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안개 속의 풍경>

이름조차 흐릿하여 확인해본 그리스의 이 영화감독 이름은 테오도로스 앙겔로풀로스. 안개속의 한 그루 나무를 너무나 긴 호흡으로 화면에 고정시켜,  보는 이로 하여금 질식할 것 같은 긴장과 아쉬움을 강요하던 그 영화제목.

 

안개속의 진고개에서 노인봉 오르는 초입에, 나도 모르게 멍하니 서서 재미도 없던 그 영화를 떠 올려내고는 배낭을 끌러 카메라를 꺼내 철커덕! 아무도 없는 산야를 울리는 셔터 소리.......

 

    


 

아버지를 찾아가는 어린 남매의 암울한 여정을 통해 공허하고 스산한 현대 그리스의 한 모습을 상징한 이 영화는, 불확실성 속에 있는 오늘의 산행과 이미지가 꼭 맞아 떨어지는 듯하다.

 

 

 

                        진고개-노인봉-소금강 계곡 산행기

                            2004년 8월 2일 (월요일)

                                     진고개에서 혼자 산행,

                        소금강 계곡에서 아내와 작은아들 만나는 코스

 

 

    
  

 

 

<망설임>

전날  태풍 남테우른의 북상을 앞질러 도착하였다.  여장을 푼 후, 내일 산행할 들머리나 확인하고자 진고개로 향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 붓기 시작한다. 걱정이다. 그래도 태풍은 지나가는 속도가 반나절이니까 기대를 꺼 버리지 않고 진고개 휴게소 강릉 방향 길가 끝쪽 산행 들머리를 확인한다. 춥다. 비... 안개.. 구름...... 조망은 고사하고 등로확인도 쉽지 않겠다.

 

금일 새벽에 태풍소멸의 반가운 소식을 접하고 들뜬 기분으로 진고개로 향했다. 600 미터 쯤 고도를 높이니 짙은 운무가 앞을 가린다. 고개 정상은 가시거리 20미터도 되지 않는다. 

 

몇 명 사람들이 산행을 할 듯한 준비도 하고해서 그냥 진행하기로 했다. 등로를 꼼꼼히 확인하며 안전한 등행을 하기로 작심을 하니 9시 5분. 마침 국립공원 매표원이 출근을 한다. 노인봉-소금강 초행길의 홀로산행은 운무로 인한 망설임 끝에 이렇게 결행되었다.


 

<매표소에서>

우려가 한가지 더 냉혹하게 더해진다.


 -3일전에 실종 사고 난거 아시죠?

-......??!!

-진고개-노인봉-소금강 코스에서 단체에 처진 한사람이 안내려 왔다고 신고가 되서 이틀 째 구조작업 하였습니다. 오늘 같이 안개가 많았거든요. 안전산행하시고.... 혹 신음소리나 기척이 있으면 확인해 보시고 다른 것이 발견되나 살펴 주세요.

-.....(헉! 다른 거?, 기어드는 목소리로)  녜 ... (꿀꺽.. 마른 침)

 

긴장되어 있는 초짜에게 구조대의 임무까지 부여하다니...... 더욱 무거워진 발걸음이 초입의 진흙 길에 푹푹 빠져들었다. 운무 속의 밭길을 홀로 걸으니 천지에 운무와 나 밖에 없는 듯했다. 갑자기 실종자의 고통스런 모습이 연상되어 뒷머리에 긴장이 전기처럼 흐른다. 홱! 돌아보았다. 정적. 아무도 없다. 안개. 적막한 고요가 또 다른 긴장감을 주는 음파를 만들어 낸다. 무슨 소리지 하면서 다시 몸을 돌려 놀란 눈으로 앞을 본다. 고요... 적막... 안개.....

 

 

 

<쾌적하고 안전한 등로>

사진을 찍고 나니 진고개에서 보았던 두 산객이 다가 온다. 채소밭이 끝나는 지점까지 같이 가다가 먼저 가시라 하고 한 템포 쉬었다. 여기부터 약간 오르막인데다 숲으로 드는 길인가 하였다. 푯말에는 <진고개 0.9 km, 노인봉 3 km>이다.


 <진고개 1.2 km, 노인봉 2.7 km> 까지 땀을 흘리며 올랐더니 매표소에서 꼬박 25분 걸린 지점이다. 등산 초반에 내가 쉬어야할 때다. 배낭을 벗고 음료도 마시며 고요히 앉아 아침 산을 호흡해 보았다.

 

긴장감은 없어졌다. 실종자를 조용히 떠올려 보았다. 만약, 그 분이 불행하게 되어 애닲은 의식이 지금 내 곁에 있다하여도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살이에 생각하기 따라서 얼마나 많은 영령들이 같이 지내는 지 새삼 각성이 되었다.

 

한껏 맑아진 눈빛으로 산행을 이어가니 300m 를 지난 표지가 이정표로 서있다.<진고개 1.5, 동대산 3.2, 노인봉 2.4> 여기부터 안개낀 수림 아래로 온갖 야생화 천지다. 문득 참회하고 마음을 가다듬으니 천상의 화원이 펼쳐진다.

  

    
 

     

 

    

 

 

<계속 이어지는 호젓하고 완만한 등로>

노인봉 대피소 1.1 킬로 남은 지점에서 길은 뚜렷하게 Y 자로 갈리는데, 수많은 리본은 오른쪽에만 달려있다. 미리 학습하기로 이 지점에서 왼쪽 능선길을 가기로 하였는데, 어째 한개의 리본도 달려 있지 않은 지 궁금하였다. 조금 더 가다가 또다른 능선 갈림길이 나오나보다......라는 생각도 들고 해서 작심한대로 리본이 없는 왼쪽 능선길을 택했다.

 

걸음이 점차 느려지다가 일분도 채 안 되어 그냥 섰다. 망설임. 안전산행의 맹세를 벌써 잊었나 보다. 능선에 조망도 없는데 그냥 리본을 따르자.... 다시 되돌아와 사면의 길을 거침없이 걸었다. 맑은 날이라면 오른쪽 나무들 사이로 황병산이 보였을 것을 짐작하면서.....

 

 

<노인봉 정상도착>

지도상으로 파악하기에 아래쪽 등로를 따르면 산장을 경유해서 오르는 것으로 여겼는데 실제로 가보니 산장 앞 50 m 지점에서 삼거리가 되어 북쪽으로 250m 진행하여 정상에 도달하였다.  정상에 오르니 앞서 갔던 두 산객이 반가이 맞아 주었다. 조망이 없는 것을 아쉬워하면서 서로 사진을 찍어주고 곧 이어 두 분은 소금강 쪽으로 하산하였다.

 

9시 5분에 매표소를 출발하여 10 시 55분에 도착하였으니 진고개에서 노인봉 정상까지 1시간 50분이 걸렸다. 산거북이의 처지에 비하면 꽤나 성실히 올라왔다고 자평할 수 있다.^^

 

    
 

 

 

<노인봉 정상에서>

뜻밖에 정상은 암봉이다. 돌덩이가 부드럽고 큼지막하여 후덕한 노인의 품새와 어울렸다. 조망이 안되는 운무 속이기는 하나, 정상 가까이서부터 언듯언듯 햇살이 투영되는 고로 잘하면 하늘이 열리는 영광도 맞이할 수 있겠다 싶어 기다리는 시간을 떼울 겸 이곳에서 점심을 천천히 먹기로 하였다.

 

정상에서 유일하게 만들어지는 작은 바위 그늘아래서 식사를 마치고 커피도 한잔 타먹고 소화까지 시킬 요량으로 뒤로 비스듬이 기대는데.....  이게 왠일!! 남쪽하늘의 구름이 빨라지면서 푸르디 푸른  하늘이 스르르 열리는 것이 아닌가. 사진을 열심히 찍었으나 얼마지 않아 다시금 운무가 하늘을 가린다.

 

한시가 되었으나 구름은 다시 걷히지 않는다. 나도 내려서기로 하고 짐을 꾸렸다. 나중에 보니 한시간 이상 산정에 있은 덕분에 구름을 통과한 자외선으로 인해 얼굴이 빨갛게 타버렸다.

 

삼거리로 내려서다보니 중간에서 구름이 빠르게 걷히더니, 카메라를 꺼낼 틈도 없이 다시 구름 속으로 가두어진다. 넓은 헬기장이 보였고 황병산의 통신시설물이 우뚝한 모습이 보였다. 핼기장도 넓고 옆의 황병산도 이곳보다 높으니 군사시설이 맞는 갑따.. 아쉬움을 달래고 산장으로 들어서니 산장의 분위기가 좋다.

  

    

 

  

 

    
 

   

 

   

 

    

 

 

 

<산장도착>

산장 윗마당에서 두런두런 열심히 두 청년에게 설파하는 눈에 익은 저이는..... 오대산 산장지기 성량수님. 끊임없이 이어지는 이야기 속에 70년대의 배반이 상처된 흔적을 드러낸다. 그러니 50이 갓넘은 저이의 나이가 가늠된다. 본의 아니게 엿듣게 되는 것이 불편해 이야기 중간에 양해를 구하고 갈 방향만 여쭈어 확인하고 산장을 벗어났다. 그것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내 나름대로의 인사다.   


 

<노인봉-삼거리>

여태 유순하기 그지없던 길이 갑자기 바윗돌과 오르내림이 심한 길로 바뀌었다. 게다가 자꾸만 왼쪽으로 틀어지는 방향에 오르막이 계속되어 방향감이 상실된다. 노인봉을 왼쪽에 두고 산장에서 남에서 북으로 약 150도 돌아가는 방향인데 거의 360도 도는 느낌이다. 나는 이런 방향감에 혼란이 잘 일으킨다. 노인봉이 내 뒤로 오는가 했더니 평탄한 능선길이 이어진다. 그렇지! 회전이 멈추고 전진 방향으로 가는구나 나침반을 확인해보니 북쪽 12시 방향과 한시 사이로 정확히 진행되고 있다. 뻔한 길도 이렇게 공간감을 가져야 맘이 편하니.....

 

잠시 후 백마봉 낙영폭포 삼거리로 짐작되는 곳에 다다른다. 오른쪽으로 90도 꺽여 내려서는 길이 낙영폭포 가는 길이고 직진하는 길은 목책으로 적당히 막아두었다. 저 길이 백마봉 가는 길이렸다.

 

 

<삼거리-낙영폭포>

하염없이 내려서는 하산로. 소금강에서부터 노인봉으로 오른다면 이곳이 최난코스일 것이다. 열심히 땀흘리며 올라오는 청년 둘을 만나고 격려하였다(나이 많은 사람으로서). 별 준비와 사전정보 없이 오르는 저들의 젊음과 순수한 도전이 부럽긴 하다. 급하강이 거의 끝난 부분에서 물줄기가 제법 계곡수를 이룬다. 혼자서 윗옷만 벗고 등목까지 하면서 땀을 식히니 심산유곡에 오고가는 이 없어 윤리적 손상도 덜되고 이렇게 좋을 수가.

 

    

 

                            

 

    

 

 

                             
 

 

                             

 

 

                             

 

 

<낙영폭포-금강사>

어제, 마침 태풍이 앞세운 비가 충분히 내렸던 터라 계곡과 폭포의 위용을 한 층 더 한 것 같았다. 광폭포와 이어지는 삼폭포에서 현란한 상류계곡의 흐름에 넋을 잃고, 백운대와 만물상의 절경에서 금강의 아우가 이런 모습이구나 경탄을 하였다.

 

 

   

 

    

 

    

  

계곡변을 따라 이어지는 산행길에는 폭포와 물소리 가득하고 잠시 등로를 벗어나  숲길로 들어서면 한낮의 시간을 예리하게 찔러대는 매미의 절규가 가득하다. 그러고 보니 고파장의 매미 소리를 가장 잘 녹여주는 소리가 물소리라는 것을 깨닫는다. 매우 가치있는 자각이다.

 

      

  

  

 

  

 

      

  

소금강이 우리나라 명승 제1호라는 것이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룡폭포 아래에 서니 폭포의 미세포말이 온몸을 감싼다. 위용이 있다. 구룡폭포 까지 유산객이 많이 올라온다. 군데군데 계곡에는 일상의 스트레스를 맘껏 토해내는 중년 아줌씨들의 즐거운 모습이 벌건 취기로 요란하다. 식당암 거쳐 금강사에 이르니 시간이 정확히 4시 31분 약속시간에서 1분 늦었다.

  

     
 

 

                             

 

노인봉에서 금강사까지 3시간 25분 걸렸다.

  

 

 

 

아내와 아들을 찾기는 쉬웠다. 계곡에서 쉬다가 같이 내려서니 금강사에서 상가까지 40분 쯤 걸렸다. 이 구간은 수많은 관광객과 피서 인파로 별 감흥 없이 내려섰다. 하지만 산책로서는 아주 좋은 코스인 것 같았다. 벼르던 노인봉소금강 코스는 이렇게 힘들지 않고 무리 없이 조용히 마쳐서 한층 기뻤다.

  

  

 


 <후기>

다음날 오대산-비로봉-상왕봉 코스를 시도할 예정이었지만 저녁에 잠들면서 포기하기로 했다. 괜히 강체질인 것처럼 한여름에 연짱으로 땀 흘리다가 되려 몸상하지 말고 휴식으로 휴가를 보내자고 스스로 다독였다.

 

작년의 여름휴가가 일박이일의 지리산 단독종주였다. 그 산행을 마치고 처음으로 한국의 산하에 산행기를 올렸다. 한 오년동안 초보로서 여러 곳, 특히 한국의 산하에서 공부하고 도움 받은 데 대한 숙제보고 같은 형식이었다. 일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체력은 초보지만 꾸준한 상승세를 이어오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산행을 늦은 나이에 시작한 많은 산초보들은 나의 경우가 참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 스스로 흥겨워 산에 대해 아는 체도 하고 분위기에 휩쓸려 이른바 고수들과 면을 트고 대화하고 한 것도 따지고 보면 부끄러운 일이다.  산행기 안팎에 있는 무수한 산객들을 다시금 존경하며 늘 배워갈 것을 다짐해본다.

 

노인봉 실종자도 무사귀환하기를 간절히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