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일째 2017년 8월 21 월요일

4시 10분에 잠이 깨다. 잠이 다시 들 것 같지 않아 출발 준비를 하였다. 두 발의 양쪽 엄지 및 새끼발가락에 물집이 잡히고 통증이 느껴진다. 물집 방지 패드로 처치를 한 후 양말을 신을 때 신음소리가 절로 난다. 알베르게를 나서서 곧바로 까미노로 향했다. 오늘처럼 어두운 새벽녘에 나홀로 출발할 것에 대비해 전날 일정을 마치면서 다음날 이어질 까미노 방향을 항상 확인하자. 머물었던 알베르게가 마을 말미에 위치한 관계로 이내 마을을 벗어났다. 어둠이 짙게 깔려 발앞이 제대로 분간이 안된다. 헤드램프 불빛을 비추며 잔돌로 다져진 까미노를 걷는다. 까미노 양쪽으로 포도밭이 나란히 가고 있다.

자동차가 지나간다. 부지런한 농부가 밭을 살피러 가는 것인가. 뒤에서 불빛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 차가 서행 운전하는 줄 알고 어두운 까미노가로 비켜가는데 부부 순례자가 큼지막한 배낭을 메고 쌍스틱을 내디디며 바람처럼 구름처럼 앞서 나간다. 건설 자재 공장에서 들리는 기계음이 새벽정적을 깨우고 있다. 이제 어둠이 서서히 걷히며 아름다운 여명이 비춰지고 있다. 까미노는 잔돌들로 다져진 채 계속 이어지고 있다. 까미노 방향은 서진하고 있기에 아름다운 일출 모습을 놓치지 않으려면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서서 바라보던가 아니면 걸으면서 자주 뒤를 돌아봐야 한다. 몇몇 순례자들의 발걸음들은 뒤에서 펼쳐지는 일출의 장관에 무관심한 채 앞으로 앞으로만 향하고 있다.

산솔 마을 초입에 있는 바엔레스토랑에 들려 간단한 스낵과 우유를 한 잔을 하였다. 새벽길을 걸어와서 그런지 땀보다는 한기를 더 느낀다.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하며 가장 많이 사용한 용어가 ‘깔리엔테Caliente 즉 뜨겁게’이다. 삼복 더위에도 찬물보다는 뜨거운 물을 먼저 찾는 체질이라 어쩔 수 없다. 약국 안내판이 의외로 눈에 많이 띤다. 물집 처치용 약품은 준비해간 것을 다 사용하고 2번 정도 더 사서 사용한 것 같다. 멀찌감치 떨어져 건물 사진을 찍는데 바엔 레스토랑 바깥 카페 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던 여인 순례자 3명 중 한 명이 손가락을 들며 브이V 포즈를 취한다. 사실 그대들을 앵글 속에 담은 것은 아니지만 감사 인사를 표했 다. 먹을 것이 마땅치 않아 바나나 한 쪽을 사 먹었다.

마을을 벗어나자 까미노는 N-111 도로와 나란히 가고 있 다. 아르꼬스 마을에서 보았던 말을 탄 남녀 3인 일행이 까미노를 간다. 어제 마을 축제 참가자들인 줄 알았는데 아마 순례자들인 모양이다. 말 엉덩이가 유리알처럼 윤기를 내고 있다. 바이크 순례자들을 맞이하기 위해 알베르게에서는 신경을 써서 바이크 전용 주차장을 만들어 놓는다. 말이나 망아지, 애견 등을 동반한 순례자들은 이들 먹이나 저녁에 쉴 수 있는 마구간 등을 갖춘 곳을 쉽게 구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나홀로 여성 바이커들이 자주 눈에 띈다. 일행들로부터 뒤떨어져 가고 있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구릿빛 근육질에서 탄력이 넘쳐흐른다. 이곳 사람들은 순례가 아니 더라도 바이크 동호인들끼리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많이들 여기저기 달리는 것 같다.

비아나 마을 중심가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다. 이 와중에도 좁은 안길 도로 위에 하늘 높이 크레인을 세워 놓고 공사가 한참 진행 중이다. 바로 옆으로 자그마한 광장이 보이고 분수대 기둥에서 물줄기를 콸콸 내뿜고 있다. 입을 대고 목을 축이는 이도 있다. 남녀노소가 벤치를 꽉 채우고 있다. 가게에서 산 납작복숭아를 분수대 물로 씻었다. 미국 드라마 ‘왕좌의 게임’에서 존스노우로 출연 중인 영국배우 킷 하링턴이 벤치 뒤편에 서 있는 입간판 속에서 순례자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 드라마에 나오는 끔찍한 한 장면 (시즌 6편 10화)이 떠오른다. 며칠 굶긴 맹견을 풀어 놓자 포승줄에 묶여 있는 자기 주인의 피묻은 얼굴을 핥다가 광대뼈를 으깨면서 잡아먹는다. 세상에. 연출자의 기획의도가 어떤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아마 악마짓을 일삼던 주인을 응징하기 위해 저승사자가 맹견으로 현신(現身)하여 육신을 거두어 가는 것으로 묘사한 것 아닌가하고 생각해 보았다. 착하게 살자.

공중화장실은 찾기가 힘든데 수도꼭지는 어느 까미노 마을에서나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어느 까미노 마을에선가 과일을 씻으려고 수도관 주둥이에 갖다 대고 꼭지를 찾느라 헤매고 있는데 마을 주민이 지나가다 땅바닥에 돌출된 꼭지를 발로 누르자 물이 나왔다. 한 번은 화장실에서 용변을 보고 수조 위의 돌출 부위를 아무리 눌러도 반응이 없고 물도 안 나온다. 한참을 누르다 뭐 이래 고장인가 혼자 구시 렁대다 우연히 그 돌출 부위를 살짝 위로 당기자 변기속에서 물이 콸콸 쏟아져 내린다. 호스텔 등에는 변기 옆에 우리와 달리 생긴 비데가 따로 있는데 사전 지식이 없으면 세면대처럼 보여 이 곳에서 머리를 감게 된다. 익숙하지 않은 다른 환경 덕분에 가끔씩 소소한 경험들을 하고 있다.

그늘진 곳에 잠시 배낭을 부리고 울퉁불퉁한 돌바닥 위에 판초 우의를 깔고 그 위에 드러누웠다. 등산화도 벗었다. 발가락 통증이 가시지 않았는데 발목 부위까지 가렵다. 이런. 좁쌀 모양의 돌기가 돋아나고 있다. 엉겅퀴가 달라붙었던 양말을 신어서 그런 것인가. 대상포진이 다시 도진 것인 가. 겁이 덜컥 난다. 몇 달 전 급성 대상포진으로 허벅지에 돋았던 돌기 모양새와 닮았다. 당시 보름간 약을 복용하고 연고를 바르며 치료한 바 있었다. 출국 전 주치의에게 혹시 모르니 대상포진약을 좀 처방해달라고 했으나 그럴 필요 없다고 하기에 그냥 나왔는데 참으로 난감하다.

무사히 살아서 순례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야 한다. 정신 바짝 차리자. 가려운 부위에 침을 발라본다. 약간 따갑게 느껴진다. 혓바닥에 손가락을 댈 수 없으니 퉤퉤하고 손가락에 침을 뱉는다. 이것 참 궁상맞게 여러 가지 한다. 좀 우아하고 깔끔하게 순례를 할 수는 없을까. 언젠가 지리산을 오르다 휴식을 취하려고 등받이 있는 등산용 접의자를 펴고 앉자 지금은 고인이 된 여성 사우(社友)가 스티로폼 깔판에 앉으면서 접의자가 우아해 보인다고 하기에 접의자를 양보하고 스티로폼 깔판으로 바꿔 앉았던 일이 엊그제 같다. 말마따나 그때는 우아한 산행 우아한 휴식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먼저 가신 그 여성 사우의 명복을 삼가 빈다. 아울러 그 사우의 말마따나 이번 순례길도 우아한 순례길이 되기를 빌어본다.

로그로뇨에 진입하는 다리를 건너는데 관광객인 듯한 부부가 다리 난간에 뭇사람들이 기념용으로 채워 매달아 놓은 자물통들을 구경하거나, 난간에 서서 사진 찍으며 유유자적 걸어가고 있다. 부인 종아리를 보니 내 발목 부위처럼 빨간 좁쌀만 한 돌기로 완전히 도배가 돼있다. 실례를 무릅 쓰고 다가가서 내 발목도 같은 증세인데 왜 생기는 것이냐 무슨 약을 써야 하느냐 물었다. 하늘을 가르키며 직사광선 탓인 것 같다며 연고를 잔뜩 바르고 있는 중이란다. 연고 이름을 종이에 메모해 달라고 부탁했다. 바람이 거세게 불고 차들이 쌩쌩 달리는 다리 중간에서 번역기를 이용해 한 참을 의사소통했다. 참으로 친절한 응대를 받았다. 무차스 그라시아스Muchas Gracias (대단히 감사합니다).

로그로뇨에서는 유니베르시따리아 세요를 리오하Rioja대학교 등 2곳에서 받아야 한다. 현재 오후 6시가 다 돼가니 천생 내일 오전에 받아야 겠다. 이곳 로그로뇨에는 성당에서 직접 운영하는 기부제 알베르게가 있다. 2013년에도 신세를 진 알베르게인 바, 오늘도 이곳을 찾아보자. 순례 중 기부제 알베르게에서 머물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기부제라고 해서 공짜로 생각하면 좀 곤란하다. 알베르게 운영 경비 가 어디서 지원금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성도들의 헌금 및 순례자들의 기부금으로 운영되는 만큼 순례자들도 성의껏 일정액을 기부하자. 공짜 좋아하지 말고. 성당 주출입문 옆 건물에 알베르게 출입문이 있다. 아무 표지도 없기에 초 행자는 아마 혼자서 찾기 힘들 것이다. 문을 두들기니 햄버거 할아버지를 닮은 오스피탈레노가 문을 연다. 하룻밤 잘 수 있느냐 물으니 ‘어브코스’란다. 만원이 안되어 다행이다. 0층(우리의 1층)에 있는 20여 침상은 마감되어 1층(우리의 2층) 침실로 배정받았다. 바닥에 매트리스가 10여 개가 깔려 있다. 안쪽으로 자리를 잡았다. 저녁식사는 성당 미사를 마친 후 1층 식당에서 8시 30분이후 있단다.

그 오스피탈레노가 고향이 미국 캘리포니아라고 자기 소개를 한다. 어째 햄버거 할아버지를 닮은 대다 영어 발음이 원어민 같더니만 바로 미국인이었던 것이다. 더운 물로 샤워를 하고나니 개운하다. 아구아를 사기 위해 밖으로 나 갔다. 아쿠아 신발로 바꿔 신고, 발모가지에 힘이 빠졌기에 어린아이 걸음마냥 아장아장 걸었다. 거리는 온통 관광객들로 붐비고 있다. 행동식과 과일 몇 가지, 아구아는 1.8L 들이로 두 병 등 한 보따리를 샀다. 무거운 비닐봉지를 든 채 관광객들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니며 잠시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하다 그만 알베르게 돌아가는 길을 놓쳐버렸다. 바로 코앞일 알베르게를 찾지 못해 한참을 뱅글뱅글 돌았다. 지도를 손에 쥐고 있었으나 건성으로 보다가 지나가는 젊은이에게 물었다.

알베르게로 돌아와서 한숨을 붙였다. 큰 아구아 물 한 통을 거의 다 마셔버렸다. 내 바로 옆 매트리스에는 오리손 만찬에서 자리를 함께 했던 스페인 순례자 두 분이 배낭을 풀고 있다. 성당 미사에 참석했다. 법정 스님도 성탄절 예배에 참석하시곤 했다는데 크리스찬이 미사에 참석했다고 대수 겠느냐. 맨 뒷줄에 앉아 미사를 참관하였다. 2013년에 낯 익힌 주임 신부가 집전을 하시고 부신부 네 분께서 강단에 섰다 앉았다 하면서 주임신부의 집전을 돕는다. 미사라고는 친지 자녀 결혼식 미사 외에는 이곳 성당에서 2013년과 오늘 미사에 참석을 하는 것이 전부인 것 같다. 신부를 볼 때마다 생각난다. 그 옛날 고등학교 친구의 신부 서품식에 초대받고도 회사일이 바빠 참석하지 못했는데 40년이 다 돼 가건만 지금도 아쉬움이 남는다. 그 이후로 연락이 끊겼 다. 식당 주방장이 맨 앞줄에 참석해 있다. 이종격투기 선수마냥 건장하다. 헌금 바구니에다 약간의 금액을 담았다. 미사후 신부실로 가서 세요를 받았다. 미사를 집전했던 주임 신부가 직접 세요를 해준다.

숙박 인원보다 다소 적은 인원들이 식당 의자에 모여 앉았다. 일부는 외부 식당을 찾은 모양이다. 주임신부가 식사전 간단히 인사말을 한다. 부신부가 영어로 통역한다. 식당 벽면에 붙여놓은 순례자 노래 Chant des Pelèrines de Compostelle에 대해 주임 신부께서 설명을 하고 한 소절을 선창을 한다. 모두 함께 2회 따라 불렀다. 전식, 본식, 후식 으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성찬이 베풀어졌다. 주임 신부께서 직접 서빙한다. 네명의 부신부들도 함께 자리했다. 무심 결에 옆에 놓인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자 서빙하던 주임 신부가 뺏어 들고 버릴 듯한 제스처를 취하고 다시 건네준다. 옆 사람과의 대화에 좀 더 집중하라는 뜻 같다. 딱 맞다. 아 무래도 순례자들간에 의미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은 바로 이처럼 식사를 같이 할 때가 가장 적격인 것 같다. 까미노상에서는 서로가 갈 길이 바쁜데 사실상 깊은 대화를 주고받으며 걸어가기는 쉽지가 않다. 참으로 서민적인 맛이 풍기고 위트가 넘치는 주임 신부다.

스페인어학원과 유투브의 생활 스페인어 강좌를 듣고 왔으나 죄다 까먹고 올라Hola (우리말로 안녕), 우노Uno (하 나), 그라시아스Gracias (감사합니다), 깔리엔테Caliente (뜨겁게) 등 몇 개만 사용했다. 다음 번에 올 때에는 스페인어 공부를 조금은 더하고 와야 겠다. 최소한 음식 주문 용어 정도는 알아야 맛있는 음식을 골라 먹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곳 약사에게 약을 주문할 때도 구글 번역기를 통해 스페인어를 주로 사용했다. 이 나라 사람들에게도 영어나 한국어나 모르기는 도긴개긴인 것 같다.

깨닫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불치하문(不恥下問)의 교훈 을 되뇌였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어른 노릇을 하려드는 성급함을 참회합니다. 가르치려드는 성급함을 참회합니다. 오늘 걸은 거리 25.4km 걸은 시간 14시간 36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