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10.01.(수요일)

  

간단하나마 이지역 역사 공부 좀 하고 다녀야 잘 보고 잘 알 수 있겠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고대에는 로마의 지배를 받았으나 슬라브인이 이주해오면서

북부지방의 보스니아는 12세기에,

남부지방의 헤르체고비나는 15세기에 각각 독립하였다.

두 지방은 15세기에 들어와 오스만투르크에 병합되어 주가 되었다. 
이에 따라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다수가 동방교회이지만 이슬람의 영향을 받게 되고 

특히 슬라브계통에 속하는 보스니아인들이 이슬람으로 많이 개종하였다.

1875년 농민 봉기가 러시아-터키의 전쟁의 발단이 되었으며, 러시아가 승리한 뒤 1878년 베를린 회의 결과

두 주의 행정권은 오스트리아에 위임되어 또다시 오스트리아에 저항하는 민족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남슬라브족의 통일을 향한 민족주의 운동은 세르비아와의 결속을 한층 강화시켜,

오스트리아에 대한 저항을 촉발하는 구심점이 되었다.

  

1908년 오스트리아가 두 주를 병합한 후, 세르비아인들이 반()오스트리아 비밀결사를 강화하면서

1914년 6월 28일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를 암살하여 

이는 제1차 세계대전의 원인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오스트리아-헝가리가 패하고 민족해방운동이  더욱 활발해져 

다민족국가인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이 형성되고

1918년 12월 1일 베오그라드왕국의 성립이 정식으로 선포되었다.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를 비롯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에 속해 있던 남슬라브인들의 땅,

이른바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보이보다나, 달마티아,마케도니아가 베오그라드왕국의 영토에 편입되었다.

이때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도 이 왕국 영토의 일부가 되었다. 구소련이 전승국이 된 제2차세계대전후에는

티토에 의하여 구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연방이 출범하고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이를 구성하는 공화국의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다민족 공화국으로서 갈등의 씨앗을 내재하고 있었다. 1990년 7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의회 선거에서 

공산당이 패배하여 1991년 10월 주권국가로의 독립선언을 하게 되자 이를 계기로 내전이 촉발되었다.

1992년 2월 슬라브계 이슬람교도와 크로아티아인의 지도부가 공화국 독립의 국민투료를 실시하고 독립을 결정하자,

세르비아인은 투표를 거부하였다. 

구연방 내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남부슬라브인의 자존심을 지켜온 세르비아인들에게는 연방의 해체가

600여년 전의 1389년코소보 전투에서 이슬람에 패배한 일과 맞먹는 비극이 되었다.
 
이렇게 되자 이슬람교· 세르비아정교(세르비아인)· 가톨릭(크로아티아인)의 3종교가 민족주의와 결부되어 분쟁이 한층 격화되었다.

4월에 EU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독립을 승인하자 세르비아인은 북부를 중심으로 ‘세르비아 공화국’ 설립을 선언하였다.

5월에 UN 안전보장이사회는 보스니아의 내전 및 외부개입의 즉각적인 정지를 결의하였다.

7월 세르비아, 크로아티아와 함께 UN에 가입하였고,

7월 크로아티안 세력이 "헤르체크 보스나 크로아티아 자치구"설립을 선언하였다.

이에 세르비아 세력은 전쟁에 돌입하였다.
EU와 미국은 분쟁의 배후를 조정하던 신유고연방의 세르비아 정부를 비난, 세르비아세력의 팽창을 막는 무력행사를 결의하였고,

1993년 6월 UN은 유엔보호군의 무력 사용을 채택하였다.

그러나 내전해결의 실마리는 풀리지 않았고 8월 크로아티아인 세력이 ‘헤르체크 보스니아 공화국’ 수립을 선언하였다.

이후 이슬람교도·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간 내전이 각 세력의 '인종청소'로 이어지는 등 매우 격렬해지자

UN의 개입으로 1995년 12월 데이턴평화협정을 체결하여,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연방(이슬람계-크로아티아계 연방)과

스르프스카공화국(세르비아계 공화국)으로 이루어지는 1국가 2체제를 수립하였다. 

아드리아 해안에 면하는 20km의 해안선을 확보하였으나 크로아티아의 견제로

항구다운 항구가 없어 내륙국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여섯째날(2008.10.01 수요일)

  

            사 라 예 보  (Sarajevo)          

  

현지 가이드 김성룡씨는 사라예보에서 NGO 활동을 하는 사람이며

일본이 이나라에 일본 문화를 펴는데 자극받아,

우리의 고유문화를 알리기 위해, 문광부와 협의 하여 한국 전통 풍물과 춤들을 소개 하였단다

500여석 좌석을 3분의2나 채워, 걱정 하던 고국 관료들을 안심 시키고, 자주 이런 행사를 하기로 하였다 한다.

거의 혼자 고군 분투 하나 보다!!!

  

16세기경에는 이스탄불 다음으로 큰도시 였다 는데, 지금은 인구40여만으로 낙후 되고,

내전중 중앙도서관의 책이 90퍼센트나 소실 되었단다.

어떤 이유로라도 전쟁은 없어야 한다.

 

 

지난 밤 지나 왔던 시가지를 다시 관통하여 중심가로 들어 가는 길 오른쪽에 공동묘지가 있다.

이곳에서는 무덤을 시가지에 모시나 보다?!

  

  

강폭은 청계천 보다 조금 더 넓은 것 같은데 수량은 훨씬 더 많고 군데군데 수중보가 있고,

보 아래에는 페트병들이 오글오글,흘러 가지 않아 오리인 줄 알았다.

이곳은  , 성당, 교회,이스람사원  어우러진 도시 이다.

강을 건너 1892년에 세워진 성안토 성당에 갔다.

  

  

  

교회 앞에 성모님이 지치고 힘들어하는 중늙은이 같은 예수를 안고있는 조각을 보고

우리 일행중 유일한 처녀 신소영양이 '예수님이 불쌍하다"고 눈물을 흘린다.

교회 밖에 나오니, 웃고 있기에 "울다 웃으면 00에 xx난대요"라 놀렸다.

11월에 행시 발표 기다리는 중이며 어머니랑 참가 한 독실한 천주교 신자이다. 

버스 이동중 어여쁜 목소리로 성가를 들려 주기도 하곤 했다.

  

  

  

교회규모는 크지 않으나 외양은 전체적으로 붉은색이고, 내부는 스테인드글라스의 그림,

모자이크벽화.....

등으로 소박하게 보인다.

  

  

교회밖의 부속건물에는 신자들에게 필요한 성물 판매소도 있으나, 우리는 나와서 주변을 둘러 보았다.

다시 강가로 나와 김성룡씨로 부터 설명을 듣고 제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된 다리로 간다.    

  

  

다리 건너 오른편에  박물관이 보인다.

 세르비아 청년이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를 암살한 라틴다리 이다.

                                                                         

1914년 6월28일 일요일,

맑고 쾌청한   날씨였읍니다.    

오스트리아-항가리 황태자,

프란츠 페르난디 대공과 부인 조세핀은

사라예보에서 열린 육군대연습을 참관하고

돌아가던 길이었습니다

황태자 부부가 탄 오픈카가 잠시 멋칫 할 때

길모퉁이에서

한 청년이 나타나 권총을 겨누었읍니다.

순간 총성이 울리고 차에 타고 있던 황태자

부부가 쓰러졌읍니다.

청년은 그자리에서 체포되고,

황태자부부는15분후에 숨졌읍니다.

 

사건이 일어나자 전유럽이 긴장합니다.

 .................

 

그리하여 세계1차대전이 일어나는 원인이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라틴다리 앞 박물관 벽에 벽보판을 만들어

그 당시 사진을 전시해 두었다.

  

우리네 안중근의사가 떠오른다.

  

                                                                   

 

뒷길로 들어가니 성모의 대중교회가 있다.

많이 파괴 되었으나, 그리스정교회와 각 종교에서 지원하여 수리 하였다 한다.

러시아풍의 황색교회이다.

종교가 달라도 서로 돕고 잘 사는데 정치가 끼어들면 왜 싸우고 죽이는지...

  

  

  교회에서 나와 조금 가니 길바닥에 서양장기판이 있고 여럿이 둘러 서서 장기를 두고 있다.

  

  

   다문화 사회의 상징인 사람과 비둘기의 조각.

  

  

  두개의 탑이있는 카톨릭성당은 예수님 성심교회로 1889년 지었고

  

  

  스테인드글라스가 특히 유명 하다.

  막내 신소영양은 기도를 드린다.

  

  

  

  오늘날의 사라예보를 건설한 오스만제국의 술탄을 기념하는 가즈하스레브베이 모스크를 돌아본다.

바슈카르지아 거리(문화적으로 뛰어남)에서 자유시간을 주어 이리저리 다녀본다.

각종 장신구를 손으로 만들어 파는 가게들이 즐비하다.

  

  

 

  

 

  

 

옛날 건물들 

                                         

  

비둘기가 많다.모이를 주어버릇해 그런지 귀여운 남매의 손에 올라앉아 잘도 먹는데

처의 손에는 앉지를 않으니 비둘기도 외국인 알아 보나^^*

  

  

  

노천카페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으려고  5유로를 주니, 거스름으로 현지 돈을 주어

오늘 이곳을 떠나므로, 쓸모 없을 것 같아  다른 사람들을  합석 시켜 콜라를 주문하여 마져 썼다.

점심은 스테익하우스에서 팔뚝만한 송어 한마리씩 구어 주어 잘 먹었다.

  

  

지금것 다닌 발칸지방은 야채라고는, 오이와 토마토 정도인데 여기서는 야채가 비교적 푸짐하다.

점심 먹었으니 또 이동이다. 1시10분 김성룡씨와 작별하고 메주고리예로 간다.

  

  

  

사라예보는 아름다운 도시 이다. 달리는 버스에서 찍은 사진들이다. 

  

  

                                                                 길가동네 

 

                                      산 나타나고, 나온다.

  

  

 강가의 휴게실  

  

사라예보에서 모스타르로 가는 길은 산악지대를 지나게 된다

창밖으로 다양한 산의 모습이 보이고, 얼마쯤 지나니, 계곡인가? 싶더니 점점 넓어진다.

이강을 따라 이리저리 계속 되는 강변도로를 달린다.

이강은 흘러 흘러~~~~  아드리아해로 빠진다!

   

  

 

  

  

강변길을  가는데 인솔자는 네레바트강이 란다.

생소한 외국 강이름 이라, 한참 가다가 또 물어보는데 차중에 아무도 모른다.

네레바트강이라 다시 가르쳐주고..........  겨우 외웠는데, 다음날 자기가 틀렸다며 네레트바강 이란다.

이렇게 되면 이 강이름이 바트인지 트바인지 뒤죽박죽 되겠다.

네레트바강 끼고 가는 길은, 강과 높은 석회암 바위산이 계속 이어져 있다.

굽이굽이 산과 강을 끼고 도는 아름다운길을 3시간 반 여를 달려 모스타르에 도착 했다.

  

          모 스 타 르  (Mostar) 

 

모스타르는 세르보-크로아티아말로 '오래된 다리'라는 뜻이다.

헤르체고비나의 수도였으며,아드리아해로 흘러드는 네레트바강 연안 있다.

포도를 비롯한 과일, 담배재배,목재가공,비행기공업도.또 인근에는 석탄 보크사이트 광산이 있다.

중세 건축물이 많고 로마시대의 성(城),1556년에 건설된 다리,터키시대의 이슬람사원등이 유명 하다. 

  

  

  

모스타르는 내전으로 많이도 부서졌고, 아직 복구되지 않은 건물도 많다.

인솔자는 시간이 없으니,  30분 동안  스타리 다리까지 갔다 오자고 한다.

400년이상 존속하던 이 아름다운 다리는, 오스만터키때나 합스부르크 시대에도 잘 지내 오던 다리를

1993년11월 내전중 크로아티아가 부수었다. 

  

  

  

  

그후 유네스코 지원하에 재건축을 위해, 고고학적 연구와,유럽 전역에 흩어져 있던 역사기록들이 동원 됐으며,

다리에 쓰인 1088개의 암석들은 모두             

전통공구와 기법을 이용해 손으로 조각되고

건축했다. 

2004년7월 다리는 재건이 완성되고,

23일 성대한 기념식이 열려, 평화를 기원하는

상징적인 다리 사랑 받고 있다.          

  

매년7월이면 스타리모스트에서는 다이빙 축제가

열린다.

주변국 유명선수들과 스포츠 관계자들도 참석한

가운데, 다시 한번 이다리를 중심으로 분열 되었던

양안의 이질적인 문화와 종교의 화합의

펼쳐 보인다고 한다.

  

2005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 되었으며,

그에 관 한 현판이 세워져 있다

  

  

  

  

  

이 아름다운곳을 이렇게 서둘러 떠나다니.....

  

               메주고리예( Medugorje)                            

  

오후 5시20분 메주고리예(Medugorje)의 성야고보(St Jacob) 성당에 도착 한다.

  

 

야고보 성당은 1897년 지었으나 지반이 약하여 무너지고, 2차세계대전후 다시지어

1969년1월19일에 완공한 성당이다.

이마을의여섯 소년소녀들이 1981년 6월24일 성모의 발현 목격 한 이후

성지순례자가 끊이지 않는다.

4000여명의 한적하던 시골이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국제적인 명소가 되었다.

성모 발현은 아직 교황청의 공식 인정은 아직 받지 못 했단다.

  

아래사진부터 그러니 야고보성당 뒤와 포도밭과 동네를 신자들은 못 보았으리라.

구경보다 더좋은 예배에 참석 하였으니...이럴때엔 신자아닌게 더 좋은가...

  

  

  

각국에서 온 천주교 신자들이 애처로운(?)예수님을 어루만지며 기도한다. 

우리부부와 또 한분은 성당 주변에서 조각품을 감상 한다.

  

  

나무로 만든 십자가 가운데 그림이 하나씩 있다.

골고다 언덕으로 십자가를 메고 가는 모습을 표현 한 것이 계속하여 있다.

  

  

  

지나 가는 데,향기가 얼마나 좋던지  ~~~~~

  

  

포도밭에서 수확하고 남아 있는 포도를 따 먹고, 허브밭에서 향기에 취하여 놀았다.

  

  

  

서쪽하늘에 구름도 있어, 멋진 일몰을 본다.

넓은 성당 뒷마당에도 여러줄의 많은 장의자가 있어 거기에도 신도가 예배를 드리고 있다.

  

  

성당 좌측 뒷문쪽으로 지나는데,  

많은 사람들이 도열 하여 신부님으로 부터 10원짜리동전보다 작은 흰밀떡을 받아먹는다.

무심코 지나다 나도 하나 주어서 거절 못하고 받아먹었더니 입안에서 그냥 녹아버린다.

내말을 들은 신자들은 큰일 났다는구나~

이제는 신자가 되어야 한다네!!!!!

사과 하나 따 먹었다고 자자손손 누대로 죄인이라 하지만,

그 밀떡이야 당신이 주셨으니 그러지야 않겠지?!

  

  

7시 지나니 신도들이 은총을 입었는지 만족한 얼굴로들 나온다.

차로 5분 거리에 있는 패밀리(FAMILY)펜션에 7시반경에 와 저녁먹는다.

닭다리와 감자(매쉬 포테토)에 포도주와 쥬스를 곁드린 푸짐한 만찬이다.  

지금껏 호텔식당에서는, 먹은 접시를 서빙하는 사람들이 가져가고 새로운 접시를 또 사용했으나

규모가 작은 팬션 주인아줌마는  젊은여자 한명 데리고 서빙을 하면서, 접시는 쓰던 것을 계속 사용 하란다.

물론 그부인의 말은 못 알아 듣지만 모두들 눈치로 알아 채고 따랐다.

이러니 돈과 시간만 되면 말 안 통하여도 해외여행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