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 탐방기

 

                                         *탐방일자:2010. 12. 24일(금)

                                         *탐방지   :경남 진주시소재 진주성

                                         *동행      :나홀로

 

 

  서부경남의 중심도시인 진주를 기지삼아 낙남정맥을 종주한 횟수가 어느새 8회나 됩니다. 지리산 영신봉에서 삼신봉까지의 첫 구간만 빼놓고 삼신봉에서 진주시의 돌장고개에 이르는 낙남정맥은 모두 진주시내에서 버스를 타고 들머리로 옮겼습니다. 구간거리가 길면 전날 밤 내려와 묵기도 했고 짧은 구간 종주 시는 서울의 남부시외버스터미널에서 당일 아침 6시 첫 버스를 타고 내려와 산행지로 이동했습니다. 섬진강둘레산줄기 환주를 매듭짓고자 낙남정맥에서 분기된 낙남금오지맥을 진주시내에서 출발해 네 번에 걸쳐 종주한 것까지 포함한다면 진주시내에서 머문 횟수는 12번으로 늘어나 호남정맥 종주 차 전남의 순천을 들른 횟수와 같습니다.

 

 

  낙남정맥의 다음 구간이 고성 땅에서 끝나게 되고 진주를 지나는 마지막 구간 산행이 생각보다 일찍 끝나 귀경시간을 늦추고 진주시내에 소재한 진주성을 찾았습니다. 진주에서 몇 밤을 묵으면서 이곳 명소를 단 한 곳도 들르지 않는다는 것은 진주 땅에 대한 예의도 아닌 것 같고 일단 고성 땅으로 들어가면 언제 다시 와서 밟아보랴 싶어 진양호를 먼저 들른 다음 해지기 한 시간 전 쯤 남강에 면해 축성한 진주성에 발을 들였습니다.

 

 

  진주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키워드는 진주, 남강, 그리고 낙남정맥일 것입니다. 지리산의 영신봉에서 경남김해의 신어산에 이르는 전장 220Km의 낙남정맥이 진주성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조금은 억지라는 생각도 듭니다. 낙남정맥이란 낙동강 남쪽의 산줄기를 칭하며 여기서 낙동강이란 이 강의 제1지류인 남강도 포함됩니다. 진주성이 축조된 진주시는 이 낙남정맥의 북쪽에 자리하고 있는 내륙도시로 남강이 이 도시를 동서로 관통하고 있습니다. 낙남정맥으로부터 물을 받아 남해를 향해 유유히 흐르는 남강에 면해 쌓은 성이 다름 아닌 진주성이라는 정도가 진주성이 낙남정맥과 맺고 있는 관계의 전부라 할 것입니다.

 

 

  남강은 진주성과의 관계가 낙남정맥보다 훨씬 밀접하다 하겠습니다. 남덕유산에서 발원한 남계천이 덕천강과 합수되는 곳이 진주의 진양호로, 여기서 합수된 강물이 남강댐을 거친 뒤부터 남강으로 불리는 이 강은 진주시를 남북으로 가르며 관류(貫流)해 경상남도의 의령군과 함안군을 같이 만나는 창녕군 남지읍 대안리에서 낙동강의 본류에 합류됩니다. 진주성은 낙남정맥과는 몇 십리 떨어져 있지만 이 강과는 바로 면해 있습니다. 평화 시에는 향연을 벌여도 좋을 만큼 경관이 빼어난 진주성이 임진왜란 중 더 할 수 없는 전략적요충지가 된  데는 남강도 한 몫 했을 것입니다.  1592년 진주목사 김시민은 이 성에서 왜군을 맞아 고전분투한 끝에 진주대첩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조선조의 실학자인 이중환은 진주(晋州)에 대해  “네 고을 물이 합쳐져 영강(瀯江)이 되고 진주읍(晋州邑) 남쪽을 돌아 낙동강으로 돌아간다. 진주는 지리산 동쪽에 있는 큰 고을이며 장수와 정승이 될 만한 인재들이 많이 나왔다. 땅이 기름지고 또 강과 산의 경치가 좋아 사대부는 넉넉한 살림을 자랑하고, 제택(第宅)과 정자 꾸미기를 좋아하며 비록 벼슬은 못하더라도 한유(閑遊)하는 공자(公子)라는 명칭이 있다”고 그의 저서 "택리지"에 적어 놓았습니다.  여기서 네 고을이란 안음, 거창, 함양과 산음을 이르는 것이고 영강은 지금의 남강입니다. 네 고을의 물만 진주 남강으로 몰려든 것이 아니고 물 따라 인재들도 진주로 모여들었기에 진주시가 서부경남의 중심도시가 되었을 것입니다. 먼 옛날 고령가야가 이곳에서 나라를 연 것으로 추정되는 것은 이중환의 지적대로 진주 땅이 기름지고 산천경개가 빼어나서였을 것입니다. 진주가 오늘의 이름을 얻은 것은 고려태조 23년인 940년의 일이니 가히 천년고도라 이를 만합니다. 조선조 고종33년인 1896년 전국이 13도로 개편되면서 진주에 경남의 도청이 들어섰으나 일제강점기인 1925년에 경남도청은 부산으로 이전되었습니다. 1948년 진주부에서 진주시로 승격된 후 1995년 인근 진양군과 통합해 오늘에 이른 이 도시에 약33만 명의 인구가 살고 있습니다.

 

 

  천년고도 진주(晋州)의 역사와 문화가 고스란히 깃든 곳이 바로 진주성(晋州城)입니다.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진 이 성은 원래가 토성이었으나, 고려 말 우왕5년 1379년 진주목사 김중광이 왜군을 막고자 석성으로 개축했습니다. 임진왜란 직후 성의 중앙에 남북으로 내성을 쌓아 공고히 한 것이 그해 10월 진주대첩을 승리로 이끄는데 크게 주효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세워진 성곽은 사기(史記)조선전(朝鮮傳)에 나오는 평양성으로 기원전 2세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합니다. 고구려, 백제와 신라의 삼국이 고대 국가로 발전하기 시작한 3세기에 들어 석축에 의한 성곽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대부분의 성곽이 간단한 목책(木柵)이었던 것이 이후 토성을 거쳐 석성으로 발전했습니다. 성곽은 기 기능에 따라 도성(都城), 장성(長城),산성(山城), 읍성(邑城), 나성(羅城), 옹성(甕城) 등 여라 가지 형태가 있다고 반영환님의 책 “한국의 성곽”에 나와 있습니다. 성곽의 둘레가1,760m인 진주성은 왕궁이 있는 도읍지에 수도를 방어하기 위해 쌓은 도성에 비하면 그 규모가 아주 작습니다. 남강에 면한 나지막한 봉우리에 쌓았으나 그 높이가 100m도 안 되는 낮은 구릉에 불과해 산성(山城)이라 부르기도 좀 뭣한 이 성은 읍성(邑城)으로 분류하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이 성이 함락된 것은 진주대첩 그 다음 해의 일로 조선조는 그 함락 원인이 평야전에 있었다며 그 후로는 주로 산성을 쌓은 것으로 보아도 진주성이 산성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이 성의 정문인 북쪽의 공북문(拱北門)을 통과해 진주성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시계반대방향으로 이 성을 한 바퀴 돌기로 하고 오른 쪽 위 북장대로 향했습니다. 장갑을 끼었는데도 손끝이 아릴 정도로 동장군의 기세가 만만찮아 해넘이가 얼마 남지 않은 저녁시간에 산보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던 지난 여름의 첫 탐방 때와는 달리 오가는 사람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 성 북쪽의 지휘소인 2층 누각의 북장대(北將臺)를 지나 포루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습니다. 포루는 진주성을 방어하던 포진지로 임란 후 설치한 12좌 중 상징적으로 한 곳만 이곳에 복원했다 하는 데 천자총통, 지자총통과 현자총통 등의 포문이 진주시내로 향해져 있어 남강 이북의 진주시내도 함께 조망했습니다.

 

 

  지난 여름 시간이 늦어 들어가 보지 못한 국립진주박물관을 번개 불에 콩 튀어 먹듯이 후다닥 돌아보았습니다. 이 박물관은 임진왜란 전문 역사박물관으로 800점이 넘는다는 관련 전시물과 눈을 맞추는 것만으로도 바빴습니다. 임란 전문 박물관으로 꾸민 국립진주박물관을 진주성 안에 둔 것은 정말 잘한 일입니다. 임란 중 왜군과의 전투에서 첫판은 신승했고 다음번은 중과부족으로 분패하기까지 여기 진주성에서 목숨을 거둔 수많은 조선군과 진주백성들의 넋을 기리기에 이만한 곳이 따로 없다 싶어서입니다.

 

  임진왜란이 발발된 선조25년인 1592년 10월 왜군은 경상도의 요충인 진주성을 함락시키고자 2만 여명의 병력을 투입해 이 성을 공격했습니다. 진주목사 김시민은 성을 굳게 닫고 3천8백의 적은 군사로 7일간을 버텨낸 결과 성 밖에서 곽재우와 최경회 등이 이끄는 의병들로부터 협공을 받은 왜군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물러나 진주성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후세 사람들은 이 전투를 한산대첩, 행주대첩과 더불어 진주대첩으로 부르고 있습니다만, 아깝게도 진주목사 김시민은 이 전투에서 왜군의 총탄에 맞아 목숨을 잃었습니다.

 

 

  조선군의 승리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그 다음해인 1593년 3-4월에 세 번이나 진주성을 공격한 왜군은 그해 6월 관백 도요토미의 명령대로 대군을 동원해 진주성을 공격했습니다. 재야사학자 이이화님은 그의 저서 “한국사 이야기”에서 직접 공격에 투입된 병력만도 37,100명에 이르고 예비 병력 21,500명과 감시병력 25,000명이라 적고 있습니다. 8만 명이 넘는 대군을 성곽의 길이가 2Km도 채 안 되는 일개 읍성에 투입했으니 승패는 불을 보듯 뻔했을 법 한데 진주성 안에 있는 창의사 김천일, 경상우병사 최경회, 충청병사 황진, 김해부사 김종인, 호남의 의병장 고종후와 임희진 등은 고작 3,500여명의 군사로 맞서면서도 모두 의기가 하늘을 찔렀다 합니다. 그러기에 중과부적의 이 전투에서 무려 열흘을 버틸 수 있었을 것입니다. 진주대첩에서 전사한 김시민에 뒤이어 부임한 서예원 목사는 도망쳤지만 나머지 장수들은 촉석루 아래 남강 가의 바위에 모여 북쪽을 향해 두 번 절하고 무기를 강물에 던져 넣은 후 강물로 뛰어들어 생을 마감했습니다.

 

 

   박물관을 돌아본 후 촉석루(矗石樓)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진주의 상징인 촉석루가 창건된 것은 고려 고종28년인 1241년이라 하니 그간 수많은 전화를 당한 것은 불문가지의 일입니다.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광해군 때 중건했고 한국전쟁 때 또 불탄 것을 1960년에 다시 지은 촉석루는 팔작지붕의 누대로 강 가운데 돌이 우뚝 솟아 있다하여 촉석루라 불린다 합니다. 지난 여름 문이 닫혀 있어 들어가 보지 못한 촉석루의 누각에 올라 남강의 빼어난 풍광을 조망하고 나자 전시에 장졸을 지휘하는 지휘소로 쓰인 이 누(樓)에서 평시에는 선비들이 풍류를 즐겼다는 이야기가 거짓말이 아니겠다 싶었습니다. 석양빛이 은은하게 조사되는 잔잔한 물결의 남강 한가운데를 빙빙 돌고 있는 돛단배 안의 두 남녀가 모형인 것을 뻔히 알면서도 정겹게 보이는 것은 제 마음이 정겨워서일 것입니다.

 

 

  열흘 동안의 참혹한 전투는 왜군의 승리로 막을 내렸습니다. 최경회 등 조선군 장수들의 머리를 잘라 소금에 절여서 도요토미에 보낸 왜군은 여기 촉석루에서 진주성 승전의 축하잔치를 벌였습니다. 이 잔치에서 적장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촉석루 밑 바위로 꾀어내 끌어안고 남강으로 뛰어든 의로운 여인이 있었으니 그 여인이 바로 논개입니다. 후세사람들은 논개가 투신한 바위를 의암(義岩)이라 부르며 그 녀를 기리고 있습니다. 장수현감 최경회는 아버지를 여의고 힘들게 살고 있는 논개 모녀를 관아로 데려와 돌봐주다가 첫 아내를 잃고 나서 장성한 논개를 내실로 삼았다 하니 논개를 의기(義妓)로 부르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해주최씨족보에 부실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도 논개는 최경회의 정실은 못되었지만 기생도 아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촉석루 한 옆으로 논개를 기리고자 사당을 지은 것은 참 잘한 일입니다. 이 사당에 모셔진 논개의 영정이 2008년 가을 전북 장수의 생가를 방문했을 때 본 단아한 모습의 영정과 다르지 않아 반가웠습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이 사당의 이름을 의기사(義妓祠)로 정한 것입니다. 장수 생가에서 본 논개생향장수비를 탁본 뜬 비문에도 “義妓論介”라는 문구가 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비가 세워진 1846년에도 논개는 기생으로 알려진 것이 분명합니다. 저 또한 학교에서 일개 비천한 기생신분인 논개가 장하게도 왜장을 껴안고 강으로 뛰어내렸다고 배웠으니 논개가 기생이 아니고 최경회장군의 부실로 밝혀진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인 것 같습니다.

 

 

  촉석루에서 자리를 옮겨 찾아간 곳이 임진대첩계사순의단(壬辰大捷癸巳殉義壇)입니다. 임진년의 진주대첩을 높이 받들고 그 다음해 계사년 전투에서 순국한 7만 선열들을 기리는 이 제단이 건립된 것이 1987년이라 하니 늦어도 한참 늦었다는 생각입니다. 이층의 계단을 올라 정서면에 자리한 제단 앞에서 묵념을 올린 후 이 제단과 이 제단 뒤로 지는 석양을 카메라에 옮겨 담은 후 촉석문으로 성을 빠져나가 1시간 남짓한 진주성탐방을 모두 마쳤습니다.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이 오늘날 G-20회의를 주관할 만큼 번영을 누리고 있는 것은 이 나라를 지키고자 목숨을 바친 선열들의 희생이 있어 가능한 것입니다.  진주성 전투에서 패하고 도망친 진주목사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장수들은 의롭게 죽었습니다. 장수뿐만 아니라 한 장수의 부실인 여인도 의롭게 그 뒤를 따랐습니다.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의 역사는 이렇듯 의롭습니다. 반만년 역사에서 원의 부마국으로 전락해 정치적 간섭을 받은 것은1세기 밖에 안되고 일본이 강점한 것은 고작 35년이었습니다.  이 치욕의 시간에 조국을 배반한 매국노들도 있었지만, 그 보다 훨씬 많은 선현들이 이 나라를 지키고자 목숨을 바쳤습니다. 우리나라가 자랑스럽고 또 자랑스러운 것은 우리들은 이렇듯 자랑스러운 역사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4백년이 훨씬 지난 오늘의 진주시민이 33만 명 정도인데 진주성전투에서 목숨을 바친 진주의 군-관-민이 무려 7만 명이라 하니 애석하기는 해도 엄청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저는 간난의 우리 역사를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현대사를 새로 개척한 해방 후의 우리 역사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승전한 진주대첩도 패한 계사년의 전투도 모두 우리의 소중한 역사라는 것을 이번 진주성 탐방을 통해 다시 한 번 일깨웠습니다.

 

 

 

                                                       탐방사진(2)

                                                   (2010. 12. 24일)

 

 

 

 

 

 

 

 

 

 

 

 

 

 

 

 

 

 

 

 

 

 

 

 

 

 

 

 

 

 

 

 

 탐방사진(1)

(2010. 5.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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