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방 견문록

(동유럽 주마간산 7박 9일)


○ 일시 : 2013. 5. 17(금) ~ 25(토) (7박 9일)
○ 날씨 : 한국과 비슷, 대체로 맑았으나 가끔 흐리고 비
○ 여행국 :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슬로바키아, 폴란드, 체코
○ 동행 : 와이프와

 


 


오래 전부터 꼭 가보려고
벼르고 있었던
곳중의 하나였던 동유럽, 자유여행으로 떠나보고 싶었지만 
준비할 시간이 없어 노랑풍선을 타고 8박 9일 여정으로 다녀왔다.
'동유럽은 봄에 가는 것이 좋다'라는 여행 매니어인 친구의 조언 덕분에 
노란 유채꽃과 초록의 밀밭, 가는 곳마다 봄꽃들이 한 폭의 그림같이 아름다운 계절에
잘 다녀 온 것이 감사하기만한데.. 마냥 좋아라만 할 수 없는 것은  여행기를 정리하고 있는
이 시간 뉴스에서는 중부유럽에 내린 유례없는 폭우로 블타바강이 넘쳐 그 아름답던
프라하 시가지가 물에 잠기고, 도나우강이 넘쳐 부다페스트가 물에 잠긴 안타까운
소식을 전하고 있다. 큰 피해가 없어야 할텐데.. 예전같지 않게 뉴스가
피부에 와 닿는 것은 그 곳에 추억을 남기며 연을 맺었기 때문이겠지. 

동유럽은 서유럽에 대응하는 역사적, 정치적 관점에서 생겨난 것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사회주의 체제로 이행했던 유럽의 국가들을 뜻하는
정치적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지역적 범위도 일정하지 않고,
민족적·문화적·종교적 측면에서도 이질성이 강한데, 이번에 다녀온
나라들은 지역적으로는 유럽의 거의 중앙부에 위치해 있다.
 
 
 



(프랑크푸르트 공항청사를 빠져 나오니..)

제일 먼저 시야에 들어오는 기아자동차 광고판.
공항 청사안에서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만 들려 답답하였는데
KIA 로고가 반갑고 한국차가 자랑스러워 보인다.











(아우토반, 눈을 시원하게 하는 아우구스부르크 가는 길의 풍경)

아우토반!
독일의 자동차 전용 고속도로로 정식 명칭은
라이히스 아우토반(Reichs Autobahn). 도로의 너비는
18.5∼20m이고, 중앙에는 3.5∼5m 너비의 녹지대(중앙분리대)가 있다.
1932년 쾰른과 본 사이를 왕래하는 최초의 아우토반이 완공된 지
6년 만에 모두 3,000km에 이르는 고속도로망이 확충되었다고 한다.
현재 총연장 1만 1000km, 통일된 국토의 대부분에 걸쳐 있다.
아우토반을 비롯한 고속도로의 추가 건설 계획은 환경문제를
이유로 시민들이 반대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프랑크푸르트 공항을 빠져 나올 때까지만 해도
독일의 첫인상은 좀 어둡고 칙칙하구나 했는데 아우토반에
들어서자 끝없이 펼쳐지는 구릉에 노란 유채꽃과 잘 배색된
푸른 초원, 고풍스런 중세풍의 집들, 그림같은 풍경을 연출한다.
그러나, 이건 서막에 불과했다.







(아우구스부르크 변두리 조용하고 아름다운 마을 풍경)

어제밤 10시(한국시간 오전 5시), 집을 떠난지
28시간만에 프랑크푸르트 거쳐 아우구스부르크까지 왔다.
아침 먹기 전 숙소 주변을 돌아 보니 동네가 참 조용하면서도
아름답다. 거리엔 휴지조각 하나없이 깨끗하다. 목가적인 풍경
기분도 상쾌한데 숲속에서는 새들의 노래소리가 정겹다.

아우구스부르크는 로마 초대황제 아우구스투스에서
< 유래된 유서깊은 도시로 인구 265,000명의 바이에른주에서
3번째로 큰 도시. 우리가 묵은 곳은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로
가기 위해 도시 외곽 조용한 마을에서 하루를 묵었다.





아우구스부르크 바로가기 ☞ 사진 클릭









(한 없이 펼쳐지는 노란 유채와 푸른 초장, 밀밭..)

오스트리아로 넘어가기 전 뮌헨에 들렸다.
뮌헨 오는 길에도 끝없이 펼쳐진 광활한 구릉지에
노란 유채와 초록색의 목초밭 밀밭이 감탄을 자아내게 하더니
시내에 들어서자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도로위에 거미줄처럼
쳐져있는 전선들.. 우리는 없앴는데 여기는 전차가..









(호프브로이하우스와 곳곳에 펼쳐져 있는 노상 카페)

매년 9월 말에서 10월 초에 걸쳐 맥주축제
'옥토버페스트(Oktoberfest)'가 성대하게 열리는 뮌헨.
바그너로 인해 음악과 무대의 도시라는 명성을 얻었던 뮌헨.
아돌프 히틀러가 나치스당에 가담하여 그 지도자가 되었던 곳도 바로 이곳.
2차대전 때 연합군의 공습을 받아 도시가 폐허로 변하고
절반 가까운 건축물이 파괴되었지만 모두 복구되고 지금은 독일에서
제일 살기좋은 도시로 손꼽히는 뮌헨이라는데.. 신시청사
광장에서 자유시간 20분 갖고 다시 떠나야 하다니..

뮌헨은 생각도 안했는데 이정도도 감지덕지지.
첨탑을 보고 교회 아니면 성당 건물일거라 했는데 예상 밖으로
뮌헨 신 시청사라 하여 또 감탄하고, 1589년 빌헬름 5세가 건축한
바이에른 왕가의 술을 만드는 주조장이었다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맥주홀 '호프브로이하우스'도 들어가 봤다.
주변을 돌다가 노상카페에서 맥주 마시는 젊은이들의 모습이 보기 좋아
사진 한 장 찍자니 스마트 폰을 주면서 먼저 한 장 찍어 달란다.
사진을 찍어주니 엄지 손가락을 치켜 세우면서 포즈를 취해 주길래
한 장을 찍었는데.. 왠걸 이 친구들.. 합석을 하자는 것 아닌가!
말도 안 통하는데 다음 장소로 이동할 시간이 되었고..
댕규! 쏘리~ 하고는 부리나게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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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츠부르크 가는 도중의 휴게소 매점 풍경)

그들은 철저했다. 2시간 운전하면 15분,
4시간 운전하면 45분간 휴식을 해야 하기 때문에
목적지가 얼마 남지 않아도 시간이 되면 가까운 휴게소에서
차를 세우고 휴식한다. 그리고 하루 8시간 이상 일을 못하고
주간 근무시간도 40시간을 초과하지 못한다고 한다.
목적지까지 데려다 주고 쉬었으면 좋겠건만 어쩔 수 없이
우리는 휴게소에서 45분간을 보낸다.

자동차 연료비를 원화로 환산해 보니
대략.. 휘발유(BENZIN) 2,303원, 디젤 2,259원,
V-Power 디젤 2,536원으로 요즘 휘발유가 1800원 대로
떨어진 우리보다 많이 비싼 것 같다.







(잘츠카머구트, 멋있는 고산들이 만든 호수가 멋있고)

장크트 길겐, 케이블카를 타고 해발 1522m의
츠뵐퍼호른 산 정상에 올라 전방의 알프스 설경과 절경의
볼프강 호수 풍경을 보고 다시 내려와 유람선을 타고 그림엽서에나
볼듯한 호수주변의 자연경관을 만끽하면서 볼프강 마을까지 간다.
아름다운 호수가 있는 장크트 길겐은 모짜르트 어머니의 고향이고
독일 헬뮤트 콜 전 수상의 여름 휴가를 보낸 곳이기도 하다.

아름다운 풍경들.., 부족한 것은 시간..
우리는 케이블카를 타고 츠뵐퍼호른 산을 오르고,
유람선을 타고 아름다운 장크트 볼프강 마을까지 갔는데..
길겐 마을 선착장 인근에 지금은 박물관이 된 모짜르트의 어머니집 등
아름다운 건물들과 볼거리가 많았는데 돌아 볼 시간이 부족했다.
또 지척에 있는 그 유명한 할슈타인도 못 보고 떠나 왔는데
내용을
정리하면서 알게된 사실들이지만 잘츠카머구트는 오스트리아 사람들과
인근 독일과 유럽 사람들이 즐겨찾는 유명한 휴양지라고 한다.
형편이 된다면 2박3일 동안 이곳만 돌아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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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적인 결혼식 장소로 유명한 미라벨 궁전과 정원)

원래 이름은 알테나우 궁전. 1606년 대주교였던
볼프 디트리히는 사랑하는 여인 살로메 알트를 위해 이 궁전을
지었으며, 그가 대주교 자리에서 물러난 뒤에는 대주교의 별궁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궁전은 18세기 초 힐데브란트라는 건축가가
개축한 뒤 '미라벨 궁전'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주변에는 아름다운 '미라벨 정원'이 펼쳐져 있어
낭만적인 결혼식 장소로도 명성이 높은데, 정원 위로
올라가는 계단은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여주인공
마리아가 아이들과 '도레미 송'을 불렀던 곳이어서
우리들에게도 친근감을 느끼게 하는 곳.









(예술의 도시, 모짜르트의 고향 잘츠부르크)

거리 곳곳에 그림을 그리는 사람,
악기를 연주하는 연주자들을 만날 수 있다.
잘츠부르크에서 가장 번화한 게트라이데 거리 9번지에 있는
노란 건물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짜르트가 태어나 17세까지 살았던
집으로 유명한 관광 명소, 지금은 모짜르트 기념관으로 사용 중인데
1층에는 모차르트가 사용했던 침대, 피아노, 바이올린, 자필 악보,
서신 등이 있고, 2층에는 유명한 오페라 '마술피리'를 초연할 당시
사용했던 것과 같은 소품들이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3층과 4층에서는 모차르트의 가족들과 잘츠부르크에서
생활하던 당시의 모습을 각각 소개하고 있고, 건물 안에는
모차르트 CD와 각종 기념품을 파는 기념품 판매점과 카페가 있다.
관람시간은 9~6월에는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 30분까지,
7~8월에는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 30분까지.

도시 곳곳에서 모짜르트 이름을 달고 있는 것을 보아서
알 수 있듯이 잘츠부르크는 모짜르트의 도시..

아래 사진은 잘츠부르크 대성당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 있는 잘츠부르크 대성당은
유럽에서 가장 큰 파이프 오르간이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774년에 건립되어 1181~1200년에 걸쳐 후기 바로크 양식으로 개축.
독일에 이르기까지 가톨릭 전파에 큰 역할을 했던 역사적인 성당.
모차르트가 이곳에서 영세를 받았으며, 어린시절 미사에 참석하여
파이프 오르간과 피아노를 연주하였고, 그의 몇 작품이 초연되는 등
모짜르트와는 매우 인연이 깊은 곳이라고 한다. 성당 실내는 대리석과
그림들로 장식되어 우아함과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성당은 제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부분적으로 파괴되었지만
1959년에 복구하였다 한다.

잘츠부르크 바로가기 ☞ 사진 클릭





(호엔잘츠부르크 성)

잘츠부르크의 전망대 호엔잘츠부르크 성을 올라가
보지 못하고 잘츠부르크를 떠나면서 제 모습을 본다.
다음에 다시 잘츠부르크에 올 기회가 생긴다면 먼저
호엔잘츠부르크 성에 올라 아름다운 잘츠부르크
시내를 살펴보고 여행을 시작할 것 같다.
공부를 하면 할 수록 모르는 것이 더 많아지듯
시간이 갈 수록 보고 싶은 것이 많아지니..









(압테나우(Abtenau!))

잘츠부르크를 시내를 떠나 잘츠카머구트 인근인
압테나우로 가는 길 차창밖으로 펼쳐지는 알프스 험준한
암봉들과 어울린 그림같은 풍경들.. 마치 꿈결속을 달리는듯 하다.
1시간 여를 달려 호텔에 도착하였는데 하늘이 붉게 타고 있다.
카메라를 챙겨 얼른 달려 나가 봤지만 간발의 차이로 일몰을
잡지 못하고 아쉬운 맘으로 둘째날을 보냈다.
 
다음날도 일출이 빨라 담지는 못했지만, 숙소 뒤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니 그림같은 풍경이 펼쳐지면서 유혹한다.
아름다운 풍경에 홀려 구릉을 넘고 돌아갈 길을 생각않고
너무 멀리까지 갔다가 가까스로 되돌아 왔다.

아! 아름다운 오스트리아!
뒤로는 설산이 배경이 되고 그 앞으로 펼쳐진 초원에는
갖가지 꽃들이 피어 있고 초원과 잘 어울리는 예쁜 집, 집들..
눈가는 곳은 온통 푸른 초원 목가적 평화로운 그림같은 풍경들,
마치 동화속 나라에 들어와 있는 듯 착각에 빠진다.
모짜르트, 카라얀, 클림트, 훈데르트 바써가 오스트리아 
사람들이라는 것이 정말 우연은 아닌 것 같다.





(Sonnenhof 주인 Rudolf Schlager와)





잘츠부르크 압테나우 바로가기 ☞ 사진 클릭









(Wien[빈, 비엔나는 영어 이름] 가는 길)

압테나우에서 빈까지 300km가 넘는 거리였지만
지루함을 느낄 사이도 없었다. 험준한 산악지대 울창한 산림과
높은 산들이 만든 그림같은 호수들을 지나면 또다시 끝없이 펼쳐지는
유채가 노랗게 핀 벌판.. 또는 수도 없이 많은 풍력발전기가 돌고
있는 차창 밖 풍경에 눈이 호사를 하고, 모짜르트의 왈츠곡들과
베토벤의 '운명교향곡', '월광소나타', '엘리제를 위하여'를 들으며
귀도 호사를 하면서 어느새 오스트리아 빈에 도착한다.





쉔부른 궁전 앞에서.. 마네킹이야 사람이야?







쉔부른 궁전과 생동감 넘치는 넵튠 분수대

쉔부른 궁전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여름궁전으로
베르사이유 궁전에 필적할 만큼 장대하고 화려하다.
프랑스 혁명 때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마리앙뜨와네뜨의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의 궁전으로 마리앙뜨와네뜨가
어린시절을 보냈던 곳. 궁전 이름은 1619년 마티아스 황제가
사냥 도중 '아름다운 샘'을 발견한데서 유래한다고..





합스부르크의 여름 궁전 쉔부른 궁전 바로가기 ☞ 사진 클릭







벨베데레 궁전, 상궁과 하궁

사보이 왕가의 프린츠 오이겐을 위해서 세워
사용하던 여름 궁전으로 오스트리아 바로크 건축의 거장
힐데브란트가 설계하여 1716년 단층인 하궁을 먼저 건축하고,
1723년 연회장인 3층짜리 상궁을 건축하였다고 한다.

현재 상궁은 19·20세기 회화관으로 사용중이고,
하궁은 오스트리아 미술관으로 사용중인데 이는 오이겐 공이
죽은 뒤 합스부르크가에서 벨베데레 궁전을 매입해 미술품을
수집 보관해 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두 궁전은 잘 정돈된
프랑스식 정원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다.

클림트의 '키스(kuss)'를 보러 벨베데레(상궁)에 들렸다.





(벨베데레 궁전에 소장되어 있는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 / 클릭하면 크게 펼쳐짐)

설명이 필요없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벨베데르 궁에 소장되어 있는
구스타프 클림트의 대표작으로 자신과 플라토닉 사랑을 나눈
애인 에밀리를 모델로 하여 영원한 사랑의 이미지를 표현한 것으로
해석되는 명작. 이 작품은 벨베데레 궁을 떠나 전시된 적이 없어
진본을 보기 위해서는 벨베데레 궁을 직접 찾아가야 볼 수 있다.
현재까지 가장 많은 모작과 복사가 된 작품이지만 앞으로도
이 작품이 경매되거나 판매될 일이 없다고 봐야할 것 같다.
왜냐면 오스트리아 정부에서 이 작품을 영웅적 소유물로 보고
국가에서 소장하는 것이기 때문.

오스트리아 바로크의 아름다움을 보여 주는
벨베데레 궁전(상궁)도 눈 부셨고, 클림트의 제자 에곤 쉴레,
한스 마카르트 등 오스트리아 예술가들의 작품들과 클림트의
키스를 비롯한 많은 작품들을 볼 수 있는 행운이...





벨베데레 궁전 바로가기 ☞ 사진 클릭







(빈 시내 모습)









(성 슈테판 대성당[Stephansdom])

모차르트의 화려한 결혼식과 초라한 장례식이 거행된
성 슈테판 대성당은 빈의 상징이자 혼이라고 일컬어 진다.
바로크의 도시 빈에서 최고의 고딕성당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슈테플'이라는 애칭을 가지고 있는 137m의 남쪽 탑은
고딕형 최고 건축기술로 유명하다.





성 슈테판 대성당 바로가기 ☞ 사진 클릭









(그린칭 마을에서 도심속 시골의 정취를 느끼며 호이리게를..)

오늘 압테나우에서 빈으로 이동하여 빈 시청사,
성 슈테판 대성당, 오페라 하우스, 쉔부른 궁전 등을 돌아 다니다 보니
어느새 저녁 때가 되고, 저녁을 먹으러 빈 외곽 그린칭 마을로 이동하여
색다른 분위기에서 오스트리아 전통음식과 함께 먹은 '호이리게'가 별미였다.
'호이리게(Heurige)'는 '그 해에 수확한 포도로 만든 화이트 와인'을 말하는데..
소시지와 구운 돼지고기, 닭고기, 감자와 샐러드가 나오면 '호이리게'는
별도로 주문을 하여야 한다. 식사를 하는 동안 2명의 악사가 테이블을 돌며
바이얼린과 어코디온으로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에 이어 '아리랑', '만남',
'소양강 처녀' 등 귀에 익은 멜로디들을 연주하며 흥을 돋군다.
오래 전부터 이어오는 전통이라나..
테이블당 5유로 정도의 팁은 필수. 









(빈에 왔으니 음악회에도 가 봐야지)

그링칭 마을에서 '호이리게'와 곁들인 저녁식사를 마치고
음악회장으로 갔는데.. 아뿔싸! 우리가 찾아간 곳은 다른 음악회장.
예약된 음악회장을 찾아 가면서 국회의사당 앞도 걸어보고 트램도 타보았으니
오히려 전화위복이라고 해야할지.. 음악회장은 관중들로 만원. 1시간 반 정도 진행된
공연은 경쾌한 왈츠곡들과 중간에 단막의 뮤지컬도 곁들여 시간 가는줄 몰랐지만
아는 곡은 스트라우스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과 서너 곡 정도.
12만원짜리 음악회인데 팜플렛이라도 한 장 나눠 주었더라면..
경쾌한 선율에 즐겁고 뜻깊은 시간이 되었다.

호텔로 돌아 오는 길 택시를 탔는데.. 택시기사는 좀 특이한
오스트리아판 기러기 아빠! 사우스코리아에서 왔다고 하니 반기며
부인과 아들, 며느리는 모두 미국 GM에 근무를 한다고 자랑.
김치와 아리랑은 알고 있지만 나이탓인지 강남스타일은 몰랐다.
나이를 물어보니 나보다 1살 적었는데 한국사람들은 나이보다 젊게
보인다고 했다. 빈에서 한국을 잘 아는 택시기사를 만난 것도
기분좋은 경험.. 이렇게 빈에서 하루가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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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에서 헝가리로.. 월경)

EU(유럽연합 / European Union)
유럽의 정치·경제 통합을 실현하기 위하여
1993년 11월 1일 발효된 마스트리히트조약에 따라 출범.
1994년 1월 1일 이후 사용하기 시작한 EC의 새로운 명칭의
연합기구. 2011년 6월 30일 크로아티아가 가입하여 현재
회원국은 모두 27개국. 올해 7월이면 크로아티아가 28번째로
가입할 예정. 경제공동체를 넘어 정치공동체를 지향하고 있다.
통화는 이미 2002년 1.1일부터 유로화를 사용하고 있으며
나라간 국경은 검문없이 바로 통과하고 있다.









도시의 중심에 아름다운 도나우 강이 흐르고,
지하에는 온천이 흐르는 부다페스트는 일찍이 물의 도시로
잘 알려져 있다. 특히, 도나우 강의 수려한 경관은 부다페스트를
'도나우의 진주', '동유럽의 장미'라는 찬양사를 받는다고 한다.
부다페스트는 원래 도나우 강을 사이에 두고 서쪽의 부다(Buda)와
동쪽의 페스트(Pest)지구로 나뉘어 있었다. 그러다가 다리가
놓이면서 양쪽의 교류가 활발해졌고 결국 하나로 합쳐 도시이름도
부다페스트가 되었다고 한다. 896년 동양인의 후예 마자르족이
이곳에 국가를 세웠으나 1873년에 부다페스트가 탄생했으니
부다페스트는 매우 젊은 도시다. 마자르 특유의 건축과 문화가
도나우 강과 어우러져 더욱 장대해 보이는 도시풍경으로
여행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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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다 왕궁 바로가기 ☞ 사진 클릭





성 이슈트만 성당 바로가기 ☞ 사진 클릭









빠리의 세느강 야경과 함께 세계 3대 야경중 하나라는
부다페스트 도나우강 야경을 배를 타고 보는 모습이 정말 아름답다.
네온사인같이 화려하거나 난잡하지도 않고 격조높은 황색의 조명이 들어오니
온 세상이 황금으로 변한듯 하다. 황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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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째, 이 날은 400km를 이동하였는데..)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아침을 먹고, 타트라 산맥을 넘어
슬로바키아에서 점심을 먹고, 저녁은 폴란드 크라쿠프에서..

우리의 운전기사는 순박한 슬로바키아인 미하엘
여행 내내 함께하면서 나와 친해졌는데.. 둘째날 아침 웃으며
"헤이 미하엘 도그레 다노" 했더니 씩 웃으며..
영어를 모른다는 친구가 친절하게 "도브레 굳, 라노 모닝"하면서
바로 잡아 주는 것 아닌가! 그 날부터 아침에 만날 때 '도브레 라노' 했더니
말이 통하지 않았지만 많이 친해져 손짓발짓하며 의사소통을 다했다.
나중에는 "떼쉬 마", 헤어질 때 "아호이" 라는 인사까지 하니 좋아라 한다.
슬로바키아에서 기름을 넣을 때 연료 탱크에 700리터까지 들어간다며
둘이 한바탕 웃었더니 일행들이 의아해 한다.

여행은 날씨가 도와 주어야 하는데 유럽 날씨답게
흐린 날씨에 비가 자주 왔지만 감사하게도 이동할 때는
비가 쏟아붓다가 차에서 내리면 언제 그랬냐는듯 날씨가
좋아진다. 가는 날까지 이런 상태가 유지되기를..







중앙광장의 시계탑과 성 마리아 성당 내부




옛 직물공장 1층의 상점들






(코페르니쿠스, 요한 바오로 2세 등을 배출한 야기엘론스키 대학)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배경이 된 곳!
폴란드 문화와 교육의 중심지 크라쿠프라는 이름은 낯설지만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배경이 된 곳.
뿐만 아니라 코페르니쿠스와 요한 바오로 2세가 다녔다는
유럽에서 두 번째로 역사가 오래된 야기엘론스키 대학이 있는 도시.
크라쿠프는 1138년 수도로 지정된 후 바르샤바 천도 때까지 558년간
폴란드의 수도였으며,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독일군이 유난히 많이
주둔해 있던 덕분(?)에 사적의 파괴 등 전쟁 피해를 면할 수 있었다고..
폴란드에서 유일하게 중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도시로
1978년에 유네스코가 지정하는 세계 12대 유적지로 선정되었다.
규모는 작지만 볼 수록 역사의 흥취를 자아내는 크라쿠프는
오늘날 폴란드 제일의 관광도시가 되어 인기를 끌고 있는
매력있는 여행지이다.





크라쿠프 바로가기 ☞ 사진 클릭









암염으로 만들어진 지하의 별세계 소금 광산

700년 동안 폴란드 왕국의 중요한 수입원이었던
소금광산 내부에는 암염채굴이 끝난 2000여 개의 빈 방이
있다는데 갱도의 길이가 무려 300㎞에 이른다고 한다.
13세기부터 채취해 오던 소금생산이 1996년 중단되었으나,
광산노동자들이 암염채굴을 한 후 빈 공간에 소금으로 직접 남겨 놓은
놀라운 예술작품들로 이제는 연간 80만 명이 찾는 관광명소가 되었다.
800개의 계단을 내려간 지하 공간에는 예배당, 운동장, 조각가상 등
많은 작품들이 있지만 눈길을 끄는 공간은 지하 100m 지점에 있는
'축복받은 킹가 교회' 이 예배당은 헝가리에서 폴란드로 시집오면서
소금광산을 지참금으로 가져왔다 하여 마을의 수호신처럼 숭배되는
킹가 공주를 위한 공간. 제단과 촛대는 물론, 성서의 중요 장면들을
묘사한 부조와 기독교 성인들의 조각상.. 특히, 소금으로 만든
아름다운 샹들리에와 최후의 만찬을 비롯한 섬세한 부조들은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최후의 만찬은 1978년 유네스코 자연문화유산
세계 제1호로 지정되는데 기여했다고 할 정도

예배당 외 1493년 코페르니쿠스의 방문을 기념해서 만든
'코페르니쿠스 방', 킹가 공주의 전설을 새겨놓은 '전설의 방',
전설 속의 난쟁이들이 일하는 모습을 묘사한 난쟁이 조각상,
왕의 조각상 등 있다. 미로처럼 얽히고 설킨 좁은 갱도를
따라가다 보면 만나는 아름다운 방들과 내부의 정교하기
이를 데 없는 조각작품들은 경이로움 그 자체다.





비엘리치카(소금광산) 바로가기 ☞ 사진 클릭





(6일째, Galicia Hotel에서 한국에서 온 팀을 만났다)











아우슈비츠의 폴란드명은 오슈비엥침.
아우슈비츠는 폴란드 남부 비엘스코주에 속해있는
도시명으로 아우슈비츠가 세계적으로 알려진 것은
1940년 6월에 나치 친위대(SS) 총사령관 하인리히 힘믈러가 세운
사상 유례가 없는 '인간도살장'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있었기 때문.
수용소 건물은 붉은 벽돌의 단층건물로 28동이 3열로 줄지어 있다.
이곳은 도심과 떨어져 있고 가까운 곳에 철도가 지나고 있어
수용자의 대량수송에 효과적이 입지선정의 이유였다.
나치는 1941년 11월 아우슈비츠에서 3㎞ 떨어진 비르케나우에
두번째 수용소도 세웠다. 약 150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1947년 7월 폴란드 의회가 박물관으로 영구보존키로
결의하여 현재는 박물관과 전시관으로 꾸며졌고 1979년
유네스코는 이곳을 세계유산으로 지정하였다.

독일이 전범국으로 저지른 만행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이지만 지금까지도 2차대전 전범들을 끝까지 추적, 단죄하며,
지난 잘못된 과거역사를 뉘우치고 속죄하며 피해를 보상하고 있는
독일의 자세에서 비극속에서도 인류의 희망을 볼 수 있지만,
똑같은 전범국으로서 이웃나라들에게 만행으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것도 모자라 A급 전범들까지 야스꾸니에 합사시켜 놓고
호국의 영령이라며 수상과 내각이.. 의회 의원들이 참배하는 나라.
사죄와 보상은 고사하고 만행의 역사마저 부인하는 나라.
그런 일본의 모습에서 인류의 절망이 느껴진다.
왜 아우슈비츠에서 일본이 오버랩되는 걸까?





아우슈비츠 바로가기 ☞ 사진 클릭





(체코로 넘어 가면서 들은 자라사테의 '지고이네 바이덴')

집시(Gipsy)!
원래는 인도 지방에서 살던 사람들로 유랑생활을 하면서
11세기 경에 페르시아 지방으로 이동한 후, 중동 지방을 거쳐
16세기 경에는 유럽의 남부지방으로 퍼지게 되었으며,
차츰 유럽 전 지역에 두루 퍼져 살게 되었다고 한다.

그들은, 유랑생활을 하면서 생계 수단으로
직업을 가지고는 있었지만 항상 떠돌이 생활을 하다보니 때로는 구걸,
도둑질, 야바위꾼 등에도 관련이 되어 이들에 대한 평판이 좋지않게 되고,
바람직하지 못한 이방인으로 인식되어 도처에서 많은 편견와 차별을 받으면서
살게 된다. 2차대전 때에는 그들도 유태인과 함께 나치수용소에서 50만 명이나
처형되었다. 이들은 대대로 유랑생활을 하면서도 그들끼리 집단 생활을 하며,
자신들의 정체성과 전통을 잘 유지하여 나가고 있다고 한다. 글은 없지만
인도계통의 Romany라는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Gypsy라는 명칭은, 이들을 처음 본 유럽사람들에게 모습이
'이짚트에서 온 사람들 같아 Egyptian(이짚션)이라고 부른데서
유래되었고, 보헤미안은 1427년 보헤미아에 최초 출현하여 그 지방에
살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현재 집시의 숫자는 전 세계에 6백만 명
정도로 추정하며 미국에 2만 명 정도가 살고 있다고 한다.

집시에 대한 일목요연한 설명을 듣고
사라사테의 '찌고이네르 바이젠'을 감상하니
그들의 애환과 슬픔이 느껴지는듯 하다.













체코 중서부 블타바강(몰다우강) 연변,
라베강(엘베강)과의 합류점 가까운 곳에 중세의 모습을
고이 간직한 채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 체코의 수도 프라하.
백탑의 도시, 북쪽의 로마, 유럽의 음악학원 등 수 많은
애칭만으로도 프라하가 유럽 문화의 중심지이자 유럽인의
사랑을 듬뿍 받아 온 아름다운 도시임을 짐작케 한다.
보헤미아 왕국의 수도로 1000년이 넘는 역사를 간직한
고도답게 중세의 기풍이 곳곳에 서려 있다.
1968년 1월의 '프라하의 봄'으로 잘 알려진
프라하는 1993년 1월 1일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분리되어 체코의 수도가 되었다.

프라하는 도시 전체가 박물관이라고 할 만큼
다양한 역사적인 건물들이 제 모습을 뽐내고 있다.
이 때문에 1989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
해마다 1억명의 관광객이 프라하를 찾고 있다고 한다.
세계 6대 관광도시에 이름을 올린 프라하는 2004년
체코의 EU가입을 계기로 더욱 발전하고 있다.





프라하 구시가 광장 바로가기 ☞ 사진 클릭











프라하 구시가지의 블타바강 맞은편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프라하성은 "9세기 중엽 보르지보이 왕이
건설한 것을 14세기 들어 카를 4세가 지금의 모습으로 완성했다.
길이 570m, 너비 128m의 프라하성은 9세기 이후 통치자들의 궁전으로
사용된 로브코위츠 궁전 외에 성 비투스대성당, 성조지바실리카,
성십자가교회 등 3개의 교회와 성조지수도원 등 다양한 부속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처음 건설될 당시에는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졌으나,
13세 중엽에 초기 고딕 양식이 추가되고, 이어 14세기에는 프라하
출신인 카를 4세에 의해 왕궁과 성십자가교회 등이 고딕 양식으로
새롭게 건축되면서 체코를 대표하는 상징물이 되었다.
프라하성에는 문이 셋있는데.. 흐라트차니 광장과 접한 정문과
말라스트라나와 면한 동문, 성 정원 쪽으로 나가는 북문이 있다.
각 문을 지키고 있는 위병들이 1시간에 한 번씩 교대를 하는데
매일 12시 정각 정문에서 화려한 위병 교대식을 펼친다.

1918년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이 성립되면서
대통령 관저로 사용중이며 성의 일부는 대통령 집무실과
영빈관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정문을 들어서면 국빈이
방문할 때 맞이하는 제1정원이 나오고, 제2정원으로 들어가면
17세기에 만든 바로크 양식의 분수를 볼 수 있다. 제2정원
오른편에 위치한 건물이 대통령 관저. 제3정원으로 들어서면
성 비투스 대성당을 만난다. 좀더 위쪽으로 들어가면
성 이르지 교회와 황금 소로를 볼 수 있다.

프라하성에는 정교한 조각과 높이 솟은 첨탑,
화려하고 다채로운 장식은 중요한 역사유적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성의 아름다운 야경을 보러 온 관광객들로 넘친다.
종일을 둘러보아도 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볼거리가
풍성한데 고작 2시간 정도 머물다 또 카렐교를 보러
떠나왔으니 맛도 제대로 못 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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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램을 타고 카를교로..)

강 서쪽의 프라하성과 동쪽의 상인거주지를 잇는
최초의 다리로 보헤미아왕 카를 4세 때(1346∼1378) 건설되어
카를교라 불린다. 다리 양쪽에는 탑이 탑이 있고 블타바 강을
가로질러 16개 아치가 떠받치고 있는 유럽 중세 건축의
걸작으로 꼽힌다. 17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제작된
카를교는 현존하는 석교 중 가장 아름다운 다리로 오랜
역사만큼 사연도 많다고 한다.
카를교는 보행자 전용 다리로
항상 사람들이 붐비는데다 음악과 퍼포먼스를 하는
예술의 다리로 악사들과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들,
마리오네트 인형극을 하는데다 각종 노점상까지 가세하여
늘 혼잡한 분위기.., 일몰 무렵 풍경은 정말 로맨틱하고
다리 건너편에서 보는 카를교와 프라하성의 아름다운
야경은 프라하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사실 이 곳의
야경을 담아 보려고 트라이포트까지 챙겨 갔는데
사정이 여의치 않아 야경은 담지 못했다.





카를교 바로가기 ☞ 사진 클릭





(무장경찰 출동)

시간날 때마다 소매치기 조심하라고 하더니
여기 한 건 터졌나 보다. 무장한 경찰이 출동했다.

 

 







(호텔 가는 길 창밖 풍경, 국립박물관과 댄싱 하우스)









(보헤미안의 보석 체스키크롬로프 가는 길의 풍경들)









높은 언덕위에 영주의 성이 자리잡고 있고,
그 아래로 빨간 지붕 집들이 평화롭게 펼쳐져 있다.
그리고 희한하게도 마을 전체를 S자 모양으로 휘감고 흐르는
볼타바 강. 이것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중세시대의 마을
체스키크롬로프의 풍경이다. 14세기부터 17세기까지 전성기를
누렸으며, 번영과 더불어 프라하 성에 버금가는 체스키프롬로프성을
건설하게 되었다. 이후 쇠락과 동시에 이 마을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고 1990년대까지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깊은 산속에 있는 이 작은 마을을
잠에서 깨운 건 달콤한 왕자의 키스가 아니라 모험심에
불타는 배낭족들이었다. 전 세계에 다시 얼굴을 내민
보헤미아의 숨은 보물은 중세의 전통과 문화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 1992년에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고
오늘날 수 많은 관광객을 불러들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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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로만틱 가도의 하일라이트 로텐부르크로..)











21세기에 만나는 중세도시, 로텐부르크!

성벽으로 둘러쌓인 거리와 중세풍의 집들이 즐비하여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여행을 온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게
한다. 타우버강의 계곡에 자리잡고 있는 '로텐부르크'가 문헌에
처음 등장한 것은 9세기에 '로텐부레로'라고 표기되어 있다고 한다.
슈타우펜왕조 때 지은 요새를 중심으로 도시가 발전하였다고 한다.
자유제국도시로 교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다가
17세기 30년전쟁 이후 쇠퇴하였다고 한다.

13~16세기에 지은 시청사에는 높이 60m의 종탑이
있고, 고딕 양식과 르네상스 양식이 복합적으로 혼재한다.
성 야콥교회에는 틸만 리멘슈나이더의 나무조각 작품인
'최후의 만찬'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도시의 약 40%가 파괴되고
소실되었으나, 이후 완벽할 정도로 중세도시를 복원시켜 놓은 곳으로
오랜 시간을 뛰어 넘어 그 가치를 인정받아 '중세의 보석'이라 불리는
우리나라의 경주같은 고도이다. 로텐부르크는 납작한 돌을 깔아놓은
구시가 보도가 이채로우며, 특히 겨울 크리스마스 시즌을 맞아
관광명소로서 빛을 발한다는데 그것은 이 곳에서 성대하게 열리는
크리스마스 마켓때문이라고.. 매년 수 많은 관광객이
로텐부르크를 다녀간다고 한다




로텐부르크 바로가기 ☞ 사진 클릭









(프랑크푸르트로..)







(집으로..)







(노랑풍선을 타고 동유럽 8박 9일간의 여정)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 이번 여행에서 절감했다.
모르면 그냥 지나칠 수 있는 것도 알면 찾아 볼 수 있고, 
숨겨져 있는 내용과 의미까지 파악하면 하나의 역사가 되는데 말이다. 
사실, 동유럽에 대해서 별로 아는 것이 없다보니 눈 앞에 보이는 것들에만 놀라며
감탄하기에 정신없었던 것 같다, 알고 있던 것들마저 얼마나 거리감있는 식이었는지..
체코의 모라비아 왕조, 폴란드의 야기에우오 왕조, 정략결혼으로 중부유럽을 지배한 
합스부르크 왕조의 역사와 문화 유적. 모짜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건축가 오토바그너,
훈드르트 바써의 고향이 오스트리아라는 것이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조금은 알듯하고,
보헤미안의 음악과 문화에 녹아있는 삶과 애환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생각같아서는 시간을 내어 한 달 동안만이라도 오스트리아, 체코, 폴란드를
여행해 보고 싶다. 이번 여행을 통해서 동유럽을 조금이나마 바로 알게 되었고
문화적인 충격을 받으며 자신을 돌아보는 좋은 계기가 된 것 같다.
 
이번에 유럽의 중부지역을 3,000km 정도 이동한 것 같다.
주마간산, 아니 말보다 빠른 차로 이동하다 보니 제대로 보고 느꼈다기 보다는
빠르게 책장을 넘기면서 다음에 정독할 곳을 갈무리 해 놓은 격이랄까.
유럽을 왜 이제사 왔을까? 젊을 때 (아니 어릴 때) 경험했더라면 생각의 폭도
넓어져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도 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지금부터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니까!
 
"여행은 그대에게 세가지 유익함을 준다.
첫째는 타향에 대한 지식,
둘째는 고향에 대한 애착,
세번째는 자신에 대한 발견이다"
- 브하그완 -
 
7박 9일간 보고 들으며 감격하고 느낀 것들은 많은데
 조그만 사각프레임에 담고 무딘 글로 표현하려는 안타까움.
 호랑이를 보고 고양이를 그린 꼴이 된 것 같다.
세부적인 내용은 시간 갖고 차차 정리해야 겠다
 
 
 

Smetana(1824~1884)
symphonic poems (6), JB 1:112
Ma Vlast(My Country) Vltava (The Moldau)
Piano for Four Hand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