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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백산 (미처 부치지 못한 편지)

  올린이 : 천리향()   2003/05/28 (올린날)              한국의 산하 | 산행기 게시판

소백산 (미처 부치지 못한 편지)

산행일자: 2003년 5/24~25
산행코스: 천동리-다리안폭포-삼거리-비로봉-천동리
산행시간; 5시간소요

산행기
오늘은 당신 대학동창 부부모임 산행이 있는 날 입니다. 모처럼 1박 예정으로 떠나게 되니 내 마음은 벌써 소백에 가 있습니다. 마침 소백산엔 철쭉제가 열리고 있다니 산상잔치는 절정을 이루겠지요.

6쌍 부부 중에 캠퍼스 커플이 있어 자연 그네들은 내게 모두 언니뻘이 되는 것이 조금 부담이 되지만...步幅이 맞는 친구들과 자주 산행하는 나로선 그네들과 발맞추는 것도 어려운 점이 되지만... 더더군다나 등산객들이 바글대는 시장터 같은 산길은 걷고 싶지 않지만..... 오늘만큼은 이유를 달지 않겠습니다.

한발 앞서가는 그네들의 세상살이에서 바르게 사는 법을... 산 경험들을 귀동냥 하는 것도 소백 산행에 의미 있는 시간이라 생각하렵니다.

콘도를 나올 때만 해도 보슬보슬 내리던 비가 신단양 시가지를 벗어나려하니 제법 굵어집니다. 앞서 달리던 김 선생의 승용차에서 핸드폰으로 연락이 오고 가더니 희방사에서 연화봉 그리고 비로봉으로 이어지는 철쭉산행은 무리인지라 산행기점은 천동리 쪽으로 정했다며 핸들을 돌립니다.

비옷을 걸쳐 입고 우리 일행은 빗소리장단에 발맞추며 일제히 초록 숲으로 향합니다. 철쭉을 못 보면 어떠하며 빗속이면 어떠하랴! 이렇게 당신과 함께 호젓한 숲길을 걷고 있는데...

잠든 숲을 깨우려는 듯 천동계곡 물소리 새벽을 가릅니다. 바위와 물이 만나 아름다움을 연출하는 다리안 폭포에 잠시 서 있습니다. 암반 위를 흐르는 물결은 물과 盤石의 어우러짐, 奇巖怪石과 老松 한 그루의 絶妙한 조화. 바위가 물을 만나고 나무가 바위를 만나 절경을 이루는 자연의 奧妙함에서 우리 부부의 모습은 어떤지 생각해 봅니다. 조화보다 부조화로 눈에 거스르던 때가... 화음보다 불협화음으로 귀에 거스르던 때가 더 많았으니 아름답지 못한 모양새로 산 세월이... 悔恨으로 남습니다. 아니 흐르는 세월이 야속합니다. 인생살이도 연습이 있다면 어제까지의 일들은 무효, 그리고 다시 시작하면 잘 살아 낼 텐데...

숲을 흔들고 지나가는 바람소리, 함박꽃 이파리에 떨어지는 빗소리.. 이 빗소리가 잠자던 감흥을 일깨워준 탓일까...! 오늘 만큼은 내 마음을 당신께 보이고 싶군요. 혹여, 문자공해에 한 몫을 하는 것이 아닌지 걱정이 되기도 하지만... 어쩜 부치지 못하는 편지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남의 것 탐내지 않고 땀 흘려 쥔 보람에 自足하며 사는 당신, 그런 당신을 야망이 없다며 쫑알쫑알 불만 파편 날릴 때 말없이 불평 주워 담던 당신, 말로 표현하는 것보다 沈黙으로 생각을 나타내는 당신 앞에 내 모습은 한없이 초라해 지곤 했답니다.

말 많던 내가 말이 줄어든 건 산을 자주 찾게 되면서라는 것 물론 당신도 아시는 일이지요. 도시의 갖가지 소리로부터 도망쳐 나와 산길을 걷다보면 자연 말은 줄고 생각이 커집니다. 그리고 듣기를 즐깁니다. 붉은 흙살이 숨 토해내는 소리, 햇살 쏟아지는 소리, 구름꽃 벙그는 소리. 등등...

비에 젖어 思念에 젖어 걷다보니 야영장에 이르렀습니다. 오를수록 장대비는 쏟아지고...비를 피해 매점천막으로 들어가 일행을 기다립니다. 따끈한 차 한 잔으로 몸을 덥힙니다. 잠시 후 우리 팀은 정상에서 하기로 한 솔잎주를 한잔씩 돌립니다. 그리곤 허리가 좋지 않은 이 선생부부와 몇몇은 오던 길로 내려가고 나머지는 비로봉을 향해 걸음을 옮깁니다. 비에 씻긴 숲의 정갈함... 신선한 기운... 마음까지 맑게 해줍니다.

마음이 맑은 당신은 멀리 내다보며 물질이 아닌 정신세계에 가치를 둘 때 난 눈앞에 것만 쫒아 정신없이 달리던 삶이었고 ...이루고 난후 그 욕망이 부질없다는 것이라 알고 나니 부끄러움으로 남습니다. 좀더 높이, 좀더 많이 거머쥐면 능력 있다고 생각하던 철부지였습니다. 살다 ... 결국 한줌 흙으로 돌아갈 때 허접 쓰레기만 늘리는 건데....

더 낮추면 그뿐인걸, 받기보다 주기를 애쓰면 될 것을, 마음하나 편케 해주면 될 것을.. 이런 것들이야말로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이라는 것을 머리에 서리가 내려앉고 서야 알게 되다니요....!

가쁜 숨 몰아쉬며 너덜길을 지나니 눈이 시원해집니다. 마루금이 보입니다. 하지만 빗줄기도 기세를 늦추지 않지만 바람역시 만만치 않습니다. 우리가 신혼 초 기득권 쟁탈하듯 비와 바람이 서로 힘겨루기를 하나봅니다. 환상적인 꽃길 산행의 미련은 버렸지만 악천후 속에 산행은 고행입니다.

나이테를 더 하면서 수형이 아름다운 주목, 주목군락지에 서 있습니다. 그 모습 볼 때마다 魅了당합니다. 예부터 사람은 산천을 닮는다는데 산에 무시로 들면 산을 닮을 수 있을까요? 주목을 얼싸안으면 주목을 닮을 수 있을까요? 주목 앞에서 우리의 노후의 모습을 그려봅니다.

우리가 함께 살아오는 동안 알게 모르게 상처를 주고받으며 아픔도 있었으련만 상처준 것은 잊고 받은 것에 아파한쪽은 나였고 받은 상처 가슴에 묻으며 삭이는 쪽은 당신이었습니다. 비바람에 가지가 찢기면 상한가지는 나무 스스로 수액을 중단한답니다. 바람적은 쪽으로 가지를 틀어 올리는 지혜, 이런 것들이 나무의 생존이듯 허물 덮어주며 상처 끌어안는 당신, 그것이 당신의 사랑법인걸 이제야 알게 됩니다. 알고 나니 우리에겐 세월이 얼마 없군요. 당신이 내게 했듯 나도 당신께 베풀 수 있게 시간을 주셔요. 그러려면 당신은 내 곁에 오래도록 있어주어야만 합니다.

운무에 가려졌다, 벗겨졌다 잠시 보이는 비로봉은 仙界인 듯 신비롭습니다. 너울거리는 안개는 마치 선녀의 옷자락인양 부드럽게 비로봉을 감싸 안고 있습니다. 인자한 비로자나불에 안기려 한 계단 한 계단 나무계단을 밟아 오릅니다. 얼굴과 손은 얼어 움직임이 자유롭지 않습니다. 세찬바람이 가슴에 안길 때면 몸을 가누기도 어렵고 발목에 쇠뭉치를 달고 떼는 것 같은 무게로 느껴져 순간 俗界를 벗고 法界에 드는 수도승의 고행을 짐작케 해 줍니다.

바람의 정도가 보통이 아니니 가능하면 비로봉에 오르지 말라던 좀 전 젊은 산꾼들의 염려가 실감이 납니다. 그래서인지 비로봉에 선 감회가 남다릅니다. 산행은 흔히 자기와의 고독한 싸움이라는데 오늘은 혼자가 아니라 덜 힘들었습니다. 산다는 것이 외로움을 견디는 것이라 어느 시인은 말하지만... 산다는 것은 외로움을 나누는 것이 아닐까 정상을 오르면서 받는 느낌입니다. 누구나 외로울 수밖에 없는 길이 인생길이라면 짊어진 짐과 외롬을 나눌 수 있는 상대는 당신, 오직 夫婦뿐이라는 값진 사실을 깨닫습니다.

비바람에 우리 일행은 오름길을 포기하고 내려간 것 같습니다. 비로봉을 뒤로 하산 길에는 마음이 바빠집니다. 같은 산 같은 코스로 매번 오르더라도 때마다 산은 모습을 달리합니다. 포근할 때도 냉냉할 때도.. 엄할 때도 다정할 때도... 인자할 때도 혹독할 때도 있으니 말입니다. 기후와 계절은 물론이거니와 하루라도 산 빛, 산 모양이 같지 않은.. 그 변화무쌍함에 우린 감동을 달리 받습니다.

적지 않은 세월 오는 동안 나를 믿고 함께 걸어온 것 고맙다고... 당신은 어렵게 말문을 열었지요. 살면서 어찌 햇살고운 날만 있었겠습니까? 기쁨은 작게 보이고 슬픔은 크게 보였던 때도 있었고 우리 사랑 흔들릴 때도 있었지만 그럴 때면 난 스물아홉 해 전 혼인서약을 신앙처럼 섬기며 살았습니다. 그건 사랑의 有無보다 더 중한 우리의 언약을 지키기 위함이란 걸 이젠 당신께 말하고 싶군요.

비구름이 빗겨가는 한쪽하늘이 말갛게 드러납니다. 첩첩 싸인 산봉우리도 한 뼘 가까이 다가옵니다. 바라보는 것마다 온통 초록빛 입니다. 한지에 물감이 배이듯 내 마음에도 풀물이 듭니다.

늘 곁에 있어 소홀해지기 쉬운 것이 부부라지만 내게 당신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젠 행복입니다. 세상은 내 마음의 눈에 따라 변한다는 걸( 幸, 不幸) 산은 내게 묵시로 알려주었습니다. 알게 되기까지 기다려준 당신, 기다림 또한 사랑이라는 것 이제야 알았으니 난 바보입니다. 내가 당신한테 기대온 세월만큼은 못하더라도 이제 인생의 하향길 에서나마 내 어깨 한쪽에 당신이 기댈 수 있게 해 드리고 싶습니다.

오름길에선 무거운 배낭 당신이 메고 올랐는데 내림길엔 대신 내가 메고 갑니다. 인생길이나 산행길이나 힘든 몫은 당신 것이군요.

계곡물소리 요란합니다. 수량이 많아진걸 보니 강우량이 꽤 되는 것 같습니다. 비에 젖은 숲은 더 싱싱하고 나뭇잎은 더욱 원기가 돕니다. 온 산은 건강한 생명력으로 충만해 있습니다. 아! 이 좋은 산 맛.. 산의 향기.. 이제 당신과 함께 吟味하려 합니다. 발걸음을 맞추고 마음을 맞추면서 한 방향을 향해 인생길 가듯 우리 산길도 함께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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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득히 솟아오른 저산정에, 구름도 못다 오른 저 산정에, 사랑하던 정 미워하던 정, 속세에 묻어두고 오르세
저 산은 우리 마음, 산사람 넓고 깊은 큰 뜻을, 저 산은 우리고향, 메아리 소리되어 흐르네
사랑하던 정 미워하던 정, 속세에 묻어두고 오르세 [아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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