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장소

답사 여행

답사일

경상북도 안동시

2008년 11월 1일

 

<답사기록>

 하회마을-병산서원-봉정사-7층전탑-도산서원.육사문학관-청량산박물관-봉화닭실마을

    7:00        8:30      11:00    12:30             13:00                   15:00         16:30

 

 


한국 정신문화의 고향 - 안동시


 

  올해 가을은 꽤 포근하게 지나간다. 지구 온난화의 영향인지 10월이 다 가도록 쌀쌀한 날씨는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안동답사를 결정하고 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비가 내렸다. 금요일은 온종일 가을비가 내렸는데 다행히 답사를 떠나는 토요일은 맑을 것이라 했다.

  금요일 밤 10시, 안동으로 향한다. 잠은 가다가 차 안에서 해결하기로 한다. 그래야 다음날 여정을 알차게 꾸밀 수 있기 때문이다. 포천에서 안동까지는 4시간 거리, 중앙고속국도 원주를 지나면서 안개가 길을 덮는다. 비가 온 뒤에는 습기가 많아서 안개 발생율이 맑은 날에 비하여 높단다. 자정을 넘고 안개까지 운행을 방해하여 단양휴게소에서 차를 세우고 새우잠을 잔다.

  가족들에게도 차 안에서의 새우잠은 꽤 익숙해진 일상이 되었다. 담요만 한 장 있어도 너끈하게 밤을 지새운다. 새벽 5시, 다시 길을 간다. 안동의 첫 방문지는 하회마을이다. 아침은 밝아오나 안개는 더욱 짙어졌다. 하회마을의 넓은 주차장에 들어서니 늦가을을 알리는 노란 은행잎이 수북하게 쌓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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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회마을 주차장>

 

  7:00

  평소에 얼마나 많은 관광객이 드나드는지 알 수 있는 넓은 주차장과 진입로를 뒤로 하고 한적한 하회마을로 들어간다. 하회마을은 낙동강 물이 육지 둘레를 S자를 그리며 돌아 흐르는 곳으로 우리말로는 ‘물도리동’, 한자어는 ‘河回’라고 한다.

  조선 초 공조전서를 지낸 류종혜 공이 이곳에 터를 잡고 입향한 이래 600여 년간 풍산 류씨가 살아왔다. 이후 조선 중기 유학자인 겸암 류운룡 선생과 임진왜란 때 영의정을 맡아 국난극복에 큰 공을 세운 서애 류성룡(1542-1601) 선생 형제 등 많은 인물을 배출함으로써 영남의 대표적인 양반촌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래서 이곳을 구경하기 위하여 해마다 많은 사람들이 방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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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회마을 안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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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표>

  마을입구에 서 있는 하회마을 안내도를 지나 골목길을 들어선다. 마을은 중앙을 가로지르는 큰길을 중심으로 크게 북촌과 남촌으로 나뉜다. 그리고 여기에는 기와집이 즐비한 가운데 초가집이 드문드문 있는데 이는 종가집에서 부리던 사람들이나 소작인들이 살던 살림집이다. 주요한 살림집들로는 대종택이자 류운룡을 모신 양진당이 있고 류운룡의 아우인 서애 류성룡의 종택으로 소종택인 충효당이 있으며 그밖에 하동고택, 북촌댁, 남촌댁 등이 있다. 양반 가옥의 전형을 이루는 이 집들 가운데는 보물로 지정된 곳이 둘이고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곳이 아홉이나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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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

 

  충효당으로 들어간다. 보물 제414호인 충효당은 조선 중기의 명필가인 허목이 서애가 충과 효를 겸비한 인물이라는 뜻으로 지어준 이름이다. 사랑채를 지나 뒷마당으로 가니 유물을 전시해 놓은 영모각이 있는데 류성룡이 임진왜란 때의 일을 기록한 ‘징비록’, 의술서인 ‘침구요결’, 만년의 시를 모은 ‘관화록’ 등의 문서와 류성룡이 생시에 쓰던 가죽신, 갓끈 등도 전시되어 있다고 하는데 이른 아침이라 문을 열지 않았다.

  충효당 앞의 넓은 뜰에는 구상나무 한 그루가 서 있고 다음과 같은 안내문이 있다. “이 구상나무는 1999년 4월 21일 영국 여왕인 엘리자베스 2세가 안동 하회마을을 방문한 기념으로 심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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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여왕의 기념식수 구상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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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

  마을길을 벗어나 강변길을 걷는다. 강원도 태백의 은대봉에서 발원한 낙동강은 그 긴 물줄기가 이곳 안동 하회마을을 돌아간다. 안개속의 낙동강은 고요하고 강변에는 만 그루의 소나무를 심어 방풍림을 만들었다는 만송정 솔밭이 보인다. 만송정은 정자가 아니라 솔밭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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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송정>

  강변을 지나 마을 입구의 안내판 앞으로 나간다. 일찍 잠을 깬 동네 사람들의 움직임도 분주해졌다. 가을이 무르익었으니 들판에는 아직도 거두지 못한 수확의 결실이 기다리고 있을 터이다. 자동차를 세워둔 주차장에서 컵라면이라도 끓여 먹으려고 버너를 꺼내는 순간 냄비를 가져오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물도 있고 라면도 있고 휴대용 가스버너까지 모든 것이 완벽한데 냄비가 없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주차장 입구에 있는 탈박물관으로 간다. 그러나 이곳도 이른 아침이라 아직 문을 열지 않았다. 9시까지 마냥 기다릴 수 없어서 다음 방문지로 이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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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박물관>

 

  8:30

  병산서원으로 간다. 병산서원(屛山書院)은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선생을 기리는 유적지다. 1572년(선조 5년) 류성룡 선생께서 31세 되던 해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병산서당을 세우셨는데 선생 사후 선생을 흠모하는 지방 유림과 제자들이 존덕사를 짓고 위패를 봉안하였다. 철종 때 사액을 받아 서원으로 승격되었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도산서원과 함께 훼철되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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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산서원 만대루>

  병산이란 서원 앞에 병풍처럼 둘러선 산의 이름이다. 경내에는 존덕사, 입교당, 전사청, 장판각, 동재, 서재, 만대루 등 건물이 있다는데 문이 열리지 않아 안으로 들어가 볼 수 없었다. 그래서 담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며 사진을 찍을 수밖에 없었는데 뜻밖에 신기한 장면을 하나 발견하게 된다. 문은 없으나 흙담을 달팽이 모양으로 둘러 안이 보이지 않게 만든 재래화장실이 재현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름하여 달팽이통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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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통시>

  KBS 대하드라마 ‘이순신’에서 이순신의 어릴 적 친구로 등장하여 이순신을 발벗고 나서며 도와주고 추천하여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끌게 했던 서애 류성룡 선생께 인사도 드리지 못하고 병산서원을 떠나간다.

 

  다음 방문지인 봉정사로 가는 길에 풍산시장에 들른다. 양은냄비라도 하나 사야 배고픔을 면할 수 있기에. 다행히 문을 연 가게가 있어서 냄비를 하나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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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산장터>

 

  11:00

  봉정사 입구는 마침 국화축제가 시작되고 있어서 분위기가 부산스러운데 나중에 길이 막힐 것이 염려되어 봉정사는 부지런히 다녀오기로 한다. 봉정사의 매력은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나라 목조건물 중 가장 오래 되었다는 극락전일 것이다. 답사를 떠나기 전부터 봉정사의 극락전을 본다는 기대로 마음이 한껏 부풀어 올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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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정사 일주문>

  일주문을 지나 봉정사(鳳停寺)로 올라간다. 국보 제15호인 극락전은 대웅전의 바로 옆에 자리 잡고 있다. 극락전은 아미타불을 모신 작은 법당인데 1972년 해체 보수하는 과정에서 고려 공민왕 12년(1363년)에 중수되었다는 기록이 발견되어 그 전까지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로 알려졌던 부석사 무량수전의 자리를 빼앗았다. 봉정사에는 극락전 외에도 보물 제55호인 대웅전, 보물 제449호인 고금당, 보물 제448호인 화엄강당이 있어 볼 만한 고건축물이 수두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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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정사 극락전>

  그 뿐인가. 봉정사의 부속암자인 영산암은 산 쪽으로 난 길을 따라 잘 정리된 돌계단을 올라가서 만날 수 있었는데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의 무대였다고 한다. 그 바람에 찾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계곡을 건너고 좁은 오솔길처럼 꼬부라진 길이 크게 훼손되고 말았다하니 그 전에는 얼마나 운치있는 길이었을지 퍽 아쉬운 느낌이 든다.

  짙은 안개는 점심시간이 다 되어 가는 시간임에도 걷힐 줄 모른다. 봉정사의 깊은 가을을 맛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안개로 인하여 반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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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정사의 가을>

  봉정사와 작별하고 안동 시내를 향하여 길을 간다. 그런데 아침부터 간식으로 끼니를 때운 가족들의 성화로 길 한쪽에 차를 세운다. 컵라면으로 아침 겸 점심을 해결해야 다음 방문지가 눈에 들어올 듯하다. 안동댐 어디로 가면 안동의 명물 ‘헛제삿밥’ 전문식당이 있다고 하던데 그 때까지 참을 수가 없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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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향기 가득한 시골풍경>

 

  12:30

  ‘시장이 반찬’이라더니 꿀맛 같은 컵라면으로 식사를 대신하고 안동시내로 들어간다. 안동시내 태화동 근처에 이육사생가가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찾아 나선다. 그러나 믿었던 네비게이션은 정보가 없고 길가의 주민에게 물어 보니 생가가 있다는 사람, 없다는 사람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 결국 실패하고 다음 방문지인 안동댐으로 간다.

  안동 시내를 벗어나면서 낙동강 물줄기를 오른쪽에 두고 올라가는데 신세동 7층전탑 이정표를 만난다. 뒤쪽에 댐 비슷한 것이 있는데 저것이 안동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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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표를 만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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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동 7층 전탑>

  전탑이란 벽돌로 쌓은 탑을 말한다. 신세동 7층 전탑은 통일신라시대에 건립되었으며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전탑으로 국보 제16호다. 높이가 17m로 모습이 특이한데 안동 최고의 역사서인 ‘영가지’에 의하면 주변에 법흥사가 있었는데 이 때 만든 탑이라고 한다.

  전탑을 둘러보고 나와 안동댐을 바라본다. 낙동강 수위 조절에 공헌하는 안동댐은 4대강유역 종합개발사업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다목적댐인데 1971년에 착공하여 5년만에 완공한 토석(土石) 댐이다. 댐의 높이는 83m이며 안동민속박물관과 KBS드라마 촬영장, 유람선 선착장 등 볼거리가 많았는데 어찌된 일인지 이곳을 아무 생각없이 지나치고 말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7층 전탑 뒤에 있는 것은 안동호 보조댐으로 진짜 안동댐은 여기서 더 가야 나온다. 배가 부르면 눈에 보이는 것이 없다더니 헛제삿밥의 유혹이 사라지고 보니 도산서원으로 가야 한다는 결심만이 가득했던 모양이다.

 

  13:00

  도산서원 주차장에 닿는다. 도산서원(陶山書院)은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 선생을 상징하는 유적지다. 산책로를 따라 서원까지 즐거운 발걸음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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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서원 들어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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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서원 전경>

  선생께서 조선 명종 16년(1561년) 도산서당을 세우고 후학을 양성하던 경내에 선생 사후 4년만인 선조 7년(1574년) 선생을 흠모하는 문인과 유림들이 서원을 세우고 상덕사를 지어 위패를 봉안하였다. 그 후 선조 8년(1575년) 당대 명필인 한호 석봉 선생의 친필로 쓴 현판을 하사 받은 사액서원이 되었다. 한석봉의 글씨는 지금도 전교당의 현판으로 걸려 있다.

  이곳에는 선생이 직접 제자들을 가르치던 도산서당, 서원의 중심 건물이 되는 전교당, 제자들의 기숙사로 쓰이던 농운정사, 책을 보관하던 광명실, 서원 유생들이 거처하던 동.서재, 서원에서 찍어낸 목판본을 보관하던 장판각 등 고건축물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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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서원 전교당>

  이 밖에 도산서원 안에는 선생의 유품과 저서들을 접할 수 있는 유물전시관이 있다. 강변을 따라 걸어서 드나드는 진입로 건너편에는 시사대(試士臺)가 높직이 자리하고 있는데 선생을 흠모하던 정조가 도산별과라는 시험을 치루었던 곳이라고 한다.

 

  도산서원을 나와 이번에는 이육사를 만나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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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육사 생가터 앞 도로>

  도산서원에서 퇴계종택 방향으로 고개를 넘어 종택 앞을 지나쳐 조금 더 가니 이육사 문학관이 나온다. 광야, 청포도, 절정 등으로 유명한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이기도 했던 시인 이육사(李陸史)는 본명이 원록(源祿)이다. 조국과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평생을 투쟁과 고난으로 일관하였으면서도 주옥같은 시를 남겨 한국시사에 길이 빛날 업적은 그의 생가터에 문학관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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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육사의 생가터 재현>

  “내 고장 7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먹으면/ 두 손을 함뿍 적셔도 좋으련만//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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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육사 동상과 시비>

 

  15:00

  퇴계와 육사를 만나고 나니 학문의 경지와 조국애의 열정이 가슴속에 스며드는 것을 느낀다. 답사는 선인들을 만나보는 즐거움도 있지만 자신만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좋은 계기가 된다.

  35번 국도를 따라 안동을 벗어난다. 내일의 첫 방문지가 부석사 무량수전이므로 최대한 가까운 곳으로 접근하여 하룻밤을 보내기 위하여 봉화 땅으로 들어선다. 봉화 땅으로 들어서는 초입에 청량산을 만난다. 청량산의 산행은 할 수 없겠지만 산길을 따라 청량사 입구까지 차를 몰고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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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산도립공원 안내도>

  정말 놀랍다. 이 많은 등산인파가 오후의 청량산을 원색의 물결로 물들이는데 그렇게도 유명한 산이더란 말인가. 청량산 도립공원 안내도를 보니 산길이 예사롭지 않다. 전국에서 모여든 산행객의 물결을 뒤로 하고 도로변까지 돌아 내려와 청량산 박물관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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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산 박물관>

  청량산 박물관은 봉화의 문화유산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도록 2004년 6월에 개관하였다고 한다. 봉화의 역사, 민속, 문화재 관광지, 특산물 등을 소개하는 봉화 홍보관인데 많은 돈을 들여 개관한 박물관답게 잘 꾸며져 있다. 3층의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청량산의 단풍이 절경이다.

 

  16:30

  오후햇살이 산그늘을 길게 늘어뜨리는 시간이다. 어느덧 시계는 4시를 넘어간다. 봉화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계획을 세우고 청량산 박물관을 떠나 봉화로 향한다. 봉화에는 저 유명한 정감록의 십승지 중의 하나인 닭실 마을이 있어 오늘 여정의 마지막으로 삼으려 한다. 오늘의 남은 해는 1시간 여, 918번 지방도를 따라 가는데 봉성돼지숯불요리단지가 나온다. 저녁식사는 여기서 해결하는 것이 안성맞춤인데 이걸 어쩌나. 닭실 마을이 기다리고 있다. 어쩔 수 없이 통과하고 닭실 마을 입구에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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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실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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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실 마을의 기와집>

  경상북도 북부 내륙에 자리한 봉화군은 온통 산지로 둘러싸여 경지면적은 12%에 불과하다. 봉화군에서도 이곳 닭실 마을은 십승지의 대표적인 장소이며 풍수가들에게 금계포란형의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즉 닭실의 지세는 암탉과 수탉이 마주보고 사랑을 나누면서 알을 품고 있는 형국으로서 자손들이 많이 번창하고 재산이 크게 늘어나는 명당이라는 것이다.

  닭실 마을은 조선 중종 때의 문신 충재(沖齋) 권벌(1478-1548)이 벼슬살이를 하다가 1520년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이곳에서 후진을 양성하며 경학에 몰두하던 곳이다. 그래서 이곳에는 권벌의 종가와 그를 모신 사당 그리고 마을의 서쪽 끝에는 청암정(靑巖亭)이라는 정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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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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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의 일몰>

  청암정을 둘러보는 동안 하루해가 저문다. 서산으로 기우는 해를 바라보며 오늘의 긴 여정을 접는다. 저녁식사는 봉화시장의 어느 식당에서 소머리국으로 대신 했다.<2008.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