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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리내 성지 답사/순례 산행기

올린이 : 이종환, 올린날 : 2002/04/10
게시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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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리내 성지 답사/순례 산행기 *

1.서설

며칠전부터 오늘 비가 온다고 난리통을 피우는 바람에 한남정맥에 용감히 대시하지 못하고망설이다가 제12회차 때 마지막 지점인 망덕의 고개를 떠올리고는 오늘이 토요일이나 출근하지 않는 날이라, 내친 김에 김대건 신부가 시목하고 또 그 유해가 이동한 길을 한 번 더듬어 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라 생각하고 비록 천주교도는 아니지만 우리 나라 최대의 천주교 성지라는 미리내를 답사하기로 하였다. 물론 천주교의 한국 순교사라는 역사공부로도 아주 그만인 것은 물론이다.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미산리 141번지 일대임. 달빛에 빛나는 냇물과 창문으로 새어나오는 호롱불빛이 마치 은하수 같다고 해서 미리내라는 예쁜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은하수는 수많은 별들이 모여서 커튼같이 하늘을 아름답게 수놓는게 아닌가).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 때 미리내를 한자로 美里川이라고 표기하고 이것과 산촌의 이름을 따서 미산리라 하게 되었다고 한다.마을은 1801년 신유박해, 1839년 기해박해를 피해 신자들이 숨어들면서 생겨났다고 한다. 냇물은 복개되어 사라졌지만 지금도 성지 아랫마을에는 신자들이 모여 살고 있었다. 집집에 성모상이 보이는 것이 특이하다.

미리내가 성지가 된 것은 1846년의 병오박해때 서울 새남터에서 순교한 김대건 신부와 1866년의 병인박해때 순교한 성 이윤일(요한)의 유해가 안장되면서부터란다. 당시 김대건 신부의 시신은 순교한 지 40일 만에 비밀리에 거두어져 용산 뒤편의 瓦署(왜고개)에 안장되었다가 10.26. 서 야고보,박 바오로,한경선,이민식 등에 의해 이곳으로 이장되었다. 1886년 에 시복 판사인 프와넬 신부가 봉분 중앙을 헤치고 홍대를 확인하였으며 1901.5.21. 유해를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이장하였고,10.17. 다시 신학교 성당으로 이장하였다가 1960.7.5.서울 혜화동 카톨릭대학교로 옮겨지면서 하악골만은 미리내 경당으로, 치아는 절두산 순교 기념관으로 분리 안치되었다.본래 무덤이 있던 자리에는 1928년에 김대건 신부의 경당이 건립되었다. 1970년대 미리내는 순례사적지로 가꾸어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1970년 수원교구의 지원으로 노곡 삼거리에서 사적지 입구까지의 길을 확장하였고,1974년 김대건 신부 기념 시비 건립,1976년에 무명순교자 묘역이 조성된 후 16구의 순교자 시신이 이곳으로 이장되었다. 동년 정행만 신부가 수도회를 설립한 후 ,순례지로서의 면모를 더욱 구비하게 되었다. 1982년 가을 사적지내의 주민들을 새로 조성된 새마을 단지로 이주시켰고, 1991년에는 천주교 성삼성당을 건립하기에 이른다.

김대건(안드레아) 신부는 성인이신 부친 김제준(이냐시오)와 모친 高울살나 사이에서 1821.8.21.솔뫼에서 출생하였고, 집안이 조정의 감시를 피해 서울 청파동에서 용인 한덕골에 거주하다가 다시 용인의 골배마을로 이주하였다. 여기서 김 신부는 당시 국내에 들어와서 방인 사제 양성을 준비하던 나 모방 신부에게 영세를 받고 신학생으로 발탁되었다. 처음에는 체력이 약하고 다른 신학생(최양업,최방제)에 비해 수업을 늦게 시작해서 걱정했으나 마카오로 무사히 유학길에 오른다. 마카오를 거쳐 무사히 공부를 마치고 부제가 된 후 수차 조선입국을 시도한 후에 라파엘호를 타고 조선에 입국한다.

조선을 떠난 지 10년만에 한국 최초의 사제로 돌아와 은이공소를 기점으로 사목활동을 시작한다. 동냥질로 연명하던 어머니 高울살나를 상봉하시며 모자는 뜨거운 눈물로 과거의 한을 달랜다. 재회의 기쁨을 채 맛보기도 전에 김 신부는 체포되어 문초를 받고 병오박해가 시작된다. 신부님의 학식과 성품에 감동한 조선의 대신들은 신부를 살려주려고 하지만 조정의 위신을 세워야 한다는 이유로 참수형이 결정된다. 신부는 새남터로 끌려가서 그고세 모인 사람들에게 "이제 영원한 생명이 시작됩니다"라고 설교하고 8번째 칼에 목을 떨구었던 것이다.
참고로 미리내성지는 성지답사라는 것 말고도 주변에 산이 좋아 등산도 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호젓한 산책 코스도 많아 연인들이나 가족 나들이에도 제격이다. 이를 참고하여 많은 분들이 이용하였으면 하는 바램이다.

*일시:2001.4.28.10:00-18:00


2.교통

안성에서 미리내까지 들어오는 버스편이 있다. 그런데 본인은 서울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서 용인행 고속버스(06:30~21:30 간 30분 간격)를 이용, 용인공용버스터미날에서 하차, 9번 홈에서 30분 간격으로 운행하는 안성행 22번 완행버스를 이용(주의:8번홈에서 22번 완행버스를 타면 수원행임. 왜냐하면 22번 시내버스는 수원-용인-안성 간을 운행한다고 써 있어 수원과 안성행을 혼동하기 쉽다)한다. 요금은 1,100원, 25분 소요, 미리내 성지 입구란 간판이 있는 삼거리에서 하차(45번 국도 이용. 용인터미날-무네미고개-숙명여대 연수원-천리-시미리-송전(3거리에서 좌측으로 진행)-용인공설묘지/낚시터-21세기 주유소가 있는 3거리). 미리내 7km란 이정표가 있다. 2

차선 아스팔트도로 따라 계속 가면 미리내 성지에 도착한다. 21세기 주유소 3거리(여기서는 들어가는 버스가 일정치 않으므로 지나가는 차를 편승하거나도보로 간다. 버스로는 약 10분,도보로는 약 1시간 소요.)-미산 2교-연합뉴스 안성송신소가 나온다. 3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계곡이 한적/조용하고 아늑하고 편안한 느낌을 준다. 이어 미산3교를 지나고 마을이 나온다. 바로 뒤에 미산저수지가 있다. 마을엔 오래된 느티나무가 있고 ,정신지체자 사회복지시설인 "맑음터"와 태종대왕 장손 순성군 世葬地입구 안내판이 보인다.

조금 오르니 고개마루이고 레스토랑을 지나니 바로 좌측으로 미산저수지의 맑고 푸른 물이 보인다. 도로를 따라가다 음식점들을 지나 오른쪽으로 휘어 나오니 우측 산 언덕에 유무상통마을 미리내 실버타운이 우뚝하다. 좌로 틀어 내려섰다가 우회전해서 직진하니 천주성삼성당이 보이고 이어 좌측에 아담한 미산1리 마을이 나타난다. 미산1리 노인정을 지나 조금만 가면 성지 입구이다. 참고로 송전리에서는 송전리 파출소에서 자전거를 빌려주는 수도 있음).
*성지버스 운행안내(031-674-1251~2)
ㅇ. 3월-11월 :오전 09시 30분(토,주일,공휴일 없음) 출발
ㅇ. 12월-2월 :매주 금요일만 오전 9시 30분 출발
ㅇ. 성시간: 매주 목 오후8시 출발
ㅇ.성모신심미사: 매월 첫 토요일 오전 9시 출발
ㅇ.타는 곳(서울): 지하철 3호선 잠원역 하차 2번 출구/ 7호선 반포역 3번 출구 경원중 정문앞.

3.미리내성지

성지 입구 경비집과 이정표(용인 8km, 안성 12km)를 지나면 "미리내성지"라고 쓰인 돌 안내석이 우뚝하고 그 옆 둥그스럼한 바위에는 "임은 가시고"란 시를 새겨 두었다. 그 시는 "하한수작으로서 내용은 " 임은 가시고 / 진리는 왔습니다 / 피로써 가꾼 땅에 / 무궁화 피나이다 / 삼천리 / 방방곡곡에 / 향기 가득합니다" 이다. 이어 넓은 주차장이 나오고 성지 안내약도가 있다. 주차장 좌측숲에 붉은 벽돌집의 "묵상의 집"이 보이고 그 우측으로 성물보급소와 요셉 성물공예사가 보이고 , 안내판 우측으로는 평화의 모후상이 있다. "한국전력은 미리내 성지 훼손하는 송전철탑 공사를 즉각 중단하라"는 현수막이 주차장 끝에 걸려 있어 보는 이의 마음을 우울하게 만든다.

애덕바위/호랑바위를 거느린 주변 산들이 온통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작은 분지 한가운데에 자리잡은 성지는 아늑하고 경관이 뛰어나고 평화롭다. 이에 더하여 신록은 성지로서의 운치를 더하여 주었다. 성지 순례는 크게 2가지 코스로 나누어진다. 우측으로 가는 코스가 게쎄마니 동산길이고 좌측으로 가는 경당길이 그것이다.


(1)게쎄마니 동산길 코스

우측으로 오르면 성지관리사무소가 나오고(성지관리사무소의 북서쪽 잔디밭엔 성요셉상이 있다) 이어 우리 나라 천주교의 역사를 상징하는 "미리내 성당"이 있다. 1906년 신자들이 세운 70평 규모의 아담한 돌성당이다. 한 장의 그림엽서같이 보인다.이 성당은 수원교구 소속 본당으로서 주보는 성 요셉, 관할 구역은 미산리,노곡리,난실리,장서리 등이고 노곡에 공소가 있다.

미리내 천주교 교우촌은 박해를 피해 온 충청도 신자와 경기도 신자들이 산간 지역에 흩어져 살다가 함께 모여 살면서 형성된 것이다. 따라서 김대건 신부의 시신이 용산 와서에서 이곳으로 이장될 수 있었단다. 박해 시기에 선교사들이 피신해 와서 한국어를 배우는 장소로 활용했던 곳. 1866년 병인박해로 일시 폐허가 되었으나 다시 재건되었고 서울 교구의 경리와 시복 조사 담당인 G.C.M.위텔 신부가 1883년에 이곳에 미리내 공소를 설립하였다.

1888년 갓등이(현 왕림) 본당에 속했다가 1896년 4월 26일 제 8대 조선교구장으로 재임하던 위텔 주교의 뜻에 따라 미리내 본당이 분리 신설되고 ,이 날 서품을 받은 강도영(마르코)신부가 초대 신부다. 1901.5.21. 김대건 신부의 유해가 발굴되어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옮겨지게 되었다. 강도영 신부는 성당을 신축하고 신자들에게 양잠 기술을 가르쳐서 해성 제사공장을 열고 초등부 과정인 해성학원을 여는 등 큰 발전을 보였다. 1928년에 김대건 신부 경당을 본래 무덤이 있던 자리에 건립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강도영 신부는 공소 순방 중 장티푸스에 걸려 사망하고,1932년부터 최문식(베드로)신부가 1952년 죽을 때까지 3대 주임으로20년간 미리내에서 활동하였으나 그가 육성하려던 해성학원은 일제의 탄압과 재정난으로 1936년 폐교되었다. 이후 미리내 본당은 양지 본당의 공소로 전락하는 등 쇠락을 거듭하다가 1963년 수원교구가 설정되면서 서울대교구에서 새 교구로 편입된 후에 안성 본당의 공소로 다시 전락하였다. 그러나 1965년 김대건 신부의 경당 옆에 있던 공동묘지터에 광장이 조성되면서 그해 9.26부터 현대까지 순교자 현양대회가 매년 개최된다.

미리내 본당이 큰 변화를 보인 것은 1976년 정행만(프란치스코 사베리오)신부가 이곳에 정착하고서부터다. 남녀 수도회의 창설을 준비하던 정 신부는 미리내에 정착하자 수도회를 재개하였고,1983년 "미리내 성모 성심 수녀회"가 교황청으로부터 회헌을 승인받고 이듬해 수원교구장으로부터 인가받고 이후 "미리내 천주 성삼성직 수도회"도 1991년에 교황청의 회헌 승인과 수원교구장의 인가를 받았다. 수도회의 정착으로 미리내는 사적지로 본격 개발되었으며 1976년부터는 미리내 수도회의 준본당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 우측으로 수녀원이 있다. 미리내성당 뒤에는 사제관이 있고 이어 광장이 나온다. 광장 좌측엔 성지 휴게실과 순례자의 집(피정의 집 대건회관)이 있고 , 정면 위에는" 천주성삼상"이, 우측으로는 성삼교리신학원이 보인다. 광장을 건너 "천주성삼상"앞에 서니 흰색으로 조각하였는데 수염 많으신 성부, 십자가 들고 있는 성자, 비둘기 형상의 성령을 상징하고 있다. 그 상의 아래엔 천주성삼께 드리는 기도가 써 있는 석판이 있다. "천주성삼은 우리를 구하시며, 세계평화를 위하여 러시아를 구하시며 ,이 세상에 약한 자를 없이 하시며 ,악한 자의 마음을 바른 길로 인도하시며, 천주성삼은 우리 죄인을 구하시며, 천주성삼은 우리 교우들이 임종시에 상등 통회 발하는 기회를 주시며, 천주성삼은 우리 나라에 임하시며, 천주성삼은 세계평화를 주옵소서.아멘." 천주성삼상으로 올라 그 좌측으로 가니 순례자의 집에서 올라오는 도로와 만나고 이어 3거리에서 좌측으로 오른다. 우측에는 넓은 공터가 있고 아까 본 실버타운이 보인다.

곧 이어 좌측 산비탈에 무명순교자/교구 성직자의 묘지가 나온다. 올라가 보니 사제들의 묘가 죽 모셔져 있고, 맨 위에 무명순교자비가 서 있고 그 앞에 무명 순교자의 묘가 있고, 그 묘 좌측엔 무명순교자의 묘비가, 우측엔 성인 요한 이윤일 천묘사적비가 있다. 무명순교자비에는 "오 위대하신 주님의 용사들이여! 영원한 삶의 길인 진리를 이 나라 이 민족에게 전하시다가 당신들의 소중한 생명을 아낌없이 주님께 바치신 그 숭고한 정신을 저희들은 정성을 다하여 영원히 영원히 빛내리이다" 라고 쓰여 있고, 무명순교자의 묘비에는 "하나님의 가르침대로 살다가 이름조차 숨긴 채 순교하신 16위의 무명 순교자를 모심.

1976년 수원교구의 순교자 현양사업으로 좌로 12기는 4.23. 용인군 내사면 대대4리 음다라니 산기슭 소위 목없는 줄무덤으로 전해 오는 곳에서, 중앙의 1기는 6.24. 용인군 이동면 묵리 한덕골 산상에서, 우로 4기는 12.17. 용인군 수지면 신봉2리 시봉부락 밭기슭 돌무덤으로 전해 오는 곳에서 옮겨 모셨다. 중앙의 1기는 이윤일(요한) 성인으로 밝혀져 1986.12.21. 순교장소인 대구 관덕정으로 옮겨 모셨다.

1988.9.20. 천주교 수원교구. "라고 적고 있고, 성인 요한 이윤일 천묘사적비에는 "성인 이윤일께서는 1812년 충청도 홍주에서 출생, 성장후 천주신앙 봉행으로 인하여 여러 곳으로 옮겨 사시다가 경상도 문경새재근처 산간마을인 여호목에 정착. 일가와 더불어 천주의 가르침대로 사시다가 병인박해가 크게 벌어지던 1866.11.18.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문경,상주 등지에서 고난을 겪으신 후, 1867.1.21. 대구 남문밖 관덕정 광장에서 순교함. 그의 시신은 그곳 교우들이 수습해 형장 부근에 가매장되었다가 그후 박해가 다소 누그러지자 후손들에 의해 대구날뫼(비산동) 야산에 안장되셨다. 1904경 경기 용인군 이동면 묵리 먹방이 마을에 은거하던 후손이 그 무덤을 대구에서 먹방이 뒷산으로 옮김.

1976 수원교구의 순교자 현양사업의 일환으로 교구내 각지에 흩어져 있던 무명순교자들의 묘소를 유서깊은 미리내 성지에 조영할 때 성인께서도 그해 6.24. 먹방이 뒷산에서 이곳 미리내 성지로 이장됨. 이 사실이 근래에 밝혀지자 ,성인을 특별히 현양하고자 하는 대구대교구 이문희 대주교의 원의를 수원교구 김남수 주교가 받아들이게 되어 성인이 혈제를 봉헌하신 대구관덕정 옛터로 성인을 모셔가기 위해 1986.12.21. 대구대교구 이문희 대주교화 사제, 평신도 다수가 함께 장엄한 행렬을 이루는 가운데 성인은 이곳을 떠나게 되었다. 1988.9.20. 이문희(바오로) 대주교 세움."이라고 되어 있다.

다시 도로로 내려와 오르면 성모통고의 집이 있는 3거리에 이른다. 여기서 우측으로 오른다. 여기가 성모칠고의 길이다. 돌로 보도를 깔았다. 약 3m의 넓이다.연인과 산책하기엔 너무나 좋은 성스러운 길이다. 낙엽송이 우거진 곳 몹시 한적한 곳이다. 성모 칠고를 조각하여 두었다. 1.시메온의 예언 2.에집트 피난 3.예루살렘 성전에서 예수를 잃으신 마리아 4. 십자가를 지신 예수를 만나신 마리아 5.악당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음을 보신 마리아 6.예수의 성시를 십자가에서 내려 품에 안으신 마리아 7.예수 무덤에 묻히심을 보신 마리아 가 그것이다. 무언가 깊이 생각하게 하는 조각들이었다. 이 7번째 조각상을 지나면 예수의 기도소리가 들려오는 듯한 "게쎄마니 동산"이다.

마음을 정리하기에 좋은 곳이다. 낙엽송 우거진 계곡에 위치하고 주변에 자연석이 많았다. 큰 암석위에 십자가를 세우고, 그 앞 낮은 바위에는 인류구원사업을 위하여 기도하시는 예수의 상을 흰색으로 조각하였다. 기도하는 예수의 모습을 대하니 마음이 절로 경건해진다. 십자가 밑에는 " 아버지, 아버지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라면 이 잔을 제게서 거두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루가 22:4 )" 라고 새겨져 있다. 예수의 마지막 기도가 아닐런가!! 그런데 좌측아래엔 예수의 이런 통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말을 잊은 채 잠에 빠져 있는 나태한 제자들상이 보여 어딘지 처연하게 느꼈다.

예수의 기도상 바로 우측 아래에는 게쎄마니 기도문이 적힌 안내판이 있다. 거기에는 " 전 인류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하시기 전날 밤에 게쎄마니에서 피땀을 흘리시며 기도하신 예수여! 현대에는 무절제한 산아제한으로 예수성심과 성모성심을 아프게 해드리는 죄가 많사와 우리들도 밤중 성시 신공을 바침으로써 그 죄를 배상하고자 하오니 ,인류의 죄를 용서하시고 세계의 평화와 교회의 평화와 조국의 평화통일을 주옵소서. 특히 교우들의 양심을 비추시어 더 많은 자녀들을 낳게 하시어 성직자와 수도자의 성소가 줄어드는 일이 없게 하소서. 아멘. " 좀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있는 글이었다.
여기서 좌측으로 내려오면 성모통고의 집이 나오고 , 한참 걸어 내려오면 성지 안내판으로 다시 돌아온다.

(2) 경당길 순례

성지안내판 좌로 난 길로 가면 새로운 조각상을 세우는 공사를 하고 있었는데, 타락한 군상과 여인과 용을 그린 그림들과 조각들이 있고, 천주교 이단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가하는 내용의 글이 빽빽한 조각을 하고 있었다. 좀 섬찟한 느낌이 들었다. 조금도 용서를 하지 못한다는 태도이었다. 시간관계상 다 읽지 못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이어 묵주의 기도를 할 수 있도록 동상을 만들어 놓은 로사리오 신비 15단이 이어지는데 이것은 환희의 신비 5단과 고통의 신비 5단,그리고 영광의 신비 5단으로 구성되어 조각되어 있는데 끝나는 지점이 야외행사장 끝이고 김대건 신부의 동상이 그 좌측에 있다.

*환희의 신비
1단 계) 마리아 예수를 응태하심을 묵상합시다. 응) 성모님의 겸손을 본받읍시다.
2단 계) 마리아 엘리사벳을 찾아보심을 묵상합시다 응)이웃사랑을 실천합시다.
3단 계) 마리아 예수님을 낳으심을 묵상합시다 응)청빈과 극기를 사랑합시다.
4단 계) 마리아 예수님을 성전에서 드리심을 묵상합시다 응)순명의 덕을 닦읍시다.
5단 계) 마리아 예수님을 성전에서 찾으심을 묵상합시다
응) 하느님과의 일치생활을 합시다.

*고통의 신비
1단 계) 예수 우리를 위하여 피땀 흘리심을 묵상합시다 응)통회의 정을 발합시다.
2단 계) 예수 우리를 위하여 매맞으심을 묵상합시다 응)감관의 욕구를 자제합시다.
3단 계) 예수 우리를 위하여 가시관 쓰심을 묵상합시다 응)교만을 경계합시다.
4단 계) 예수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 지심을 묵상합시다 응) 매일의 역경을 참읍시다.
5단 계) 예수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히심을 묵상합시다.
응) 자존심과 탐욕을 버립시다.

*영광의 신비
1단 계) 예수 부활하심을 묵상합시다 응)개과천선하도록 노력합시다. 2단 계) 예수 승천하심을 묵상합시다 응) 하늘나라에 대한 동경과 희망을 가집시다.
3단 계) 예수 성령을 보내심을 묵상합시다 응)성령의 7가지 은혜를 구합시다.
4단 계) 예수 마리아를 하늘에 불러올리심을 묵상합시다
응) 선종의 은혜와 신앙의 항구함을 구합시다.
5단 계) 예수 마리아에게 천상모후의 관을 씌우심을 묵상합시다
응) 성모님께 효도를 드립시다.

영광의 신비까지 보고 나니 이윽고 몸은 잔디로 잘 가꾸어진 야외행사장의 끝에 있었다. 여기서 좌측으로 가면 김대건 신부 동상이 우뚝하다. 사진으로 보니 무척 미남이었는데 동상의 얼굴도 미남형으로 조각되어 있었다. 돌아다 보니 수녀 한 분이 내가 돌아온 신비의 15단을 돌면서 기도하고 묵상하고 있다. 아마 그 15단은 묵상용으로 조각/설치되어 있나 보다. 김대건 신부 동상 아래에는 신부님이 마지막으로 작성하신 "교우들 보아라"라는 제목으로 글이 빽빽히 새겨져 있다. 사료상 중요하여 여기 그 전문을 옮겨 적어 본다.

"우리 벗아 생각하고 생각할지어다. 천주 무시지시로부터 천지만물을 배설하시고 그 중에 우리 사람을 당신 모상과 같이 내어 세상에 두신 위자와 그 뜻을 생각할지어다. 온갖 세상일을 가만히 생각하면 가련하고 슬픈 일이 많다. 이 같은 험하고 가련한 세상에 한 번 나서 우리를 내신 임자를 알지 못하면 난 보람이 없고 , 있어 쓸데없고,비록 주은으로 세상에 나고 주은으로 영세 입교하여 주의 제자되니 이름이 또한 귀하거니와 실이 없으면 이름이 무엇에 쓰며 세상에나 입교한 효험이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배주 배은하니 주의 은혜만 믿고 주께 득죄하면 아니 남만 어찌 같으리요. 씨를 심는 농부를 보건대 때를 맞추어 밭을 갈고 거름을 넣고 더위에 신고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아름다운 씨를 가꾸어 밭 거둘 때에 이르러 곡식이 잘 되고 영글면 마음에 땀낸 수고를 잊고 오히려 즐기며 춤추며 흠복할 것이오. 곡식이 영글지 아니하고 밭 거둘 때에 빈 대와 껍질만 있으면 주인이 땀낸 수고를 생각하고 오히려 그 밭에 거름내고 들인 공부로써 그 밭을 박대하나니 이 같이 주 땅을 밭을 삼으시고 우리 사람으로 벼를 삼아, 은총으로 거름을 삼으시고 강성 구속하여 피로 우리를 물주사 자라고 영글도록 하여 계시니 ,심판날 거두기에 이르러 은혜를 받아 영근 자 되었으면 주의 의자로 천국을 누릴 것이요, 만일 영글지 못하였으면 주의 의자로서 원수가 되어 영원히 마땅한 벌을 받으리라.

우리 사랑하는 제형들아 알지어다. 우리 주 예수 세상에 내려, 친히 무수한 고난을 받으시고 괴로운 데로조차 성교회를 세우시고 고난 중에 자라게 하신지라. 그러나 세상 풍속이 아무리 치고 싸우나 능히 이기지 못할지니, 예수 승천 후 종도때부터 지금까지 이르러 성교 두루 무수 간난 중에 자라니 이제 우리 조선에 성교 들어온 지 5,60년에 여러 번 군난으로 교우들이 이제까지 이르고 또 오늘날 군난이 치성하여 여러 교우와 나까지 잡히고 아울러 너희들까지 환난 중을 당하니 우리 한 몸이 되어 애통지심이 없으며 육정에 차마 이별하기 어려움이 없으랴. 그러나 성경에 말씀하시대 작은 털끝이라도 주 돌보신다.모르심이 없이 돌보신다 하셨으니 어찌 이렇다 할 군난이 주명 아니면 주상 주벌 아니랴.

주의 성의를 따라오며 온갖 마음으로 천주 예수의 대장의 편을 들어 이미 항복받은 세속 마귀를 칠지어다. 이런 황황한 시절을 당하여 마음을 늦추지 말고 도리어 힘을 다하고 역량을 더하여 마치 용맹한 군사가 병기를 갖추고 전장에 있음같이 하여 싸워 이길지어다. 부디 서로 우애를 잊지 말고 돕고 아울러 주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환난을 걷기까지 기다리라. 혹 무슨 일이 있을지라도 부디 삼가고 극진히 조심하여 위주 광영하고 조심을 배로 더하고 더하여라.

여기 있는 자 20인은 아직 주은으로 잘 지내니 설혹 죽은 후라도 너희가 그 사람들의 가족들을 부디 잊지를 말라. 할 말이 무궁한들 어찌 지필로 다하리 그친다. 우리는 미구에 전장에 나아갈 터이니 부디 착실히 닦아 천국에 가 만나자. 마음으로 사랑하여 잊지 못하는 신자들에게 너희 이런 난시를 당하여 부디 마음을 허실히 먹지 말고 주야로 주은을 빌어, 삼구 대적하고 군난을 참아받아 위주 광영하고 여등의 영혼대사를 경영하라. 이런 군난 때에는 주의 시험을 받아 세속과 마귀를 쳐 덕공을 크게 세울 때니, 부디 환난에 눌려 항복하는 마음으로 사주 구령사에 물러나지 말고 오히려 지나간 성인 성녀의 자취를 만만수지하여 성교회 영광을 더으고 천주의 착실한 군사와 의자됨을 증거하고 비록 너희 몸은 여럿이나 마음으로는 한 사람이 되어 사랑을 잊지 말고 서로 참아 돌보고 불쌍히 여기며 주의 긍련하실 때를 기다리라. 할 말이 무수하되 거처가 타당치 못하여 못한다. 모든 신자들은 천국에 만나 영원히 누리기를 간절히 바란다. 내 입으로 너의 입에 대어 사랑을 친구하노라.
부감목 김 안드레아.

세계 온갖 일이 막비주명이요, 막비 주상주벌이라. 고로 이런 군난도 역시 천주의 허락하신 바니 너희 감수 인내하여 위주하고 오직 주께 슬피 빌어 빨리 평안함을 주시기를 기다리라. 내 죽는 것이 너희 육정과 영혼대사에 어찌 거리낌이 없으랴. 그러나 천주 오래지 아니하여 너희에게 내게 비겨 더 착실한 목자를 상주실 것이니, 부디 서러워 말고 큰 자랑을 이뤄 한 몸 같이 주를 섬기다가 사후에 한 가지로 영원히 천주대전에 만나 길이 누리기를 천만천만 바란다. 잘 있거라. - 김 신부 사정정표 "

이 얼마나 구구절절한가.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도 신도들을 염려하여 당부하는 글을 남긴 그 초연함이 배어 있지 아니한가. 과연 성인 제1호로 추앙받을 만하다고 본다. 그러길래 한국 땅에서 천주교가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이리라.
김대건신부 동상을 지나 야외행사장 우측으로 해서 103위 시성기념성당 아래 십자가의 길 입구로 내려온다. 마침 우측 밭에는 유채꽃이 만발하여 온통 노란색을 연출하고 있어 보기 좋았다. 야외 행사장 건너편 산에는 수도원 별관과 천주성삼성직수도회 묘원이 있다.

십자가의 길 위 산자락에는 강재희(방지거)의 묘가 있다. 십자가의 길은 좋은 순례 내지산책 겸 묵상하기 좋은 장소였는데, 총 14처로 청동으로 만들어 구성하여 예수의 고난을 조각하여 두었다. 103위 기념성당 좌측 아래에서 시작하여 성당 뒤를 거쳐 성모당 뒤에까지 연결되어 있다. 그 14처란 1.예수 사형 선고 받으심 2.예수 십자가 지심 3.예수 기진하시어 넘어지심 4.예수와 성모 서로 만남. 5.시몬이 예수를 도와 십자가 짐 6.성녀 베로니카 수건으로 예수의 얼굴을 씻어드림 7.기력이 쇠하신 예수 2번째 넘어지심 8.예수 예루살렘 부인들을 위로하심 9.예수 3번째 넘어지심 10.악당들이 예수의 옷을 벗기고 초와 쓸개를 마시게 하였음 11.악당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음 12.예수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 13.제자들이 예수의 성시를 십자가에서 내리움 14.예수 무덤에 묻히심 등이 그것이다.

다시 천주 성삼께 봉헌한 한국 순교자 103위 시성기념성당으로 돌아왔다. 설계가 특이했다. 전통적인 성당의 것이 아닌 현대식으로서 웅장한데 ,1층은 예배를 행하고 고백성사를 받는 곳이었다. 실례를 무릅쓰고 등산복 차림으로 들어갔다. 엄숙한 분위기가 압도하였는데, 수녀 한 분이 성가를 연주하고 있어 그 분위기가 경건스러웠다. 나무로 된 긴의자들이 다수 있고, 벽쪽으론 3면위로 시성 성인 성녀의 이름이 적힌 휘장이 배열되어 있었고 산쪽의 벽에는 십자가의 길에서 본 14처의 그림과 그 해설이 걸려 있었다. 정면과 좌우측 공간에는 외국인 사제들과 우리 나라 사제들 인형이 보인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한복을 입고 있었다.

1층을 다 둘러보고 밖으로 나와 계단으로 2층으로 올라가니 천주교도들에 대한 박해를 마네킹으로 전시한 전시관이었다. 각종 고문방법으로 줄톱질(털을 켠 줄로 다리를 돌려 감고 양쪽에서 당겼다 놓았다 하면서 톱질하는 형벌.살이 찢어졌다고 한다), 매질(앉혀 놓고 넙적다리를 때린다), 육모매질(팔과 머리털을 뒤에서 엇갈리게 세게 묶고 사금파리 위에 무릎을 꿇게 하고 양쪽에서 사령들이 다리를 두들겨 팸), 주리(가위주리라고도 한다. 두 무릎과 발목을 동시에 꽁꽁 묶은 다음, 2개의 나무막대를 정강이 사이에 끼워 양끝을 반대로 틀면 정강이뼈가 활처럼 휘었다고 한다), 팔주리(무릎을 꿇게 하고 두 팔을 어깨에 맞닿도록 뒤를 묶은 다음 나무를 팔 속에 똑바로 세운 다음, 한쪽 나무를 반대로 틈), 학춤(양팔을 뒤로 엇갈리게 묶어 높이 매달아 놓고 양쪽에서 때림), 곤장(참나무로 만들고 넓적다리와 궁둥이를 침)이 있었다. 얼마나 지독한가. 정말 인간이하의 대접을 했던 슬픈 역사의 현장이었다.

박해시대의 사제들은 외국인의 모습을 감추기 위하여 상주복장을 하였다는 사실도 처음 알게 되었다. 또 조선시대 때 사형장에서 참수직전에 죄인을 군중에 보여주기 위하여 죄인을 얼굴에 회칠을 하고 두 귀에 활이 꽂힌 채 팔목을 묶어, 겨드랑이로 긴 막대를 양쪽에 넣어 앞뒤에서 포졸 2명이 막대를 어깨에 매고 죄인을 중간에 세우고 운반하였으며, 軍門梟(효)首라고 하여 대역죄인이나 國禁을 어긴 중죄인을 軍이 공개적으로 형을 집행하여 같은 죄를 짓지 않도록 사람들에게 경고하고 겁을 주는 의미로 목을 군문에 달아놓았다고 하니 이 얼마나 잔혹한가? 몸서리가 쳐졌다. 아! 진정 천주교도의 순교가 성스럽게 느껴진다.

그리고 성 유대철 베드로가 수형받는 모습(13세의 어린 나이로 신앙을 증거하기 위하여 총14차례의 형벌과 백여대의 매, 40도의 치도곤을 당했으나 ,배교하지 않자. 기해년 10.31. 교사당함)과 성녀 골롬바 김효임의 수형모습(1839.9.26. 26세의 동정녀로서 서소문 밖에서 참수)과 1839(기해).9.21. 앵베르 라우렌시오 주교님과 모방 베드로,샤스땅 야고보 신부가 새남터에서 傳邪분토(요사한 것을 전파하고 땅을 어지럽힌다는 뜻)란 죄명으로 순교하는 모습도 전시되어 있었다. 이것들을 보면 비위가 약한 사람은 아마도 며칠간 꿈에서 나타나서 혼이 나거나 밥맛이 떨어져 고생할 것같다. 그러나 그 혹독한 시련을 이겨내고 이 땅에 천주교가 발을 붙인 것을 생각하니 참으로 대단한 사건이었다고 본다.

이 성당에서 나와 우측으로 가니 성모당이다. 가운데에 성모상이 있고, 예배용 의자가 길게 좌우 4개씩 있으며, 한국성인 제1위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제 103위 성 이윤일 요한 회장상이 있다. 여기서 성모칠락의 기도를 할 수 있음은 물론이다. 성모칠락 그림이 있다(1.성모 영보 2.엘리사벳을 방문함 3.예수의 탄생 4.예수 공현 5.성전에서 예수를 다시 찾음 6.예수 부활 7.성모 승천). 좌측 끝엔 평화를 위한 묵주 간주경(1948.11.17. 지 다니엘 주교 인준)이 있다. 그 경의 내용은 " 우리 예수여 / 우리 죄를 용서하시며 / 우리 나라 평화를 위하여 / 외교인들을 돌보시되 / 그 중에 천주를 핍박하는 악한 자들의 / 마음을 바른 길로 인도하소서/ 세계 평화를 위하여 러시아를 구하소서 / 예수성심이여, / 티 없으신 마리아 성심이여, / 우리 마음을 주의 마음과 같게 하소서. ///// 이 세상에 악한 자를 없이 하시며, / 우리 분심 중의 기도를 용서하소서, /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이여, / 지극히 티 없으신 마리아 성심이여, / 우리 마음을 뜨겁게 하소서./ 로 되어 있다.

그 우측 가정집 두어 채를 지나 김대건 신부 동상있는 쪽 좌측위에는 순교자의 모후께 봉헌한 한국 순교자 79위 시복기념 경당이 있다. 시복일 1925.7.5. 축복일 1928.9.18.이라고 적혀 있다. 정문 좌측 아래에는 주재용 신부가 작사/작곡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행적가비가 있다.

총 18절로 되어 있는데 여기에 옮겨 본다.

[1.십오세 어린 소년 안드레아는 모정에 쌓인 조국 뒤에 버리고 / 멀고먼 이역풍토 만리타국에 십여년 오랜 풍상 겪으셨도다

2.산설고 물선 저곳 마카오에서 오륙년 철학 신학 두루 배우고/ 임인년 이월경에 오문을 떠나 요동에 당도하니 만주객이라

3.변문에 몸 숨기고 지내면서도 조정의 사신행렬 지날 때마다/ 그 중에 혹시 교우 만나질까봐 틈틈이 기웃기웃 살펴보도다

4.우연히 김방지거 만나게 되어 첩첩이 쌓인 정담 서로 나눌새/ 오호라 주교신부 치명하시고 그리던 부친까지 순교하셨네

5.열심한 안드레아 이 말 듣고서 영신엔 기꺼하며 감사하시나 / 모친의 유리걸식 생각을 하니 육정엔 뜨건 눈물 옷깃적신다.

6.흉흉한 조국 땅에 혼자 가고자 동편을 바라보니 망망하구나 / 올올이 찢은 편지 노를 비비어 허리에 보배로이 받아지녔다.

7.압록강 깊은 물은 앞길을 막고 삼엄한 순라꾼은 사방 살피나 / 민첩한 안드레아 소틈에 끼어 번문을 썩나서니 고국이로다

8.밤새껏 길 걸으니 기갈 심하고 혹독한 추위 겹쳐 사경이건만 / 주막집 쫒겨나와 잘 데 없어서 깊은 산 찬 눈위에 몸을 던진다

9. 혼몽중 바빠가란 소리 듣고서 이상한 저 그림자 뒤를 따르며/ 조국땅 등지고서 되돌아서는 비장한 그 마음이 오죽했을까

10. 메스뜰 이 신부에 사실 아뢰고 몽고에 머물면서 공부하던 중 / 훈춘에 다녀오란 분부 받들고 새 길을 개척하려 그곳 가시네

11.십이월 중순경에 길을 떠나니 쌓이고 덮인 눈이 발길 막으며/만주벌 찬 바람은 살을 에이고 백두산 눈보라는 뼈를 녹인다.

12.경원서 밀사 교우 잠깐 만난 후 눈물로 이별하며 발길 돌리니 / 사십일 천신만고 수포가 되고 그토록 애쓴 일이 허사되도다

13.몽고에 되돌아가 부제품받고 세 번 째 조국땅을 찾아 나설 제 / 주교님 강복받고 변문을 떠나 십여일 고생길에 서울에 오다

14. 십여년 그리웁던 모친 안 뵙고 상해를 목적지로 배를 띄우니 / 광풍에 놀란 물결 배를 덮치나 성모님 보호입어 생명 구했네

15. 상해의 김가항서 탁덕승품코 고주교 안신부를 함께 모시고/ 강경포 고국땅에 상륙하시니 회로의 그 고생은 더욱 심했네

16.이신부 영접차로 황해도 가서 뜻밖에 체포되어 포청몸 되니 / 귀국 후 채 일년에 옥중생활은 진실로 애석하고 원통하도다

17.금부에 이송되어 사십공초에 죽기로 결안내니 영광이로다 / 새남터 형장에서 생명 바치고 안성군 미리내에 안장되도다

18.천 구백 이십오년 칠월 오일에 칠십구 복자 함께 시복되시고 / 천구백 팔십사년 오월 육일에 백삼위 모두 함께 시성되도다 ].


행적가표지석 앞에는 4기의 묘소가 있다. 김대건 안드레이 신부묘(1821.8.21-1846.9.10., 서품 1845.8.17. , 시복 1925.7.5. , 시성 1984.5.6.), 강도영 말구 신부묘(1860.8.16.-1929.3.12. , 서품1896.4.26.*1907년 석조 성당을 건립함), 조선교구 제3대주교 요한 요셉 페레올 高주교묘(1808.12.27-1853.2.3, 사제서품 1938, 주교축성 1843.12.31.*거룩한 순교자의 곁에 있고 싶다는 페레올 주교의 유언에 따라 이곳에 안장됨), 최문식 베드로 신부묘(1881.5.16-1952.10.11, 서품 1910.7.3.)가 그것이다.

김대건 신부님의 묘는 신부님의 턱뼈를 모시고 있다고 합니다.방문객이 많은 날은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사람이 많이 온다고 한다. 그 경당 좌측 위에는 김대건 신부의 어머니인 高울술나묘와 함평 이민식묘가 있다.본래 두 묘는 김대건 신부의 경당 앞에 있던 공동묘지에 안장되었으나 1965년에 이 공동묘지가 광장으로 조성되면서 두 묘가 현재의 자리에 이장되고 그해부터 매년 9.26.경에 이 광장에서 순교자 현양대회가 개최되고 있다. 高울술나묘의 송덕비의 내용은 이러하다. "高울술나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모친으로 1798(무오)년 장흥고씨 가문에서 출생, 한국 천주교회의 심한 박해 속에서 일생을 고스란히 성모님의 뒤를 따라 바치신 희생자시다. 성모께서 세상 죄를 대신해서 40일 동안 굶으시는 예수님을 생각하며 한없는 마음 고통을 당하셨듯이 울술나 어머니도 15세 어린 아들을 수만리 타국에 보내 놓고 한없는 마음고통을 당했다.

장부성 김제준 이냐시오가 순교하신 후 혼자 남아 문전걸식하면서도 오직 아들이 훌륭한 사제가 되어 박해받는 한국 교회를 지키기 위하여 희생기도를 바쳤고 아들의 순교로 성모님의 가슴에 꽂혔던 예리한 칼날이 그의 가슴에도 꽂혔다. 성모님이 전 인류를 위한 당신 아들의 십자가 구원 사업이 헛되지 않도록 한평생을 애태우며 희생 바치셨듯이 울술나 어머니도 성모님의 통고를 위로하며 아들의 순교로 박해받는 한국 교회에 평화가 오고 교우들이 굳은 신앙으로 천주님을 위해 용감히 순교하고 순교자의 피의 대가로 한국땅에 성직자 수도자들이 많이 나와 앞으로 교회가 번창하도록 모든 고통을 참아 받으시다가 1864(갑자).5.17. 외로운 그의 삶을 마치셨다."고 되어 있다. 이 얼마나 고귀한 삶이냐? 그러길래 역사에 길이 남을 훌륭한 아들이 나왔지 않았나 싶다. 참으로 어머니들은 위대하다.

특히 종교를 둔 어머니들은 더욱 그러하다. 그 좌측에 있는 함평 이민식의 묘비 내용은 이러하다. "출생지는 안성군 양성면 미산리, 거주지는 용인군 이동면 묵리. 1829년 안성 미리내에서 태중교우 자손으로 출생하여 소년시절부터 겸손하고 모든 일에 열성이 지극하여 모든 교우에게 모범이 됨. 병인군란의 온갖 고초를 겪고난 후 40여세에 신품공부에 뜻을 두고 중국과 일본에 가서 수학한 바 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환국하여 1921.12.9.92세를 일기로 자택에서 선종하니 모든 교우의 표양된 자 지대하다. 1846.9.16. 서울 새남터에서 치명하신 김대건 신부님의 사체를 모시고 밤으로만 200 여리길을 이레만에 미산리 자기 친산에 안장하고 그 후 고주교님 유해도 복자 안드레아 김신부님 묘소 옆에 안장하고 항상 수호하고 자기 친산까지 복자 기념지로 기증한 그의 갸륵한 정신은 실로 모든 교우의 귀감이 되리라" .

그 당시의 법은 참수형을 당한 죄인은 사흘동안 그 시체를 치우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김대건 신부님의 경우에는 나라에서 큰 중죄인으로 다스려 누구도 며칠이 지나도 그 시신에 손을 댈 수가 없었고, 실제로 김 신부의 시신을 모시려고 시도하다가 많은 사람들이 발각되어 잡혀갔는데고 불구하고 이민식이 이를 몰래 거두어 미리내까지 밤으로만 200여리나 운구했다는 것은 신앙이 아니고선 불가능한 일이고 그 신앙에 고개가 숙여진다. 한 팔에는 머리를 들고,다른 한 팔은 몸을 안고 밤마다 걸었다고 생각을 하니 얼마나 힘들었을지를 오늘 이렇게 답사함으로써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어 다행이었다.

이상으로 미리내성지의 답사는 끝나게 된다. 그러나 김대건 신부가 생전에 시목활동을 하고 죽어서는 시신이 이동했던 길을 조금이나마 자취를 찾아 보려면 애덕고개와 망덕의 고개를 거쳐, 용해곡 마을로 이동해 보았다. 물론 묵리 한덕골도 가 봐야 하지만 다음으로 미루기로
했다.


4.애덕고개.

김대건 신부님 묘소가 있는 경당을 나와 우측으로 가면 산으로 오르는 길이 나온다. 바로 이 길로 이민식이 한밤에 김대건 신부님의 시신을 업고 넘어 온 고개이다. 여기서 5분 정도 가파르게 오르면 고개에 닿는다. 여기가 애덕고개이다. 고개엔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거기에는 애덕(오두재)고개라는 이름과 성 김대건 신부님이 생전엔 시목활동길이고 순교후엔 휴해를 운구하던 장소라고 적혀 있다. 미리내에서 500m. 뒷면엔 김 신부의 약력이 적혀 있고.양쪽 좁은 면에는 애덕, 애덕송이 기록되어 있다.
ㅇ. 愛德頌 :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자비의 근원이시며 저버림이 없으시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하여 주실 구원의 은총과 영원한 생명을 바라나이다.
ㅇ. 愛德 : 망덕은 천주 태워주신 超性德行이니
천주 예수의 공로를 보사 허락하신 천당영복을 바라고
그 복을 얻기에 요긴한 모든 성총을
천주의 성실하심과 자비하심을 인하여 굳이 바라는 덕이니라.


5.망덕고개

애덕고개에서 비포장 임도가 3갈래로 나온다. 좌측으로 가면 시궁산(515m)으로 가는 길이고, 가운데로 가면 한덕골로 가는 길이다. 우측으로 난 길로 진행한다. 우측 능선길도 보인는데, 그쪽으로 가면 고초골 고개로 해서 고초골로 가는 길일 것이다. 산허리로 난 도로를 따라가면 산림도 원시림에 가까울 정도로 울창하고 호젓하다. 연인과의 산책코스로는 아주 그만이다. 걸음을 빨리 하니 30분이 지난 후 다시 3거리가 나온다. 건너편에 개인 농장이 있고, 농부가 한창 농사일에 바쁘다. 여기서 우측 오르막으로 올라가야 한다. 약 15분 후에 3거리가 나와서 좌측으로 가다가, 연이은 3거리가 나오면 우측으로 진행한다. 여기서 좌측으로 가도 망덕고개에 이를 것이다. 여기서 우측으로 진행, 도로 따라 계속 20여분 정도 가니 망덕고개가 나온다.애덕고개 3,827m, 미리내성지 4,372m란 이정표가 있다. 또 천주교 수원교구 평택성당에서 세운 망덕(해실이)고개비가 있다. 김대건 신부가 생전에 사목활동을 하고 순교후 유해운구길이었다고 한다. 이제 그 비에 쓰여 있는 내용을 옮겨 적는다.
ㅇ. 望德頌 :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자비의 근원이시며 저버림이 없으시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하여 주실 구원의 은총과 영원한 생명을 바라나이다.
ㅇ. 감옥에서 하신 김대건 신부 말씀 :
"오늘 묻고 내일 물어도 오직 이 같을 따름이요
때리든지 죽이든지 또한 이 같을 따름이니
어서 때리고 어서 죽이시오".
"이제 죽는 것도 천주를 위하여 하는 것이니
바야흐로 나를 위하여
영원한 생명이 시작하려 합니다."
ㅇ. 望德 : 망덕은 천주 태워주신 超性德行이니
천주 예수의 공로를 보사 허락하신 천당영복을 바라고
그 복을 얻기에 요긴한 모든 성총을
천주의 성실하심과 자비하심을 인하여 굳이 바라는 덕이니라.

6. 용해곡-별미

망덕고개에서 우측 산아래 숲으로 난 길로 내려서다 보면 묘를 산중턱에 이장하기 위하여 길을 내었는데 산림훼손의 정도가 도를 지나치다. 후손들이 꽤나 행세를 하는가 본데 그렇더라도 좀 심할 정도로 했다. 나무를 잘라내고 길 좌우측에 복구 공사도 하지 않아 홍수나 장마 때에는 토사 유출이 있을 듯하다. 이것은 산림법 위반인데 법이 미치지 못하니 씁쓸할 뿐이다. 숲이 끝나고 논이 보이면 논뚝으로 해서 제일 위의 민가를 겨냥하여 가면 논뚝 초입에 망덕고개 안내 표지석이 있다. 망덕고개까지 564m. 민가를 지나면 대광사라는 절이 나온다. 함석지붕 2채로 된 가정집같은 절이다. 이어 우측 개울을 따라 마을을 지나 내려가면 다리를 지나고 이어 직진하면 대광사 안내판이 있는 2차선 아스팔트포장도로와 만난다. 이 도로는 한국석유공사 용인지소 진입도로로 개설한 것이다. 한참을 내려가면 별미 3거리다. 우측으로 오르면 와우정사가 있고, 좌측으로 가면 용인/수원으로 가는 도로다. 삼거리에는 한국석유공사 2km란 안내판이 있다. 여기서 용인으로 가는 차를 편승하여 용인터미날로 와서 서울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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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득히 솟아오른 저산정에, 구름도 못다 오른 저 산정에, 사랑하던 정 미워하던 정, 속세에 묻어두고 오르세
저 산은 우리 마음, 산사람 넓고 깊은 큰 뜻을, 저 산은 우리고향, 메아리 소리되어 흐르네
사랑하던 정 미워하던 정, 속세에 묻어두고 오르세 [아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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