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담사....너무나 이름을 많이 들어 꼭 한 번 가보고 싶었던 설악산 깊은 곳

 

 

이번 1박2일의 여행길을 강화로 가자고 주장하였으나

백담사와 대관령 목장이 포함되었다기에 그냥 참고 말았을만큼이나

백담사는 나에게 강한 유혹이었다.

 

백담사 입구에서 내려 백담사까지 7km의 길을 백담사 경내버스를 타고 이동해야 한다.

길은 매우 좁고 커브가 심하여 승용차도 속력을 내기 어려운 길이다.

전에는 중간지점에 내려 3km정도를 걸어서 가야했다고 하는데 백담사 바로 앞 수심교까지 차로

운행하는데 요금은 2000원이다.

 

백담사까지 가는 길의 계곡에는 풍부한 수량의 물이 계곡을 채우고

힘차게 흘러 주전골과 함께 설악산 제일의 경치를 이룬다.

 

일주문을 지나 주차장에 도착한 버스에서 내려 다리에 올라서니 이름이 修心橋이다.

마음을 닦고 들어오라는 뜻인가?

멀리 나뭇가지 사이로 전각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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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 끝에는 금강문이 있고

금강역사상과 함께 문수 보현동자가 사자와 코끼리를 타고 있다.

관광객끼리 주고 받는 말을 듣고 한마디 아는체를 했다.

"절에 들어가면 다른 곳은 모두 4명이 지키던데 여기는 두명이 있네?"

"4명이 지키는 곳을 사천왕문이라고 하지요. 각각 동서남북 방향을 지키는 수호신인데

두명이 지키는 곳을 금강문이라고 하고 그 사천왕보다 격이 낮은 금강역사라고 합니다.

금강역사는 2명으로 되어 있고 금강역사상이 있는 곳에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같이 있습니다.

대개 사자를 타고 있는 동자가 문수동자 코끼리를 타고 있는 동자를 보현동자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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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담사에 들어서면 너무나 많은 전각들에 놀라 입이 벌어지고

그 많은 전각들이 대부분 최근에 만들어 졌다는 것

그리고 많은 전각들이 卍海와 관련지어 있다는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금강문을 지나 오른쪽으로 돌아들어가니 범종각 그리고 만해기념관이 눈에 뜨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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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 기념관 안에는 만해를 추모하는 글

만해의 시를 출판한 책들

만해의 업적

만해의 행적 등 다양한 내용들이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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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스님들의 수행처 인듯한데 규모는 엄청나게 큰데

적막하기만 하다.

그럴리야 없겠지만 혹시 여기 저기 들어온 성금(?)이나 입장료 등이 넘쳐서

제대로 돈쓸곳을 찾지못해 이렇게 엄청난 규모의 전각들만 지어낸 것은 아닌지???하는 불경스러운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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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내용은 <완벽에의 충동>블로그에서 복사해 온 것임

필자의 생각으로는 지금의 상태가 단청을 하지 않고도 오랜 동안 버틸 수만 있다면 지금 이대로가 더 좋을 것 같다. 주지 스님께 여쭈어 보았다. "이렇게 대대적으로 제대로 증개축을 하려면 엄청난 돈이 필요할 텐데 전두환 전 대통령께서 도움을 주셨습니까?" "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오해를 하고 있는데 직접적인 도움을 받은 것은 없고 그 분 덕분에 백담사가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등 그 외 간접적인 도움을 받았지요" 백담사의 증개축은 국가에서 지원을 받아 이루어지고 있고 오히려 백담사는 돈이 많다는 소문이 나 시주를 하지 않아 운영에 어려움이 있다고 한다. 백담사는 4계절 마다 볼거리와 분위기가 달라져 매력이 있으며 지역적 특성으로 겨울철에는 눈이 많이 쌓여 있다. 입구부터 백담사 까지 약 7Km의 구간에 평시에는 셔틀버스가 운행되나 눈이 많은 겨울철에는 여유를 갖고 걸어서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주변의 풍경을 천천히 감상할 수 있으며 사람 또한 많지 않아 더욱 고즈넉한 분위기를 맛 볼 수 있다. 

 

극락보전 앞에 있는 3층석탑이 한여름 햇살아래 눈부시다.

깊고 깊은 산속 백담사

전두환대통령 덕분에 세간의 사람들에게 알려져

저자거리의 사람들 붐비듯 답사객 관광객 등산객 틈에 몸살을 앓고 있는것은 아닌가?

왼쪽에 있는 전각이 전두환대통령 내외가 거처하던 곳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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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담사 극락보전에서 예불을 드리고 나오려니 스님 한 분이 들어오셔 사시예불을 시작한다.

주불인 아미타불상은 보물 1182호이다.

극락보전 뒤에 있는 산령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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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 동상 뒤쪽에 있는 나한전108나한이 모셔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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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랄까? 이곳 백담사는 그 이름이 유명해진만큼 모든것이 새로운 것이라고 할까?

경망스러운 표현일지 모르지만 싸구려 페인트 냄새가 난다고 하면 또 한번 불경죄를 저지르게 되는데...작고 소박하고 조용하고 유서깊은 절집이기를 원한 나의 잘못된 생각때문이리라.....

 

 

이 전각도 이름이 만해당이다.

백담사는 모든 것이 만해인데 이제 그만해라고 소리치고 싶다.

 

 

극락보전 앞에 있는 화엄실...

전두환대통령 내외가 머물렀다는....

당시 사용하였다는 물건들과 생활하던 모습을 담은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김시습, 한용운, 고운 등등의 시비가 세워져 있지만내 느낌이 그런지 별로 예술성이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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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담사 앞의 계곡
누가 쌓았는지 알수 없는 돌탑들....
백담사 경내에 있는 찾집 농암장실(벙어리농 바위암)

찾집의 이름이 맘에 든다.
보았어도 말을 하지 말고
알아도 말을 하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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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기념관을 지키는 보살님께 혹시 부도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더니
스님들이 수행하시는 안채 깊은 곳에 있어 출입이 금지되어 있단다.
백담사.............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고 했던가?
그래도 묵은 김치에서 맛볼수 있는 생강 한조각의 톡 쏘는 맛과 같이
몇 장의 멋진 사진을 건졌으니 그 사진들은 <디카-절집 풍경>에 옮겨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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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인 신흥사의 말사이다. 647년(진덕여왕 1) 자장이 창건하였는데, 처음에는 한계령 부근의 한계리에 절을 세우고 한계사라고 하였다. 690년(신문왕 10년)에 불타버려 719년(성덕왕 18)에 재건하였는데, 《백담사사적기》에 이때의 중건과 관련된 전설이 수록되어 있다.

낭천현(지금의 화천군)에 비금사가 있었는데 주위의 산에 짐승이 많아 사냥꾼들이 많이 찾아들었다. 이 때문에 산수가 매우 부정해졌는데 비금사 승려들은 그것도 모른 채 샘물을 길어 부처님에게 공양하였다. 더러움을 싫어한 산신령은 하룻밤 사이에 절을 설악산 대승폭포 아래의 옛 한계사터로 옮겼다.

승려와 과객들이 아침에 깨어나 보니 비금사는 틀림없었지만 기암괴석이 좌우에 늘어서고 앞뒤에 쏟아지는 폭포가 있는 산이 이전과 달라 그 까닭을 몰라할 때 갑자기 관음청조가 날아가면서 “낭천의 비금사를 옛 한계사터로 옮겼노라”고 일러주었다고 한다.

지금까지도 이 전설은 그대로 전해지며, 이 지방 사람들은 춘천시 부근의 절구골, 한계리의 청동골 등의 지명이 절을 옮길 때 청동화로와 절구를 떨어뜨려 생겨난 것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구전으로 미루어 보면 한계사를 중창할 때 비금사를 옮겨간 것임을 추정할 수 있다.

785년(원성왕 1)에 다시 불탔으며, 790년에 한계사터 아래 30리 지점으로 옮겨서 중건하고 절 이름을 운흥사라고 하였다. 그러나 984년(성종 3)에 다시 불타버려 운흥사지 북쪽 60리쯤 되는 곳으로 이건하고 987년 심원사로 개명하였다.

이때부터 조선 초기까지 전승되다가 1432년 4번째 화재로 다시 폐허가 되었다. 그뒤 2년 만에 심원사지 아래 30리쯤 되는 곳에 법당과 요사채를 세우고 선구사라 하였으나 1443년에 불타버렸고, 1447년 옛 터의 서쪽 1리쯤 되는 곳에 다시 절을 세워 영축사라 하였다. 그러나 1455년 6번재 화재로 불에 타고 이듬해 옛 절터의 상류 20리 지점으로 옮겨 중건하여 백담사라 하였다.

1772년(영조 51) 다시 불타버리자 1775년 최붕, 태현, 태수 등이 초암을 짓고 6년 동안 머물면서 법당과 향각 등의 건물을 중건하고 심원사라 하였다가 1783년(정조 7년)에 절 이름을 다시 백담사로 바꾸었다. 근대에 이르러 한용운이 머물면서 《불교유신론》, 《십현담주해》, 《님의 침묵》을 집필하였다. 6·25전쟁 때 소실되었다가 1957년에 재건하여 오늘에 이르렀으며
대청봉에서 절까지 웅덩이가  백개 있어 백담사라 이름 붙였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중심 법당인 극락보전을 비롯하여 산령각, 화엄실, 법화실, 정문, 요사채 등이 있으며, 뜰에는 삼층석탑 1기가 있고 옛 문화재는 남아 있지 않다. 현존하는 부속암자로는 봉정암, 오세암, 원명암 등이 있다
 
 
여행칼럼 신운섭 기자    http://blog.naver.com/singunji
 

2006-09-28[17:38] ⓒ 즐거운생활news   www.enjoylife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