뽀드득 뽀드득… 한라산 설원을 걷는 행복


한라산 선작지왓 설원 트레킹의 반환점이 되는 윗세오름에서 어리목으로 내려가는 길에 만나는 설원 풍경

《이 겨울에 흰 눈 덮인 한라산 설경을 두루 살피지 않은 이가 있다면, 삼천리 금수강산의 화려한 자연을 품평할 자격이 없음을 알아두시라. 한겨울이 되어도 눈 보기가 어려운 글로벌워밍(지구온난화)의 지구. 그러다 보니 한라산마저도 눈옷을 입는 횟수가 점차 줄어든다. 그 눈이 몽땅 사라지기 전에 이 멋진 풍경을 기억에 담을 일이다.》

지난 연말 한라산을 찾았다가 낭패를 보았다. 눈 대신 비가 추적추적 내린 탓이다. 멋진 설경을 기대하고 갔건만 눈이 없다는 소식에 머쓱해졌다. 언제쯤 눈에 덮일 것 같으냐는 우문에 한라산국립공원 직원은 ‘하늘에 물어보라’는 현답으로 응대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지구온난화인가 뭔가 때문인지 여기서도 눈 보기가 힘들다”고.

지난해 1월. 서귀포의 귤 밭 너머로 한라산 정상의 부악(분화구 외벽)이 하얗게 변한 모습을 보고 찾은 영실. 국도 99호선 입구부터 온통 흰 눈에 덮여 있었다. 여기서 오를 수 있는 마지막 지점인 윗세오름 대피소까지 거리는 8.7km. 혼자서 터덜터덜 오르기 시작했다.


영실매표소로 이어지는 눈덮인 도로. 뒤로 오백나한 바위벽이 보인다

폭설에 먹잇감을 잃은 까마귀 무리가 사람 손만 쳐다보는 영실 입구를 뒤로 하고 오르기를 한 시간. 마침내 영실주차장이 보였다. 등산로가 시작되는 영실휴게실까지는 또다시 눈 덮인 오르막 도로로, 온 만큼(2.54km) 더 걸어야 한다. 그래도 발걸음은 가벼웠다. 호젓한 산길을, 그것도 온통 눈에 덮인 길을 마냥 걸을 기회가 또 언제 올지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국도99호선에서 영실로 들어서는 입구. 까마귀떼가 먹이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영실휴게실을 지나니 숲 속으로 길이 이어진다. 앞서 간 이가 다져 놓은 한 줄의 눈길을 밟으며 이들의 노고에 감사한다. 계곡을 지나면 사다리 타듯 오르는 가파른 산등성을 만난다. 그 산등성에 오르자 기막힌 절경이 펼쳐진다. 영실의 보배라 할 오백나한의 바위군상이 계곡 너머 산자락에 있어서다. 이 산등성 길로 곧장 오르면 영실 전망대(해발 1600m)다.


윗세오름으로 오르는 산등성의 영실전망대 부근 풍경으로 오른 편 바위벽이 오백나한이다

햇볕 쏟아지는 따뜻한 양지 녘의 설원. 오던 길을 돌아보니 서귀포 칠십리 해안과 삼방산이 옅은 안개 속에서 고운 자태를 드러냈다. 가까이로는 눈 덮인 크고 작은 오름이, 멀리로는 아름다운 해안과 바다가 조망되는 이곳 영실전망대. 오백나한의 기기묘묘한 바위벽도 지근거리다. 조금 더 오르니 경사 급한 산등성 길은 사라지고 눈이 덮인 숲이 펼쳐진다.


한라산의 해발 1600m 지점에 자생하는 구상나무 군락 숲길.
한겨울이면 온통 눈에 덮여 숲길은 눈터널로 변한다.


해발 1600m의 구상나무 군락 숲 밖으로 펼쳐지는 아고산식물 자생지인 선작지왓이 온통 눈에 덮인 모습.
정면의 봉우리가 한라산 정상 분화구 외벽이다.

구상나무 숲이다. 구상나무는 덕지덕지 눌어붙은 눈 덩어리로 인해 그 모습 자체를 알아볼 수가 없을 지경이다. 그런 눈 나무로 숲을 이뤘으니 그 눈 숲을 고개 숙여 통과하는 이 멋진 눈 숲길 트레킹이야말로 한겨울 한라산이 주는 고귀한 선물임에 틀림없다. 한참 걷다 보니 눈 숲 사이로 정상 아래 부악이 모습을 드러낸다.


 해발 1600m에 자생하는 구상나무 군락 숲 끄트머리에서 바라다 보이는 한라산의 분화구 외벽

숲을 벗어나자 부악이 거느린 거대한 눈 평원이 펼쳐진다. 이곳이 ‘선작지왓’이다. 선작지왓은 한라산에서도 희귀한 아고산지대 식물의 보고이자 한라산 노루의 서식지다. 이 눈이 녹아 스며들어 고인 땅속의 물이 여기서는 그대로 고인단다. 식생이 풍부하고 노루가 사는 것은 그 물 덕분이다.

제주말로 ‘작’은 바위, ‘왓’은 들판이다. 그래서 선작지왓을 설명하면 ‘작은 바위가 깔려 있는 들판’이라는 뜻이다. 5월과 6월에 이곳을 찾은 이라면 알 것이다. 빨간 털진달래와 산철쭉이 마치 이곳을 불태울 듯한 기세로 온통 바위인 이 평원을 뒤덮은 모습을. 한라산 노루는 이 꽃잎을 먹고 산다.

선작지왓의 설원을 걷는 행운. 그것은 부지런한 이들에게만 주어지는 자연의 선물이다. 지금도 내 발바닥으로 느꼈던 이곳 눈의 촉감, 밟을 때마다 들리던 뽀드득거리는 소리, 그리고 선작지왓의 눈 평원을 훑고 지나던 매서운 바람의 거친 촉감이 기억난다. 여기서 만나는 자연의 만물은 모든 것이 새롭고 싱싱해서다.


트레커들이 선작지왓의 눈평원을 지나 윗세오름 대피소를 향해 걷고 있다


설원트레킹의 반환점이 되는 윗세오름 대피소(해발1700m)

백록담을 향해 계단처럼 차례로 자리 잡은 붉은오름과 누운오름. 선작지왓 트레킹 길은 이 두 오름 사이를 지난다. 그리고 그 끝은 윗세오름의 대피소다. 하늘로는 거대한 성벽처럼 버티고 있는 현무암 덩어리의 분화구 외벽, 정면으로는 어리목으로 내리닫이로 잦아드는 산자락 너머의 또 다른 한라산과 제주 바다 풍경. 세상은 온통 눈에 덮였고 가슴은 즐거움으로 뻐근하리만큼 충만했으니 대피소에서 사먹는 컵라면 하나가 임금의 호사로 다가온다. 겨울 한라산은 이처럼 아름답고 사랑스럽다.



:여행정보:
◇한라산 선작지왓 설원 트레킹
▽코스=영실 입구(지방도 1139호선·해발 1000m)∼2.5km∼영실매표소(한라산국립공원)∼2.5km∼영실휴게실(해발 1280m)∼3.7km∼윗세오름 대피소(해발 1700m) ▽트레킹 난이도=방한장구(장갑 모자 보온복)와 아이젠, 등산화만 갖추면 온 가족이 함께 오를 수 있을 정도로 쉽다.

◇한라산국립공원(www.hallasan.go.kr)
▽어리목매표소=064-713-9950 ▽영실매표소=064-747-9950 ▽주차료=승용차 1800원. 자동차가 평일에는 휴게실까지 오른다. 입장료는 없다. 트레킹을 떠나기 전에는 전화로 눈이 덮였는지를 확인하라고 권한다.

           ▲ 출처: 도깨비뉴스 여행전문 리포터 동분서분
* 관리자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8-01-16 06: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