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릉 순례 (12) : 광해군묘 ~ 연산군묘

 


답사지 : 광해군묘(光海君墓), 경기 남양주시  ~ 연산군묘(燕山君墓), 서울 도봉구 방학동
일자 : 2009년 10월 18일 (일)
날씨 :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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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광해군묘~연산군묘, (13)광릉,
(14)장릉 


연산군(燕山君墓)과 광해군(光海君)에 대하여
 

 

제10대 연산군

제15대 광해군

생몰년도

1476년~1506년 (31세)

1575년~1641년 (67세)

재위기간

1494년(19세즉위)-1506년 (13년)

1608년(34세즉위)~1623년 (16년)

부모

성종과 폐비 제헌왕후 윤씨 (성종의 장자)

선조와 공빈 김씨 (선조의 2남)

왕비 및
자녀

.폐비 신씨(영의정 신승선의 딸)와
 후궁 3명(장녹수포함)
.4남2녀 (폐세자 황, 창녕대군 포함)

.폐비 문성군부인 유씨(판윤 유자신의딸)와
 후궁 9명
.1남 1녀 (폐세자 질 포함)

즉위
과정

.3세때 생모 폐비 윤씨가 사사되고 정현왕후(중종  의 모후)의 아들로 자라남.
.7살 때 세자로 책봉
.19세때 즉위


 

.선조는 전쟁 중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함
 -임진란 당시 정비의 소생 없음
.전쟁후 정비소생인 영창대군으로 세자를 교체할 생  각이 있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함
.승하시 광해군에게 선위교서를 내림
.세자책봉 때부터 동인과 서인 사이의 대립이 시작  하여 반정 때까지 계속됨

성품

.학문을 즐겨하지 않고 분별력이 부족함 
.성격에 광포한 면이 있고 횡음을 즐김
-즉위후 성종의 두후궁을 죽이고 조모 인수대비   구타 등
-채홍사, 채청사를 파견하여 처녀 차출 
-궁중에 기생을 불러('흥청'이라함)향연

.왕자들 중에서 가장 능력이 뛰어남
.서자 신분으로 왕위에 올라 왕권강화와 왕위를
 지키는데 대해 민감하고 단호함
.명분보다는 실리를 중시
.의연한 성품(강화, 제주에 위리안치 후에도 18년
 동안 살아감)

치적

.초기에는(무오사화전) 관료의 기강을 바로잡고  인재를 등용함
.왜구를 격퇴하고 북방변방을 튼튼히 함
.사창,상평창등을 설치하여 빈민을 구제하고
 국조보감(國朝寶鑑)등 서적을 완성

  

  

  

.임진왜란, 정유재란 기간 중 선조를 대신하여 많은  공을 세움 (군사모집,병기조달,민심수습 등), 백성  들의 신망을 받음
.즉위후 왕권강화, 전후복구, 민심안정
.당쟁의 폐해를 억제하려 노력
.서적편찬, 사고정비,
 -신증동국여지승람,용비어천가,동의보감
.선혜청을 두어 대동법 실시
.창덕궁 중건,경희궁,인경궁 건립
.국경방비와 후금과 양면 실리외교 폄
.일본과 외교재개 및 조선인포로 송환

 반정 및
주도자

.중종반정
.명분 : 악행과 폭정
.성희안, 박원종,유순정 등

  

.인조반정
.명분 : 명에대한 사대를 거부하고, 계모 인목대비를  유폐
.능양군(인조)과 서인들(이서,신경진,이귀,  김유,이  중로,최명길 등)

반정
원인

.사화 및 불만세력들의 원한과 파벌간 권력다툼
-무오사화 : 김일손등 많은 신진사류처형
-갑자사화 : 윤씨 폐비시 동조자 처형
-비판자들의 숱한 처형
-여념집 부인겁탈, 사냥에 방해되는 민가철거   등으로 민심 이반
-경연을 없애고 사간원 폐지
-학문탄압과 언문 탄압
-조모 인수대비와의 불화


 

.사대보수세력인 서인들의 집권세력인 대북파에
 대한 쿠테타
-즉위후 서인들 숙청에 대한 원한
-친명사대주의세력인 서인들은 명나라와의
  실리외교에 불만
.왕실내의 원한과 불화 
-동복형 임해군을 유배후 죽임
-즉위 5년후,대북파의 요청으로 영창대군을 폐서인   하였다가 이듬해 죽이고, 인목대비의 부 김제남
  가족도 죽임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후궁으로 격하
.전란후 무리한 궁궐복원으로 민심이반

폐위
이후

.연산군은 강화에 유배, 그 해에 31세로 병사
.장녹수등 후궁은 투석사형
.네 아들 모두 반정 직후 사사(장자 황 나이 11세)
-일설에 의하면 반정세력들이 중국의 허가를
  받기위해 연산군을 서둘러 독살하고 그 아들들   도 폐위 얼마되지않아 사사했다고 함
.페비 신씨는 폐위후 32년을 더 살다가 66세에
 사망
.중종은 살아남믄 공주옹주는 잘 대했다고 함.    

.광해군은 강화에 유배, 후일 제주도로 옮겨짐
.폐비는 곧 홧병으로 죽고, 폐세자 질과 폐세자빈은  탈출 실패후 자결
.폐세자 질은 아주명석하여 장차 성군감이었다고 함
.광해군은 혼자서 18년을 더 살다가 67세까지 천수  를 누리고 죽음.
.죽기까지 반정세력과 인목대비 측의 살해기도가
 여러 차례 있었으나 신하나 주변의 도움으로 화를  면함. 

연산군묘(도봉구 방학동, 사적 362호)

 광해군묘(남양주시, 사적 363호)

기록

연산군일기,중종실록, 연려실기술 등

 인조실록,광해군일기 등

 후세
평가

.즉위초 이외에는 대부분 좋지 않은 평가
.두번의 사화는 사림파와 훈구파간의 파벌다툼,
 임사홍 등의 꾐에 젊은 연산군이 끌려든 점도 있  기는 함.
.연산군의 실정을 빌미로 불만세력의 쿠테타의
 성격도 있음, 
.폐비 윤씨와 관련한 동정론도 있음.
.반정세력에 의해 일부 과장했다고 하더라도
 광포한 행동과 폭정의 잘못은 큼
.연산군의 후예로 왕통이 이어지지 않은 것이 조  선조에 다행이었을 것임

.임진난 당시와 전후 복구, 외교면에서 많은 치적을
 쌓음
.붕당 간의 원한과 세력다툼속 에서의 희생
.광해군 이후 나라가 더 혼란해짐
-집권한 서인은 친명배금을 내세움으로서후일 병자  호란, 정묘호란의 빌미가 되고, 인조는 삼전도의  굴욕을 당함
-이괄의 난으로 서울이 함락되는 등 혼란
.결과적으로 능력 있고 치적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조정내의 불화와 원한을 가진 세력의 반정을 막지  못함


유적관리에 대한 유감

조선왕릉 42기(연산군묘, 광해군묘 제외)중 남한에 있는 40기가 세계문화유산에 등제되었으며, 이들은 동구릉, 서오릉 등 18곳에 분산되어 있다.
지난 6월에 시작한 나의 조선왕릉 순례도 그리 특별하지 않는 능을 빼고는 대충 마무리되어 간다.

이번의 답사지는 폐위된 왕이기에 '능'이라 불리지 못하고 일반인과 같이 '묘'라고 불리우는 연산군과 광해군의 묘이다.
무릇 역사는 살아남은 자, 승리한 자의 기록이고 해석이기에 이유야 어찌됐건 폐위되어 쫓겨난 왕의 무덤을 제대로 만들어 주지 않았으라라는 것은 쉽게 짐작이 가지만, 많은 세월이 지난 지금 그 무덤이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보존되고 있는지는 늘 궁금하였다.

그리고, 이번 순례를 시작하기 전에도 꼭 가고 싶었던 곳은 태조, 태종, 세종의 릉 등 대표적인 왕릉을 제외하고는
단종릉, 연산군묘, 광해군묘, 장희빈묘, 페비윤씨묘 등 영화나 드라마, 소설 등을 통해서 어릴 때부터 많이 듣고 이야기되어 오던 무덤이었다. 아마 다른 사람들도 비슷하리라. 
  

그 곳 중에서 이번에 다녀온 곳이 광해군묘와 연산군묘인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문화재 보존과 관리에 대하여 완전 실망이고 유감이다.

1) 우선, 묘역이나 구성 석물들이 오랜 기간동안 방치되고 제대로 관리되지 않아 훼손이 심하다.
2) 묘역자체가 좁고 초라할뿐더러 왕의 묘에 걸맞는 주변공간의 조성과 관리가 매우 부실하다.
3) 다른 왕릉에 비해 문화재관리기관의 관심이 별로 없는 것 같고, 관람공간, 진입로나 주차공간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방문이 힘들다.

여기서, 조선시대에 조성한 묘의 형태나 석물구성들을 바꾸라는 말이 아니다.

묘 차체는 조선시대에 만든 그대로 두더라도. 묘역 주변은 현대인들이 탐방하고 역사나 문화를 체험할 수 있도록
다른 왕릉에 버금가게 시설을 만들고 관리해 달라는 것이다.

그리고, 투자나 관리 수준의 기준이 될 묘의 역사적 가치도 현재시점에서 볼 때는 일반 왕릉이나 폐위된 왕묘나 다를 게 없다.
사전에 보니.
문화재는 "문화적 가치가 있다고 인정되는 인류 문화활동의 소산"이고
사적은 "
역사상 중대한 사건과 시설의 자취"로 되어 있는데
겨우 9개월 동안 재위한 인종이나, 1년 2개월 동안의 예종에 비해, 13년을 재위한 연산군과 16년을 재위한 광해군이
오히려 더 중요한 역사적 인물이고 훨씬 더 가치가 큰 사적일 것이다.

그리고 광해군의 치적을 요즘 잣대로 보면 조선 왕들 중에서 상위 30%에는 충분히 든다.
또, 일반 시민들에게도 관심이 크고 찾아가보고 싶고 이야기할 소재가 많은, 즉 우리의 삶을 다양하게 해주고 역사에 흥미를 가지게 해주는 왕으로 치자면 연산군과 광해군을 따라갈 왕이 어디 있을까?

그리고, 요즘 젊은이들 계산으로 말해도 그렇지, 
인기있는 TV 드라마 한편 잠시 찍은 곳도 갖은 치장을 하고 돈을 퍼붓든데,
연산군, 광해군도 영화, 드라마, 소설 등에 그렇게 많이 등장시켰으면 그 무덤에도 그만큼 관심을 가지고 보존해주어야 계산이 맞지 않을까 (출연료도 안주면서 말이다)... 


패망한 나라든 패자의 유적이든 현재의 시점에서 보면 똑 같이 소중한 우리의 역사고 유적이다..
광해군묘와 연산군묘도 다른 왕릉에 못지 않게 묘역 주변을 넓히고 잘 조성하여, 시민들이 자주 찾아가게 하고 역사에 흥미를 가지게 하고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현 위치에서 힘들면 천장을 해서라도.
.



광해군묘(光海君墓)


광해군묘(光海君墓) 개관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에 있는 조선 제15대 왕 광해군(光海君)과 문성군부인(文成郡夫人) 유씨의 묘 (사적 제363호).
쌍분(雙墳)형식으로 곡장(曲墻)안에 두 무덤 앞에 혼유석·향로석·비석이 각각 설치되어 있다. 망주석 1쌍, 문인석 1쌍, 장명등 1개의 석물이 배치되었으며, 왕릉에 있는 난간석, 양석,호석, 무인석 등은 없어 초라하다. 광해군묘 뒤쪽으로는 형 임해군(臨海君)과 생모 공빈(恭嬪) 김씨의 무덤 이 있다.



사진 및 메모

광해군묘는 단종비의 능인 사릉을 관리하는 사릉관리소의 관할이다.
사릉에 들렀다가 네비게이션에 "광해군묘"를 치니 왔던길로 잠시 되돌아와서 좁은 시골길로 들어간다.
그리고 곧 "영락교회 공원묘지" 대문속으로 들어간다.
 

영락교회 공원묘지 대문을 통해 광해군묘로 간다. 
묘역 쪽은 분명 국유지일텐데 웬 교회 공원묘지가 출입을 통제하고 있담?
자세한 영문은 모르겠지만(도로를 교회에서 만들었거나) 입구부터가 기분이 찜찜하다.

 


꼬불꼬불 오솔길을 올라가다 보니 조그만 "광해군묘" 표지판이 나온다.
제대로 보이지 않아 처음에는 표지판을 놓쳤다가 공원묘지에서 되돌려 왔다.
주변에는 주차시설도 없다. 노견에 주차를 한다.
"누가 찾는 사람이 있어야 주차장을 만들지요"라고 하겠지.
"주차장을 만들고 시설을 좀 정비해 보시요 찾는 사람이 많아 질테니" 라고 말해주고 싶지만
주변에는 아무도 묘를 돌보는 사람이 없다.

들어가는 입구도 따로 없다. 안내판 옆의 철문을 슬쩍 밀면 들어간다.
찾아온 방문객에게는 "뭐 이렇게 허술하게 해놓았지 그래도 왕의 묘인데"라는 생각이 들게하고
묘를 훼손하기 위해 침입한 사람이 있다면 "이거 뭐 누워서 떡먹기군" 이라고 할법하다.

 


길 같지도 않는 산비탈로 잠시 내려가니 쌍능형식의 봉분이 나오는데
이곳이 바로 조선을 16년을 통치한 광해군의 묘이다.  
묘 앞에는 간딘힌 설명판이 있는데 이것이 후대에 와서 특별히 설치한 구조물의 전부이다

1년도 안된 재위기간이더라도 왕릉에는 넓은 능역에 홍살문부터 정자각을 거쳐 능상으로 올라가는 거창한 공간이 있는데
그기에 비교할 수는 없다손 치더라도 이건 정말 너무 초라하구나...
안내판에는 많은 치적을 남겼다는 설명과 "King Gwanghaegun"이라고 적혀 있는데
그렇게 적지나 말던지, 진정으로 그리 평가한다면 주변을 정리라도 좀 잘 해주던지...

 

묘소 앞을 좀 보시게.. 이게 도대체 일반 양반묘의 모습이나 되겠는가.
숲이 빽빽하게 앞을 가려 10m앞도 안보이고 봉분은 종일 그늘에 가려져 있다.
처음부터 그럴 의도였는지 모르지만, 해도 너무했다.
광해군이 생을 마치고 묘를 만들 때는 반정으로 왕이된 인조의 시대이니까...
사실 인조는 맏아들 소현세자 사후 (친청정책으로 암살설도 있다)
소현세자의 빈을 사사하고 손자들까지 죽게하는 비정한 왕이었다.

 

그늘진 묘 앞에는 새카맣게 변색된 묘비와 그저 일반인의 상석 규모의 혼유석과 향로석만이 참배객을 반긴다.
 

광해군 묘 정면
난간석이야 본래 설치할 수 없고, 능묘를 지키는 양석과 호석도 기대할수 없었을 테지만
가능한 비석이나, 혼유석, 망주석이라도 좀 제대로 만들어 주지...

 


"광해군지묘"... 아무런 수식어도 없다.
비석은 패이고 금이가고 몰골이 흉하기 짝이 없다.
이렇게 허술하게 관리하는데 누가 깨거나 훔쳐가지 얺은 것만 해도 다행이다.

 


폐비 문성군부인 유씨의 비석은 더 보기 사납다.

 

겨우 한쌍의 자그만한 문인석이 묘를 지키고 있는데
문인석의 표정은 마치 울고 있는 듯 처량하기 짝이 없다.


망주석
그 당시에는 세호을 새기는게 보통이었는데 그저 뭉툭하게 튀어 오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저 흉내만 낸 듯하다. 

 


그리고 봄품없는 모양에 깨어진 장명등...
자연히 깨어지지는 않았을텐데..

 

어두침침하고 을씨년스런 분이기에
앉아서 생각에 잠겨볼 돌의자 하나 없는 곳을 서둘러 떠나면서 뒤돌아보니
오랜세월 쓸쓸히 묘를 지켜온 망주석과 문석인이
"찾아주셔서 고맙소이다. 전하께서 가상케 여길 것입니다. 살펴가소서.."
라고 정중히 읍하며 인사를 건낸다.

 


연산군묘(燕山君墓)


연산군묘(燕山君墓) 개관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에 있는 조선 제10대 왕 연산군과 부인 거창신씨의 묘(사적 제362호). 폐비가 된 부인 신씨가  연산군이 죽은 뒤 묘를 강화에서 현 위치로 이장하기를 청하여, 1513년 왕자(君)의 예로 이장하였다. 묘의 시설은 곡장·혼유석(魂遊石)·장명등(長明燈)·향로석(香爐石)·재실(齋室) 등이 갖췄으나, 난간석, 양석,호석, 무인석 등은 세우지 않았다. 같은 묘역안에 태종때의 궁인 조씨의 묘와 연산군의 딸과 사위의 묘가 함께 있다.



사진 및 메모


연산군묘는 도봉구 방학동에 있는데 지금은 도심안이 되어 주변에 인가가 빽빽하다.
허름한 표지판을 따라 좁은 골목길로 들어간다.
광해군묘에서 실망한지라 별 기대는 안했지만, 이번에는 노견에도 차 한대 제대로 댈 공간이 없다.
통행이 별로 없는지라 한쪽 차선을 좀 실례하고 주차를 했다.
 

방학동에서 세운 안내판  

 


그래도 연산군묘에는 조그만 안내소가 있다.
안내판도 있고 설명서도 한장 준다. 

 

연산군 묘역에는 연산군과 부인 신씨 묘이외에
태종의 궁인으로써 후궁 첩지는 못 받았지만 마지막으로 태종을 모셨다는 의정궁주 장씨의 묘와
연산군의 딸인 휘순공주(후일 폐출)와 사위 구문경 부부의 묘가 같이 있다.
이 묘터는 몬래 궁인 장씨의 묘터이었는데 페비 신씨가 연산군을 이곳으로 모셨다고 한다. 
 

좁은 공간이나마 문인석이 두 쌍이 있고 전면도 좀 틔여 있어 광해군 묘보다는 낫다.
죽은 후 아무도 돌볼 사람이 없던 광해군 보다,
폐비이지만 부인 신씨가 살아남아 이 곳에 묘도 쓰고 석물 몇가지도 비치했던 모양이다.

초라한 봉분앞에 자그마한 혼유석 그리고
구멍뚤린 귀모양도 없이 그냥 밋밋한 망주석

 

두쪽으로 금이 간 혼유석 (누군가 깨지 않고야 화강암이 저렇게 갈라지지 않을텐데) 
4각 장명등은 각각 설치되어 있잇고 향로석이 중앙에 하나 잇다.


 연산군 묘비
전면에는 ‘燕山君之墓’, 뒷면에는 ‘正德 八年 二月二十日葬’이라고 새겨져 있다.
'正德'은 명나라 연호
19세에 즉위하여 13년간 왕권을 최대한 행사하면서
후세에 갖은 이야거거리를 남기고 파란만장한 삶은 산 연산군이
여기에 잠들어 있다.


부인 신씨의 묘비는 깨지고 마모되어 잘 보이지 앟는다.
전면에 ‘居昌愼氏之墓’, 뒷면에 ‘六月二十六日葬’이라 새겨져 있다. 

 

세호나 아무 형상이 없는  망주석

 

같은 묘역에 있는 의정궁주 장씨의 묘
태종을 마지막으로 돌본 궁인으로써 이곳에 가장 먼저 묘가 있었다고 한다.

 

 연산군의 딸인 휘순공주(후일 폐출)와 사위 구문경 부부의 묘
휘순공주는 반정후 시가로부터 이혼당했으나

후일 중종의 배려로 다시 구문경과 재혼하였다고 한다.

  

 휘순공주의 묘비 (전주이씨의 비문이 보인다)와 문인석

 

 

 연산군 묘 앞의 수령 830년의 은행나무. 
서울시 지정 보호수 제 1호이다.
연산군 페위가 1506년이니 지금으로부터 약 500년전
그러면 이 느티나무는 그 당시에 일어났던 일들을 다 보고 들었으리라...


마침 가을하늘은 청명하기 그지없고
800년 은행나무도 노란 단풍색으로 물들었다.
....
연산군은 그래도 광해군보다는 덜 서글퍼 보이는 구나
같은 시대를 산 은행나무 단풍도 볼수 있고
아파트가 좀 가리고는 있지만 따스한 햇볕도 들고, 딸 사위묘도 가까이 있고
사람들 왕래가 쉬어 산책삼아 찾아주는 사람도 가끔 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