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동서원에서

 

-아들에게-

 

 

 

2005.4.17

 

경상북도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에서

 

 

 

 

 

 

(프롤로그)

 

 

지난 겨울, 낙동강 탐사를 하면서 우연히 들렀던 도동서원.

꽃 피는 봄이면 다시한번 찾으리라 했던 결심을 오늘 이루었다.

 

 

서원의 구조와 풍치가 맘에 들었지만 봄이 되면 더욱 아름다우리라는

기대는 푸릇푸릇한 들녁을 지나오는 동안 기대를 더욱 부풀게 했다.

 

 

중간고사 중인 너의 요청으로 대구에 갔다가 되오는 길.

도동서원으로 가는 낙동강길과 비슬산의 풍경에 다시금 감회가 서린다.

 

  

 

 

 

 

 

 

대니산 언저리 다람쥐 고개(다람재)를 넘어 가는 길에 바라본 도동마을은 더욱 평화롭다.

발 아래 무참한 재선충 피해만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면 더욱 좋으련만.

 

 

마을 끝에 이르면 도동나루터가 있다.

지난 겨울, 그 스러진 나루에 버려진 듯 낡은 목선 한척

 

 

옛스러움을 지켜내듯 안간힘으로 버티고 있는 나룻배에

물결을 찰랑이며  낙동강은 동결을 거부했다. 

 

 

질주의 시대에

강을 따라 도대체 어디로 갈 수 있을까.

......

 

 

 

 

 

 

보호수 은행나무의 위용은 봄물이 오르니 더욱 놀랍다.

콘크리트 지지대 지팡이를 너댓개 짚고 있는 늙디 늙은 선비의 모습일까.

아니, 그 자체로 나무신령의 모습에 가까울지 모른다.

 

 

 

 

 

 

도동서원.

 

 

-도동서원의 이름 유래-

 

도동(道東)은 성리학의  도(道)가 처음으로 동(東)으로 건너오다((道果東矣)라는

뜻으로, 조선에서 도학이 이제 시작되었다는 자부심이 넘치고 있다. 일찍이 선생

이 남명 조식 선생과 퇴계 이황 선생에게 도학의 으뜸스승(近世, 道學之宗)으로

존경받았을 만큼, 조선에 처음으로 도학의 시대를 열어 주셨다.

 

 

 

-보다 객관적인 역사적 유래는 다음과 같다.

 

 

선생이 돌아가신 지 64년 선조 원년(1568)에 비슬산의 두 골짜기 물이 합쳐지

는 유가면 쌍계리 초곡천 산기슭에 쌍계서원(雙溪書院)을 세웠으나 정유재란때

왜병의 방화로 불타고 말았다.


 

 

그 후 선조 38년(1605) 현재의 위치에 다시 세워 보로동서원(甫勞洞書院)이라

했다. 다시 2년 후 나라에서 공자의 도(道)가 동쪽으로 왔다는 뜻으로 도동서원

(道東書院)이라 이름지어 사액하여, 마을 이름도 도동리라 고쳐 불렀다.

 

 

 1607년 선조 대왕 40년에 도동서원으로 이름지은 현판을 하사받고 사액서원이

되었고, 고종2년(1865) 흥선 대원군이 서원을 정리할 때에도 김굉필을 대표하는

서원으로 문을 닫지 않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정리)

 

 

 


 

오늘은 이곳에서 조선 유학의 대강을 둘러보고

우리가 잘 알 수 있는 범주 내에서 역사의 흔적을 더듬어 보기로 했다.

 

 

언급했다시피, 도동서원은 유학자 김굉필을 모신 서원이다.

김굉필.....

 

 

-당신은  역사의 어느 위치에서 김굉필을 쉽게 찿아낼 수 있지?

 

 

조광조의 스승이었음을 기억한다고?

대단한 네 엄마다. 지난 번에 왔을 때의 잔영인가?

 

 

 

 

 

 

그들을 세웠다.

김굉필의 17대 손이라는 분들에게 과거를 여쭈었다.

 

 

단번에

조광조의 스승으로서.....로 시작된다.

 

 

그렇다면 조광조는 누구인가. 다 아는 이야기지만 다시한번 요약해보자

 

 

 

 

 

 

 

-정암 조광조-

 

 

 

향년 38세.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한양. 자 효직(孝直). 호 정암(靜庵). 시호

문정(文正). 개국공신 온(溫)의 5대손이며, 감찰 원강(元綱)의 아들이다.


 

어천찰방(魚川察訪)이던 아버지의 임지에서, 무오사화로 유배 중인 김굉필에게

수학하였다. 중종 5년(1510) 진사시를 장원으로 통과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공

부하던 중, 성균관에서 학문과 수양이 뛰어난 자를 천거하게 되자 유생 200여

명의 추천을 받았던 수재였고, 다시 이조판서 안당(安당)의 천거로 조지서사지

(造紙署司紙)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에 들어갔으며 전적·감찰·정언·수찬·교리·전한

등을 역임하고 1518년 홍문관의 장관인 부제학을 거쳐 대사헌이 되었다. 성균

관 유생들을 중심으로 한 사림파(士林派)의 절대적 지지를 바탕으로 도학정치

(道學政治)의 실현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그것은 국왕 교육, 성리학 이념의 전파와 향촌 질서의 개편, 사림파 등용, 훈구

정치(勳舊政治) 개혁을 급격하게 추진하는 것이었다. 국왕 교육은 군주가 정치

의 근본이라는 점에서 이상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가장 먼저 힘써야 할 것이었

다.

 


 

성리학 이념의 전파를 위해서는 정몽주(鄭夢周)의 문묘종사(文廟從祀)와 김굉필

·정여창에 대한 관직 추증을 시행하였으며, 나아가 뒤의 두 사람을 문묘에 종사

할 것을 요청하였고, 1517년 《여씨향약(呂氏鄕約)》을 간행하여 전국에 반포하

게 한 것은 사림파가 주체가 되는 새로운 사회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1518년에 천거를 통해 과거 급제자를 뽑는 현량과(賢良科)의 실시를 주장하여

이듬해에는 천거로 올라온 120명을 대책(對策)으로 시험하여 28인을 선발하였는

데 그 급제자는 주로 사림파 인물들이었다.

 


 

훈구정치를 극복하려는 정책들은 연이어 많은 논란을 일으키며 추진되었다. 친정

아버지 신수근(愼守勤)이 연산군 때에 좌의정을 지냈다는 이유로 반정(反正) 후에

폐비가 된 왕후 신씨(愼氏)의 복위를 주장하였는데, 이것은 반정공신들의 자의적

인 조치를 비판하는 것이었다. 도교 신앙의 제사를 집행하는 관서로서 성리학적

의례에 어긋나는 소격서(昭格署)를 미신으로 몰아 혁파한 것도 사상적인 문제인

동시에 훈구파 체제를 허물기 위한 노력이었다.


 

급기야 1519년에는 중종반정의 공신들이 너무 많을 뿐 아니라 부당한 녹훈자(錄

勳者)가 있음을 비판하여 결국 105명의 공신 중 2등공신 이하 76명의 훈작(勳爵)

을 삭제하였다.


 

이러한 정책 수행은 반정공신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켜

홍경주·남곤·심정 등에 의해 당파를 조직하여 조정을 문란하게 한다는 공격을 받

았으며, 벌레가 ‘조광조가 왕이 될 것(走肖爲王)’이라는 문구를 파먹은 나뭇잎이 임

금에게 바쳐지기도 하였다.


 

결국 사림파의 과격한 언행과 정책에 염증을 느낀 중종의 지지를 업은 훈구파가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하는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킴에 따라 능주에 유배되었

다가 사사되었다.


 

그러나 후일 사림파의 승리에 따라 선조 초에 신원되어 영의정이 추증되고, 문묘

에 종사 되었으며, 전국의 많은 서원과 사당에 제향되었다. 그의 사상의 핵심은 덕

(德)과 예(禮)로 다스리는 유학의 이상적 정치인 왕도(王道)를 현실에 구현하려는

것이었으며, “도학을 높이고, 인심을 바르게 하며, 성현을 본받고 지치(至治)를 일

으킨다”는 바와 같이 도학정치의 구현인 지치라고 표현하였다.


 

동시에 그러한 이념은 사마시에 제출한 답안인 <춘부(春賦)>에 나타나듯이 자연

질서 속에서의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따뜻하고 강렬한 확신이 기초가 된 것이었다.

그러나 학문과 경륜이 완숙되기 전에 정치에 뛰어들어 너무 급진적이고 과격하게

개혁을 추진하려다가 실패했다는 점은 후대 사림들에게 경계해야 할 점으로 평가

되었다.


 

훈구파의 반격으로 자기를 따르는 자들과 함께 죽임을 당하고 개혁은 한때 모두

실패로 돌아갔으나, 그의 이념과 정책은 후대 선비들의 학문과 정치에 중요한 지

침이 되었다.


 

조광조에 대한 평가는 그가 정몽주· 길재(吉再)· 김숙자(金叔滋)· 김종직(金宗直)·

김굉필로 이어져 내려온 사림파 도통(道統)의 정맥(正脈)을 후대에 이어준 인물

이라는 점에 정파를 초월하여 합의하고 추앙하였다.


 

그것은 학문의 전수 관계로 인한 것만이 아니고 목숨을 걸고 이상을 현실정치에

실행하려 한 노력에 대한 경의였다. 문집에 《정암집》이 있다 .(정리)

 

 

 


 

조광조의 개혁은 이른바 반개혁 세력과의 충돌해온 개혁의 시대에 항상 떠오르는 역사의

모델이 되곤 한다. 그것은 이상과 현실이 대립하는 상징으로도 언급되기도 하며, 정의와

불의의 단순한 역사적 비유로 인용되기도 하며, 안타까움과 미숙함의 표본으로도 상징되

기도 한다.

 

 

그리하여 그 조광조의 뿌리에 김굉필이 닿아있음을 알고 아둔한 후세는 그제서야 무릎을

친다. 그렇다면 기왕 내친김에 조선유학사를 한번 더 더듬어 보자.

 

 

 

 

 

 

 

 

 

 

 

 

 

 

 

 

 

 

 

-조선시대 유학의 역사적 개관-


 

조선은 유교, 곧 성리학의 철학적 이론으로 무장된 도학(道學)을 국가이념으로

받아들이고, 불교에 대한 억압정책을 실행했다. 조선 초기를 통하여 역대 임금

들은 유교이념에 입각하여 사회제도를 전면적으로 정비하여 유교사회의 기틀을

확립했다.


 

조선초기의 유학자들 중에서 공신과 관료의 기존세력인 훈구파(勳舊派)와 도학

정신의 실천에 진력하던 신진세력인 사림파(士林派) 사이에 대립을 보여 여러

차례 사림파의 선비들이 희생당하는 사화(士禍)가 일어났다.


 

조선 중기인 16세기에는 도학의 이상정치가 조광조(趙光祖) 등 사림파에 의해

추구되다가 실패했지만, 결국 이들이 정치의 담당자가 되는 사림정치시대를 열

었다.


 

사림들이 정치의 주체가 되자 이들 사이에 분열이 일어나 당파가 만들어졌는데,

이는 조선 후기 사회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 시기부터 소수서원(紹修書院)을

비롯하여 서원 설립이 활발해져서 향촌의 유림활동이 확산되었고, 지역사회에서

향약(鄕約)을 시행하면서 향촌 질서의 유교적 교화가 심화되었다.


 

이 시대에 성리학의 이론적 논쟁이 인간의 심성문제를 중심으로 활발히 전개되

면서 성리학의 놀라운 발전을 이루었다. 이황(李滉)·이이(李珥)에 이르러 불붙은

기대승과의 사단칠정(四端七情)의 논쟁은 당시의 대표적인 성리학 논쟁으로서,

학문적인 큰 업적으로 평가된다.


 

조선 후기에는 가정의례를 중심으로 예학(禮學)의 발전과 성리학적 논쟁의 확대,

청나라를 배척하는 의리론의 강화에 따라 정통도학도 강력하게 영향력을 발휘했

다. 그러나 성리학의 사변적 공허성과 의리론의 비실리적 명분주의에 대한 성찰

을 하면서 현실 사회제도의 개혁과 실용성을 중시하는 새로운 학풍으로서 실학이

대두했다.


 

18세기초에는 심학파(心學派:陽明學)가 형성되었다. 당시 새로 전래해온 서유럽

문물(西學)을 수용하면서 로마 가톨릭교 신앙운동이 일어나자, 도학파는 이단사설

로 배척하고 정부는 형벌로 금압했다. 이처럼 조선 후기에는 다양한 신념들이 서로

비판하는 다원적 상황 속에 놓여 있었다. (정리)


 

 

 

 

 

 

 

 

 

 

이들 흑백의 과거는 우리민족의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고,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우

리의 피와 혼에 유전자로 깊이 새겨지게 되었다. 과학문명이 전 시대의 사유와 이념의 가치를

송두리채 대치하고 우리는 완전히 새옷을 입고 사는 컬러의 시대에도 불구하고.....

 

 

 

우리문화의 근저를 관통하고 있는 유교문화의 대략도 한번 정리해보자.....

 

 

 

 

 

-한국문화와 유교-

 


 


 

유교의 기본윤리인 삼강오륜은 전통사회의 일상적 실천원리로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삼국시대부터 〈효경 孝經〉이 중요시되면서 효(孝)의 덕목이 일

찍부터 확립되었으며, 충(忠)의 규범은 국가 성장기의 강한 시대적 요구에 부응

했다.


 

화랑의 세속오계(世俗五戒:忠·孝·勇·信·仁)도 유교윤리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삼강(三綱:忠·孝·烈)의 규범은 조선 초기 세종 때의 〈삼강행실도 三綱行實圖〉

를 통해 모범적 인물들이 포상되고 사회적으로 장려되었다. 3강과 5륜의 규범

이 대중 속에 널리 확산되어 사회윤리로 정립되면서, 전통사회의 도덕규범과

가치관의 근거로서 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조선시대의 도학이념은 의리정신을 유교윤리의 표준으로 확인하여, 절의(節義)

가 숭상되고 불의에 대한 강인한 저항정신을 실현했으며, 청백(淸白)의 풍속과

염치(廉恥)의 도덕성이 사회기강의 핵심을 이루었다. 다만 지나친 도덕적 순수

성의 추구로 물질적 가치와 욕망의 현실성이 무시되는 문제점은 실학파의 실용

적 관심을 통해 그의 보완이 탐색되기도 한다.

 

 

유교사회에서 풍속의 교화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예법의 제도를 들 수

있다. 일상생활에서 사양(辭讓)의 예법을 비롯한 각종 유교예절이 삼국시대 이

래 시행되어 풍속을 이루었으며, 이 때문에 '동방예의지국'(東方禮義之國)이라

불려왔다. 특히 〈주자가례 朱子家禮〉가 들어온 뒤로, 조선시대에는 이에 따른

의례절차의 모든 법식이 대중 속에 확산되어 실천되었다. 유교의례가 대중생활

속에 확산되면서 전통사회는 미풍양속을 확립했으나, 반면 의례의 형식주의에

빠지는 폐단을 일으켰던 것도 사실이다.


 

유교의 사회제도는 신분계급의식과 장자(長子) 중심의 종법(宗法)제도를 기초로

한다. 사대부(良班)·중인·양인·천인의 신분에 따른 차별이 엄격하여, 사회적 진출

과 통혼(通婚)의 범위가 한정되며, 의복과 언어까지도 차이를 두는 상하의 수직

적 계층질서를 형성한다.


 

조상에 대한 제사권은 장자만이 지닐 수 있고, 남녀 사이도 실질적으로 남자 중

심의 차별을 바탕으로 한 수직적 질서를 확립한다. 유교사회는 가족제도에 기초

하며, 군신관계의 모범을 부자관계에서 찾았다.


 

대가족 형태인 가문을 지키기 위해 친족 중심의 공동체의식을 강화함으로써, 전

통사회에 안정의 기초를 확보해주었다. 국가도 가족의 확산으로 인식함으로써

사회의 유기적 공동체 의식을 확보하지만, 폐쇄적 문벌주의로 서로 대립하여 분

파적 대립을 일으킬 위험도 있다.


 

유교의 정치이념은 권력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민심 속에서 천명을 발견하고,

덕으로 백성을 교화하는 민본(民本)사상과 덕치(德治)주의에 근거한다. 따라서 백

성의 교화에 도덕을 앞세우며, 법률은 유교의 기본윤리를 확립하는 수단으로 제정

된다. 지배층과 백성과의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 언로(言路)를 넓히고, 그 임무를

전담시키기 위해 언관(言官)의 비중을 높여놓았다. 또한 임금도 경전을 비롯한 유

교 교육을 받는 경연(經筵)제도를 통해 유교이념에 입각한 정치를 실현하고자 노

력했다.


 

또한 유교 교육을 받은 사람만 과거(科擧)를 통하여 관직으로 나아갈 수 있게 했

고, 관리의 업적이 유교적 통치목표에 따라 평가되게 함으로써 전통사회는 치밀

하게 유교정신으로 다스려지도록 했다. 유교문화는 한자의 문자생활을 통해 중국

문화의 신속한 수용으로 가능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자는 대중의 문맹화를 초래했고, 더구나 우리 언어의 고유한 세계를 한

자에 예속시킴으로써 문화적 예속성을 초래하게 했다. 한문의 시가(詩歌)는 우리

의 고유 음률과 어긋남에 따라, 중국문화를 지향하는 사대부 문화와 우리의 고유

문화를 보존하는 서민 문화 사이의 이질성을 보여주게 된다. (정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