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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봉산(진안) 청산은 나를 보고 물같이 살다 가라하네..

올린이 : 천리향    2003/05/08 (올린날)              한국의 산하 | 산행기 게시판

구봉산(진안) 청산은 나를 보고 물같이 살다 가라하네..

산행일자: 2003년5월3일

산행코스: 윗양명-1봉-9봉(천왕봉)-천황사

산행시간: 4시간20분


산행기

산이 媒介가 되어 만난 10년 지기를 뜻하지 않은 일로 잃고 말았다. 그리곤 잊어야 했다. 잊으려 애쓰는 고통의 시간이 계속되는 동안 수없이 煩悶의 산을 오르내리느라 정작 淸山은 찾을 수 없었다.   미움, 怨望 다 짊어지고 있자니.... 마음이 휘청거린다.


그래 버리자. 버리면..... 다 비우고 나면 산을 좋아하던 예전의 나로 돌아오겠지. 미친 듯이 산을 오르던 그때로 돌아갈 수 있겠지.... 배낭에 앉은 먼지를 손바닥으로 훑으며 그 친구에게 향했던 미움까지도 털어낸다.


어둑한 서해고속도로를 달려 천안, 유성을 지나니 도로변에 검은 천을 덮어쓴 인삼밭이 쭈욱 이어진다. 금산을 지나 남이 휴양림 쪽 지름길을 버리고 진안으로 향하는 길을 택해 유유히 흐르는 물결 따라 서행한다. 여명에... 산천초목도 눈 비비며 일어선다. 현관문만 나서도 초록빛의 싱그러움이 온 누리에 가득한데.... 그동안 난 마음속 감옥에 꽁꽁 묶여 있었구나.


용담 땜으로 산과 산 사이에 호수가 생겨 山水의 佳景이 눈과 마음을 즐겁게 해준다.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운 마음으로 보아야 아름답다 했는데 5월의 신록이 나의 審美眼을 되찾아준 탓일까?.


주천면에 닿을 즈음 주변산세가 예사롭지 않다 느끼는 순간 골골이 주름잡힌 壯快한 능선이 눈앞을 가로막는다. 놀란 가슴.. 하마터면 핸들을 놓칠 뻔 했다. 기암절벽과 호수와의 어우러짐, 그 절묘한 조화미에 잠시 한눈을 판 사이 큰 산의 偉容은 사라지고 아기자기한 청산이 길 위에 누워있다.


暗鬱(암울)한 현실에 겨워하던 나완 상관없이 여전히 春風은 숲을 넘나들며 봄기운을 퍼뜨리고 있었고 봄빛은 풀꽃들과 密語를 속삭이고 있었구나...

산벚꽃이 봄 산을 수놓은 풍경을 먼발치에서 바라 볼 때  내게는 고문이었다. 그리고 물리칠 수 없는 誘惑이었다.


구봉산 입구. 폐쇄된 주차장 (입산 통제기간 중) 에서 순찰 중이던 감시원께 양해를 얻어 양명마을에 주차시키고 입산을 시작한다. 실개천 따라 오르니 햇살고운 쪽에 노오란 양지꽃이 소담스레 피어있고 야광나무도 흰 꽃잎을 활짝 열고 나비를 부른다. 두릅나무엔 두릅이 한 뼘 올라와 있지만 눈요기만 하고 가파른 등로로 접어든다.


잃어버린 친구로 인해 나 홀로 가슴앓이 하는 동안 .... 산길에 발길을 끊었던 시간, 그사이 회색빛이었던 산엔 어느새 봄꽃이 지나가고 연두 빛 연한 잎은 나날이 부풀어 신록으로 온 산을 뒤덮고 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풍요롭다. 그리고 평화롭다. 녹음 짙은 숲에서 번져 나오는 풀과 나무에 청결한 내음... 천천히 들여 마신다. 가슴속에 덕지덕지 붙은 哀想들을 헹구어 버리면서..... 아프면 아픈 대로 설움은 서러움 그대로 내려놓으라고 한줄기 솔바람은 내 마음의 주름을 지워버리고 지나간다.


솔향기에 묻어온 ‘나옹선사‘의 시 구절이 閃光처럼 스친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네...로 시작해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 탐욕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놓고.....아! 나의 어리석음을 꾸짖는 듯 반복 음이 가슴을 때린다.


몇 번의 다리쉼을 하며 올려다본 아홉 개의 봉우리는 팔영산과 비슷하지만 봉우리 끝은 뽀족봉으로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와 위용이 힘으로 내게 전해온다. 비지땀을 흘리며 1봉에 올라서니 하늘아래 뫼들이 나직이 엎디어 있다. 먼 곳, 산과 산사이엔 안개강이 흐르고.. 눈 가까이 산과 산사이엔 용담호의 모습이 한국화처럼 펼쳐진다.


청산은 煩惱를 아우르고 아픔을 달래주며 또 다른 꿈을 심어준다. 그래서 일까...? 생각을 나누고 마음을 나누고 즐거움을 나누면서 산길을 가던 옛 친구가 어제처럼 多情으로 온다. 많은 사람들의 관심보다 단 한사람의 관심에 온 세상이 내 것 인양 의기양양하던 어제가 또다시 그리움이 될 줄이야....웃음은 슬플 때를 위해 있는 것이고 눈물은 기쁠 때를 위해 있는 것이라던가...  바보같이 가고 없는 지난 우정에 내 상처를 갖다댄다. 


2봉, 3봉, 4봉 오르는 가파른 길엔 밧줄이 설치돼 있어 잡고 오르내리기만 하면 된다. 오르고, 내리고...내려가면 그만큼 또 오르고...참 이상한 일이다. 몸이 편할 땐 마음이 괴롭더니 몸을 괴롭히니 마음은 점점 편해진다.


봉우리를 거듭 지날수록 산은 더 깊고 험준하다. 2시간여를 오르는 동안 단 한사람도 만난 적이 없이 혼자 걷는다. 고립된 것 같아 불안한 마음에 주위를 두리번거리면 그때마다 눈에 띄는 반가운 리본 표지기....


청정지역, 인적 없는 산 속에  혼자가 되어 철저히 고독해지리라....사람냄새가 간절히 그리워질 수 있도록... 그리하여 이미 준 것은 잊어버리고 못 다준 것만 생각나도록...


산기슭엔 지다만 벚꽃이 시들시들 가지 끝에 달려있다. 비우고 다 비워낸 裸木에서 꽃이 피고 지고... 연두 빛 새 잎이 돋고... 단풍들고...  삭풍에 가지를 떠나지만 어느 잎은 제 몸에 다시 내려앉아 이듬해 돋을 새순에 자양분이 되어주는 나무의 일생... 자연의 순환에서 生成과 消滅의 이치를 깨달으며... 한자리에 오래 머무는 것 세상 어느 곳에도 없음을 본다.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나 아니듯.. 사람의 감정 또한 물 흐르듯 흐르는 것, 매임 없이 흐른다. 만남은 헤어짐의 시작이라 하지 않던가.. 그렇담 헤어짐은 또 다른 만남을 위함인가....  만남도 헤어짐도 아니 우리인생 자체가 찰나인 것을 ...세상살이 마음에 묶어둘게 무언가....


천왕봉을 향해 오르는 길 만만치 않다. 頂上이란 원래 그런 것이겠지만....바위틈에서 쏟아지는 석간수에 목마름을 달래며 고지를 향해 오름짓을 계속한다.


바쁠 것 없이 쉬며, 생각하며, 꾸준히 오르니 정상. 정상석을 밟고 동서남북 휘~ 둘러본다.  등성이 첩첩이 이어진 끝으로 하늘금이 선명하고 산이 끝나는 곳에 또다른 크고 작은 산들이 앉아 있다. 구봉산을 南으로 이웃한 마이산, 두 마이봉이 또렷이 눈에 들어오고 덕유산은 희미한 모습으로 동편에 자리하고 있다.


하늘이 주는 간지러운 햇살을 받으며 5월의 숲을 바라보니 꽃보다 숲이 더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나이 듦인가? 꽃의 아름다움은 눈으로 오지만 숲의 비경은 마음으로 오기 때문일까? 초록빛에는 희망이 실려 있다. 젊음이 출렁인다.


살아있는 순간, 한순간이 얼마나 소중한가! 얼마나 귀한가... 사랑하며 살아도 모자라는 시간... 오늘이 내 생애 마지막 날이라 생각하면 그 같은 것! 용서 못할 것도 없지 않으리...


좀 전 암릉길에서 뭉친 다리근육을 풀면서 활엽수 우거진 숲길을 내려간다. 가파른 도내미 상수원을 지나치고 천황사 쪽으로 방향을 튼다. 1시간가량 숲 속을 산책하듯 내려오니 끝자락에 계곡을 만날 수 있었다. 손과 발을 담그고 더위를 식혀본다. 서늘해질 때 까지 물 흐름을 듣다 자리 털고 일어서며 배낭을 챙긴다. 정은 가슴에 새기고 미움은 물속으로 흘려보내는 것도 잊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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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득히 솟아오른 저산정에, 구름도 못다 오른 저 산정에, 사랑하던 정 미워하던 정, 속세에 묻어두고 오르세
저 산은 우리 마음, 산사람 넓고 깊은 큰 뜻을, 저 산은 우리고향, 메아리 소리되어 흐르네
사랑하던 정 미워하던 정, 속세에 묻어두고 오르세 [아득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