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일곱째 날 : 2010.7.15(목요일)

 

노르웨이는 1905년 스웨덴으로 부터 독립 한 입헌군주국 이다.

 

위치 : 북유럽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서반부.

수도 : 오슬로(Oslo). 

언어 :  노르웨이어. 

기후 :  북대서양해류의 영향으로 온화.

종교 :  복음루터교 85%.

환율 : 1NKr=189.3원 (2010.08.19. 매매기준)

인구 :  약 464만명 (2008)

면적 : 323,802 km²

1인당 GDP : 7만 9085$ (2009)

 

 양차에 걸친 세계대전에서 노르웨이는 엄정중립을 표방한 바 있으나,  

나치독일의 침공으로 많은 국토가 피해를 입었다.  

전후 전쟁의 상처를 딛고 일어 선 그들은 때 맞추어 발견 된 북해유전(1970년대)으로

유럽 제2의 산유국이 되었을 뿐 아니라

해양의 나라답게 조선업과 어획량 등 세계유수의 경제력을 자랑하고 있다.

 

 오슬로는 해안에서 내륙으로 100km 가량 들어간 Oslo Fjord의 끝자락에 발달된 도시 이다.   

노르만 어로 "신의 목장"을 상징 하듯 Oslo는 시가지의 60% 이상이 숲에 뒤덮인 숲의 도시 이다.   

  

이 도시는 1050년 최초의 통일왕국인 노르게의 하랄드 왕에 의하여 개발이 시작  되었고,   

1299년 베르겐에서 이곳으로  수도가 이전 되어 오고

14세기들어 한자동맹의 도시로 번영을 누리게 되었으나

1624년의 대화재로 도시전체가 손실을 입는 비운(悲運)을 맞기도 했다.

 

덴마크의 크리스찬 4세가 오늘의 화려 한 도시로 재건 해,   

오슬로라는 이름을 다시 찾은 1925년까지 이 도시를 크리스차니아로 불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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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6시에 호텔 근처로 산책을 나가니,

  

중국사람 두사람이

벌써 산책길에서 돌아 오고있다.

 

꽃과 콩과식물 하나씩 꺽어 가지고

오다 가 보여 준다.

 

우리나라 야생화도 잘 모르는데......

노르웨이 야생화는 더 모르지만,

꽃 보고 좋아하는 처를 보며 나도 좋아진다.

 

 

  

이 분홍꽃은 이곳에서 자주 만나는 꽃 인데,

나중에 가이드에게 물어 보니 루핀이라고 한다

약간의 신경독소가 있다고 한다

 

                                                바이킹 선박 박물관 

 800년대 여왕 전용 선박등 세척의 선박이 있는 바이킹 박물관으로 갔다.( 9시20분)

 

 유럽의 역사에 바이킹의 시대가 등장한 것은 약 800년경 이었다.  

스칸디나 반도에 살던 이들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항해술과 모험심으로

노르(Knor)라고 하는 기동성이 뛰어난 배를 만들어,

러시아, 영국, 프랑스를 비롯하여 스페인과 북아프리카까지

그들의 활동무대로 삼아 해적질을 일 삼았으며, 때로는 그곳에 그들의 나라를 세우기도 하였다.  

  

바이킹이란 이름도 해적을 뜻하는 것이었으며,

사각돛에 바람을 가득 머금고 파도를 날렵하게 헤쳐 나가는 그들의 배를

유럽사람들은 Long Ship이라고 부르며 두려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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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고학자,탐험가 로서 바이킹 연구한 부부의 동상이 있다.

Anne Stine(1918.2.11~1997.11.6), Helge Ingstad(1899.2.30~2001.3.29),결혼은 1941년에 했으니...

남편은 아이슬란드와 카나다 북부까지 바이킹들이 활동한 것을 밝힌 사람이다.

우리나라 이순신 함정이 있듯이 잉스타드란 노르웨이 함정도 있다.

 

 

 

 

 

 

 

바이킹들중에 죽으면

배와함께 바다에 수장 하는데 

비싼 배와 함께 수장하는 사람은 왕이 란다.

수장된 배를 인양했을때 각종 부장품이 나온단다.

 

배에 있던 유골인데 바이킹 왕이었으리라.

 

     화려한 마차도 부장품.

 

       배의 앞뒤가 같아서 공격과 철수가 유리 했단다.

 

투어를 일찍 시작해 10시경 바이킹 박물관을 끝내고

비겔란 공원(Vigeland Frogner Park)에는 10시반도 되기전에 갔다.

 

                            비겔란공원(Vigeland Frogner Park)

                      

오슬로 시에서 공원 부지10만평을 비겔란에게 주고 마음껏 공원에 작품을 조성 하라 했단다.

 

이 공원에는 사람의 일생과 갖가지 희노애락을 표현하는

193개의 청동과 화강암의 조상, 군상 등과

분수, 돌다리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는 자기 작품에 제목을 붙이지 않았다고 한다.

 

 

 가이드는 후문도 그의 작품이란다.

문을 지나 들어가니 다리가 있고,다리난간에는 58개의 청동상으로 장식 되어 있다.

 

입구에서부터 저 멀리 중앙의 모노리텐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탄생과 죽음에 관련된 조각품들이 펼쳐져 있다. 

  

 

 

 가장 인기가 있는  화난 아이 조각상!  손을 타 색깔이 노랗다. 

 

 

 

 

 

  

 분수의 네모서리에 있는 조각. 부로콜리 같다.

 

 

 

                                

 

공원의 거의 끝부분 가운데에 있는 높이 17,3m의 모노리텐 이라 불리는 조각품 이다. 

  

260t의 거대한 화강암에 조각된 121명의 남녀상은 서로 위로 올라 가려는 인간의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인간의 본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비겔란의 최후 작품이기도 한 이 작품은 비겔란에 의해 제작된 석고 모델을 가지고

세명의 제자와 같이 14년에 걸쳐 제작한 것이며

결국 그는 이 작품의 완성을 보지 못 하고 생을 마감 하였다고 한다.   

  

이 모노리텐을 중심으로 주위에는 인생의 생로병사를 의미하는 작품 배치되어 있다.

 

 

 

 날이 흐리더니,  많은 비는 아니지만 드디어 비를 뿌린다. 

 

 

 

 Monolitten과 주위의 조각상

 

  

 여보!  조각들이 뭘 보던가요~~~

 

 

 

 또 아가들을 보는 처!  왼쪽 유모차에는흑 백의 아기들이 나란히...

 

이곳 북구에 오니 젊은 부부들이 보통 2~3명의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다닌다.

역시! 복지가 잘 되어 있어서, 육아에 대한 부담이 없어서인가!~~~~~

 

 다리밑에는 호수인지? 흐르는 물인지?......오리가 많다.

 

 나올때 다리 오른쪽으로 내려가,  물가로 갔다.

 

 

 

            태중의 아기란다.

 

  아쉬움을 남기고 부지런히 걸어 갔으나.....

 

시간에 늦지는 않았지만_   제일 나중에 버스에 탔다.

 이번 우리 여행팀들은  모범생(?)들이여서  항상 약속시간 보다 일찍 돌아와 앉아 기다린다 ^*^

 

  정문

 

 점심식후 오슬로 시청사 로 갔다. 

본관은 못들어가고 강당 같은 건물에 들어 갔는데 벽마다 그림이 있다.

오슬로시 창립 900주년을 기념 하여 만든 시청사 란다.

 

  노벨 평화상의 수상식은 매년 12월 이곳 시청사에서 열린다.

  

많은 의미가 있는 미술품이 걸려 있다.

가이드로 부터 설명을 열심히 들었지만 기억이 나지 않으니,

'녹음기를 갖고 다닐까! ' 하는 생각을 매번 하게 되지만....... 

 

 

 

뭉크의 방이 있는데,  출입금지 인지라 열린 문밖에서 바라 보았다.

위의 그림이 뭉크가 그린 그림이란다.

'절규'로 유명한 뭉크의 작품은 2일후 오슬로에 다시 돌아 왔을 때 국립미술관에서 보기로 한다.

 

 창밖으로 바다도 보고

 

 

                    왕과 왕비, 설마 나 두고 제2 왕비 되고 싶은것 아니시겠지 후후.

 

 

                                       시청 앞의 백조상

 

 비는 계속 내린다. 

 

1시10분경 오슬로를 떠나 1994년 동계올림픽 개최지였던 릴레함메르 지역을 지날때

오른쪽을 보니, 스키점프대가 푸른 비닐 덮은 것 같다.

 

페르킨트 생가가 있는 휴게실에 들렸다.

 

 노르웨이의 음악가 그리그의 솔베이지의 노래에 나오는 페르퀸트의 집.

 

 노르웨이 어느 산골짜기에 가난한 농부 페르귄트가 살았습니다.
그 마을에는 아름다운 소녀, 솔베이지가 있었지요.
사랑하는 두 사람은 결혼을 약속했습니다.
가난한 페르귄트는 돈을 벌기위해 외국에 나가 갖은 고생 끝에 돈을 모아
고향으로 돌아오다 국경에서 산적을 만나 돈을 모두 빼앗깁니다.
겨우 고향으로 돌아온 페르퀸드는 어머니가 살던 오두막을 찾았습니다.
병드신 어머니는 페르퀸트를 보고는 곧 눈을 감으셨습니다.
지난날의 후회와 인생의 덧없음에 페르퀸트는 투신자살을 결심합니다.  
그때 멀리서 들려오는 노래소리를 따라가 보니
백발이 된 솔베이지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솔베이지는 꿈에도 그리던 연인 페르귄트를 안고 '솔베이지의 노래'를 부르며 페르귄트의 뒤를 따릅니다.


 

겨울이 떠나고 봄이 지나고,
여름이 서툴러 지나가고 해가 지나고
그러면 당신은 제게 돌아 오겠지요,
저는 약속했지요.
진정 당신을 기다리기로.
당신에게 신의 가호가 있기를
당신이 아직 태양을 보신다면
신의 축복이 있기를
저는 당신을 기다립니다.
당신이 제 곁에 오실때 까지
당신이 제 곁에서 기다리신다면
그곳에서 만나겠지요.

 

 

 솔베이지마을을 떠나 오따강을 떠나 오따로 간다.

  

  

 오따 라는 지명은 페스트가 유행했을때 주민 모두 죽고 8사람이 살아 남아 오따라 한단다.

오따가 숫자 여덟이라지!

오따를 멀리 바라보며 우측 가파른 언덕으로 굽이굽이 올라가,

해발900여m(?) 아무튼 아주 높은 곳에 있는 론다스파호텔에 들었다.

밤 10시까지 스파를 한단다.

 

한국사람들이 많이 다녀갔는지, 방명록에는 한국사람들이 글을  많이 남겼다.

우리도 흔적을 남겼다.

아주 오래 된 호텔 인지? ...... 에리베이터 문이 나무로 되어 있다.

문이 저절로 열리는 줄 알고 기다렸더니......

손으로 열고 내려야  했다.

 

 

 

식후 처가 호텔에 있는 자전거를 타려기에 같이 타 보려는데

안장이 높아서,  절반 내리고 올라타고 가는데 발끝이 겨우 닿아 내리다가 오른쪽으로 사정없이 넘어졌다.

카메라를 왼쪽에 걸어 다행이었지만 오른쪽 쇄골아래 세번째 갈비뼈가 아프다.

숨쉬기 재채기 모두 괜찮으나 여행내내 결리고 아프더니 지금은 혹이 나 있다.

그나마 갈비뼈 부러진것은 아니어서 다행이다.

안장을 끝까지 내리고 타니 맞네 ~    유럽사람들 다리가 얼마나 긴거야..... 

 

 처는 내가 넘어지는 걸 보더니,

자전거 타기를 포기 한다. 

 

호텔앞 염소 우리, 우리 바닥에도 풀이 있으나,

처가 같은 풀을 뜯어 주니 먹는다.

 

자기네 우리에도 같은 풀이 있는데,

검은녀석도 달라고 오네...

 

 

 

  지붕바닥에 자작나무 껍질을 깔고 흙을 올려 잔디를 심었다.

  추운겨울 난방에 도움 되리라.

 

 

 처와 산책을 나가 호텔 뒷산을 올라가니, 별장인지 사람이 사는지 가파른 산에 터를 평평하게 하고

 지붕에는 잔디를 덮은 집들이 계속 계단식으로 있다.

 

  염소도 있는 걸로 보아 사람이 살기도 하나 보다!

  처는 누런색의 노루를 보았다는데 내가 부지런히 갔는데 안보인다.

 

  9시40분경 아직도 구름과 숨바꼭질하는 해.

 

 

 

 

 조금 만 더 하다가 꼭대기까지 올라 갔다.

 돌탑이 있고 누가 흘렸는지 모자 하나를 돌탑위에 돌로 눌러 두었구나.

 건너편에 더 높은 봉우리가 있지만, 

 내려가다가 다시 올라가게 되어 있고, 올라 온 거리보다 더 멀고 어두워 그만 내려 왔다.

  

                                 밤 10시가 지났어도 아직도 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