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 보이지 않은 경우 크릭하세요http://blog.daum.net/ilman031/14547318 

도초도(都草島) 여행/ 전남 신안군 도초면

가거도항(可居島港)울 떠나  비금도(飛禽島), 도초도(都草島)를 향하는데 상상 이상의 파도가 배를 흔들어 댄다. 한반도를 빗겨 일본을 강타한 태풍19호 XXX의 영향으로 한국 남서해안에 강풍경보가 해제 된 지 몇 시간 안 돼서인 것 같다. 승객의 비명 속에 배는 날치처럼 바다를 날라가듯 바다 위를 치솟다가 뚝- 떨어지게 하는 파도를 뚫고 쾌속선 남해 퀸호가 달린다. 몸을 흔들고 귀로 듣는 파도가 두려워 나는 눈을 지긋이 감았는데도 두려움이 엄숩해 온다.

 갑짜기 옛날 고3 시절, 집이너무 가난해서 모든 것이 국비(國費)라는 해양대학에 원서를 내러 갔다가 내 이빨을 본 접수자가 자격 미달이라고 만류하는 바람에 그냥 돌아 오다가 서울대 교복을 입은 대학생을 만나 골목에 들어가 눈시울을 닦던 기억이 새롭게 난다. '그때 해양대로 안 간 게 다행이었지?' 하는 파도였다.  

내가 오늘 가려는 비금도 도초도까지는 바람을 막아줄 섬이 거의 없는 망망대해의 외해(外海)라서 비금도에서부터 시작되는 내해(內海)까지는 난생 처음 당하는 이런 파도를 견뎌 내야만 할 것 같다. 그래서 준비해온 멀미약도 이미 먹어 두었다.

" 여기 만재도(晩才島)의 경치가 끝내 주네요. 오늘 선생님 타신 배는 만재도에 안 들린다네요. 풍랑으로요,"  고마운 사람, 나보다 9살 적은 원주에 사는 분으로 한국의 서해최남단 가거도 가는 배에서 처음 만난 분으로, 지리산을 하루에 종주했다는 산꾼이다. 지금은 눈병이 점점 심해져서 앞길이 잘 보이지 않는다면서도 수 많은 섬을 누비고 다니는 분으로 이분 덕분에 독실산 하산 길에 능선을 타고 하산하는 등산다운 등산을 하게 도와주고 함께 하룻밤의 정을 맺은 고마운 분이다.

* 도초도(都草島)

995A963A5DA8FC8A2A452A

거가도를 떠난 남해 퀸호는 오후 1시에 떠나  4시간만에 비금도 항에 도착하였다. 그 도초도를 소개하는 멋진 자연석에 꿈이 있는 '인재들의 고향'이란 표석이 있다.

조선, 고려 시대의 도초도나 비금도와 같은 뭍에서 먼 섬은 귀양이나 오던 낙도(落島)로 이 시대 역사적인 위인을 섬에서 찾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인데 도초도 인재는 누가 있는가 해서 지도를 보니 도초면사무소 옆에 '박성모 공원'이 있다. 박성모는 누구일까?

 

빅정모 해병대 대령은  6‧25전쟁 기간 중 이룬 그의 혁혁한 공으로 대한민국 태극무공훈장에 이어 2급 무공 훈장인 을지무공훈장(‘53)을 수상한 군인으로,  그 중 그의 가장 큰 업적은 1950년 9월 27일, 서울탈환 작전 시 해병 제2대대 제6중대 1소대장으로서 소대원들과 함께 새벽에 서울 시내 소탕전의 치열한 교전 끝에 목숨을 걸고 중앙청 안으로 들어가 중앙청 옥상에 걸려 있던 인공기를 걷어내고 태극기를 제일 먼저 게양하는 위업을 달성 한 분이시다.


*.한국의 하멜(Hamel) 문순득(文淳得)

9927903359BF7AA628B74E

  내가 비금도와 도초도에 꼭 오고 싶었던 것은 홍어장수 문순득의 고향 우이도(牛耳島)와 세계적인 바둑 천재 이세돌의 박물관을 둘러 보고 싶어서였는데 그 박물관은 도초도 아닌 비금도에 있다 한다.
다음의 '문순득  이야기'는 필자의 인터넷 불로그에 발표한
 '음식물 이야기 홍어' 편에서 언급했던 것이다. 

손암(巽庵) 정약전(丁若銓) 선생의 또 하나의 업적은 홍어장수  문순득(文淳得 1777~1830)이 3년 2개월 동안 "류구(오키나와) →필리핀→중국→흑산도"를 표류하며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을 구술하는 이야기를 듣고 기술한 95쪽의 "표해시말(漂海始末, 漂海錄)"이란 책자를 낸 것이다. 

이는 한국 최초의 해양문학의 보물이라 평가 받고 있고, 문순득을 한국의 하멜(Hamel), 한국의 마르코폴로(Marco Polo)라 칭할 수 있게 한 책자다.

99FCFD3F5DA93EAC020087

 지금으로부터 200여년 전 조선 순조 때(1802년 1월 18일) 흑산도 우이도(牛耳島)에 살고 있던 홍어 장수 문순득(25세)이란 청년이 있었다. 
그는 돛단 배를 타고 남쪽으로 몇 백리 밖에 있는 지금의 흑산면 태도리에 있는 상태도(上苔島), 중태도(中苔島),하태도(下苔島)를 오가면서 홍어(洪魚)를 사가지고 영산포에 내다 팔며 살았다.
 어느날 아버지와 같은 마을에사는 문호겸, 이백근, 박무청, 이중원, 김옥문 등 5명과 함께  태사도에서 홍어를 사가지고 돌아오던 중 지금의 흑산도 심리 앞  바다에서 북서 돌풍을 만나 키가 꺾이는 바람에 돛대를 세우지 못한 채로 표류를 하다가 조류에 밀려 11일만에 구사일생으로 도착한 곳이 일본 남쪽 섬 류구(琉球, 오키나와)였다. 거기서 8개월 17일만에 중국을 향하였지만 서풍을 만나 다시 또 표류하다가 필리핀 루손섬에 도착하게 되었다. 거기서 노끈을 만들거나 나무를 해 팔면서 필
리핀에서 8개월 28일을  살던 중 1803년 9월 9일에 이번엔 중국 광동을 가는 상선(商船)을 타고 13개월 26일 동안 "마카오→난징→베이징→신의주"를 거쳐서 1805년 1월 8일에야 일행은 구사일생으로 그리운 흑산도 우이도(牛耳島) 고향집에 돌아 올 수 있었다.

그동안 겪은 오키나와 와 필리핀의 풍속, 집, 옷, 배, 토산물, 말씨 등 수많은 모험담을 귀양와 있던 손암 정약전에게 구술한 것을 정약전이 듣고 집필한 것이 '표해시말(漂海始末)이란 책이다. 문순득 출연 손암 정약전 각색하여 출판인 한 편의 드라마 같은 셈이다.


 조선 왕조실록에 "문순득이  우리나라에 표류한 필리핀 사람을 만나 통역했다
"는 글을 보면 문순득은 당시 조선에서 필리핀어 통역관 대우를 받은 모양이다. 다음은 그 책의 내용의 일부다.


필리핀은 남자가 밥을 짓고, 귀인은 숟가락과 쇄 끝이 뾰족한 젓가락(포크)으로 식사를 한다. 그 책 말미에 112개의 우리말을 한자로 적은 뒤 류구어(81개)와 필리핀어(54개)를 싣고 있다.


 이는 송나라 손목(孫穆)이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와서 고려시대의 우리말 360 여 개를 한자 음으로 발음을 기록한 계림유사(鷄林類事)와 마찬 가지로 류구어와 필리핀어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가 되는 문헌이다. 

 이 책이 발견된 것은 최근으로, 신안군 도초면 우이도에 살고 있는 문순득의 5대손 문채옥씨(89세) 가문에 가보(家寶)로 전해 오던, 동생 정약용의 제자며 고산 윤선도의 사위인 이강회(李綱會) 저 '유암총서(柳菴叢書)' 책의 일부에 실려 있던 것이다.


*.도초도(都草島) 관광

995F5D3A5DA928F82479E8

 혼자 그것도 80고개를 훨씬 넘긴 허리 아픈 사람이 20kg 이상인나 되는 무거운 가방을 지고 섬 여행을 다니니 어려운 일이 많았다. 도초도는 고가의 돈을 요구하는 가거도 상인들과는 합리적인 숙박료를 받는 순박한 섬 사람들이 더 많았다. 
 하선하자 택시로 섬 일주는 6만원이라며 친절히(?) 다가서는 사람을 제치고 
섬 일주 관광여행 하는 분들에 편승하다 보니 가거도의 1/5 가격의 저렴한 비용으로 도초도와 비금도를 둘러 볼 수 있었지만 날이 어두워지자 안타깝게도 중요한 여러 곳을 생략해야만 했다.

 도초도(都草島)는 한국에서 13번째 큰 섬으로 서울 여의도 면적(7㎢)의 6배나 되는 42.38㎢ 넓이에 해안선이 42.0km요 거기에 2,970여 명(2007)의 주민이 사는 섬이다.  

도초도(都草島)란 명칭의 유래담 중에 하나로 섬의 모양이 마치 고슴도치처럼 생겼다 해서 도치라 하다가 도초도로 바뀌었다 한다. 
 도초도에서 제일 먼저 들른 곳이 신기하게도
가을에 벚꽃이 만발한 시목해수욕장이다. 이 해수욕장의 좌측에는 이 섬에서는 제일 높다는 큰산(265.7m)과 언덕이 병풍 같이 둘러 싼 이 수영장은 더할 나위없는 고운 흰모래 해안이 2km요, 해수욕장의 그 경사는 완만하다. 큰산은 여름에 해수욕 객들이 수영과 간단한 등산으로 오를 수 있는  산이다. 섬 산의 등반은 바다를 굽어보는 게 멋인데 이곳은 한국이 자랑하는 다도해국립해양공원(多島海 國立海洋公園)이니 더 설명하여 무엇하랴.
해수욕장 이름을 시목해수욕장이라고 하는 것은 그
주위에는 감나무(시목, 柿木)가 많아서 시목해수욕장(柿木海水浴場)이라 이름하였다 한다.

관광버스는 기사의 친절한 안내를 받으며 고속도로 같은 평야를 건너 달린다. 아마도 이 신안군에서는 가장 넓다는 고란평야(古蘭平野)를 가로지르는 길 같다.

                                                                                - 2019. 10.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