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경표에 주화산이라는 지명은 존재할까』 라는 글은 紛紛한 의견과 함께 표지석이 세워지는 등 주화산이라는 지명을 사용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고 사료되는 바, 주화산 지명에 대해서 정리한 글이다.
역사와 관련된 글이라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고 틀린 부분도 있다 지적한 부분에 대해서는 겸허히 받아들이겠습니다.

 

 

 

[山經表에 주화산이라는 地名은 存在할까]

 

 

1. 현재 주화산이라는 곳은?
▲  백두대간 1075.6봉(전북 장수군 장계면, 번암면, 경남 함양군 서상면 境界地域 또 흔히 영취산이라고 말하는 곳)에서 분기한 錦南湖南正脈 줄기는
무령고개-장안산-사두봉-밀목치-수분치-신무산-팔공산-서구리재-오계치-신광재-성수산(鎭安郡 所在)-옥산동고개-마이산-부귀산-가정고개로 이어져 오다가 3正脈 분기점에 다다르게 되며 산악인들은 이 곳을 흔히 주화산이라고(사진4 참고) 부른다.
주화산이라는 곳은 3正脈 分岐點으로서(사진5 참고) 東으로는 금강과 섬진강을 나누는 금남호남정맥, 南으로는 섬진강을 가르는 호남정맥, 北으로는 만경강과 금강을 나누는 금남정맥, 서쪽으로는 만경강을 發源하는 중요한 분기점이자 三波水가 되는 곳이기도 하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과 진안군 부귀면의 境界에 위치하고 있고 표고는 대략 565m이며 뚜렷한 봉우리는 아니며 평지성의 능선상에 불과하다.
또 주변으로는 舊 노선인 전주∼진안간 26번 국도가 있고 모래재터널에서 거리는 약 0.6㎞이며 주변 지형은 진안군 부귀면 쪽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는 반면 완주군 소양면 신월리 쪽은 급경사를 이루고 있다.
또한 주화산이라는 곳 옆에는 헬기장이 있고 植裁木은 참나무류가 주요 樹種을 이루고 있으며 주변의 山群들을 조망하는데 위치적으로도 좋지 않은 지역이다.
모래재 휴게소가 있는 곳에서는 20분 정도면 오를 수가 있는 곳이고 주변으로는(진안군 부귀면 쪽)개인묘지, 가족묘지 등 개간으로 인하여  近來에 山林이 많이 毁損되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 주화산이라는 곳에 있는 안내문과 표지기들

 

 

  

▲ 주화산이라는 곳에 세워져 있는 표지석

 

 

  

 

 

 

  

 

 

▲ 주화산이라는 곳의 모습

 

 


2. 주화산이란 地名이 記錄된 地圖와 文獻 또 언제부터 거론되었나

가. 주화산이란 地名이 기록된 地圖와 文獻은?
地圖보다는 山經表에서 쉽게 찾아볼 수가 있는데....

 

 

산경표에 대한 敷衍 說明을 덧붙이자면....
산경표는 海東道里譜, 箕封方域誌, 山里攷(이상 서울대학교 규장각), 輿地便覽(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海東山經(국립중앙도서관)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된 책의 일부로서 程里表, 道里表가 전해온다. 모두가 한문으로 된 筆寫本이며, 필자와 연대를 밝히지 않았고 序文이나 跋文도 싣지 않고 있다.

 

 

이 가운데 두 가지 筆寫本이 주목을 받고 있는데
첫째는 규장각 소장의 海東道里譜[② 참고] 중의 山經表,
둘째는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의 輿地便覽[③ 참고]중의 산경표가 있는데

 

 

이우형은 규장각 소장의 海東道里譜 중 산경표에 대해 무게를 더 두고 있는데 그의 주장은 이렇다.
山經表의 한북정맥 追慕峴에 영종 45년(1769)이라는 연대를 附記하고 있는 점, 여암(旅庵) 신경준이 1781년에 타계한 점, 장서각본 여지편람의 곤책(坤冊) 거경정리표(距京程里表)에는 정조 20년(1796)에 완공된 화성(華城, 수원)이 실려 있는 점 등을 摘示하고 山經表의 출현 시기는 1800년 전후로, 찬표자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고 하였다.(백두대간이란 무엇인가, 월간 『산』, 1993. 6월호에서)

 

 

반면에 박용수는 여지편람의 산경표에 대해서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
1769년에 여암 신경준(1712-1781)이[④ 참고] 편찬한 것으로 보고 있다.
영조 40년(1770년)에 완성된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는[⑤ 참고] 우리나라의 문물제도를 분류, 정리한 백과사전격인 책이다. 그 중 지리 부분인 여지고를 신경준이 담당했다.
여지편람은 우리나라의 산줄기와 지리를 알기 쉽게 기술한 지리서다.
여지편람은 건책(乾冊)과 곤책(坤冊)으로 구성되어있다. 건책은 내제목(內題目)이 산경표, 곤책은 거경정리표(距京程里表)다. 여지편람은 1769년경 신경준이 영조의

명을 받아 감수, 편찬한 것이다.
여지편람의 건책이 바로 現在 전하는 산경표의 원전이다.
그러므로 산경표의 간행시기는 1769년, 저자는 신경준이다. 라는 뜻을 밝히고 있다.(태백산맥은 없다에서)

 

 

山經表에 대해서 또 다른 주장은........
양보경은(성신여자대학교 지리학과 교수) 일본 정가당 문고(靜嘉堂文庫)에 전하고 있는 같은 제목의 여지편람은 전혀 다른 내용의 6책으로 된 조선 지도책임을 밝히면서 내용은 다르나 이름이 같은 책이 있을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영조가 동국문헌비고의 편찬 과정을 설명하면서 여지편람의 범례가 중국의 문헌통고와 비슷하다고 언급하였으나 장서각본 여지편람은 산경표와 도리표(道里表·『정리표』)로서 문헌통고와는 체제가 다른 점 등을 고려해 볼 때 장서각본 여지편람을 영조가 신경준에게 감수를 맡겼던 책으로 추정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으므로 좀더 신중히 검토할 것을 주문하였고....([조선시대의 자연인식 체계], 『한국사 시민강좌』 제14집, 일조각, 1994)
산경표에는 19세기초에 변화된 지명이 기재되어 있고 문헌비고의 오류를 지적하고 있는 점 등을 고려해 볼 때 저자를 신경준으로 단정하기 어려우나 산경표가 신경준이 편찬한 산수고와 문헌비고의 여지고를 바탕으로 하여 작성된 것임은 분명하다고 하였다.([여암 신경준의 지리사상], 『월간국토』 1999년 5월호)
이렇게 서로 다른 주장을 하고 있지만 우리는 이 둘의 산경표를 쉽게 구경할 수가 없는 처지다.

 

 

그러면 우리가 쉽게 볼 수 있는 朝鮮光文會本의(사진6 참고) 山經表는 어떤 것인가
서지학자들은 影印本이 아닌 독립된 하나의 本으로 인정하고 있다.
1913년대 조선광문회의 산경표는 전 시대에 붓글씨로 써서 발간된 즉 최성우가(사진7 참고) 소장하고 있던 筆寫本을 참고로 하여 그것을 인쇄용 활자로 바꿔 찍은 것이기 때문에 하나의 本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 조선광문회본의 산경표 표지

 


어째든 산경표는 朝鮮 후기에 발간되었던 地理書다. 아쉽게도 아직까지 저자가 누구인지 편찬시기가 언제인지 확실치는 않다.
하지만 이 책에는 現存하는 우리나라 산줄기를 사실에 根據하여 15개 산줄기(백두대간, 1정간, 13정맥)로 나누고 1,650여개의 지명과 1,500여개의 산과 고개를 일목요연하게 표기하고, 10대 주요 강줄기를 流域別로 나누어 수록해 놓은 우리민족의 전통지리서 임에는 틀림이 없고 또 당시 國家의 공인된 地理槪念이었으며, 朝鮮時代를 거치는 동안 지리의 근간으로 활약했고 논리 정연한 大 지리 백과사전이었다.

 

 

그런데 아쉽게도 전통지리서인 山經表가 후대들에게 묻혀 지며, 특히 日帝의 조선 강점이라는 국가적 환란에는 근 1백년 가까이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山經表가 우리 시야에 사라지는 일제시대에는 일본이 조선침략정책의 일환으로 두 차례에 걸쳐서 광물탐사사업을 실시하였다.
그중 학술책임자 자격으로 고토 분지로가 우리나라의 地質을 조사했으며,[⑥ 참고] 그는 조사를 토대로 조선의 산악론, 지질구조도를 동경제국대학 論文集에 발표하게 되며 그 때부터 조선 땅에 山脈이라는 용어가 등장했다.
이후 日本은 조선 전래의 산줄기체계를 몰아내고 이어지지 않고 단절된 地質槪念인 山脈을 강제로 도입시켜 그후 우리는 1백년 가까이 지질개념을 배우는 비운을 맞았고 또 山經表는 역사속에서 묻혀 지내야만 했다.

 

 

그러다가 1980년대 초 서울 인사동 고서점에서 이우형이란 사람에 의해서 1800년대 초에 편찬된 것으로 보이는 저자미상의 우리 나라 옛 地理書인 山經表를 발견한다
그 후부터 이우형은 산경표에 골몰하기 시작하여 1985년에 大東輿地圖의 再版을 찍어내는데 成功을 한다.
1986년 이우형에 의해서 언론매체에 白頭大幹이라는 用語가 처음으로 등장하기 시작하였고 이를 모태로 1988년 한국대학산악연맹, 박용수, 조석필님 등의 연구와 노력으로 地形의 槪念인 大幹, 正脈 등 그동안 빛을 보지 못한 우리 지리체계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1) 그러면 주화산이란 地名은 어디에 나올까
먼저 古地圖를 살펴보았다.
1872년 지방도(군현도) 전라도편 용담현, 진안현, 전주부
광여도(1800년경 제작) 전라도편 용담현, 진안현, 전주목
동국여지도 전라도편
동국여지승람 전라도 1편
동국지도 전라도편
여지도 전라도편 용담현, 진안현, 전주부
조선지도 전라도 전체
대동여지도 영인축쇄판(사진8, 9 참고) 옥천, 익산, 진안, 전주(조선일보사 발행, 故 이우형 선생이 1985년도에 복간한 대동여지도 영인본을 85%로 축소하여 제작한 지도)
위와 같은 지도를 살펴보았지만 주화산이라는 지명은 찾을 수가 없었고
유일하게 비변사인방안지도 호남지도 용담현과 해동지도 용담현 지도에 주화산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먼저 호남지도 용담현에는 반일암, 구봉산, 숭암사(현 천황사) 사이에 珠華山이라고 적혀 있지만 현재 주화산이라는 곳의 위치인 전북 완주군 소양면과 진안군 부귀면의 경계지역에 아닌 곳에 표기되어 있어 신빙성이 떨어진다.
해동지도 용담현에도 주화산이 표기돼 있지만 표기된 위치는 비변사 호남지도와 같다.

 

 

2) 이번에는 옛 文獻을 찾아보았다
▲ 먼저 신증동국여지승람중에서
전라도 全州府 山川편을 찾아보았지만 주화산이라고 기록된 문헌은 없다.

 

 

다음에는 鎭安縣 山川편이다.
부귀산(富貴山) 현의 북쪽 5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고달산(高達山) 현의 서남쪽 30리에 있다.
마이산(馬耳山) 현의 남쪽 7리에 돌산이 하나 있는데 봉우리 두 개가 높이 솟아

있기 때문에 용출봉(湧出峯)이라 이름하였다. 높이 솟은 봉우리 중에서 동쪽을 아버지, 서쪽을 어머니라 하는데, 서로 마주 대하고 있는 것이 마치 깎아서 만든 것 같다. 그 높이는 천 길쯤 되고 꼭대기에는 수목이 울창하고 사면이 준절(峻絶)하여 사람들이 오를 수 없고 오직 모봉(母峯)의 북쪽 언덕으로만 오를 수가 있다. 신라 시대에는 서다산(西多山)이라고 불렀는데 소사(小祀)에 올렸다. 본조 태종(太宗)이 남행(南幸)하여 산 아래에 이르러서 관원을 보내어 제사를 드리고 그 모양이 말의 귀와 같다 하여 마이산(馬耳山)이라는 이름을 내려 주었다.
성수산(聖壽山) 현의 남쪽 50리에 있다.
중대산(中臺山) 마령현(馬靈縣)에 있다.
웅령(熊嶺) 현의 서쪽 37리, 전주(全州)의 경계에 있다.
동천(東川) 현의 동쪽 1리에 있다. 물의 발원지는 마이산 동봉(東峯)에서 나와 용담현(龍潭縣)의 마산담(馬山潭)으로 들어간다.
서천(西川) 현의 서쪽 13리에 있는데, 물의 발원지는 마이산 서봉(西峯)에서 나와 임실현(任實縣)의 오원천(烏原川)으로 들어간다.
진안현에도 주화산이란 지명은 찾을 수가 없다.

 

 

龍潭縣 산천편
주줄산(珠줄山) 현의 서쪽 30리에 있다.
구봉산(九峯山) 현의 서쪽 20리에 있다.
고산(鼓山) 현의 동쪽 30리에 있다.
용강산(龍岡山) 현의 북쪽 3리에 있는데, 진산(鎭山)이다.
마산담(馬山潭) 현의 동쪽 12리에 있다. 〈주기(州記)〉에, 현의 동남쪽 두 물이 서로 모이는 사이에 용담(龍潭)이 있어 현의 이름으로 취한 것이다. 하였으니, 바로 이것이다.
수성천(壽成川) 객관 남쪽에 있으니 주줄산에서 나와 달계천(達溪川)으로 들어간다.
달계천 현의 동쪽 12리에 있는데, 금산군(錦山郡) 덕유산(德裕山)에서 나와 무주현(茂朱縣) 소이진(召爾津)으로 들어간다
용담현에도 주화산이라는 지명은 더더욱 없다.(이상 민족문화추진회)

 

 

▲ 이번에는 大東地誌를 찾아보았다
전주 山水편을 보았지만 주화산이라고 記錄된 文獻은 없다.

 

 

鎭安縣 山水편이다.
富貴山北三里, 高達山南五十里 任實界西支有 盤龍寺 馬耳山南七里石山峻高而雙峯聳立名湧出峯東曰父西曰母相對如削成高可千이其頂樹木森鬱四面峻絶人不能
升惟母峯北崖可升東峯上有小池西峯上平闊有泉
  鳳頭窟在山之西石峯高可數百?
  華嚴窟在山之腰
  成道窟修行窟羅漢窟
  上元寺穴岩寺聖壽山南五十里任實長水界北有中臺寺南有金堂寺珠?山西北四十里高山龍潭界萊東山南三十里擊壤山東十里宣祖丁酉天將劉綎陣于此山美方山南十里白雲山南二十里儉德山南三十里獅子山西南四十里全州任實界萬德山嶺路熊峙西三十里全州界通全州大路栗峙東南二十九里長水界大路件隱峙西北三十里全州界通威鳳山城及高山賊川峙西十里距熊峙金堂峙南五十里任實界馬峙西南三十五里全州界銘峙北二十里(松林峙求神峙竹本峴歡坎峙斗南川鶴川衣岩川照林川伊浦堤堰六)龍潭界我 太祖雲峯大捷後幸于此路下有滄江布盤石幾至百步攀?無緣命石工?鑿通道鋤古峙長水路對戎峙任實路山影峙龍潭路鶴頂峙高山界
  南川南十里出馬耳山東流入長水松灘下流東川東五里出馬耳山東峯東流入龍潭馬山潭右二水錦江之源西川西十里出馬耳山西峯南流會熊峙中臺之水西南流至任實界爲烏原川卽蟾江之源盤龍川源出盤龍寺洞入于西川下流甑淵在馬靈古縣東有大竇上通山頂人轉石則直下於淵水氣常??若蒸炊然

 

 

龍潭縣 山水편이다.
山水珠줄山西三十里高山鎭安錦山之界雄盤高大北有半日岩西有深源寺九峯山西二十里
  崇岩寺長古山東三十里茂朱界龍岡山北三里玉女峯南十里四美臺東四十里島岩東北十五里嶺路松峴北二十五里錦山路栗峙東三十里通茂?杻峙西四十里高山界通高山古南峙南十五里通長水鎭安汗米嶺西路虎峙東路

  朱子川卽珠?川西二十里出珠?之陰北流經臥龍岩東南流經縣南爲壽成川入于龍湫有溪山之致土地之饒川北有梯天臺壽成川朱子川下流東流八達溪川南有逍遙臺達溪川東十里卽錦江上流程子川南十五里出珠?山東流入達溪上顔子川東二(堤堰一)十里出長古山西流經顔子洞八達溪上伊川南十里馬山潭東十二里兩水交會間稱龍湫城池古城東十三里山上周一千二百十一尺石棧古柵東北三里高麗辛?時倭入嶺浦侵掠州郡縣令皮元亮樹柵縣南石棧乘高累石六所候其入欲下石碎之賊?其有備莫敢近遂遁去(이상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또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서 제공하는 동국여지승람, 동국여지지 원문을 찾아보았지만 주화산이라고 기록된 문헌은 없다.

 

 

3) 주화산이라는 지명이 산경표에서 거론된 부분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의 여지편람 중 산경표와 조선광문회 산경표 이 두 책에는 주화산(珠華山)이라는 지명이 똑같이 기록되어 있다.
먼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의 여지편람 중 산경표를 찾아보았다.
44丈 금남호남정맥 9階段을 보면 珠華山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지시문에는 西北來라고 적혀 있다.

 

 

그 다음에 우리가 쉽게 볼 수 있는 朝鮮光文會에서[⑦ 참조] 1913년에 최성우 소장본을[⑧ 참조] 바탕으로 간행한 산경표를 보면
錦南湖南正脈편 87頁 9階段을 보면 珠華山이란 지명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고 지시문에는 똑 같이 西北來라고 적혀 있다.

  

▲ 조선광문회본의 산경표 금남호남정맥편(87頁, 좌측) 금남정맥편(88頁, 우측)

 

 

장서각 소장의 산경표와 조선광문회본의 산경표를 자세히 비교해 보면......
금남호남정맥편
장안산, 노치, 수분치, 성적산, 팔공산, 성수산, 중대산, 마이산, 주화산까지 이어져 온 줄기나 지시문은 同一하며 차이나는 부분은 주화산 밑으로 장서각 소장의 산경표는 錦南正脈 見本次下, 조선광문회본의 산경표는 錦山正脈 見次下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그 다음에 금남정맥편 마이산, 주줄산은 같다.

한편 面數를 표시할 때 장서각 소장의 산경표는 丈이라 하였고 조선광문회본의 산경표는 頁라고 표시하였다

 

 

나. 주화산이라는 지명을 처음 거론한 사람은?
처음 거론한 사람은 故 이우형 先生이라고 생각된다.
먼저 理解를 돕기 위해 신산경표의 저자 박성태님의 글을 認容하면
바라보는 산줄기와 직접 찾아가는 산줄기는 槪念이 다르다.
즉 바라보는 산줄기는 넓이를 가진 산(=면)의 연속이지만, 찾아가는 산줄기는 능선의 가장 높은 부분을 따라서 이어지는 마루금(=선)으로 보는 좁은 의미의 산줄기로서 고 이우형선생께서 산경표를 재탄생시킨 이후에 생겨난 개념이다.

산경표와 大東輿地圖는 바라보는 개념의 산줄기이기 때문에 分岐點은 의미가 없고, 따라서 그 곳에 기왕에 산 이름이 있는 경우 이외는 따로 산 이름을 기재하지 않았다. 

 

 

산경표를 찾아내고 대동여지도를 복간(1861년의 대동여지도는 1857년의 동여도를 그대로 목판에 새긴 것인데 판각의 어려움 때문에 동여도에 그려진 19,140여 지명 중 7,000여 개를 빼고 11,760여 개만을 새겼다.
누락된 지명을 동여도에서 모두 찾아 대동여지도 판목 126매를 새로 새겨서 124년 만에 다시 출판한 것을 말 한다-조석필 著 태백산맥은 없다에서)한 고 이우형 선생께서 산경표가 이름을 붙여 구분한 15개 산줄기를(사진10 참고) 현대지형도의 눈으로 다시 읽어 작도한 지도를 최초로 제작했다.
그 산경도에는 대간과 정맥을 쉽게 구분해서 보고 설명할 수 있도록 정맥이 갈리는 곳에 매봉산과 같이 현대지도에 있는 산 이름, 주화산. 칠현산과 같이 산경표에서 산줄기가 나뉘는 곳에 있는 산 이름, 영취산과 같이 대동여지도에는 있으나 현재 쓰고 있지 않는 산 이름 등을 골라서 표기했다.(이 글은 같은 의견이기에 신산경표의 저자 박성태님의 글로 대신 하였다)

▲ 故 이우형 선생이 제작한 산경도(산경표의 15개 산줄기를 현대지형도의 눈으로 읽도록 제작하였다)

 

 

이후 광주의 아이매드가정의학과 원장이신 조석필님이[⑨ 참고] 山經表에 기록된 산줄기의 실체를 확인하고 각종 資料 및 조사 기록을 통하여 호남정맥의 개념을

확립하고 정보를 제공하며, 또한 정맥 주변의 마을을 통해 산과 사람과의 關係를 정립하기 위해 금남호남정맥, 호남정맥을(92. 11∼93. 8)踏査를 하게 되는데 이때 결과물인 호남정맥보고서에 주화산이라는 地名을[⑩ 참고] 거론하게 되며 또 이 보고서를 겸해 산경표의 해설 산경표를 위하여(1993년, 산악문화)를 발간하였다.
그 뒤 조석필님은 1997년에 산경표를 위하여의 내용에 더더욱 충실하고 백두대간의 복원을 말하기 위해 태백산맥은 없다(사진11 참고) 라는 책을 발간하였다.

 

 

아래의 글들을 보면 조석필님도 주화산이란 분기점에 대해서 많은 고민과 정립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본인의 저서 산경표를 위하여 제2부인 호남정맥보고에서는
산경표 87페이지는, 금남정맥의 시작을 주화산(珠華山) 이라 적고 있다. 그러나 연이은 88페이지에서는 같은 산을 주줄산(珠줄山)이라 표기하고 있다. 그 좌측의 설명문까지 감안하면, 주줄산이 옳은 표기이고 주화산은 오식(誤識)으로 보인다. 대동여지도 또한 이 부분을 주줄산으로 쓰고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사실은 최근에 인지된 것이다. 지금까지 산경표와 관련한 여러 문헌이나 지도들이 모두 주화산이라 써 왔기 때문에 이 책에서도 그렇게 표기했다. 확정 되는대로 고쳐야 할 것이나, 일단은 이 책에 표기된 주화산을 모두 주줄산으로 바꿔 읽어주셨으면 고맙겠다. 이 주줄산은 현 지형도의 운장산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내용은 산경표의 오류를 인정하는 부분이고 바로 잡을 것을 제시하고 있다.
또 분기점의 정확한 위치는 모래재 북쪽 0.6km 지점의 야트막한 봉우리다. 이것을 주화산으로 부르자는 의견이 있는데 고유명사가 필요한 지점인데도 마땅한 이름이 없기에 본 보고서에서도 일단 주화산으로 썼다. 이 글을 보면 분기점의 명칭을 놓고 고민의 흔적이 나타나 있다고 볼 수 있다.

 

 

조석필씨는 본인의 또 다른 著書인 태백산맥은 없다에서
산경표를 위한 기본 제안(향후 산경표의 표준으로 확립해야할 과제들)을 피력하고 있는데.....
이 절에서는 산경표에서 지적되고 있는 문제점들과 그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논란거리는 성격상 두 가지 종류로 나뉜다. 하나는 당시의 측량기술 수준의 한계에 따른 잘못으로 마땅히 고쳐져야 할 것들이고 다른 하나는 견해 차이에 기인한 혼란으로 적절한 논의 후에 통일되어야 할 것들이다.
논란거리를 해결하기 위해 산경표에 집착할 이유는 없다고 본다. 산경표는 18세기의 책이다.
당시의 생각과 명칭, 당시의 측량수준, 당시의 인쇄 능력을 반영하고 있다. 적지 않은 오류가 있고 그에 따른 혼선 또한 만만치 않다.
산경표에서는 지리인식의 원리만 배워오면 충분할 것이다. 나머지는 현대지형도의 눈으로 다시 읽어야한다. 왜냐하면 지리인식으로서의 산경표는 미래의 표준으로 쓰여나가야 할 도구이며 미래의 다양한 요구에 부응하는 체계와 명칭을 갖춰야하는 잣대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완전히 새로운 체계도를 생각할 수도 있지만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는 일이므로 가능성만 열어두기로 한다.

 

 

제시한 대안들은 실용성을 중심으로 마련한 것이다. 시급한 것은 어느 쪽이든 하루 빨리 통일안이 확립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혼란은 방치할수록 바로잡기 힘들어진다. 책임 있는 기관에서 나서야할 때다.
이하 설명하는 주장에 쓰이는 산 이름들은 부록2 이우형의 산경도를 기준으로 하겠다. 예를 들어 금남호남정맥의 분기점이 산경표에서는 장안치지만 이우형 산경도에서는 영취산이다. 이 경우 영취산이라 쓰겠다. 산경표의 명칭은 지나치게 광범위하며, 또한 옛 이름이 많아 의미 전달에 혼선을 빚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해서 이우형의 산경도가 표준이며, 정확하다는 뜻은 아니다. 예를 들어 이우형 산경도는 금남정맥과 호남정맥의 분기점을 주화산으로 표기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명칭만 해도 주줄산이 더 타당하며, 정확한 위치도 재고되어야 한다. 그런 것들을

일일이 지적하고 고치면서 설명해나가는 것은 힘의 낭비다. 그러므로 우선 이장에서 필자와 독자의 공통언어로써 이우형 산경도를 채택한다는 취지다.
단 산경표 자체를 인용하는 경우에는 산경표대로의 명칭을 썼고 이우형 산경도에 표기되어 있지 않은 산이름을 말할 때는 지리원의 현대지형도를 기준으로 했다
위와 같이 분기점의 이름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으며 일부의 사람들이 산경표나 이우형 선생의 뜻을 잘 못 해석하여 없는 주화산이란 지명을 더 확산시킨 것이다.

 

 


3. 山經表에서 말하는 珠줄山은 現 운장산이며 주화산은 없다
朝鮮光文會에서 1913년에 최성우 所藏本을 바탕으로 간행한 산경표(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산경표이기 때문에 기준으로 하겠다)87頁 錦南湖南正脈편을(사진12 참고) 보면.....
長安山에서 이어져 온 산줄기는 中臺山, 馬耳山을 거쳐서 珠華山에 이르게 되고 지시문에는 西北來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 밑에는 錦山正脈見次頁(금산정맥을 보려면 다음 차례를 보라)이라고 적혀 있다.

 

 

그 다음에 山經表 88頁 錦南正脈을(사진13 참고) 보면....
馬耳山을 거쳐서 珠줄山으로 이어지고 지시문에는 一名  추줄 또는 一名 珠耳라고 기록되어 있고 줄기는 王師峰, 屛山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볼 수가 있다.

 

 

珠華山, 珠줄山, 一名  추줄 또는 一名 珠耳라는 비슷한 지명이 4곳이 있는데 과연 주화산이라는 곳은 어디일까.
먼저 주화산이라는 地名을 論하기 전에 주줄산은 현재 운장산을 가리키는 것이 확실하다.
고지도인 1872년 지방도(군현도), 광여도, 동국여지도, 동국여지승람, 동국지도, 여지도, 조선지도, 大東輿地圖 등 다수의 지도가 주줄산을 표기한 것이 위치적으로나 또 그림으로 보아 큰산임을 볼 때 운장산으로 여겨지며 또한 주변의 지명을

보면 주자천, 정자천, 옥녀봉, 고남치, 용담 등을 볼 때 아주 근접한 거리에 있어 현재 운장산이라고 해도 무리는 없다.
물론 지도제작 과정이 발달하지 않았던 時代에 方位角이 조금은 틀리게 그려 질 수도 있다.
산경표에 기록된 주줄산의 지시문중 龍潭, 高山, 錦山(충남)방향에 위치하는 것이 그러하며 주줄산에서 뻗어나간 용강산을(현 鎭安郡 龍潭面에 位置하고 있음) 볼 때 現在 운장산이 확실하다는 것에 무게가 실린다.
그 다음에 산경표 주줄산의 지시문중 일명 추줄 또는 일명 珠耳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 대동지지, 동국여지지, 비변사호남지도, 해동지도에는 주줄산이라 했고 또 여지도서, 광여도, 1872년 군현지도, 진안지에는 추줄산, 진안지에는 朱伊山이라는 이름을 가진 것을 볼 때 현 운장산이라고 말해도 무리는 없을 듯 하다.(이중 주이산(朱伊山)은 주자천(朱子川), 이천(伊川, 정자천)의 발원지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럼 珠華山이라는 곳은 어느 산을 말할까
아직까지 산경표외에(장서각 소장의 산경표, 조선광문회의 산경표) 주화산이라고 나와 있는 文獻이나 地圖는 없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대동지지, 택리지, 동국여지지 등 고지도에도 없으며 해당 자치단체인 진안문화원, 완주군문화원 등 어떠한 자료에도 나와 있지 않다.
또 현 지형도에도 없으며 현지 주민들에게 물어 보아도 주화산은 없다.

 

 

왜 珠華山이라는 地名이 山經表에 적혀 있을까
산을 오르는 일도 힘겨운 일인데 선조들이 만들어 놓은 전통 地理 때문에 이런 고민을 하게된다.
누가 풀어도 해결해야될 課題이다.
珠華山
한자인 주화산을 直譯해본다면

구슬주 字에, 빛날화 字인데 그럼 쉽게 이야기해서 구슬처럼 빛난다는 산이란 말인가
그것은 절대 아닌 것 같다.
옛날에는 어떤지 몰라도 현 地勢는 진안군 부귀면 쪽으로는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는 반면 완주군 소양면 신월리 쪽으로는 급경사를 이루고 있는 외에는 암릉이나 암벽으로 이뤄진 산도 아니고 또 산세가 수려한 것은 절대 아니다
그저 밋밋한 능선상에 불과하고 잡목으로 덮여진 산이다.
한자 이름에 맞춘다고 해도 주화산은 절대 아니며 또 확고한 고증자료가 없는 이상 그곳이 주화산일 수 없다. 따라서 이것은 붓의 실수이다.

 

 

그렇다면 산경표의 편찬, 편집과정에서 일어난 실수일까
조선광문회본의 산경표를 보면 산, 고개 등 지명에 대한 부분적인 誤謬(오자 등)를 발견할 수가 있다.
주화산이라는 지명만을 보아도 장서각 소장의 여지편람 중 산경표도 분명 오류(오자)라고 보여진다.
현대의 편집과정, 인쇄기술이 발달한 지금에도 오류(오타 등)가 종종 있는데 그 시대에는(산경표가 발간된 時期)더 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된다.
선비들이 공인기관에서(옛날 국가의 사무를 맡아보는 관청) 책을 쓰고 편집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부분적인 오류들을 점검하지 않았을까
다시 생각하건대
임금의 명을 받아 책을 편찬하는 선비들이 어떠한 점검도(오자검사 등) 하지 않고 책을 지었을까
점검은 했겠지만 분명 실수는 있었을 것이다.
제작하는 사람은 한 사람일 수 있겠지만 편집이나 영인하는 과정에서는 여러 사람이 동참했을 것이다
그러다 보면 자연(誤字 등)한 사람이 연속적으로 작업을 하는 것보다 정확성이 떨어졌을 것이고 오류가 많이 발생하였을 것이다.
장서각 소장의 輿地便覽중 산경표를 보면 의구심이 생긴다.
백두대간이 시작되는 1장부터 청남정맥 23장까지는 글씨가 대체적으로 깔끔하고 차분하게 쓰인 반면 청남정맥,해서정맥 24장부터는 다른 사람의 글씨로 보여지며 또 앞장보다는 글씨가 깔끔하지 못하며 흘려 쓴 탓에 읽기 어려운 글씨들을 종종 발견할 수가 있다.
좀 어찌 보면 단순한 생각을 갖게된다.
하지만 글을 쓰는 과정이나 편집과정에서 생긴 일이며 주화산이라는 글씨는 분명코 오류로 봐야 한다.
자칫하면 엷을薄이나 문서簿 같은 글씨를 혼돈 할 수 있듯이....
위와 같은 정황을 비춰볼 때 산경표에 말하는 주화산이라는 곳은 선인들의 실수로 빚어진 일이며 우리는 이 문제를 지혜롭게 풀어야한다.

 

※ 說明을 덧붙인다면....
장서각 소장의 여지편람 중 산경표와 조선광문회본의 산경표에서 오류가 발생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최성우가 소장하고 있던 筆寫本를 참고로 하여 그것을 인쇄용 활자로 바꿔 찍은 것이고 또 서지학자들은 조선광문회의 산경표를 독립된 하나의 본으로 인정하지만 분명 최성우가 소장하고 있던 산경표도 그 이전의 어떤 산경표를 원본으로 삼았을 것이다.
장서각 소장의 산경표도 마찬가지다.
저자와 편찬연대는 알수 없으나 산경표는 영조 때의 실학자 신경준(申景濬)의 산경표와 동일하고 정리표의 내용은 신경준이 편집하고 그뒤 증보된(증보문헌비고) 여지고(輿地考) 안에 있는 도리(道里)의 내용을 표로 만든 것으로 보아 신경준이 만든 원작을 다른 사람이 增補, 筆寫한 것으로 추정되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일련의 편집과정에서 오류들이 충분히 발생 할 수 있다.
위 두 산경표중 금남호남정맥편 주화산 밑에 조선광문회본의 산경표는 錦山正脈이라고 적혀 있지만 시기적으로 앞서 편찬한 장서각 소장의 산경표에는 錦南正脈으로 봐서는 자료의 정확성에 대해서 여지편람의 산경표가 무게를 두고 있으며 후자인 조선광문회의 산경표는 오류가 더 많이 있을 수 있다고 본다.

 

 

 

4. 주화산의 重要性과 論爭
주화산이라는 곳이 왜 이처럼 중요한가
금남호남정맥이나 호남정맥 또 금남정맥을 한 번쯤 걸어 보았던 사람이라면 說明을 하지 않아도 그곳이 왜 중요한지 잘 알 것이다.
그곳은 道路상으로는 전라북도 서부권과 동부권을 연결해주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며 더 멀게는 육십령을 통해 경북, 경남권을, 충남 금산권과 충북 영동권을 연결해 주는 道路이다.
한 지역의 文化와 생활권을 연결해 주는 가교역할을 하는 곳이며 아울러 우리들에게 아주 중요한 삼파수가 되는 지역이기도하다.
다시 말해 금강과 섬진강, 만경강을 나누는 分水界가 되는 곳이다.
또 山自分水嶺에 의한 3正脈의 分岐點이 되는 곳이다.
산에서 분기점은 아주 중요한 役割을 한 것으로 보여진다.
물줄기를 따라 생활권이 형성되고 또 문화에 대한 동질성을 낳게 되고 인류가 발전하는데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생각된다
산줄기도 마찬가지지만 도로에 있어서도 분기점은 지역과 사람의 교류, 문화의 교류, 물류의 교류 발전의 중심에 서 있는 곳이기도 하다.
여하튼 위와 같은 것 들 때문에 산, 물, 도로가 갖는 분기점의 의미는 중요하다 하겠다.

 

 

주화산에 대한 論爭은 계속되어야만 하는가?
애초 산경표에 주화산이라는 지명이 거론되지 않았고 또 누군가에 의해 금남호남정맥이나 호남정맥, 또 금남정맥을 하면서 산자분수령에 의한 실체를 확인하는 동안 주화산이란 지명을 운운하지 않았더라면 논할 가치조차 없었고 더욱이 분기점이 아니었더라면 論爭에 대해서 우리는 시간만 낭비하고 있었을 것이다.
대간이나 정맥, 지맥 등의 평범한 峰, 嶺, 峙, 줄기 같았으면 논의 가치는 더 작았을 것이고 지형의 개념이 아니었다면 우리들의 입에 올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제는 論爭이라기보다는 이 것은 어떻게 보면 우리의 課題이다.
우리의 지리가 지형개념인 大幹, 正脈이고 또 山自分水嶺에 의한 산줄기인 만큼

선조들이 남겨 놓은 課題를 풀어야 한다.
여기에 합당한 지명을 부여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지리를 말하는데 무식한 꼴이 될 것이고 눈 가리고 아옹하는 식으로 우습게도 주화산이 될 것이고 뒤를 따라 오는 사람들은 주화산으로 못을 박을 것이다.
論爭이 아니라 山經表가 우리들에게 주어진 課題이다.

 

 


5. 맺음말
▲ 錦南湖南正脈, 湖南正脈, 錦南正脈 3正脈이 分岐하는(흔히 주화산이라고 일컫는 곳)곳도 산줄기의 흐름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지만
그 주변의 지형도 앞서 말한 거와 같이 생활권의 연결, 문화의 교류, 물류의 교류 등 아주 중요한 가교역할을 하고 있으며, 분기점을 중심으로 한 지역은 산줄기뿐만 아니라 호남지역 들판에 아주 긴요한 물줄기를 발원하는 곳이며 또 지형적으로는 분기점을 중심으로 서쪽으로는 평야지대를 이루고 동쪽으로는 진안고원을 형성한다.
이처럼 이 곳 분기점이 아주 중요한 산줄기임에는 틀림이 없다.
지리체계가 산자분수령에 의한 산줄기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서 시간을 소비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산경표의 저자와 편찬시기가 누구인지를 떠나서 이미 산경표에 거론되었기 때문에 매듭을 지어야 한다.
산경표를 기록하는 과정이나 편집하는 과정에서 珠줄山을 적는 다는 것이 편집자의 실수로 珠華山을 잘 못 기재하였다. 이것은 확실한 것이고 실수로 빚어진 일이다.(산경표 상에 주화산 뿐만 아니라 비슷한 誤字들이 발견되고 있다)각종 문헌이나 고지도 등을 살펴 본 결과 주화산이라는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
분명 산경표에서 말하는 주화산이라는 곳은 없다.

 

 

錦南湖南正脈, 湖南正脈, 錦南正脈 3正脈이 分岐하는(흔히 주화산이라고 일컫는 곳)곳에 우리는 새로운 이름을 부여해야 된다.
단순한 능선에, 봉우리에 또 嶺에 峙에 지나치는 지역이라면 몰라도 중요한 分水

嶺이 되는 곳이기기에 거기에 걸 맞는 지명을 붙여줘야 한다.
새로운 지명을 부여할 때는 당연히 신중함과 동시에 지리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지명을 부여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새로운 지명에 대해서는 몇 몇 사람들이 좋은 의견을 내 놓고 있다.
3정맥 분기점의 근처 조약치를 따서 조약봉이라고도 부르고 있고 또 모래재분기점, 또 새로운 지명을 정하되 가급적 산보다는 봉이어야 한다는 뜻의 의견을 피력하고 있지만  보다 많은 여론을 수렴하고 충분한 토론을 거쳐서 조급하지 않게 새로운 지명이 만들어 졌으면 한다.

 

 

우리 지형도에 지형개념인 대간, 정맥, 지맥 등 산자분수령에 의한 산줄기 체계가 하루 빨리 표기되고 올바른 지리역사를 다시 배우는 날을 기대해본다.
우리는 산에 오르면 하나의 산을 놓고 여러 지명을 가진 산을 볼 수가 있다
공인기관인 국토지리정보원에서 지명, 고시한 이름이 분명히 있는데도 우리는 아무런 생각없이 입맛대로 부르고 있고 이것은 우리 지리역사에 대한 상당한 혼선이다.
그 산에 대한 정확한 유래가 있고 그 지명이 마땅하다면 해당 자치단체나 단체, 개인은 공식적인 절차를 밟아서 지명을 改定, 사용하는 것이 옳은데
개인의 주장대로 부르는 것은 선조들이 만들어 놓은 역사와 문화를 매장시키는 일 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또 산과 관련된 매체도 마찬가지다
우리 산줄기의 지명이나 유래에 대해서 틀린 부분을 바로 잡고 정확한 지명을 사용하고 전달해야할 매체가
일부 산악인들의 원고를 받아서 그대로 싣고 사용하는 것은 또 다른 혼선만 가중시킨다.
국토지리정보원에서 발행하는 지형도가 다 맞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적어도 믿어줘야 되고 기본으로 삼아야 한다.

 

 

공인기관인 국토지리정보원 등 지리에 관련된 기관은 우리 지리역사가 바로 서는데 부단한 노력을 경주해야 된다.
지형도에 지형개념인 산줄기 표기는 물론 지명의 통일, 우리의 옛 지리역사에 대한 규명 등 새롭고 올바르게 밝히고 또 다시 써서  우리의 땅은 지형의 개념인 백두대간이다라는 것을 널리 알리고 영원히 배울 수 있도록 앞장서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지리역사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엄청난 資産일 것이다.

 

 

 

[參考文獻]
[①  참고]
▲  진안문화원에 실린 진안의 산천 고개지명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면.....
주화산//주화산은 진안지방에 실재하지 아니하는 산이다. 그럼에도 모래재터널에서 북쪽으로 직선거리 700m 떨어진 지도상 568m의 봉우리에는 주화산이라는 팻말이 서있다.
이는 전라북도내 산악인들이 산경표(山經表)를 잘못 해석하여 벌인 일로 실제로 그 봉우리에는 예전부터 이름이 없었다. 그런데 산경표  금남정맥(錦南正脈)란에 주줄산(珠줄山 : 지금의 운장산)의 줄을 華와 비슷한 글자로 잘못 기재했는데 이를 다른 산으로 보고, 또 현대의 지세도에 대입하여 금강과 만경강의 수계가 갈라지는 그 봉우리를 주화산이라 견강부회한 것이다.  운장산,  주줄산. 《참고문헌》 山經表(朝鮮光文會, 1913)
※ 견강부회 :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억지로 끌어 붙여 자기에게 유리하게 함

 


[② 참고]
▲ 海東道里譜는
저자와 편찬연도 모두 미상이다.
조선후기에 우리나라 도로와 산세 등을 정리한 표, 본문은 去京程里表, 山經, 本營으로부터의 거리표, 嶺南道里表로 구성되었다.
去京程里表는 서울로부터 연결되는 도로망을 정리한 것으로서 서북쪽으로 義州, 동북쪽으로 慶興 西水羅, 동쪽으로 平海, 동남쪽으로 釜山, 太白山, 남쪽으로 統營別路, 濟州, 서남쪽으로 忠淸水營, 서쪽으로 江華 등 9개의 大路로 구분하였고 각 대로는 다시 여러 단계의 지선으로 나누었다.
각 道路는 주요 지점을 수록하고 여기에 거리와 分岐의 수를 병기하였으며 분기되는 도로는 첫머리에 방향을 명기하였다.
말미에는 道里總目이라 하여 각 大路의 총 里數를 정리하였다.
[생략]...................
<山經>은 우리나라의 주요 산세를 정리한 것으로서 百頭大幹을 중심으로 長白正幹, 淸北正幹, 淸南正幹, 海西正幹, 臨津北禮成南正幹, 漢北正幹, 洛東正幹, 漢南錦北正幹, 錦南湖南正幹으로 나뉘었다.
각 항목에는 邑治에서의 거리, 山勢의 방향, 分岐, 지리고증, 水營 등의 설치 등을 함께 기록하였다.
[이하 생략]...........................
(서울대학교 규장각)

 


[③ 참고]
▲ 輿地便覽은
여지편람, 우리나라의 산맥계통을 밝힌 산경표와 거경정리와 도내의 군현읍치 사이의 거리조견표를 포함하는 程里表가 포함된 지리편람
2책, 필사본, 산경표는 51장이고 정리표는 48장으로 되어 있으며 책의 크기는 세로 24.1㎝, 가로 15.1㎝이다.
저자와 제작연대의 표시는 없으나 산경표는 영조 때의 실학자 신경준(申景濬)의 산경표와 동일하고 정리표의 내용은 신경준이 편집하고 그 뒤 증보된(증보문헌비고) 輿地考안에 있는 道里의 내용을 표로 만든 것으로 보아 신경준이 만든 원작을 증보, 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산경표의 내용은 우리나라의 산맥계통을 大幹, 正幹, 正脈으로 구분하고 그 계통을 상세히 밝히고 있다. 白頭大幹은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黃土嶺, 厚致嶺, 黃草嶺, 狼林山, 金剛山, 五臺山, 太白山, 小白山, 竹嶺, 德裕山을 거쳐서 智異山에 이르는 한반도의 등뼈산맥을 이루고 있다.
長白正幹은 경성 서쪽 100리에 위치하는 장백산에서 시작하여 동북쪽으로 뻗어 서수라에 이르는 산맥이다.
백두대간에서 서쪽 황해안을 향하여 뻗고 있는 산맥을 정맥(正脈)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청천강을 경계로 청북(淸北)과 청남정맥(淸南正脈)을 구분하고 있다.
즉, 현재의 적유령산맥과 묘향산맥에 해당할 것이다.
그리고 해서정맥, 임진북예성남정맥(臨津北禮成南正脈), 한북정맥(漢北正脈), 낙동정맥, 한남금북정맥(漢南錦北正脈), 한남정맥·금북정맥, 금남호남정맥(錦南湖南正脈), 금남정맥, 호남정맥으로 나누고 있다. 따라서 정맥은 하계의 유로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생략]....................
또한 정리표에는 증보문헌비고에 없는 거리조견표가 도별로 정리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우리나라의 산맥계통과 주요간선도로 및 지로(支路)에 관한 지식을 쉽게 얻을 수 있고, 이 책은 지방수령을 비롯한 조선시대의 관료와 선비들에게 널리 이용되었던 것으로 생각되며 유사본이 많이 전하여지고 있다. 그러나 지리편람으로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지도가 없는 것이 아쉽다(한국학중앙연구원)

 


[④ 참고]
▲  신경준 [申景濬, 1712∼1781]은
본관 고령(高靈), 자 순민(舜民), 호 여암(旅庵), 1754년(영조 30) 증광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 승문원(承文院)을 거쳐 휘릉별검(徽陵別檢), 전적(典籍), 병조와 예

조의 낭관(郞官), 정언(正言), 장령(掌令)을 지내고 1762년 서산(瑞山)군수로 나갔다.
이어 장연(長淵)현감, 헌납(獻納), 사간(司諫), 종부시정(宗簿寺正)을 역임하였다.
1770년 문헌비고(文獻備考) 편찬에서 여지고(輿地考)를 맡아 한 공으로 동부승지(同副承旨), 병조참지(兵曹參知)가 되어 팔도지도(八道地圖)와 동국여지도(東國輿地圖)를 완성하였다.

1771년 북청(北靑)부사, 1773년 좌승지(左承旨), 강계(江界)부사, 순천(順天)부사, 이듬해 제주(濟州)목사, 1779년 치사(致仕)하고 고향 순창(淳昌)에 돌아갔다.
학문이 뛰어나고 지식이 해박하여 성률(聲律), 의복(醫卜), 법률, 기서(奇書)에 이르기까지 통달하였고, 실학을 바탕으로 한 고증학적 방법으로 한국의 지리학을 개척했다. 1750년에는 훈민정음운해(訓民正音韻解)를 지어 한글의 과학적 연구의 기틀을 다졌다.

저서에는 여암집(旅庵集), 소사문답(素砂問答), 의표도(儀表圖), 강계지(疆界志), 산수경(山水經), 도로고(道路考), 산경표(山經表), 증정일본운(證正日本韻), 수차도설(水車圖說)이 있다.

 


[⑤ 참고]
▲  동국문헌비고 [東國文獻備考]는 한국의 문물제도를 분류, 정리한 백과전서적인 책이다
목판본, 100권 40책, 영조의 명으로 1769년(영조 45) 편찬에 착수, 1770년에 완성되었다.
체재는 중국 문헌통고(文獻通考)의 예에 따라 상위(象緯), 여지(輿地), 예(禮), 악(樂), 병(兵), 형(刑), 전부(田賦), 재용(財用), 호구(戶口), 시적(市?), 선거(選擧), 학교(學校), 직관(職官)의 13고(考)로 나누어 수록하였다.
그 후 이를 다시 증보, 고종 때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라 하여 250권으로 간행하였다.


▲  증보문헌비고 [增補文獻備考]는 상고(上古) 때부터 한말에 이르기까지의 문물제도(文物制度)를 총망라하여 분류 정리한 책이다.
활자본, 250권 50책, 문헌비고(文獻備考)라고도 한다.
최초의 편찬은 1770년(영조 46)에 홍봉한(洪鳳漢) 등이 왕명을 받아 상위(象緯), 여지(輿地), 예(禮), 악(樂), 병(兵), 형(刑), 전부(田賦), 재용(財用), 호구(戶口), 시적(市?), 선거(選擧), 학교(學校), 직관(職官)의 13고(考)로 분류하여 100권으로 만들어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라 하였다.
그러나 사실(史實)에 어긋난 점과 누락된 부분이 많을 뿐만 아니라 시대의 변천에 따라 법령(法令)과 제도가 많이 변경되었으므로 1782년(정조 6) 왕명으로 이만운(李萬運) 등에게 이를 바로잡아 보편(補編)토록 하였다.


이것이 제2차의 편찬이며, 9년여에 걸쳐 동국문헌비고의 13고(考)에 대해 오류를 바로잡고 누락된 것을 채우는 한편 새로이 물이(物異), 궁실(宮室), 왕계(王系), 씨족(氏族), 조빙(朝聘), 시호(諡號), 예문(藝文)의 7고(考)를 증보하여 146권을 편성하고 이를 증보동국문헌비고(增補東國文獻備考)라 하였다.
그러나 이 책은 간행되지 못하고 100여년 뒤인 고종 광무 연간에 이르러 제3차 보편을 하였다. 즉, 1903년(광무 7)에 특별히 찬집청(撰集廳)을 설치하고 박용대(朴容大) 등 30여 명의 문사들에게 명하여 이를 보수하게 한 것이다.
박용대 등은 5년여에 걸쳐 증보동국문헌비고에 수록된 20고 중에서 물이는 상위에, 궁실은 여지(輿地)에, 시호는 직관에 포함시키고 왕계는 제계(帝系)로 고쳐서 씨족(氏族)에 포함시켰다. 또 조빙을 교빙(交聘)으로 고쳐 상위, 여지, 제계·예, 악, 병, 형, 전부, 재용, 호구, 시적, 교빙, 선거, 학교, 직관, 예문의 16고 250권으로 편성하고 이를 증보문헌비고라 이름 붙여 1908년(융희 2)에 간행하였다.
한국 전통문화에 관한 백과사전으로서 제도, 문물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⑥ 참고]
▲  일본은 강점 후 1910년부터 18년까지 9년 동안 수탈의 目的으로 토지조사사업을 시행하여 조선의 세밀한 지형도를 그렸고 쌀과 곡물을 가져가기 위해 도로와 철도를 냈으며 금 등을 캐가기 위해 地質調査에 광분했다.
그 시기에 조선으로 들어온 사람이 고토 분지로 라는 지질학자다.
그는 일본이 조선침략정책의 일환으로 1900년과 1902년 두 차례에 걸쳐 총 14개월 동안 실시한 광물탐사사업의 학술책임자 자격으로 우리나라의 지질을 조사했다.
그 조사를 토대로 "조선남부의 지세(1901년)", "조선북부의 지세(1902년)"를 발표했고 두 논문을 종합하여 체계화한 "조선의 산악론(An Orographic Sketch of Korea)" 및 "지질구조도(1:200,000)"를 동경제국대학 논문집에 발표했다. 그게 1903년이었다.
그 때부터 조선 땅에 山脈이라는 용어가 나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고토의 논문은 조선 전래의 산줄기체계와 확연히 다른 것이며, 당시 유행하던 지질학에 근거한 것이다. 그것이 오늘날 한국 산맥분류의 시초가 되었고 체계와 명칭의 확립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이다.
이듬해인 1904년, 정치지리학 전공의 야쓰쇼에이가 韓國地理를 펴냈다.
일본 동경에서 간행된 그 책의 산맥편에 나오는 산맥지형도는 고토의 연구를 충실히 반영한 것이었다. 다만 거미줄처럼 얽힌 고토의 산맥선들을 단순화시켜 오늘날의 산맥계통도와 유사하게 만들었다는 점이 다르다.
1905년 조선이 통감부체제로 들어가자 교과서의 내용도 제재를 받는다. 그리하여 마침내 1908년 당시의 지리교과서였던 "高等小學大韓地誌"에 신식 지질개념이 전래의 산줄기인식을 대신한다는 선언이 등장한다(조석필 著 태백산맥은 없다에서) 

 


[⑦ 참고]
▲  조선광문회는 1910년에 설치된 韓國古典 간행기관이다
.
을사조약이 체결된 이후 정치적으로 다난했던 시기에 학자들의 국민계몽을 위한 활동이 컸다. 그들은 애국적인 견지에서 독립정신을 불러일으키고 새로운 지식을 널리 전하고자 노력하였다.
이에 따라 국사연구도 민족적인 기개(氣槪)와 자존심을 앙양하기 위한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광문회에서는 한국의 고전을 발굴하고 그 가치를 재인식시키기 위한 노력으로 한국고전을 간행·보급시키는 한편, 민족의 정신적 결합을 기하며 민족문화와 사상의 기원에 관한 연구에 종사하였다.
최남선(崔南善)이 창설하고 박은식(朴殷植) 등이 관계하였으며, 동국통감(東國通鑑), 해동역사(海東繹史),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경세유표(經世遺表), 상서보전(尙書補傳), 등 17종의 조선총서(朝鮮叢書) 간행하였다.

 


[⑧ 참고]
▲ 朝鮮光文會가 崔誠愚 소장본을 臺本으로 1913년 2월 단행본으로 간행한 산경표 신연활자본에는 편찬자는 알 수 없다. "撰者 未考고 하면서도 서문에서 신경준(申景濬, 1712∼1781)의 輿地考를 거론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지지를 가만히 살펴보면 산을 논한 것은 많지만 심히 산만하고 계통이 서 있지 않음을 지적하게 된다. 오직 신경준이 지은 여지고의 山經만이 그 줄기[幹]와 갈래[派]의 내력을 제대로 나타내고 있다.
높이 솟아 어느 산을 이루고 비껴 달리다가 어느 고개에 이르며 굽이돌아 어느 고을을 둘러싸는지를 상세히 싣지 않은 것이 없기에 이야말로 산의 조종을 알려 주는 표라 할 만하다.
산경을 바탕[綱]으로 삼고 옆에 이수(里數)를 조목[目]으로 부기하고 있어 이를 펼치면 모든 구역의 범위와 경계를 마치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듯 한눈에 알아볼 수 있으니 원전으로 삼은 산경에 금상첨화일 뿐만 아니라 실로 지리가의 나침반[指南]이 될 만하다 하겠다."( 考東方地志論山者類多 摘拔其尤散亂無統 惟輿地考申景濬所撰 山經直 幹波來歷 高起爲某嶽橫馳爲某嶺 回抱爲某治無不詳載 寔爲導
山之祖是表也 以山經爲綱而旁附里數目 而張之全區界境曉然爲指掌 非但爲原經之錦花 實爲地理家之一指南云爾)』

 


[⑨ 참고]
▲  조석필은 1953년 전라남도 진도에서 태어났다.
광주일고 재학시절 산악부에 몸담은 것을 인연으로 산악활동을 계속하고 있으며, 1987년 세계 최초 닥터원정대라는 전남의대산악부의 히말라야 렌포강(7,083m)원정대를 이끌어 성공시킴으로서 그 해 한국대학산악연맹에서 선정하는 올해의 산악인에 뽑혔다.
1992년부터 1년 동안 호남정맥 462㎞를 종주 등반하면서  이 땅의 산줄기 원리에 눈뜨게 되어 백두대간 복원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또 2005년 12월 30일 백두대간을 널리 알린 공로를 인정받아 산림청장의 추천으로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현재 월간 사람과 산 편집위원, 광주 하나소아과의원 원장이고 렌포강 하늘길, 산경표를 위하여, 태백산맥은 없다. 등의 책을 썼다.

 

 

[⑩ 참고]
▲  호남정맥보고서에 주화산이라는 지명이 거론된 자료
1. 호남정맥보고서-첫째마당-시작하기 전에 내용을 보면.....
- 호남정맥 총 462.0km를 수역별로 보면
안쪽 462km는 전부가 섬진강의 젖줄이고
바깥쪽 462km는 다음과 같은 강의 젖줄이 된다
금강 63.3km (영취산  주화산 ) [산경표]의 금남호남정맥 부분
만경강 50.9km (주화산  분기점3) [산경표]의 호남정맥 부분, 398.7km
동진강 40.6km (분기점3 분기점4) (주화산 백운산)

 

 

2. 호남정맥보고서-셋째마당-산경표상의 호남정맥 내용을 보면.....
- 논란의 핵심은 금남호남정맥이 금남정맥과 호남정맥으로 나뉘는 분기점을 어디로 볼 것이냐 이다. 그것에 관한 산경표의 의견과, 지형도 및 실제 답사 결과와의 차이점을 그림으로 그려 비교해보면 아래와 같다.
- 마이산을 분기점으로 본다.
금남정맥은 주화산에서, 호남정맥은 웅치에서 시작하며,
부귀산을 금남호남정맥의 곁가지로 분류한다.
-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마이산은 분기점이 아니다. 분기점의 정확한 위치는 모래재 북쪽 0.6km 지점의 야트막한 봉우리이다.  이것을 주화산으로 부르자는 의견이 있는데 고유 명사가 필요한 지점인데도 마땅한 이름이 없기에 본 보고서에서도 일단 주화산으로 썼다. 그러나 이 경우 산경표상 금남정맥의 시작점인 주화산과의 관계정립이 문제로 남는다.

 

 

3. 호남정맥보고서-다섯째 마당-우리들의 호남정맥 내용을 보면.....
- 호남정맥상의 수분점(무명봉(565)(=주화산?) : 모래재(터널) 북쪽 0.6km 지점의 야트막한 봉우리로 호남 및 금남정맥의 분기점이다(마이산이 분기점이 될 수는 없다). 이것을 주화산이라 부른다는 의견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參考資料]
-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여지편람
- 민족문화추진회/고전국역총서/신증동국여지승람
-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중앙연구원/고지도, 원문정보
- 산경표를 위하여(조석필 著)
- 태백산맥은 없다(조석필 著)
- 조선광문회본/산경표
- 대동여지도 영인축쇄판(조선일보사 발행)
- 백두대간 첫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