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시황릉을 찾아서

 

시안은 오래전부터 내게 가장 가보고 싶었던 도시 중 하나였다.

중국엔 이런 말이 있다. ‘10년의 역사를 보려면 선전(深玔)을 보고, 100년의 역사를 보려면 상하이를, 1000년의 역사를 보려면  베이징을 가 볼 일이나, 만년의 역사를 보고 싶다면 시안(西安)을 찾아가라.’고 회자 된다.

 

그래서였을까 1998년 클린턴 대통령은 중국 방문 시 시안에 첫발을 딛고 “한 민족을 이해하려면 이 민족이 어디서 왔는지를 이해해야 한다”고 古都를 찾은 辨으로 시안의 자존심과 중국의 유구한 역사성을 칭송 했는지 모른다.    어찌됐던 나의 절절한 호기심은 진시황이란 위인의 병마용 갱이 발견 되면서부터였다. 

 

3/28일 일찍 호텔을 나선 우린 당(唐) 현종이 양귀비와 겨울을 나며 목욕을 했다던 화청지(華淸池)를 답사했다. 연화탕, 해당탕, 태자탕 등을 들러 보았는데, 수온 43*c의 깨끗한 온천수가 흐르는 거대한 욕실에서 풍만한 육체를 갖은 양귀비가 온갖 교태로 폭군 현종을 농락했을 모습과 호사를2300여 년 전을 거슬러 상상해 보았다. 

  

화청지 근방 비림(碑林)도 너무 인상적 이였다.  한나라에서 청나라까지의 2300여 개의 비석을 수장한 8개의 비정(碑亭)을 시간상 다 돌아 볼 수는 없었으나 역대의 유명한 서예가들의 글씨체를 주마간산식이나마 감상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예서, 진서, 초서, 행서를 망라한 서체의 비석들을 나의 천박한 안목으로 무엇 하나 제대로 식별할 순 없었으나 그 방대한 유물들이 한 곳에 이렇게도 많이 집장(集臟)되어 있다는 사실이 중국에서나 가능한 일 아닐까?  현장에선 유명 비석을 탁본(拓本)하여 기념품으로 판매하고 있었는데 여러모로 군침이 당기는 바였다.

 

점심 후 그토록 고대해 마지않던 진시황릉을 향하면서 멀리서 보아야만 했던 다옌타(代贋塔: 唐 玄奘이 인도에서 가져온 불경을 모시기 위해 세운 탑)을 아쉬움으로만 가슴에 담은체 시안에서 30km 떨어진 벌판 한 가운데 솟은 야산 앞에 닿았다.

능의 둘레가 6km. 높이76m(원래115m였으나 지난 2천여 년 동안의 침식과 풍우로 인한 닳음으로 인해)인 능은 야산이라 해야 옳다. 봉분 정상까지는 20여 분간 계단을 올라가야 하는데 천하를 호령하던 진 시황을 내 발 아래 뭉개고 있다는 억지 자만외엔 허망스럼이 더 함은 무슨 연유 땜인가?

 

능 뒤론 玉山(여기 玉은 질이 좋고 지금도 체굴 중 이어서 민둥산이 됨)이 병풍처럼 휘둘러 달리고 있었고, 전면엔 광활한 지평선이 무한대여서 여기 시안의 광대함을 절감케 하였다. 무덤엔 잔디 아닌 석류나무가 빼곡히 군림하고 있었는데 석류가 잡충(雜蟲)의 침범을 막는다나-.

일설엔 양귀비가 석류꽃을 즐기고 열매 씨까지 먹었다니, 2000여 년 전 그녀의 미용식을 이제야 즐기는(석류엔 식물성 에스트로겐-여성호르몬인 estrogen-이 풍부해 여성 건강식으로 최고) 현대 여성들의 양귀비 흉내 내기가 자못 가상타 하겠다.

 

아무튼 진시황릉은 사마천의 史記 외엔 기록이 없단다. 그 사기 중 ‘진시황 본기’의 내용은 ‘전국의 죄인 70 여 만 명을 동원하여 39년이란 역사 끝에 완공 됐으며, 능 내부는 구리물을 부어 내부 돔을 만들었고, 자동 화살을 곳곳에 장치하여 접근자가 있으면 자동 발사 되게 하였으며, 위는 해와 달과 별들의 천문모양을 아래로는 수은으로 강을 만들어 흐르게 하였으며 인어 기름으로 촛불을 밝혀 영원히 꺼지지 않게 했다.’고만 알고 있기에 내부는 아직 미개발(무덤 설계 시 도굴 방지용으로 여러 함정을 만들었기로 그 비밀을 과학적으로 풀 때까지) 상태여서 숱한 신화만이 구전 되어 올 분이다.

 

그런 무궁한 궁금증을 달래며 1.5km 떨어져 있는 병마용굉(兵馬埇坑)을 찾았다.  흙으로 구워 만든 병사와 말 그리고 병기들의 집합장인 갱은 진 시황 사후에 그의 무덤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 졌다는데, 700여개의 도용들은 제각기 다른 표정, 자세, 복장, 머리모습에 머리카락, 주름살까지도 실물처럼 섬세하게 만들어졌으며, 100여 개의 전차, 40여 필의 말, 10만여 개의 병기들도 각기 다른 모형을 이루고 있어 그 정교함과 장대함이 가히 상상을 초월한 - 명실상부한 세계8대 불가사이였다.

 

더구나 지금 발굴된 3개의 갱은 능 전체의 1/10도 안되는 시작일 뿐 시황릉 일대 어디에 다른 갱이 있을지 탐사 중이란다.  1974년 우물을 파던 농부에 의해 우연히 발견되기까지 시황릉은 철저히 비밀스런 곳이었다. 도굴을 염려하여 어떤 기록도 남기지 않았고 짐작컨대 당시 무덤을 만들었던 수많은 인부들도 능 완성과 함께 토사구팽[殉葬] 당했기로 사기의 내용은 시황릉이 완전 발굴되기 전까지는 유일한 기록문서일 수 밖엔 없으리라. 

 

진 시황(bc259-210)!

6국(韓.魏.楚.조.齊)을 정복하여 춘추전국이 활거 하던 시대를 종언(終焉)시켜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영웅 - 만리장성을 완성시키고 아방궁을 축조하며 사후를 위한 거대한 능을 조성키 위해 백성들의 고혈(膏血)을 수탈한 폭군은 천하통일 11년 만에 죽고, 4년 후 그의 제국마저 멸망(bc206)하는 전무후무한 황제였다.

 

생전에, 영원히 살겠다고 불노초를 구하려 안달했던 그는 고작 50년의 생을 끝으로 스스로 만든 능속에 안주해야 했는데 역설적이게도 그는 지금 위세를 떨치며 살아가고 있음인가?

그가 수탈한 백성들의 고혈의 유적을 지금 그들의 후예들이 보상 받고 있음을 예지(叡智)한 걸까?  제국의 번성은 ‘爲民政治’속에 가능하고, ‘人命은 在天‘ 이란 걸 감수했었다면 위대한 토목공사는 없었을지도 모르고 자연 현재의 그의 인구의 회자[名聲]도 불가능 했으리라.

 

오늘 우리들이 흘린 피와 땀은 후예들의 복전일 수 있고, 승리한 폭군은 역사의 위인으로 거듭 나게 마련임은 역사란 대게 승리자의 기록일터여서 일게다. 

진시황릉 답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버스 속에서 난 중국의 4대 전설(견우직녀. 白蛇傳. 梁山佰과 祝英傳) 중 맹강녀(孟姜女) 생각이 떠올랐다.

결혼 3일 만에 만리장성 축조에 강제 징발되어 노역하다 죽어 장성 안에 파묻힌 남편을 찾아 나선 갖 신부의 엘레지 말이다.

 

남편 시체가 묻힌 장성 앞에서 얼마나 슬피 울었던지 장성이 무너지고 거기서 시신이 나왔단다.  맹강녀가 장성을 무너지게 했다는 보고를 받은 진시황은 대노하여 그녀마저 죽이려다 그만 그녀의 미색에 홀딱하여 후실로 삼으려 하자 맹강녀 왈, 3가지 조건을 제시한다. 첫째, 남편 무덤을 만들어 장례를 치루고 둘째, 그 무덤에 재배를 한 후 셋째, 자기와 같이 바다에 나가 3일간 연회를 베풀어 달라는 것 이였다.

시황은 얼른 두 가지 조건을 들어주곤 그녀를 동반하여 바다로 나갔었다. 그때 웬걸 맹강녀는 바다에 투신자살하게 되는데 그 후 그녀는 은어가 되었다고도 하고 해충으로 변신하여 시황을 물어 병들게 하였다고도 한다.는 전설 말이다.

 

어떻든 폭군 진시황은 지금 중국인민속에 살아있고, 인민들의 호주머니를 달러로 채워주는 은인이 되 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를 실감케 한다.  그래서 현대의 위정자들도 재임시 기념물을 남기려 무리수를 두는 어리석음을 가끔 저지르는지도 모른다. 

현대에서의 기념물이란 원대한 이념과 치밀한 계획 그리고 빼어난 설계를 갖고 국민적 컨센스를 구한 구조물이어야 하리라.

치밀하지도 못하고 국민이 총의도 간과한 날림공사가 빚은 조형물들이 우리의 혈세를 얼마나 낭비했으며, 또한 보수 유지하려 더 많은 비용을 쏟아야 되는지를 그들 위정자들은 생각해야 할 것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