로 보여주는 빨강, 노랑, 초록의 조화는 애처로울 정도로 화사합니다. 멀리
군데군데 산봉우리에는 방금 전 내린 눈이 잠시 쌓였다가 바람에 다시 운무처럼 흩날립니다.
영시암을 지나면서부터 서서히 경사가
급해지고, 갈림길을 지나면서부터 길이 험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언덕과 계곡을 오르내리면서 단내도 뿜습니다. 아름드리 소나무가 곧게
하늘로 뻗쳐 있습니다. 깊은 산속이어서 곧게 자란 것같다면서 서로 자기를 닮은 나무라고 주장합니다. 산이 높아지면서 대나무 모양의
키작은 나무들의 군락이 계속됩니다. 잎을 따서 풀피리를 만들어 불면 제법 소리가 날 것같습니다. 이름이 궁금하여 얼른 한 잎을
따서 주머니에 넣습니다. 오세암에 가서 스님께 물어볼 생각입니다. 마지막 가파른 언덕을 넘으니 오세암입니다.
절은
깎아지른듯한 높은 언덕에서 계곡으로 떨어져 내리는 중턱의 움푹 파인 곳에 걸터 앉아 있습니다. 거리보다는 위치에서 이 곳이 속세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이 아닐까하는 부질없는 생각을 해봅니다. 신라시대에 창건된 절이라는데, 어떻게 그 옛날에 그 깊은 산속에 지을 생각을
하였는지? 다만 신축 중인 건물이 마음에 걸립니다. 조화가 그대로 유지되어야 할터인데.
절에서는 밥과 미역국을 제공하여서,
우리는 고맙게도 그 미역국으로 몸을 녹이고 김밥을 먹었습니다. 그 무렵 비는 그쳤지만 옷은 축축해진 상태이고 날씨가 추워서 몸은 거의
얼어 있었습니다. 오세암은 그 위치 때문인지 다른 곳보다도 더 추웠습니다. 친구들 옷은 신소재 등산복이어서 속옷은 젖지 않았다고
하나, 내 옷은 나무가 머금었다 뱉어낸 빗물과 눈녹은 물을 제법 빨아들인 것입니다. 아하, 그래서 좋은 등산복 이야기들을 하는 것이구나.
식사하고 커피를 마시고 마등령으로 출발하려는데 시계를 보니 겨우 12시. 초행길이어서 시간안배를 할 수가 없었고, 그래서
서두른 결과 3시간 반만에 오세암에 도착한 것입니다. 식사를 마치자마자 출발을 서두르는 우리를 보고 오세암의 스님은, 땀을 흘리고
마등령을 오르면 내려갈 때 추우니 천천히 쉬어가면서 올라가라고 충고합니다. 오늘 중에는 분명히 속초에 도착할 터이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덧붙이고 웃습니다.
몸이 춥다보니 내설악 만경대를 그냥 지나쳤는데, 사실 우리는 오세암을 출발할 때까지도 만경대를 지나쳤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뒤늦게 알았으나, 아쉽지만 부족하고 모자란 것이 있어야 다음에 또 오게 되는 법이라고 자위하고는 발길을
재촉합니다 마등령을 오르면서 건너편 장엄한 산의 모습이 선명해지는데, 눈과 단풍의 조화가 신비롭기까지 합니다. 울굿불굿한 마지막
단풍의 애절함에 무심한 백설이 화사하게 덧칠을 하고, 곳곳에 바위의 색상이 그대로 모습을 들어내면서 절묘한 색상의 조화를 이룹니다.
바위와 단풍과 눈. 게다가 마등령 정상이 가까와지면서 날씨가 개면서, 구름한점 없는 파란 하늘이 모습을 들어내자 하늘은 그
전까지의 동양화를 자신을 배경으로 한 전혀 새로운 그림으로 바꾸어버렸습니다.
발자국이 남아있지 않은 눈을 밟으면서 느끼는 산과
눈에 대한 미안함을 이야기하다보니 어느새 마등령.
마등령에서 공룡릉과 비선대로 갈라지는 갈림길에서 조금이라도 공룡릉을 더 가까이서
보기 위해 공룡릉 쪽으로 몇 백미터 가 보았으나 어차피 부질없는 짓. 마등령 부근은 눈이 싸였다고 표현해도 될 정도의 눈길인데,
외설악에서 출발해 공룡릉으로 향했을 것으로 보이는 발자국이 여러개 남아있습니다.
마등령 정상에 올라 외설악의 장관에 빠져서 한
동안 넋을 잃음. 무려 40분간을 정상에 머물면서 산을 둘러보고 또 나를 둘러보았습니다. 멀리 화채봉과 대청 줄기가 보이고
공룡릉이 징검다리로 가로놓여 있는데, 모든 봉우리가 온통 눈으로 덮여 있어서 흰머리 독수리를 연상시키는구나. 당장이라도 공룡릉을 건너서
희운각에서 일박을 하고싶다는 희망을 농담으로만 남기고 아쉬운 하산길. 우리는 40대 중반의 등산초보자들입니다.
경치좋은
곳을 골라 쉬어가면서 쉬엄쉬엄 하산을 하였는데도, 무릎, 발목이 아프고 몸은 지쳐갑니다. 눈 앞 공룡릉의 치열함과 화채봉의 수려함이 눈의
피로를 덜어주기는 하었으나, 그래도 나이는 어쩔 수 없는 법. 옷이 비에 젖어서 체온과 체력이 떨어진 것도 한 몫 하는 것같습니다.
내설악 방면보다는 외설악 방면의 경사가 훨씬 급한 까닭에, 외설악에서 시작하는 코스를 선택하였다면 훨씬 더 고생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위안합니다. 이곳저곳 천불동계곡이 모습을 들어냈다가 숨기를 반복합니다.
금강굴에 도착한 시간이 5시.
비선대로 향하는 길에 그날 아침 서울에서 출발한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도착이 예상보다 늦어서 금강굴까지만 오르던
중이랍니다. 사실 우리 일행이 오세암을 출발하여 금강굴에 도착할 때까지 5시간 동안 만난 사람은 고작 4사람뿐입니다. 공룡릉에
오르려는 젊은이 2명과 금강굴에서 조금 더 올라온 외국인 젊은이 2명. 일기예보 때문에 등산을 포기한 사람들이 제법 있었을 것입니다.
덕분에 우리는 마치 처녀봉을 정복하는 기분까지 내면서 흥겨워했습니다.
잠시 쉬고 비선대에 도착하니 저녁 6시.
탁주를 한 잔 걸칠 돈을 찾으려고 주머니를 뒤지니 오세암가는 길에 주머니에 넣어둔 나뭇잎이 손에 잡힙니다. 결국 그 나무의 이름은
알지 못하고, 잎을 비선대 계곡물에 띠워 보냅니다.
많은 것을 산에 내려놓고 다른 많은 것을 가슴에 채워온 느낌입니다.
앞으로도 산에 오르고, 설악산에도 다시 오르겠지만 가을과 겨울이 공존한 이번 산행은 잊혀지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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