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다시 그들의 후손과 동시대의 발걸음 같이 해보자.

도포자락을 휘날리며 총총걸음으로 중정당으로 집결하는 어르신들이다.

 

 

17명.

 

 

한달 전, 집행위원회에서 선별한 사람들에게 통지를 보내고 응답을 하여 집결한 후손들이다.

오늘은 이곳 중정당에 모여 몸과 마음을 정갈히 하고,

곧 이어 문을 걸어 잠그고 내일의 행사까지 밤을 지내고 대기하게 된다.

 

 

 

 

 

 

 

 

 

 

중정당 뒤의 창호를 통해 바라보니, ...


 

중정당 뒤쪽으로 돌아가서 가운데 창호를 통해 바라보면, 산이 지붕 위에 걸쳐있는 듯한 착각

을 일어나게 해서 잘못 보게 한다. 두 개의 기둥사이로 바라보는 경치는 하늘이 주변의 산과

잘 어울려 자연스럽고 조화의 미(美)를 보여 준다. (인용)


 

 

 

 

오늘 우리가 찾은 날은 우연히 유학자 김굉필(직계 후손들은 함부로 함자를 입에 올릴 수도

없지만-굉자 필자....로 언급해야하니.... 양해를 바란다.)의 묘향 전날이다.

 

 

 

묘향이란......

 

 

김굉필(지금부터는 한훤당이라 언급하겠다.), 한훤당은 제사인 기일은 음력 9월 29일이다.

서원에서는 기제사 외에,  매년 2회의 묘향과 2회의 향사를 지낸다.

 

 

묘향 : 묘에 가서 제사를 지내는 것

 

향사 : 서원의 강당에 모여 추모하는 것이다.

 

 

 

 

 

 

 

 

 

 

 

나의 호기심은 단지 서원의 부산을 구경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어르신 한 분을 붙들고 예에

어긋나지 않게 조심하며 궁금증을 풀어나가게 했다.

 

 

이곳에서 일어나는 정중동의 일들은 모두 이 어른에게 청취하여 메모한 내용이고, 부산에 돌

아와 미진한 점들이 있어 다시 어른의 자택으로 전화를 걸어 다시 여쭈어 보았던 것이다.

 

 

자상하게 설명해 주신 대구시 남구 봉덕2동에 거주하시는 김규옥 어른께 머리 숙여 감사드린

다. 내년 5 월이면 한훤당 500 주기 기념이 되는데, 인연이 있으면 그때 다시 한번 뵈올 수 있

을 지도 모른다.

 

 

 

 

 

 

 

 

 

 

도동 서원은 선례후학 정신과 호연지기가 넘쳐흐르는 서원으로, 서원의 교과서로 알려져 있

다. 서원의 정신은 한 가운데를 관통하는 계단에서 찾을 수가 있다. 계단은 오직 한사람만 오

르고 내려 갈 수 있도록 좁게 놓아졌고, 선비들은 존경과 양보의 미덕을 발휘하도록 해주고

있다. 그리고 계단 곳곳마다 구름무늬와 석조물을 새겨두었다.


 

 

    중정당의 기단은 우리 선조의 정성과 기술이 가득 들어있다. 기단은 가파른 산비탈에 튼튼

한 건물을 세우기 위하여 보통 성인의 키만큼 앞면을 높이 쌓아올렸다. 돌은 거의 같은 모양

을 볼 수 없을 정도로, 6각형 내지 심지어 12각형 모양으로 하나하나 다듬어서 모든 정성을

기울여 끼어 넣었다. 크기와 색깔을 더하거나 달리하는 돌들이 서로 섞여 조금의 틈도 없이,

서로 잇고 짝을 지어 맞물려서 일체가 되어 조화를 이루며 높은 기단을 유지하고 있다.


 

    같은 사물이라도 미묘한 차이로 모양과 색깔을 다르게 하고 있어도, 어떤 미묘한 차이도

서로 짝짓기에 의해 안정과 조화를 이룰 수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여러 빛깔

의 돌들이 농도를 달리하며 조화를 이루고 있다. 크고 작은 만들어 내는 여러 가지 모양과 빛

깔은 말 그대로 예술의 세계를 펼치고 있다. 학술명으로는 다듬은 돌 허튼 층 쌓기로 알려져

있다.(인용)


 

 

중정당의 기단은 처음 접했을 때 그야말로 탄성을 자아낸 구조였다.

불국사 외벽의 석축과는 비교되지 않는 자연미와 은은하면서도 화려한 색감.

전체 서원의 구조를 통털어 가장 매력 넘치는 석축이었다.

 

 

 

 

 

중정당 뒤의 화원

 

 

 

 

중정당 뒤의 화원

 

 

 

 

중정당 마루 

 

중정(中正)은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바르게 실천한다는 뜻이다. 바로 중용(中庸)을

나타낸다. 중정당 현판 밑의 창호를 열어보면, 계단이 한 가운데를 꿰뚫고 달리고 있다. 중정

당에 앉아 바라보는 건너편 산과  들의 경치는 알맞은 조화를 이루어 한눈에 들어온다 .(인용)


 

 

 

 

 

중정당 창호와 뒤켠 화원

 

 

 

 

 

화원

 

 

 

 

 

시지각의 변화 따라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아빠의 시선)

 

 

 

 

 

중정당 한 가운데에는, 선조대왕께서 하사하신 사액(賜額)현판이 걸려있고, 현판의 글씨는

모정(慕亭) 배대유(裵大維)선생의 친필이다. 선생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아서, 망우당 곽재

우 선생과 함께 창녕 화왕산성을 방어하셨다.(인용)

 

 

 

 

 

 

시지각의 변화 따라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엄마의  시선-캐논 익서스)

 

 

 

 

 

 

 

지난 겨울 여자는 또한 환주문에서 꽃병 기와의 신선함을 놓치지 않았다.

오늘은 늦은 오후녁, 노을로 기울어지는 햇살을 받아 그 빛남이 더욱 새롭다.

 

 

 

환주문(喚主門)은 부를 환(喚) 주인 주(主)로 읽고, 내 마음의 주인을 부르는 문이다. 갓 쓴 선

비들은 고개를 숙여 들어오도록 처음부터 문을 낮게 지웠다. 배움의 문으로 들어서는 선비는

스스로 마음가짐을 낮추고, 내 마음의 주인을 불러보게 한다. 옛 선비의 높은 정신 문화 앞에

고개가 저절로 숙여진다.

 

지붕 위의 꽃병 기와는 선비의 갓을 떠오르게 한다. 비록 선비는 고개를 낮추고 들어오지만,

선비는 갓을 쓰고 들어오는 모습으로 보이게 된다.(인용)

 

 

 

 

 

17분의 어른들은 노을과 함께 과거로 묻혀 들어간다.

우리가 환주문을 나섬과 동시에 문을 걸어 잠구었다.

 

 

이제 저이들은 500 년 전의 위대한 도학자를 묵념하고 오늘의 번영을 반추할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세태를 한탄해 하지는 않으리라는 메시지를 나는 분명히 전해 받았다.

 

 

김규옥 어른은 내게 말씀하셨다.

 

 

-우리가 성심껏 조상을 감사히 여기고 섬기는 것에 최선을 다하면 된다.

그 분들이 당대에 얼마나 조상과 후손을 생각하였는 지는 나이가 들수록 알게 된다.

 

그러니 내가 조상을 진심으로 소중히 생각하여 이 몸으로 최선을 다하는 것이 내 아들

딸들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네들에게 조상을 섬기고 경배하여라 강요할 것이 없다.

우선 내가 조상을 섬기기에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이 내 아들세대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이다.

 

 

.......

 

 

 

 

 

 

 

 

 

조선5현(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유학자)은 한훤당 김굉필, 일두 정여창, 정암 조

광조, 회재 이언적, 퇴계 이황을 지칭하는 말인데, 그중 수현(首賢)을 차지하는

한훤당에 대한 후손들의 자부심이 이곳 도동서원에서 유난히 돋보인다.


 

따지자면 일두 정여창이 한원당 김굉필보다 네 살이다 위인데, 으뜸자리를 차

지하는 것을 보면 뒷날의 유학자들이 얼마나 한훤당을 높이려고 했고, 그러한

실제로 공감을 얻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한훤당의 간략한 일대기를 옮겨보자.

 

 

  김굉필 선생(1454년-1504년)은 서흥 김문(瑞興金門)으로서, 호(號)를 한훤당

(寒 찰 한, 暄 따뜻할 훤, 堂 집 당)으로 스스로 지어 불렀다. 한훤당은 단종대왕

때 서울 정동에서 태어나서, 여기 달성군 현풍에서 성장하셨고, 연산군 10년 51

세의 나이로, 전라도 순천의 유배지에서 돌아가셨다.


 

 


 

   선생은 당시 가까운 이웃 고을 함양군수로 계셨던 점필재,  김종직(金宗直)

선생의 문인으로 들어가서, 소학(小學)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선생은 언제나 소학

을 생활의 모범으로 즐겨 배우고 익혀, 스스로 소학동자(小學童子)로 지어 불렀다.

소학은 어린이가 일상생활에서 마땅히 행하여야 하는 예절과 수양에 관한 내용을

적은 유학 기본서이다. 선생은 사헌부 감찰을 거쳐 형조좌랑에 이르렀지만, 연산군

때 일어난 무오(戊午) 갑자사화(甲子士禍)에 휘말려 평안도 전라도로 유배되었다.


 

 


 

   한훤당은 도학정신으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선비의 거룩한 모습을 보여

주셨다. 한훤당은 전라도 순천의 유배지에서 효수형을 당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형장에서도 얼굴빛을 편안히 하시고, 수염을 간추려 입에 머금고 신체발부 수지

부모 불감훼상(身體髮膚, 受之父母,不敢毁傷, 이 수염은 부모에게 물려받아서니

칼날에 다치게 할 수 없다) 라는 말씀을 남기시고 돌아가셨다. 선생은 마지막 순

간까지 죽음에 임하는 선비의 엄숙한 모습을 보였으며, 죽음 앞에서도 수염하나

까지 부모를 생각하는 효(孝)의 실천을 잊지 않았다.


 


 

 


 

   선생은 유배지에서 학문연구와 인재양성에 힘쓰시어, 마침내 영남 사림의 도학

을 경기도 전라도 등 전국으로 확대한 업적을 이루었다. 특히, 평안도 희천에서

정암 조광조 선생에게 도학을 전해서, 조선에서 도학이 뿌리내리는데 결정적인 역할

을 하게 하였다. 모재 김안국, 사재 김정국 형제와 금헌 이장곤 및 신당 정붕 등 이

른바 기묘명현(己卯名賢)들도 선생의 문인들로서, 중종대왕 때 실행하였던 왕도정치

에서 주역을 맡게 되었다. 한훤당은 우의정으로 추증받았고, 문경(文敬)으로 시호를

받았다. 광해군 2년에 선생은 일두 정여창, 정암 조광조, 회재 이언적, 퇴계 이황 선

생과 더불어 조선 5현의 수현(首賢)으로서, 조선의 선비로서는 최초로, 성균관 문묘

에 배향을 받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