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칠선계곡 칠선폭포

 

 

필자가 1980년대 중반 처음으로 칠선계곡을 찾게 된 것은 우천 허만수(宇天 許萬壽) 선생의 족적을 더듬어보기 위해서였습니다.
당시 칠선계곡은 이정표 하나 없는 것은 물론, 길이 불분명하여 길 안내자는 머리가 빙빙 돌 지경이라고 말하고는 했지요.
모든 것이 불비했던 그 시절에는 칠선계곡에 발을 들여놓는다는 자체가 어렵고 힘든 노릇이었어요.

칠선계곡을 답파하려면 우선 산길을 걷는 훈련은 물론, 체력을 다지는 것부터 선행돼야 한다는 것이 산악 선배들의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칠선계곡 답파에 앞서 주능선 종주 등을 여러 차례 하기도 했었지요.
그런 뒤 칠선계곡 답파에 나섰는데,  로타리산장에서 한밤중에 출발하여 천왕봉을 거쳐 당일로 하산하는 시간계획을 세웠답니다.

우천 허만수는 누구인가?
왜 그이 때문에 칠선계곡을 찾지 않으면 안 되었던가?
그 해답은 중산리계곡 두류교 옆 천왕봉 등산구의 자연암석 위에 세워놓은 그이의 추모비에 씌어 있습니다.
'산을 위해 태어난 산사람 우천 허만수 추모비'-그 비석 뒷면에는 그이의 지리산 행적과 산사람으로서의 면모를 소상하게 적어 놓았어요.

이 비문은 참으로 명문으로 구절구절 감동이 한 아름씩 넘쳐납니다.
그이를 어째서 세상 사람들이 지리산 최초의 '인간 산신령' 또는 '지리산 산신령'이라고 부르는지 능히 짐작하게 해주거든요.
특히 필자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그 비문의 마지막 구절이었어요.

[..그런데 어찌된 일이랴, 님은 1976년 6월 홀연히 산에서 그 모습을 감추었으니 지리 영봉 그 천고의 신비에 하나로 통했음인가?
가까운 이들과 따님 덕임의 말을 들으면 숨을 거둔 곳이 칠선계곡일 것이라고 하는 바, 마지막 님의 모습이 6월 계곡의 철쭉빛으로 피어오르는 듯하다.]

바로 이 대목이예요.
'님의 정신과 행적을 본받고자 이 자리에 돌 하나 세워 오래 그 뜻을 이어가려 하는 바이다' 라고 끝맺은 이 비문에서 우천의 최후를 언급한 대목은 좀체 풀리지 않는 미스테리였습니다.
칠선계곡이 얼마나 아름다우면 인간 산신령의 영원한 안식처가 된다는 것일까요.

우천이 최후의 원시림지대인 칠선계곡에서 아무런 흔적도 남겨놓지 않은 채 증발했을 것으로 추측하는 데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답니다.
추모비문에 쓰인대로 그이와 가까왔던 사람들과 따님의 증언을 근거로 하고 있는 것이었어요.
하지만 그 증언이란 '평소에 허만수로부터 들었던 이야기'에 근거하는 추상적인 추론에 지나지 않는 것이기도 하지요.

지리산의 '인간 산신령' 우천 허만수는 1976년 6월 홀연히 종적을 감추었답니다.
그이는 아무런 흔적도 남겨놓지 않고 사라져버렸어요.
그 이후 아무도 그이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는 군요.
그가 어디서 어떻게 최후를 맞이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칠선계곡에서 숨을 거두었을 것'이라고 추모비문에까지 씌어 있지요. 어째서일까요?
그이는 가족을 버리고 지리산에 입산하여 30년 가까이 짐승처럼 야생했답니다.
그이는 평소 가까운 친척이나 딸에게 자신은 최후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증발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하더군요.
살아있을 때처럼 죽은 뒤에도 어떠한 부담도 주지 않으려고 한 것이지요.

그이는 지리산 가운데 칠선계곡의 자연세계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고 말하고는 했어요.
허만수님은 그 칠선계곡의 원시 자연세계에 동화하고 싶은 자신의 마음을 가끔씩 내비치고는 했었다는 거예요.
원시세계에서 태고의 이끼처럼, 풋풋한 나뭇잎, 또는 돌이나 흙처럼 자연의 한 구성 분자로 동화하고 싶어했다는 것입니다.

 

지리산 중산리 초입에 세워진 우천 허만수 추모비

 

천왕봉 등산구의 우천 허만수 추모비가 주는 여운이 필자에게는 가슴 깊숙한 곳에서 소용돌이를 일으키게 하는 듯했어요.
'칠선계곡에서 지리영봉, 그 천고의 신비에 하나로 통했을 것'이라고 했으니...!
우천 허만수님은 칠선계곡에서 증발한 것이 아니라, 태고의 신비와 하나로 통하여 영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자문해보기도 했답니다.

지리산에서 30년을 야생(野生)한 산사람이 지리산의 가장 이상적인 것으로 '칠선계곡의 적요'를 꼽았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그이는 칠선계곡의 원시 자연세계에 동화하고자 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이는 평소 가까운 이들에게 그런 말을 넌지시 비치고는 했다니까요.
말이 씨가 된다고도 하지 않습니까.

필자가 첫번째 칠선계곡을 찾았을 때는 계곡 주변에 '그럴듯한 동굴'이 없을까 하고 시종 좌우를 살펴보고는 했었답니다.
우천의 행방에 대해 집착을 보이자 가까운 주위 산악인들이 이렇게 말하고는 했지요.
"우천은 자연 동굴 같은 곳을 자신의 유택으로 미리 마련해놓았을 법하다."
칠선계곡 어디엔가 자신이 편안하게 영면할 수 있는 영원한 안식처를 마련해 두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었어요.

실제 우천 허만수님은 생전에 가까운 이들에게 아무도 모르게 증발할 것이라고 말하고는 했었다네요.
자신이 사라지고 없을 때는 찾지를 말라고 했답니다.
칠선계곡 어디에선가 자연에 동화돼 있을 것이라고요.
사후 자신의 시신을 거두는 것마저 누구에게도 신세를 지지 않으려 한 것이지요.

산길을 따라 내려가면서 주위를 이리저리 둘러본다고 하여 칠선계곡의 오묘한 자연세계를 겉모습이나 제대로 알기나 하겠습니까?
깊은 자연의 속살은 아예 필자의 눈에는 비치지도 않겠지요.
허만수님이 은신했을 법한 자연 동굴을 찾아보겠다고 생각한 것이 잘못이겠지요.
산길을 따라 칠선계곡을 다 내려갔지만, 동굴과 같은 곳은 눈에 띄지 않았답니다.

'지리산 산신령'으로까지 불린 우천 허만수님은 누구인가?
그이를 기리는 추모비문은 '지리산 산신령'의 남다른 면모를 이렇게 설명해줍니다.
[님은 평소에 "변함없는 산의 존엄성은 우리로 하여금 바른 인생관을 낳게 한다"고 말한대로 몸에 배인 산악인으로서의 모범을 보여주었으니, 풀 한 포기, 돌 하나 훼손되는 것을 안타까워 한 일이나, 산짐승을 잡아가는 사람에게 돈을 주고 되돌려받아 방생 또는 매장한 일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허만수 추모비' 비문은 1916년생인 그이가 '40여세에 지리산에 들어가 가없는 신비에 기대 지내며...' 라고 적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이는 50년대 후반, 빨치산이 평정된 직후에 세석고원으로 올라가 토담집을 마련한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이는 지리산에 들기에 앞서 의령 자굴산 토굴에서 2년여를 보냈다고 하지요.

1961년 광주 조선대학교 약학과 1학년 학생 13명은 여름방학을 맞이하여 지리산 세석고원에 올랐다네요.
안학수 지도교수 인솔로 지리산의 약용식물 채집과 조사에 나선 것이었답니다.
그들은 우천 허만수님의 초막에서 잠을 자게 되었답니다.
그들 학생 가운데 한 명인 노금모님이 당시 세석고원의 우천 초막 사진을 들고 필자를 찾아왔어요.
1989년, 필자가 지리산 이야기를 신문에 연재하던 <지리산 365일>에 우천의 행적을 언급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세석에 있었던 우천 허만수님의 초막...1961년....]

 

'지리산 산신령' 또는 '인간 산신령'으로 불리는 우천 허만수님.
그이가 살았던 세석고원의 '토담집 한 채'의 모습을 필자의 고교 선배이자 신문사 선배인 이종길님의 <지리 영봉>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석산장이 없었을 때는 그 자리에 토담집 한 채가 있었다. 어느 시골집의 헛간 같았던 그곳이 허만수씨의 보금자리였다.
허씨는 그 토담집에서 흘러가는 구름, 피고 지는 고산식물들의 꽃, 속삭이는 솔바람을 벗삼고 살았다.
인정 많은 등산객이라도 찾아들지 않으면 나무 열매, 산나물로 배를 채우며 살았다.
그러나 허씨는 세상에 이 생활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고 말했다.]

지난 1950년대 중반부터 70년대까지 지리산을 찾은 등산객들은 거의 누구나 우천과 크고 작은 인연을 맺었거나, 그로부터 깊은 인상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이는 세석고원 뿐만아니라 천왕봉과 거림골 등을 비호처럼 날아다녀 그이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다시피 했으니까요.
지리산의 조난사고 현장에는 언제나 그가 번개처럼 나타나 도움을 베풀었고, 멋모르고 지리산에 오른 사람들에게는 그의 움막이 안전한 대피소 역할을 했다네요.

1961년 지리산의 약용식물 채집에 나섰던 조선대학 약학과 학생 13명.
그들은 변변한 야영장비도 없이 해발 1600미터의 세석고원에 올랐지만 허만수님의 초막 덕분에 아무런 어려움도 겪지 않았답니다.
그들 학생 가운데 한 명인 노금모님은 우천 초막집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지금까지 간직해온 것이지요.

두 장의 흑백사진은 아주 인상적입니다.
움막의 지붕은 억새풀로 덮여있고, 벽체는 나무들을 잘라 차곡차곡 쌓아올렸어요.
축담 하나 없고, 마당도 없습니다.
허름하기 짝이없지만, 집 주변의 자연 훼손이 거의 없어요. 산중의 한 자연세계마냥 자리합니다.

노금모님은 초막 주인 허만수님에 대해 특별히 깊은 감명을 받았고, 세석고원에 체류하는 동안 즐거움도 컸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이는 그 다음해인 62년에 친구 한 명과 함께 다시 세석고원의 우천 움막을 찾아갔답니다.
다음은 노금모님의 증언입니다.

"허만수 선생님은 1년만에 다시 찾아간 우리들을 따뜻하게 맞이해 주더군요.
그이는 밤이 깊도록 여러 가지 재미있는 산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었어요.
특히 통천문에 나무사다리를 만든 이야기며, 교사로 근무하고 있다는 따님 얘기도 들려주었습니다.
그 때는 선생님이 술도 많이 마시지 않는 것 같았어요. 아주 밝은 얼굴 모습이었거던요."

조선대학교 약학과 학생들이 세석고원을 찾았던 바로 그 해인 1961년 8월1일에는 지리산 일원에 강력한 태풍인 너러호가 엄습했어요.
당시 부산에서 지리산 등반에 나섰던 언론인 김경렬 일행 24명은 산중에서 비상탈출을 시도했답니다.
그러나 일행 가운데 예닐곱명이 낙오되어 다시 수색대가 출동하는 소동을 빚었어요.
수색대는 가까스로 낙오자들을 찾아내 세석고원의 허만수님 초막으로 대피시켰습니다.
그 때의 상황을 훗날 김경렬님은 다음과 같이 들려주더군요.

"허만수 초막에서 사흘 밤낮을 갇혀 있는 동안 2명의 환자가 발생했다. 우리 일행은 겨우 정신을 가다듬고 허만수의 안내를 받아 하산을 시도했다.
우리는 계곡을 피해 거림골의 왼쪽 산 능선을 타고 내려갔다. 하지만 그쪽에도 곳곳에 계곡이 길을 막았다. 그때마다 우리는 우천의 도움으로 계곡을 건넜다.
마지막으로 곡점의 큰 하천 격류를 만났는데, 우리 자신의 능력으로는 도하가 불가능했다.
허만수가 자일을 설치하고 한 사람 한 사람씩 건널 수 있게 해주었다.
그이의 그 때 그 도움은 언제까지나 잊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