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째 2017년 8월 19 토요일

모처럼 잠을 잘 잤다. 밖은 아직 어둡다. 배낭을 일찍 꾸렸 다. 헤드램프를 쓰고 알베르게를 나섰다. 마을을 빠져 나오면서 까미노싸인을 놓치는 바람에 잠시 알바를 했다. 어제 슈퍼에서 산 바게트와 납작복숭아를 먹으면서 걸었다. 이 나라의 과일들은 싱싱하고 맛있으며 종류도 다양하다. 가격도 저렴해서 주머니 가벼운 순례자들에게 고마운 존재가 아닐 수 없다. 특히 납작하게 생겨서 새끼 호박 형태를 닮은 납작복숭아 맛은 참으로 일품이다. 수페르메르까도를 지나칠 때면 꼭 들려 이것저것 한 보따리 씩 사들고 걸으며 원없이 먹었다.

배낭 무게는 당일 먹을 행동식 및 큰 아구아Agua통으로 인해 족히 2-3kg 더하게 된다. 전날 세탁을 하였으나 밤새 마르지 않아 물기가 남은 옷가지를 보행 중 마르도록 배낭에 매달면 무게는 더 나가게 된다. 약국에 들렸을 때 무게를 측정해보니 15kg를 넘길 때도 있다. 공항에서 잰 소화 물 무게가 8.8kg이었다. 무게가 늘어나게 되면 무게가 나가는 물건을 한두 개씩 버리게 되고 나중에는 본의 아니게 알베르게간 배낭 배달 서비스에 의지하려 든다. 더욱이 몇몇 구간은 택시나 기차로 이동하는 경우도 목격된다. 짐을 줄이자. 짐을 솜털처럼 가볍게 꾸려야 걷기 편하다. 그래야 날아가듯 오래 걸으며 많은 거리를 갈 수 있다. 장장 30-40일간의 대장정 아닌가. 까미노에 서서히 여명이 밝 아오고 있다. 아직은 나홀로 걷고 있다. 오늘은 좀 많이 걷고자 한다. 오늘의 일기예보가 맑음으로 나타난다. 손가락을 쓸 수가 없어 터치펜으로 입력하니 자꾸 오타가 난다. 디스크형 다기 펜이나 소프트형 터치 펜이나 입력시 매끄럽게 작동이 안된다. 바게트에 잼을 바르려고 빵을 가르다 왼손 엄지손가락을 그어 버렸다. 본의 아니게 피묻은 빵을 먹었다. 몇 일전 스틱을 조립 분해하다 오른쪽 검지 손가락 살점이 떨어져서 손가락으로 입력할 수가 없다.

수확을 마친 넓디 넓은 밀밭 평원을 뚫고 까미노는 이어지고 있다. 수확 전이라면 바람에 흩날리는 밀밭 모습이 더욱 장관일 듯하다. 까미노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초입 바엔레스토랑에 찾아 들었다. 새벽길을 걸어온 탓인지 약간 추위가 느껴진다. 근사한 벽난로가 있는 안쪽 식탁에 앉았다. 불을 때나 살펴보니 재만 쌓여 있다. 뜨거운 소파 한 그릇 했으면 좋으련만 소파 요리는 안한단다. 커피, 크로와상 한 조각 및 바나나 한쪽으로 요기를 하였다. 까미노는 다시 순례자들의 활기찬 발걸음들로 채워지고 있다.

수백 년을 이어져 내려왔을 이들 마을은 고풍스런 건축물로 채워져 있다. 마을마다 어김없이 눈에 띄는 것은 하늘 높이 우뚝 솟은 종탑들이다. 매 시간 매 30분마다 어김없이 종이 울린다. 녹음 방송은 아니고 직접 치는 종소리인 듯한 다. 인구의 90%이상이 가톨릭교도의 나라이니 당연한 현상 아니겠는가. 평원 위로 저 멀리 보이는 언덕안부에 비행기 동체만 한 풍력발전기들이 길게 늘어서서 거대한 프로 펠라를 돌리고 있다. 금세 도달할 듯한 언덕이 한참을 걸어도 쉽게 다가서지 않는다. 까미노는 서서히 고도를 높히며 물줄기처럼 라운딩하며 언덕을 향하고 있다. 언덕 기슭에 다다르자 머리를 치켜들고 고개를 뒤로 한참 꺾어서 풍차를 올려다 보았다. 강원도 평창에 있는 풍차를 보고 대단하다고 감탄했었는데 이 곳 풍차는 더 대단하다.

언덕 안부에 올라섰다. 안부 한편에 순례자 행렬을 구멍으로 뚫어 묘사해 놓은 철제 구조물이 설치되어 있다. 뒤로 돌아서서 어제 오늘 지나온 빰쁠로나 방향을 조감해 본다. 아스라한 지평선 산기슭 아래로 도시 형체가 조망된다. 탑차를 개조한 이동식 바엔레스토랑이 차려져 있다. 매대에 놓여진 천도 복숭아를 한 개 사서 한 입 물어보니 달콤 하다. 수도시설까지 갖추어져 과일을 물로 깨끗이 씻어 건네준다. 그라시아스(감사합니다). 매일 시장을 봐서 차리는 매대이기에 의외로 신선한 먹거리들이 놓여져 있다. 몇 몇 순례자들이 배낭을 부려 놓은 채 사방을 조망하고 있다. 360도 전 방향으로 끝없는 대평원이 펼쳐져 있다. 배낭 무게를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 막판에 DSLR카메라와 360 도 카메라를 빼놓고 온 것이 후회되었다. 그냥 아무 곳이나 대고 찍어도 바로 작품 사진이 될 풍광들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 이 풍광들을 한아름 안고 가는 방법은 카메라 앵글 속에 담는 것 아니겠는가. 한 알바 청년이 알베르게 전 단지를 나눠주며 오늘은 자기네 알베르게에서 머무르라고 선전을 하고 있다. 까미노는 내리막길로 길게 이어지고 있다. 자칫 미끄러질 듯한 너덜길이다. 발목이나 무릎에 부담은 되지만 길은 너덜길을 걸어야 제 맛이 난다. 헌데 양 발가락에 물집이 잡히기 시작하여 차츰차츰 올바른 걸음걸이를 유지할 수 없게 되어가는 것 같다. 절뚝절뚝. 경험상 물집이 잡혀 터지고 다시 새살이 돋는 데 아마 십 수일 이상 걸릴 것이다.

전남 완도 청산도 앞바다는 하도 푸른 빛을 띠고 있어 흰 천을 담그면 푸른 빛으로 염색이 될 것 같은 느낌을 들게 하는 데 이 곳 까미노 하늘도 금방이라도 푸른 물을 내리 부을 것같이 참으로 푸른 빛을 띠고 있다. 태초에 지구상 어느 곳인들 이런 풍광이 아니였겠는가. 인간들이 마구잡이로 대하여 태초의 모습을 잃은 것이 아니겠는가. 총성이 들린다. 두리번거리니 사냥총을 거머쥔 엽사가 개들을 앞 세우고 경사진 밀밭 고랑을 오르고 있는 모습이 아스라이 보인다. 저 멀리를 관찰하려면 망원경이 제격인데 이제 보니 일안 망원경도 배낭에 넣었다 빼놓고 왔구나. 까미노상에 사냥 보호 구역Reserva de Caza이란 팻말이 많이 세워 져 있다. 까미노가 해바라기밭으로 이어진다. 까만 알갱이들이 알알이 풍성하게 익은 채 수확을 기다리고 있다. 나의 마음도 덩달아 풍성해지는 듯하다. 앞서가는 중년 남성 순례자가 송아지만 한 애견 두 마리를 목줄에 매단 채 앞서 나간다. 어느 작은 까미노마을을 통과하다 마주친 어린 여학생들이 자기 몸보다 더 큰 배낭을 매고 열심히 지나가고 있다. 하도 귀여워서 사진 한 컷 찍겠다고 하자 냉큼 ‘노’하며 거절한다.

오후로 접어들며 순례자들의 발걸음들이 뜸해지고 있다. 이 시간쯤 되면 전 까미노상에서는 새벽 일찍 출발한 대부분의 순례자들이 하루 여정을 마감하고 자기 정비를 하는 시간을 갖게 되리라. 통상 하루 주행 시간을 8시간으로 잡는다면 오후 3-4시에 하루 일정을 마감한다. 느낌을 열심히 기록하기도 하고, 가이드 책자 등을 펼쳐 내일 걸을 길을 다시 읽어보거나, 갖고 다니는 악기로 연주를 하며 싱어 송하기도 한다. 부지런한 순례자는 마을 유적지를 탐방하기도 할 것이다. 수영장이 갖추어진 알베르게일 경우 수영복 차림으로 일광욕을 즐기기도 한다. 이때는 땀과 흙먼지로 범벅이 된 단벌의 옷가지들을 죄다 빨아 널 수 있는 기회로 활용한다. 오늘은 좀 더 걷자. 좁은 도랑길을 내려가는데 바이크 3대가 비켜달라고 소리지르며 사정없이 내려 온다. 옆으로 비켜서자 총알처럼 내리 꽂는다. 어이 조심들 하게 그러다 다치네. 간혹 이처럼 느닷없이 길가는 사람들을 놀래키는 상황을 접하게 된다. 개 두 마리를 데리고 도랑길을 오르려고 자전거에서 내려섰던 현지 주민도 얼른 옆으로 비켜선다. 밀밭 까미노가에 배낭을 부리고 판초 우의를 전부 펴서 땅바닥에 깔고 큰대자로 하늘을 보고 드러 누웠다.

배에 구멍이라도 난 것인가. 자주 먹어도 허기가 진다. 과일을 몇 개 사올 걸 그랬다. 행동식을 다 먹어 치워 물병만 달랑 남았다. 나홀로 젊은 여인이 단촐한 배낭 차림으로 지나간다. 여인의 배낭에 탐스런 복숭아 한 개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이 시간까지 걸었으면 지쳤을 법한데 나비가 날아가듯 사뿐사뿐 가볍게 걸어가고 있다. 선녀천사의 걸음 걸이가 저렇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나홀로 여성 바이크 순례자도 부엔 까미노를 외치며 뒤를 이어 지나가고 있다. 아 요즈 운하Cana de Alloz에서 앞뒤 1km 여 구간에 까미노 싸인이 끊어져 있다. 까미노싸인을 놓치고 주변에 물어볼 사람도 없는 상황일 때는 잠시 길 잃은 망아지처럼 불안한 마음이 들게 된다. 그 간단한 표지 하나가 이리도 중요함을 새삼 느끼는 순간이다. 뿌엔떼 라 레이나 마을에 진입을 한다. 아르가강 위로 얹혀놓은 아치형 돌다리를 건넜다. 오늘 일정을 이 곳 알베르게에서 일찍 마감한 순례자들이 자기 정비를 하는 모습들이 눈에 보인다. 일단 허기 먼저 달래자. 바엔레스토랑에 들려 스파게티를 한 그릇 한 후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까미노상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이 드넓은 평원 길을 나홀로 호젓이 걸어간다. 잠시나마 이 기름진 옥토 평원의 주인이라도 된듯한 기분 이다. 시라우끼까지 2km 남았다는 이정표를 지난다. 까미노는 포도밭을 끼고 다시 길게 이어지고 있다. 검붉은 포도 송이가 주렁주렁 열려 있다. 포도 농사가 올해도 대풍년인 것 같다. 오늘 일정은 로르까마을에서 마감을 하였다.

참회합니다. 자연의 위대함을 새삼 깨우쳐 주셨습니다. 인간의 탐욕이 자연을 병들게 하고 있습니다. 아홉 개를 가진 자가 한 개를 가진 자의 것을 빼앗아 열 개를 채워야 직성이 풀린다는 우리 인간들의 끝없는 탐욕에 대해 깊이 참회 합니다. 오늘 걸은 거리 33.3km 걸은 시간 14시간 1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