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릉 순례(7) : 세종의 영릉(英陵), 효종의 영릉(寧陵)


답사지 :  영릉(英陵), 영릉(寧陵), 경기 여주군 능서면
일자 : 2009년 7월 5일 (일)
날씨 : 맑음


자세한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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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광해군묘~연산군묘, (13)광릉,
(14)장릉 


세종의 영릉 (英陵)

세종 영릉(英陵)의 개관

영릉(英陵)은 조선 제4대 임금 세종과 비 소헌왕후의 합장릉이다.
같은 능역 안에 있는 효종의 능인 영릉(寧陵)과 함께 동일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조선왕릉 중 최초로 한 봉우리에 다른 방을 갖춘 합장릉이며, 무덤배치는 국조오례의에 따라 만든 것으로 조선 전기 왕릉 배치의 기본이 되었다.
1469년(예종1) 여주로 천장하면서 세조의 유명에 따라 병풍석을 두르지 않고 난간석만 설치하였으며,
봉분 안에는 석실이 아니라 회격(灰隔:관을 구덩이 속에 내려놓고, 그 사이를 석회로 메워서 다짐)하고, 혼유석 2좌를 마련하여 합장릉임을 표시하였다.
또한 기존의 왕릉에는 난간석에 십이지신상을 조각하여 방위를 표시하였는데, 영릉은 이를 간소화하여 십이지를 문자로 표현하였다. 입지는 풍수사상에 따라 주산을 뒤로 하고 산의 중허리에 봉분을 조영하였으며, 좌우측에는 청룡, 백호를 이루고 남쪽으로는 멀리 안산인 북성산을 바라보고 있다. 능의 형식은 합장(合葬)이며 널방(玄室)은 돌방(石室)으로 하여 능 앞에 혼유석(魂遊石) 2좌를 놓아 양위(兩位)임을 표시하였다.
한편 광주에 있던 원래의 능 자리에 묻었던 석물은 1973년에 발굴하여 서울 청량리 영휘원(永徽園) 북쪽에 세운 세종대왕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사진 및 메모

 

지방에 내려갔다 돌아 오면서 민족의 성군 세종대왕이 잠들어 계신 영릉에 들렀다.
영릉은 영동고속도로 여주 IC로 빠져나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으므로 지나는 길에 잠시 들러도 좋고,
주변의 유명한 절인 신륵사, 명성황후 생가 등과 묶어서 한나절 코스로 다녀와도 좋겠다.

 

2009년 6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조선왕릉

 

세종의 영릉과 효종의 영릉이 동일 사적지에 있다.

 

 

영릉은 상당히 넓은 공원이자 시민들의 휴식처이다.

영릉에는 세종대왕 능 외에도 세종대왕 시대의 업적을 잘 정리해 놓아서 가족 나들이 장소로도 좋고, 역사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나 이이들의 살아있는 교육장소로도 아주 좋은 곳이다. 영릉 입구에 있는 세종전에는 활자, 총통류, 앙부일구, 악기, 관천대, 자격루, 일정정의시, 측우기 등 세종대왕 시절 발명되었던 여러 발명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또 넓은 잔디밭과 울창한 소나무숲이 조성되어 있는 있다.

 

 홍살문을 지나 신도(중앙에 약간 높은 길)와 어도를 따라 정자각으로 간다.

 

 정자각 추녀 마루위의 용두와 잡상들
맨 앞은 삼장법사이고(대당사부 현장으로 사람 모습에 삿갓을 쓰고 있다),
다음은 손오공(손행자, 삿갓을 쓰고 있으므로 구별이 쉽다)
손오공 이후는 저팔계, 사오정 순으로 많게는 10개까지 배치되는데
여기에는 용두 앞에 3개밖에 없어서 확실하지는 않지만 모습으로 보아
두개의 뿔이난 이귀박(二鬼朴)에 가까와 보인다.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합장릉 전체 모습
조선조의 가장 위대한 왕이고 왕후와의 합장릉임에도 불구하고 봉분도 크지 않고 
구성도 상대적으로 소박한 편이다.
병풍석도 없고 (앞의 태종과 뒤의 문종 릉에는 있음), 문 무인석, 호석 양석의 수도 태종의 헌릉에 비해서 적다.
영릉은 처음에는 현재의 헌인릉 자리 옆에 있었으나 예종때 이곳으로 천장하였는데,
예종 앞의 세조가 병풍석을 쓰지 않도록 유교를 내려 이곳으로 천장할 때 병풍석을 설치하지 않았는지
아니면 처음부터 없었는지는 확인하지 못하였다 (추후 확인).
초기의 석물과 신도비 등은 천장시 가져오지 않고 그자리에 묻은 것을 후에 발굴하여
현재 세종대왕기념관(서울 청량리동)에 보존되어 있는데
그 사진에도 병풍석은 보이지 않는다. (아래사진  참조)

 

(참고) 조선 왕릉에는 강(岡)과 잉(孕)이 있다
신라나 고려와는 달리 조선의 왕릉에는 강과 잉이 있다. 강은 봉분이 자리잡고 있는 언덕을, 잉은 왕릉 뒤쪽에 봉긋하게 솟아오른 지형을 말한다.
강은 땅의 기운 중에 가장 좋다는 생기(生氣)를 저장하는 탱크역할을 한다. 잉은 강에 생기를 주입시켜 주는 역할을 맡는다.


 

  

 세종대왕 기념관(서울 청량리동)에 보존되어 있는 초기 세종 릉의 석물들

 

 능에서 내려다 본 전경 (좌측에 비각이 보임)

세종의 영릉은 풍수상으로 한반도에 있는 천하 명당중의 하나이라고 한다.
영릉의 지세는 북성산이 남한강에 몸을 담그면서 떨어뜨린 낙맥이 북으로 굽이쳐 달리다가
한 봉우리가 솟으면서 남쪽으로 머리를 돌려 주산인 북성산을 바라보는데 이런 형태를 회룡고조형이라 한다.
또한, 이런 형세는 마치 모란이 반쯤 핀 듯해서 모란반개형이라고도 하고
주위의 산자락들이 봉황의 날개처럼 펼쳐져 영릉을 품어준다고 하여 봉황포란형이라고도 한다
.

 

 

난간석만 덩그러니... 
영릉 터가 명당터인지는 모르나, 능침 주변의 능역구성은 그 아들 문종 릉보다도 허술하다.

 

난간석에 새겨진 12간지 중의 하나인 "子"자 표시
다른 왕릉에는 병풍석에 큼지막하게 12지신상을 조각하고,
모란, 해바라기, 연화 등 꽃문양을 새기는 등 장식이 많다.
난간석에도 12지신을 새기기도 하는데 여기는 조각대신 글자로 간소화하고 말았다.
  

 

혼유석과 장명등
합장릉이라 능침(봉분)은 하나이지만 혼유석은 둘이다.
장명등(長明燈)은 묘역에 불을 밝혀 사악한 기운을 쫓는 등이다

 

 
 고석
 혼유석의 받침돌, 사악한 것을 경계하는 의미로 귀면 (귀신얼굴)을 새겼다 

 

 

 망주석
망주석(望頭石)은 무덤 앞에 놓은 혼유석의 좌우에 벌려 세우는 한 쌍의 8각 돌기둥으로, 
조선 초기에는 중간에 귀모양의 돌출부에 구멍을 만들어 놓았으나 (위 사진)
나중에는
세호(細虎)라고 하는 작은 동물 형상을 조각하였다. 

 

 석양(양석)과 석호(호석)
석호와 석양은 왕을 지키는 영물들로 각각 4개씩 교대로 배치되어 있고,
밖을 향하여 언제든지 방비할 수 있는 준비 태세를 갖추고 있다.

 


 석양의 뒷모습
생식기까지 디테일하게 조각했다.

 

문석인과 무석인 그리고 옆의 마석
능침아래 3계로 나누어 석물을 배치하고 있으며, 문석인인 중계에, 무석인은 하계에 위치하고 있다.
영릉에서는 각 계의 높이 차이가 특별히 큰 것이 특징이다.
  

 

 무석인의 모습
큰 장도를 빼어서 집고 있는 장군의 모습이나, 위압감을 주거나 기골도 그리 장대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약간 퉁명스럽고 순해보이는 표정이 흥미롭다. (아래의 효종릉과 비교)
또 세종대왕 기념관에 있는 초기의 무석인과도 상당한 다른 모습이다.

 

 

비각위의 용두와 잡상들

 

 

세종대왕 능비
이 곳의 능비는 영조때 세운 것이고
본래의 신도비는 천장 전 본래의 묘역(헌인릉 주변)에 묻혀있던 것을
1974년에 발굴하여 현재는 세종대왕기념관(서울 청량리동)에 보존되어 있다.

 


세종대왕의 영릉 천장에 관한 일화

 

영릉이 처음에 자리잡은 곳은 이곳이 아니다.
1946년 소헌왕후가 승하하자 태종의 능인 헌릉(서울 서초구 내곡동) 서쪽에 조성하여 그 우실을 왕의 수릉으로 삼았다가 1450년 세종이 승하하자 합장하였다. 그런데 세종의 능이 있는 곳은 육산으로 물이 많아 능지로 부적합했다. 그래도 효성이 지극한 세종은 아버지 태종 곁에 묻히고자 했다고 한다.

세조 이후 영릉이 길지가 아니라는 이유로 종종 천장의 문제가 거론되었으나 조정신료들의 의견이 분분하여 무산되다가 1469년(예종 1년)에 들어 왕위계승의 혼란과 왕가의 불운이 수시로 나타나면서 다시 천장의 논의가 시작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태조는 8남 5녀, 정종은 15남 8녀, 태종은 12남 17녀, 세종은 18남 4녀를 두어서 세종 승하 시까지 왕실 핏줄이 53남 34녀 이었는데 세종 승하 후 문종, 단종, 세조, 예종 4대에 이르는 19년간 문종이 1남 2녀를 두고 병사했고 단종은 사사되었고, 세조는 4남 1녀를 두었으나 의경 세자가 요절했고, 예종은 2남 1녀를 두었으나 장자 인성대군은 일찍 죽고 그의 아들 제안대군은 재목미달이었다.

이와 같이 왕실 핏줄의 빈곤과 장남 단명이라는 불길한 일이 계속 일어나자 세조비 정희왕후 윤씨는 세종 능의 수렴 때문이라고 믿고 세조의 유지라면서 천장을 서둘렀다.

이에 예종은 1468년 노사신, 임원준, 서거정 등을 여러곳에 파견하여 천장할 땅을 물색토록 하였다. 이중 한패는 광주, 이천땅을 거쳐 여주 땅을 답사하게 되었다. 산천이 수려하고 강물이 맑은 여주 북성산에 대신들과 지관이 올라 사면을 바라 보았다. 마침 산기슭에 정기가 어리어 있는 곳이 있어 찾아 올라가 주위의 지세를 살펴보니 이곳이 명당터임을 금방 알 수 있었는데 그 곳이 현재의 영릉 터이다.

여기에는 재미난 일화가 더 있다.

지관이 찾은 현재의 영릉 자리에는 세조때 대제학을 지낸 이계전과 우의정을 지낸 이인손의 묘가 이미 있었다.
이인손은 광주(廣州)이씨로서. 그의 가계를 살펴보면 그의 할아버지는 고려 말 절의와 문장으로 명성을 떨쳤던 이집이고 그의 아버지는 청백리로 이름 높았던 이지직이다.

이인손이 세상을 떠나자 지관이 이 자리를 잡아 주면서 ‘이 자리는 금시발복지이나 아래 세가지를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것은 명당수(明堂水)를 가로지르는 돌다리를 놓지 말 것, 재실이나 묘막(墓幕)을 치지 말 것, 국거리 마련을 위해 솥단지를 걸지 말 것이었다.
그러나 나중에 이인손의 아들 5형제가 모두 대과에 급제하자 효성이 발하여 개울에 돌다리를 놓고 묘 앞에는 재실을 지었다.

이후 영릉 천장의 자리를 물색하라는 왕명을 받은 대신과 지관이 이 근방을 지나다가 장대비를 만나게 되었다. 배는 고프고 비를 피할 곳도 마땅치 않은 상황이었다. 그때 근처 골짜기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고 찾아가려는데 물이 불어 건널 수 없었다.

그런데 조금 아래쪽에 물길을 건널 수 있는 돌다리가 놓여 있었다. 찾아간 그곳에는 천막이 쳐져있고, 광주이씨 후손들이 묘제를 지내고 있는 것이었다. 따뜻한 국밥 한 그릇까지 얻어먹고 정신을 차린 뒤 주위를 살펴보니 그곳이 바로 천하명당이었던 것이다. 이 계기가 되어 이인손의 묘가 있던 이곳이 영릉 천장지로 결정되었는데 만약 돌다리나 재실이 없었더라면 지관들이 이곳을 발견하지 못했을 거라는 말이 있다.

그 이후 결국 이인손의 묘는 왕명에 의하여 이장(移葬)을 하게 되는데, 후손들이 묘를 개장(開葬)을 해보니, 그 속에는 놀라운 내용의 비기(秘記)가 들어 있었다.
"필시 모년 모월 모시에 이 터의 진짜 주인이 나타날 것이니 기쁘게 자리를 양보할 것이며, 이 자리에서 연을 띄워 연이 떨어지는 곳에 이장을 하면 광주이씨의 발복은 지속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여러 사람들이 신기하게 여겨 그대로 하였더니 과연 연은 바람에 날리어 서쪽으로 약 10리 밖으로 날아가 떨어졌다. 그 자리에 이장한 후에도 자손이 번창 하였다. 그리고 연이 떨어진 마을이라 하여 연하리라 하다가 지금은 여주읍 연라리라고 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효종의 영릉(寧陵)

효종 영릉(寧陵)의 개관

 

영릉(寧陵)은 조선 제17대 임금 효종과 비 인선왕후의 동원상하릉이다.
효종이 1659년(효종 10) 5월 4일 창덕궁 대조전에서 승하하자, 이 해 10월 29일 건원릉 서쪽 산줄기에 능을 조성하였다.
그런데 1673년(현종 14) 병풍석에 틈이 생겨 광중에 빗물이 스며들었을 우려가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능을 옮겨야 한다는 천장론이 불거졌다.
따라서 현재의 위치인 세종의 왕릉 영릉 동쪽으로 입지를 정하고 능을 열어보았는데, 그동안의 우려가 무색하게 물이 들어온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결국 영릉은 천장하였으나 이에 연루된 자들은 면직을 당해야 했다. 영릉 천장 다음 해에 인선왕후가 승하하여 효종 왕릉 아래에 인선왕후의 능을 조영하였다.

왕릉과 왕비릉이 한 언덕에 같이 있는 경우 대개는 봉분을 나란히 두는 쌍릉의 형식을 택하는데, 영릉은 특이하게도 왕릉과 왕비릉이 상하로 조영되어 있다.
이는 풍수지리적 이유에서 비롯된 것으로 왕릉과 왕비릉을 좌우로 나란히 놓을 경우 생기가 왕성한 정혈을 비켜가야 하기 때문에 좌우 쌍릉을 쓰지 않고 상하혈 자리에 왕릉과 왕비릉을 조성한 것이다.
이러한 배치를 동원상하릉이라고 하는데 동원상하릉 중에서는 영릉이 조선 최초이다.
왕릉의 봉분 주위로는 곡담이 설치되어 있다. 그러나 왕비의 능에는 곡담이 없어 두 능이 한 영역 안에 있음을 드러내주고 있다.
왕릉과 왕비릉 모두 병풍석이 없으며 난간석의 기둥에 방위를 표시하는 십이지를 문자로 새겨 놓았다.
이는 간소화된 능제로서, 세조 광릉 이후 사라졌던 조선 초기 십이지신상을 새긴 병풍석이 성종의 선릉에서 다시 나타났다가, 이곳 효종의 영릉에서부터 없어진 것이다.


사진 및 메모

 

세종의 영릉과 인접해 있으며, 홍살문으로 가는 차도가 따로 조성되어 있으나 세종능과 연결되어 있는 산책길로 걸어서 가는 것을 추천한다. 느릿느릿 걸어도 20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다.

 

홍살문, 참도(좌: 신도, 우: 어도), 정자각, 비각 모습.

 

효종의 생애
효종 만큼 생애가 복잡한 왕도 많지 않다.
삼전도의 치욕을 당한 아버지 인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형과 함께 청나라에서의 몰모 생활
장자인 소현세자의 의문의 죽음, 세자빈 강씨와 집안에 대한 인조의 계속되는 탄압
세자빈 강씨는 물론 왕위상속권이 있는 세 손자까지 귀양시켜 죽게하는 인조의 냉혹함.
왕위에 오른 효종의 북벌계획
그리고 꿈을 키워보지도 못하고 재위 10년만에 갑자기 승하..... 

  

정자각 앞의 금천교 다리

 

효종의 영릉비

 

효종 영릉 능역구성... 세종 영릉과 유사.
여기도 풍석은 없고 기본적인 구성이다.

 

3계에 걸쳐 배치된 석물들

 

혼유석과 장명등

 

기골장대한 문인석과 무인석
북벌을 계획한 왕답게 무인석은 물론이고 문인석도 엄청 장대하며 표정도 근엄하다.
이루지 못한 북벌을 한을 당시 석물을 조각한 사람이 표현한 듯하다
.

 

양석과 호석
양석의 귀모양이 다른 능에 비해서 크다.

 

 망주석과 세호
망주석의 모양이 세종때에 비해 꽤 변화되었다. 윗 부분도 많이 세련되고 문양도 많이 새겨졌다. 
세종 영능에는 귀모양에 구멍을 만들어 놓았으나 여기에는 구멍이 없고 무언가 상징적인 형상이 조각되어 있는데
후대에 나타나는
세호(細虎)의 초기형태로 볼 수 있겠다. 

 

예감(叡感)
정자각 뒤 서쪽에 있는 사각형의 석함. 제향을 한 후 축문을 태우는 곳

 

효종 능 아래에 보이는 비 인선왕후릉
쌍릉이기는하나 동원상하릉 구조로 서로 상하로 떨어져 있으며 석물들도 따로 배치되어 있다.
단, 왕후릉에는 곡장을 두르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인선왕후릉 능침 주변

 

 난간석에 새겨진 12간지 중의 하나인 "子"자 표시

 

장명등, 문익석, 무인석, 석마

 

  망주석과 세호
 동물을 형상화한 세호의 모습인지는 분명하지는 않다.
조각의 아래위 모습이 조금 다른 것 같으나 양쪽이 같은 모양으로
방향을 나타내는 것 같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