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이 휴전으로 끝난 1956년에 초등학교를 입학을 했다. 당시 열악한 시설은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맨 바닥에 가마니를 깔고 엎드려 ㄱ.ㄴ.ㄷ.ㄹ. 1.2.3.4를 외우고 마분지라고 불리는 종이에 침을 발라 연필로 글씨를 썼고 화장실은 아래가 뻥 뚫리고 깊은 퍼세식으로 냄새는 왜 그리 나는지 생각만 해도 어지럽다. 전쟁 후 입학을 하게 되니 나이가 들은 사람들은 졸업하고 바로 결혼을 한 사람도 있던 시절이었다.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한 해가 1962년으로 올해가 꼭 50주년이 되는 해이다. 각자 열심히 앞만 보고 달려와 이제 환갑. 진갑이 지나 할아버지, 할머니가 된 코흘리개 친구들과 지난 8월 26일 고향인 예당저수지 봉수산 휴양림에서 즐겁게 여름밤을 보냈다.

 

  당시 전쟁 후유증으로 편부, 편모 가정도 많았고 40여명이 졸업을 했는데 10여명만이 겨우 이곳에 대흥에 있는 중학교에 입학을 할 정도로 모두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초등학교를 가까스로 졸업을 하고 진학을 못한 동창들은 농사를 돕기도 하고 객지에 나가서 밑바닥에서 기술을 배운다고 온갖 설움도 받았던, 지금은 의젓한 사장이 되어 경제적으로 성공한 동창들도 있고 여자 동창들은 가사를 돕다가 일찍 결혼을 한 사람과 생산 공장에 다니다가 좋은 남자를 만나 결혼에 성공한 사람과 실패한 사람도 있다.

 

  아침 일찍 승용차에 연료를 가득 채우고 방향이 비슷한 동창들을 태우고 파란 들판을 바라보며 달려 내 고향 예산에 도착했다. 명물인 장터국밥에 막걸리로 점심을 대충 때우고 마트에 가서 먹을거리를 준비하여 휴양림으로 갔다. 저녁식사는 그 곳에 사는 여자동창이 어죽으로 준비를 하기로 했다. 여자동창의 남편은 공교롭게도 중학교 동창이라 부담 없이 부탁을 했다, 보통 충청도 사람들은 동작이 느리다는 말은 맞는 말인 것 같다. 오후 2시부터 입실이 가능한데 시간에 맞춘 동창들은 반도 안 되고 5시 가까이가 되니 약속한 동창들이 모두 모였다.

 

   이곳 봉수산 휴양림은 예산군에서 운영하는 곳으로 산 중턱에 아담하게 지은 목조건물로 저렴하게 대여를 해주는데 휴일 날은 예약하기 어렵다. 평일에는 할인도 해주고 비교적 예약이 쉽다고 한다. 이곳을 자주 이용하는 세무회계사무실을 운영하는 동창이 예약을 하고 비용도 부담을 해주니 고맙기 그지없다.

 

  먼저 온 동창들이 여장을 풀고 물이 흐르는 계곡에 가서 발을 담그고 어릴 적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으니 재미도 있고 시원하다. 앞에는 맑은 물로 가득 찬 예당저수지와 벼이삭을 내민 들판이 보인다. 그 옆에는 1시간 30분을 터덜터덜 걸어서 다녔던 대흥중학교가 옛날 단층건물은 없어지고 현대식 교사와 기숙사 건물만 보인다.

 

  예당저수지는 단일 저수지로는 국내에서 제일 넓고 1962년부터 담수를 시작했으며 낚시인들의 사관학교라고도 할 정도로 붕어낚시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대흥은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던 의좋은 형제의 아름다운 형제애를 나타나는 우애비도 있다. 봉수산 정상에는 백제부흥운동을 했던 임존성이 있고 슬로시티마을 (느리게 사는 마을)로 지정이 되어있어 각종 행사와 없어졌던 대흥장을 복원했고 KBS 수요 농촌드라마 「산 너머 남촌에는」촬영장의 실제 무대이다. 조선시대에는 대흥현으로 지금의 군청에 해당되었으나 행정구역 조정시 예산군과 합해졌으며 예당저수지가 생겨 급격히 인구가 급격히 줄어 겨우 명맥만 유지하는 작은 면소재의 역할만 하고 있는 셈이다.

자주 만나는 동창들도 있지만 몇 십 년 만에 만나는 사람들은 변화된 모습에 한참을 기억하지 못하는 촌극도 벌어졌다. 여자동창의 남편인 중학교 친구가 준비한 붕어찜을 가지고 올라왔다. 막걸리로 한 순배 돌리고 각자 취향에 맞게 술잔을 돌린다. 기다리던 어죽이 도착했다. 옛말에 어른도 한 사발 아이도 한 사발로 쉽게 소화가 되기 때문에 두 그릇은 기본이다. 식사를 담당한 여자 동창이 손이 커서 12명이 실컷 먹고도 많이 남았다.

 

  술이 몇 순배가 들어가니 혀가 구부러진 사람도 있고, 듣기 거북한 말도 나온다. 요 ㅇ들, 요 ㅇ들, 일상에서 쓰지 않는 말을 해도 누구하나 이의를 달지 않는다. 이래서 초등학교 동창이 좋은 거여! 아무리 가까운 사회친구라 해도 이런 말을 대 놓고 하겠는가?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대학 동창이라 해도 초등 동창만큼 이물 없는 동창은 없는 것 같다.

 

  지나온 이야기는 끝없이 이어진다. 누구는 어떻게 살고, 누구는 벌써 하늘나라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지나가는 이야기처럼 말한다. 계산을 해보니 9명이 저 세상으로 갔다. 한번 태어나면 반드시 죽게 되는 건데 너무 걱정이나 신경을 끊어. 저승사자가 와서 가자고 하면 예! 그럽시다. 하고 따라나서면 되는 겨. 그려, 안 그려!! 사는 날까지 건강하게 살다가 어느 날 팍 가버려야 되는 디, 그게 어디 맘먹은 대로 되는 겨. 나도 모르게 충청도 본토 사투리가 나온다. 평상시엔 쓰지 않던 사투리가 고향에 오면 불쑥불쑥 잘도 나온다.

 

  밖에 나가 하늘을 쳐다보니 달도 보이고 별도 보인다. 시골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던 시절. 석유등잔의 심지를 돋우고 책을 읽다가 꾸뻑 졸다보면 앞머리가 지직 소리를 내며 머리카락이 탄다. 이럴 때는 밖에 나가서 찬물에 세면을 하고 은하수와 별을 쳐다보기도 했던 어린 시절이 생각이 났다. 중학교를 같이 다녔던 동창들은 ‘일찍 일어나 솔가지로 냄비에 새벽밥을 지어 주셨던 돌아가신 어머니’ 이야기에 분위기기 잠시 숙연해지기도 했다. 어렵던 시절에도 농사꾼이 안 되게 교육을 시켜주어 지금가지 편하게 살아온 기반을 닦아주신 부모님! 정말 고맙습니다. 저 산 너머 아래에 모신 부모님은 잘 계시겠지.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교육의 기회를 받지 못하고 농사일만 돕다가 결혼한 바로 위 누님이 요즘 몸이 편찮다는 소식이 나를 우울하게 만든다.

 

  자정이 넘어 1시가 되었다. 일이 있어 집에 가는 사람도 있다. 방에는 여자 동창들이 자고 거실에는 남자들 차지이다. 불을 밝히니 이름 모를 풀벌레들이 찾아든다. 여치와 방아개비. 귀뚜라미. 작은 사마귀도 보인다. 나는 평소에 속옷 차림으로 잠을 자야하는데 어떻게 한다. 할 수 없지, 체면 불구하고 편한 차림으로 잠을 청한다. 한잔을 걸쳤으니 모두 코를 골며 금방 잠에 곯아떨어진다.

 

   5시에 3개의 핸드폰에서 동시에 알람이 운다. 6시에 봉수산 등산을 시작했다. 날씨도 좋고 시야도 좋다. 멀리 용봉산과 오서산도 보이고 충남도청의 이전건물도 보인다. 등산로를 잘못 찾아 8시 30분에 도착하여 아침식사를 하고 업무에 바쁜 동창들은 서둘러 돌아간다.

 

   나도 빨리 올라가면 좋겠지만 회장이란 감투를 썼으니 마무리를 해야 한다. 휴식을 취하고 남은 밥으로 간단하게 점심을 대신하고 한우로 유명한 광시면에 가서 한우고기를 구입하였다. 3년 전 송년모임을 초대해 주었던 여자동창이 “자기 아들네 공장 옆에 남편이 들깨농사를 잘 지었으니 깻잎을 따가라”고 하니 모두 대찬성이다. 빈손으로 가서 미안한 마음인데 동창 남편이 따뜻하게 대해준다. 나이는 나와 동갑인데 학교를 일찍 입학하여 중학교 2년 선배이기도 하다. “콩밭 매는 아낙네가 아닌 깻잎 따는 사람”이 되어 장화를 신고 깻잎을 따기 시작한다. 여자동창들은 잘 따는데 내가 언제 깻잎을 따 봤어야 빨리 따지, 그래도 금방 비닐 봉투가 가득하다. 무공해 거름을 주고 얼마나 정성을 쏟았는지 깻잎이 기름이 돌고 싱싱하다. 동창 남편은 애써 심은 늙은 오이, 가지, 부추를 담아 주면서 박도 한개 따가지고 가라고 하는데 체면이 있지 사양을 했다. 여자동창들은 마치 “친정에 다녀가는 기분이라”고 좋아들 한다. 천안과 평택에 각1명씩 내려주고 마지막 병점역에 전철을 이용하는 여자 동창을 배웅하는 것으로 임무를 완수했다.

 

  나이가 들었어도 아직 직장도 다니고, 언제나 따뜻하게 대해주는 고향이 있어 친구를 만나 회포도 풀 수 있고 건강을 위해 매주 산행도 할 수 있는 나는 행복한 사나이라고 자위를 해본다. 친구들!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 연말에 만나자고, 알았지! 올 겨울 송년회가 벌써부터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