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신사(六臣祠)를 찾아서 /사육신 자손으로 유일한 순천 박씨 박비(朴婢) 이야기

 우리 창녕 성씨 계당공 종중(昌寧成氏 溪堂公 宗中)에서는 봄 가을 매년 2회씩  성씨(成氏)  선조 유적지 순례 참배 행사를 갖는다. 10여 년을 하다 보니 웬만한 곳은 다 가본 곳이라서 새로운 유적지를 찾다가 금년 봄에는 대구 달성군 하빈면 묘리 묘골의 육신사(六臣祠)를  찾아 간다.
삼대멸족(三代滅族)한 사육신(死六臣) 중 유일의 생존 후손을 둔 순천 박씨 충정공 박팽년(朴彭年) 후손들이 고맙게도 우리 매죽헌 성삼문 할아버지를 위시해서 여섯분의 사육신(死六臣)의 신위(神位)를 모시고 제(祭)를 올리고 있다는 소식을 접해서였다.

가마귀 눈비마자 희는 듯 검노매라

야광명월(夜光明月)이 밤인들 어두오랴
님 향한 일편단심(一片丹心)이야 고칠 줄이 있으랴

                                      -박팽년

 입속으로 박팽년의 '충절'의 시조를 읊조리며 가다가 달성군에서 우리가 제일 먼저 도착한 '육신사 기념관(六臣祀記念館)'에는 순천박씨 충정공파 박도규 종친회장이 우리들을 반가이 맞는다.
세월을 뛰어 넘어 568년만에 순천 박씨 박팽년 자손과 창녕성씨 성삼문 후예들의 해후(邂逅)였다. 
사람은 세상에 태어나서 남보다 잘 먹고, 잘 살면서 자식을 잘 키워 대를 잇게 하는 것이 삶의 큰 목적인데-,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신념 하나로 그의 학문이 아까워서 은근히 회유하는 세조의 마음을 물리치고 멸문지화(滅門之禍)를 기꺼이 감수한 사육신(死六臣)의 넋을 우러르기 위해서 찾아온 곳이다.
계유정란(癸酉靖難) 무렵 세조는 박팽년의 학문을 사랑하여 살려주고 싶어  김질을 시켜 '모의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말만하면 살려주겠다.' 하며 태종 이방원의 시조 하여가(何如歌)로 박팽년을 회유하고자 하였다. 다음은 그에 대한 박팽년의 화답 시조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萬壽山) 드렁츩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 백년 같이 누리리라.
                          -이방원의 시조로 김질의 회유시조 

금생여수(金生麗水)이라 한들 물마다 금(金)이 나며
옥출곤강(玉出崑岡)이라 한들 뫼마다 옥(玉)이 날쏘냐
아무리 사랑이 중한들 님님마다 좇으랴
                         -박팽년의 화답 시조 *崑岡: 곤륜산

역사는 충신 충정공 박팽년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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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조의 고문 앞에서 박팽년(朴彭年)은 세조를  '상감마마'로 부르지 않고 '나으리'라 불렀다.
세조가 노하여 " 그대가 나의 신하 충청감사로 있던 시절 '신(臣)'이라 장계(狀啓)를 올리지 않았는가?" 하였다. "나는 상왕(上王, 단종)의 신하(臣下)이지 나으리[進賜]의 신하가 아니라 그런 적이 없소." 하였다.
신하시켜 조사해 보니 '臣'이라 쓸 자리에 '巨' 자로 쓰여 있었고, 세조에게서 받은 녹은 하나도 먹지 않고 그대로 창고에 쌓여 있었다. 그는 모진 고문 끝에 다른 사육신이 능지처참(陵遲處斬) 당하기 8일 전에 아까운 40세 나이에 옥사(獄死)하고 말았다.

*. 사육신 중 살아 남은 기적의 박팽년 손자 박비(朴婢)
  계유정란(癸酉靖難) 무렵 박팽년의 아버지 중림(仲林)과 그의 4형제는 물론 그의 아들 3형제인 헌(憲), 순(珣), 분(奮)과 육신(六臣)의 손자들까지 삼대가 모두 처형되어 멸족(滅族)의 참화를 당하고, 아녀자들은 공신의 노비(奴婢)가 되거나 관비(官婢)가 되어 가야만 했다. 
무렵 박팽년의 둘째 아들 순(珣)의 부인 성주 이씨(星州李氏)도 관비(官婢)가 되어 고향인 경상도 닭밭골로 내려와 살았는데 집의 몸종과 함께 임신 중이었다. 그후 이씨 부인은 아들을 낳고 몸종은 딸을 낳았다. 당시 세조는 역적의 후손된 남자는 누구나 죽이라 하여서 외할아버지가 이를 감추기 위해서 아이 이름을 박비(朴婢)라 하고 비밀리에 여종이 낳은 딸과 바꿔 길러서 기적적으로 사육신 중 오직 하나 박팽년의 혈손(血孫)만이 남아 대를 잇게 되었다. 충신 집안에는 노비도 충복(忠僕)이었나 보다.

 박비(朴婢)가 17세 되던 해에 이곳에 부임해온 이모부인 경상도 관찰사 이극구(李戟均)의  권유 따라 자수하여 성종(成宗)으로부터 사(赦)함을 받고 박비(朴婢)는 종의 이름이어서 나쁘다 하여 박일산(朴一珊)이란 이름까지 하사 받아 고향에 내려오게 되었다.
박팽년의 유복손 박일산(朴一珊)은 후손이 없던 외가의 재산을 물려 받아 경북 달성군 하빈면 묘골에 99간의 종택(宗宅)을 짓고 정착하였다. 이를 계기로 경상도 달성군 하의면 묘골은 순천 박씨 박팽년 후손의 집성촌(集姓村)을 이루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그후 묘골에는 구한 말까지 300여 호가 살았고 광복까지만 해도 100 여호가 살았으나 지금은 30 여호만이 남았다.
 그후 237년이 지난 숙종17년(1691년)에 나라가 사육신의 신원(伸寃)을 풀어주어 옛관직을 복위시켜 사육신(死六臣)의 넋을 위로 하고 그 무렵부터 사육신(死六臣)을 만고충절(萬古忠節)의 표본으로 기리게 되었다.

*. '육신사(六臣祠)'의 유래
 지금 삼가헌이 있는 묘골에서 500m 가량 떨어진 하빈면(河賓面) 묘리(妙理) 마을 삼가헌(三可軒) 근처에다가  그 자손들이 뜻을 모아 절의묘(節義廟)란 사당을 세우고 박팽년과 그의 아버지 중림(仲林)의 신위를 모시고 제(祭)를 지낼 무렵이었다. 박팽년의 현손(玄孫) 계창(繼昌)이 고조부의 제삿날에 꿈을 꾸었더니 꿈 속에 성삼문(成三問), 하위지(河緯地), 유성원(柳誠源), 이개(李塏), 유응부(兪應孚) 등 사육신(死六臣) 5명이 사당 밖에서 서성이는 것을 보고, 직계 후손 없이 멸문지화(滅門之禍) 당한 것을 안타까이 여겨서 다섯분의 제물도 함께 진설하고 제사를 지내다가 하빈사(河濱祠)를 세워  사육신을 함께 배향하며 서원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를 들은 숙종이 1694년 낙빈서원(洛濱書院)이란 이름의 사액(賜額)을 내려 주었다. 그러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로 폐쇠된 것을 박정희 대통령의 '충효위인유적정비사업'의 일환으로 지금의 묘골에다가 육신사(六臣祠)를 짓고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 묘골의 풍수지리(風水地理)
 순천박씨의 집성촌인 안동 하빈면의 묘골 집성촌은 풍수지리(風水地理學)으로 명당 중에 명당이라 한다.

명당(明堂)이란 조상의 묘를 쓰면 장차 좋은 일이 자주 생긴다는 묏자리나 집터로 길지(吉地)를 말한다.

  묘골 땅모양은 '팔공산을 머리로 하는 거대한 용이 자신의 꼬리를 돌아보는 듯한 땅 모양을 한 회룡고미(回龍顧尾) 형국의 지형'이라는 것이다.  (돌아볼 회),(용 용), 顧(돌아볼 고), 尾(꼬리 미)
묘골 너머에 '파회(巴回)'라는 마을이 있는데, 산 줄기가  '巴'자 모양으로 산이 마을을 감싸고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 글자의 윗부분의 네모 둘은 왼쪽이 파회(巴回) 마을이요, 오른 쪽 네모는 묘골 마을로 이 두 마을의 출입구는 글자의 동남쪽으로 트인 부분으로 나머지는 삼면이 산으로 둘려 싸여 있어서 밖에서도 안에서도 이 마을을 들여다 보거나 내다 볼 수 없어서  난(難)을 피하여 은거하기에 최적의 장소로 소위 십승지지(十勝之地)에 해당하는 명당 자리라는 것이다.
그래 그런가. 이 고장 출신에는 인물이 많다니 그 훌륭한 인물들이 누구 누구인가 옥신사(六臣祀)로 어서어서 가보자.

*. '육신사(六臣)' 이야기

 사육신 기념관에서 이상의 여러 가지를 익히고  육신사로 오르다 보니 길 좌우에 기와집들이 즐비한 것이 아산(牙山) 외암마을 민속촌(民俗村)을 거니는 분위기다.
 육신사기념관(六臣祠記念館)에서 사진과 영상을 카메라에 담다 보니 일행이 보이지 않는다.
부랴부랴 갈길을 제촉하다 보니 가는 길 좌측에 이정표가 서 있다.
'
←삼가헌 0.5m 육신사 0.3m'  
거기로 가야만  하는데 이 또한 생략할 수밖에 없었다. 육신사 종가댁으로 사육신 신위를 모시기 이전에 있었다는 '절의묘(節義廟)'와 '하빈사(河賓祠)' 그리고 사액서원이라는 낙빈서원(洛賓書院)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충정공의 11대손 삼가현(三可軒) 성수(聖洙)가 지은 초가(草家)를 그의 아들 광석(光石)과 손자가 허물고 지었다는 사랑방과 별당체인 '하엽정'과 '연당'을 못보고 그냥 지나친다는 것은 이번 육신사 답사 여행의 진수(眞髓)의 일부를 생략하는 것이기도 하지 않은가. 
그래도 여행에서 일행과 떨어지는 것은 낙오자가 되는 법이라서 그냥 직진할 수밖에 없었다.
가다보니 좌측에 공의 7대손 금산군수 박승고(朴崇古)가 지었다는 충효당(忠孝堂)이 발길을 잡는다. 그냥 단순한 집이 아니라 청년들에게 충효와 예악, 궁도 등을 가르찬다는 그곳도 지나쳐야 했다.
 왼쪽에 '바람의 家' 라는' 동강초당(東江草堂)'은 굳게 잠겨 궁금증을 더하는데 거기서 조금 더 가니 '박두을 여사 생가' 이정표가 있다.
'박두을 여사'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있는가.
남편 뒤에서 조용히 그 뒷바라지만 하던 동양적인 한국의 전형적인 이 부인은 갑질로 국내외 손까락질을 받으며 전국민의 지탄 받고 있는 저간의 모 항공사 재벌의 아낙내들이 배워야 할 모범이 되는 부인이다. 
한국의 제일의 재벌이 누구였나? 순천 박씨 박두을 여사는 호암 이병철의 부인이요, 그의 3째 아들 삼성전자 창설자 이건희 어머니시다.
 드디어 이 마을에서는 제일 유명하다는 六臣祠(육신사)의 외삼문(外三門)이 문 하나를 활짝 열고 멀리서 온 우리를 반기고 있다.
그 현판을 자세히 보라. 낯 익은 글씨체가 아닌가. 전 박정희 대통령의 글씨라서 구테타로 나라를 찾이한 세조와 묘하게 일치 되니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육신사 이 7만여 평의 부지는 순천 박씨 충정공의 17대 손 박노익(朴魯益)의 생가 터로 그의 아들인 9선 국회의원과 국회의장 3선을 역임한 박준규(朴浚圭)의원이 부친의 유지를 받들어  1994년에 종중에기증한 곳에 마련한 것이 이 고장의 명소 육신사(六臣祠)였다. 
  경내에 들어서니 우리를 반겨 주는 것은 홍살문이다.
홍살문이란 붉은 화살문이라는 뜻으로 홍전문(紅箭門) 또는 홍문(紅門)이라고도 핟다. 능(陵), 원(圓), 묘(墓), 궁전, 관아 등의 정면에 세우던 붉은 칠을 한 문(門)으로 유적지에 세우는 문이다.
육신사 경내에서 가장 볼거리는 홍살문에서부터다. 
(17) 한석당(閑碩堂)은 박팽년 아버지의 유허비, (14)번 우물 박준규 전 국희의장의 생가터 흔적. (3) 숭절당(崇節堂): 숭정사 앞 제사 준비로 소요되는 건물, (10) 육선생 사적 6각비: 사육신의 생애와 사적을 6각에 각각 음각한 비  (22)박정희 전대통령 휘호(揮毫)  (21)최규하 전대통령 휘호(揮毫) (20)박준규 전국회의장 휘호(揮毫) (2) 태고정(太古亭) (1)숭정사(崇正祠 ) (23) 송덕사(頌德辭): 순천 박씨 16대손 박준규 전 국회의장의 부친 박노익옹 송덕비
 
육신사 입구에는 외삼문(8)과 내삼문( 있다. 바깥과 안의 담에 있는 세칸으로 세운 대문이란 뜻으로 외삼문(8)은 '육신사'를 들어 가는 정문이요, 내삼문(內三門)(7)은 삼정사를 들어 가는 문이다.
육선생 사적비는 사육신의 생애와 사적을 음각한 비로 거북 6 마리가 받치고 있는 육각의 비로 1979년 '육선생서적비 건립위원회'가 세운비다. 물론 가장 앞 면에 세워 눈에 띄게 한 것은 박팽년의 비다.
  좌측에 태고정(太古亭)은 일시루(一是樓)라고 도 하는데 그 현판 '太古亭'은 한석봉 글씨체고, '一是樓'는 안평대군 글체인데 '옳은 것은 오직 하나뿐'이란 뜻이다.
이 태고정은 육신사에서는 제일 역사가 깊은 오래 된 건물이다. 앞서 이 필자가 ' 박팽년의 유복손 박일산(朴一珊)은 후손이 없던 외가의 재산을 물려 받아 달성군 하빈면 묘골에 99간의 종택(宗宅)을 짓고 정착하여 순천 박씨의 집성촌을 이루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쓰지 않았던가. 
그래서 유복손인 박일산(朴一珊)이 지은 태고정(太古亭) 정자는 육신사에 현재까지 남아 있는 가장 오래 된 건물로 보물 554호로 지정 되었다.
  숭정사를 드나드는 내삼문(內三門)은 평상시에는 꼭꼭 대문을 닫아 놓은 문이지만 천리길을 달려온  방문객 우리들도 창녕성씨 성삼문(成三問) 자손이라 숭정문을 활작 열고 우리들을 맞아 주고 있는 것이다.
나도 매죽헌 성삼문(梅竹軒 成三問) 신위에 참배 절을 올렸다. 박비(朴婢)처럼 직계 후손은 아니지만, 창녕성씨 후손으로서 창녕 성씨를 빛내주신 우리 할아버라서였다.
육신사(六臣祠) 이름에 대해 이의를 다는 사람도 있다. 이 육신사에 모신 분은 사육신 외에 박팽년의 부친 한석당(閑碩堂) 박중림(朴仲林) 한 분이 더 있지 않은가 해서다. 그렇다고 칠신사(七臣祠)라 하기도 그렇고, 육신사(六臣祠)라 고집하기도 순천박씨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은가. 참배객들도 한번쯤은 짚고 넘어가야 할 이야기 같다.

매죽헌 할아버님께
              -창녕 성씨 성철용
慶會樓의 연못에 뛰어들던 朴彭年을
挽留하던 그 손길로 만드신 訓民正音
그 한글
가르치는 일로
한 平生을 살았네요.
 
順天 朴씨 祭主시라 촛불 하나 못 밝히고
忠節을 기린 마음 깊이 깊이 새겨 가요
千里 길
멀다고 않고
달려 오길 잘했네요, 

     -2018년 4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