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5.29~2009.5.30.

 

한달여 전 친구가 전화하여 포르투갈과 스페인 다녀 오잔다.

작년 내가 발칸반도 6개국 같이 가잘때 호주와 뉴질랜드 간다며 안가더니

사정이 생겨 호주 못갔다며 내가 권할때 같이 갈걸 그랬다며 후회하네.

이제 앞으로 두어번이나 더 나가겠냐며 가잔다.

두번이 뭐냐 나는 여러번 더 갈 수 있다며 큰소리 쳤다.

아직 건강은 된다 자부하니까.

 

L여행사로 가자며 계약 하더니 우리 두부부 네사람뿐이라 모객이 취소되었다며

하나여행사로 옮겨 주겠다더란다.

L사나 하나투어나 여행상품이 비슷하여 하나여행사로 바꾸어 나가기로 하고.

 

해외여행은 왜 이리 일찍 공항에 나오라는지 11시경에 나와 세시간이나 공항에서 진을 빼게 한다.

4시넘어야 밥줄거라며 가볍게 먹고 가재서 반우동(별이름 다보네 우동 반그릇이란다) 먹고

처는 프랑크푸르트 시간에 맞추고 나는 우리나라 시간 그대로.

 

                             프랑크푸르트 탑승구는 지하철 타고 가야 한다.

 

보안검색 마치고 마지막 법무부 출국검사에서 비행기 티켓이 잘못되었다며 못나간다네.

여행사에서 준 비행기표가 프랑크푸르트에서 리스본 가는 표라 모두 나갔는데 나만 혼자 남아

핸드폰도 없어 인솔가이드를 이리저리 찾아 표 바꾸어 달라니 그가 보관하고 있는 표도 똑 같다.

그가 LH항공에 전화하여 급히 인천출발 프랑크푸르트도착 표로 바꾸어 와 들어가게 되었다.

부디 나가서나 어려움이 없어야 할텐데...

5월29일 오후 1시55분 인천공항에서 LH(루프트한자)713편으로 떠나는데 2시22분에 이륙하네.

12시간여 날아 프랑크푸르트공항에 오니 나는 30일 밤1시20분 처는 29일 오후6시20분이다.

 

공항에서 3시간여 기다리는중에 인솔가이드에게 부탁하여 서로간에 인사 나누고 보니

모두 17명이다.

LH4536편으로 9시45분 프랑크푸르트 공항 떠나

(섬머타임으로 스페인은 7시간 시차, 포르투갈과는 8시간 시차.)

포르투갈 리스본공항에11시반에 도착하여 호텔에서 여장을 풀고 밤 한시 넘어 자게 되었다.

오늘은 8시간을 더 살았나. 하루가32시간이네.

그래도 밤에 도착하니 잘 수 있어 좋다.

이집트 갔을때는 도착하니 아침 8시반이라 쉬지도 못하고 바로 투어를 했는데...

 

위치 :  유럽 서남부 이베리아 반도 서부
수도 :  리스본(Lisbon)
언어 : 포르투갈어
종교 :  천주교 90%, 기독교 1%
면적 :  9만 2152㎢
환율 :  1750.72   (2009.06.11. 매매기준)

 

선사시대에 이베리아 반도에 이주하여 온 여러 종족의 혼혈로 형성된 켈트계 이베리아인 

B.C. 12세기에 페니키아인, B.C. 8세기에는 그리스인의 영향을 받았다.

BC 2세기부터 로마의 속주()가 된 뒤 로마화가 시작되어 루시타니아라고 불렸으며,

로마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후 고트족등 게르만계 부족들의 침입을 받았으며 그리스도교도 널리 전파되었다.

 

8세기에는 이슬람 세력의 침입으로 국토의 대부분이 그들의 지배에 들어갔으나

그리스도교도에 의한 국토회복운동(레콩키스타) 과정에서 포르투갈 왕국이 성립되었다.

1095년 프랑스 왕족 앙리 드 부르고뉴가 포르투갈 백작에 봉해지고

그의 아들 아폰수 엔리케시가 테호강 북쪽을 평정하여

카스티야로부터 독립하고 1143년 포르투갈왕()이 되었다.

국토회복운동은 1249년에 완료되어 오늘날의 영역이 정해졌다.

 

14세기의 후앙 1세(재위 1385∼1433) 때부터 왕권은 리스본의 상인계급과 결탁, 절대주의화하였으며

영국과의 동맹이 시작되었다.

후앙 1세의 아들 엔히크는 항해왕()이라고도 불렸으며, 아프리카 서해안을 비롯한 신항로의 발견에 노력하여

곧 인도항로와 브라질을 발견(1500)함으로써 포르투갈은 해양왕국으로서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식민지 경영은 사금과 노예의 획득, 향료를 비롯한 몇 가지 농산물의 수입에 주력하였으며,

수도 리스본은 각지로부터 유입된 부()의 집산지로써 크게 번창하였다.

그러나 부는 왕실과 귀족에게만 집중되었으며 이들의 낭비로 부의축적은 없었다. 

 

포르투갈의 해외진출은 군사력을 배경으로 한 무역과 함께 포교활동이 수반되었다.

국내에서는 반종교 개혁의 중심으로서 카톨릭 교회의 세력이 강화되었다.

또 문화적 측면에서는 이슬람· 인도· 고딕풍()이 뒤섞여 조화를 이룬 마누엘 양식이 확립되는 등

독자적 르네상스 문화가 개화하였다. 

"우스 루지아다스"로 유명한 국민시인 "카몽이스"가 출현한 것도 이 시기였다.

1572년에 출판된 이 불후의 명작은 그리스의 "호메로스"에 비견되는 웅장한 국민적 서사시이며,

그 주제는 바스쿠 다 가마의 항로발견 등 포르투갈 역사를 다룬 것이다.


1578년 세바스티안왕()이 북아프리카 원정에서 전사한 뒤,

1580년부터 60년 동안 에스파냐의 지배하에 들어갔다가

1640년 브라간사공()이 프랑스· 영국과 동맹을 맺어 다시 독립을 쟁취, 브라간사공은 후앙 4세가 되었다.

그러나 영국에의 경제적 종속이 점차 심화되었으며,

1703년에는 메스엔 조약에 따라 영국공예제품의 자유로운 수입이 인정되고

낮은 관세로 포르투갈산() 포도주의 영국 수출이 결정되었다.

이와 함께 브라질에서 인도에 이르는 대제국도 점차 네델란드· 영국의 진출에 의해 축소되어갔다.

 

19세기 초에는 나폴레옹 군대가 침입하여 왕실 일족은 브라질로 망명하였으며, 

나폴레옹 몰락 후에는 영국 장군이 섭정()으로 부임, 포르투갈을 실질적으로 지배하였으나

1820년에 에스파냐 내란에 호응하여 반영국() 입헌파()의 혁명이 일어나

국왕이 복귀하여 입헌군주제가 채택되었다.

1822년에 최대의 식민지인 브라질이 독립을 선언한 뒤부터 포르투갈의 국력은 쇠퇴해 갔다. 

1908년 국왕 카를로스 1세와 그의 왕자가 암살되었고

1910년 총선거 후 공화파()의 혁명이 일어나 마누엘 2세가 퇴위하고 공화제가 성립하였다.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아침에 깨어 창문을 열고 포투갈에서의 첫날을 맞는다.

 

                                                     일출 무렵 호텔 마을

 

호텔앞 대서양 바다의 방파제로 나가니, 파도타기 하는 사람도 한사람 있고

방파제 끝에는 낛시꾼도 세사람 있다.

모래사장을 걷기도 하고, 방파제 위에는 바닷물이 증발하여 소금이 되어 있기도 하고

처랑 서로 사진찍어 주는데

 

                                  

                                                            대서양 바다

 

한사람이 가까이 오더니, 사진 찍어 준다는데 한국 말이다.

5시부터 한시간여 산책을 하는데,

악기소리가 들려 자기가 가보니 카바레에서 밤새워 지금도 춤추고 있다는 구나 

주말은 이렇게 밤새워 즐기는 젊은이도 많은가 보다.

김명수씨라고 자기 소개를 하는데,  지식경제부 산하기업체 사장이라며 에너지관련 사업하는데

포르투갈이 풍력발전에 강한나라라 찾아왔단다.

카메라 안가져 나왔기에 그분 사진 한컷 찍고 e mail 주소 받아두었다.

아침, 식당에서 또 만났다.

 

현지가이드 이원희(데니스)씨를 만나 그의 안내로 벨렘(Belem)지구의 벨렘탑으로 가는길에

왼쪽에 전시된 복옆비행기를 보았다.

 

                                                                 복옆비행기

  

                                             벨렘탑(Torre de Belem)

 

 테주강 하류에 있는 탑으로 처음에는 물속에 만들었으나 강 흐름이 바뀌어 물 밖으로 나왔단다.

1515~19년에 만들어 진 이탑은 하얀나비가 물에 앉은 형상의 마누엘양식의 3층탑으로

아름다운 테라스가 있는 3층은 옛날 왕족의 거실로, 지금은 16~17세기의 가구가 전시되어 있단다.

2층은 포대가 있으며 항해의 안전을 수호하는 "벨렘의마리아" 상이 있다.

1층은 스페인 지배때 부터 19세기초까지 정치범 수용소로서 스페인지배에 반대하던 독립운동가, 

나폴레옹군에 저항하던 사람, 진보주의자등, 밀물때는 물에 잠기니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발견의탑

 

무슨 행사가 있는지 군인들이 모여있는 잔디광장을 지나 1km 상류의 발견의탑으로 갔다.

콜럼버스가 스페인 이사벨라여왕의 도움으로 남미를 발견하고 돌아올때에는 포르투갈로 들어왔단다.

그래서 여기에 발견의탑이 있는가 보다.

 

                                      발견의탑 광장 바닥에는 세계 지도가 있고 

                                      지도에는 포르투갈에 의해 발견된 연도가 있다. 

        

수신기를 주어 가이드의 설명은 떨어져서도 들을 수 있어 좋다

"전에 일본 관광객들의 수신기 사용이 부러웠다"는 일행도 있다.

 

            아침에 우리가 이다리로 건너 온 떼쥬강의 4월25일 다리 (Ponte 25 de Abril) 가 보인다.

  

새로이 탄생된 신정부는 4월25일의 무혈혁명을 기리는 의미에서 4월25일 다리로 부르게 되었단다.

  

                       강가에는 요트도 많다.포르투갈은 우리와 같은정도의 소득수준이라는데.......

 

지하도 건너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인

제로니모스 수도원(Mosteiro dos Jeronimos) 으로 갔다.

대항해시대의 선구자 엔리케 항해 왕자가 세운 예배당에

미누엘 1세가 제로니모스 파 수도사들을 위해 수도원으로 건립하였다.

마치 스페인의 알함브라 궁전과도 같다는 사람도 있다.

 

 

 

 

 

                      돌기둥이 굵고  기둥에 조각을 화려하게 하여 다른 사원보다 특별하다.

 

 

                                                       코끼리가 관을 지고있다.

 

 

 

 

  

  

점심후 해남땅끝마을 같은 포르투갈 서쪽끝인 까보 다 로까(Cabo da Roca ; 로까 곶)로 갔다.

리스본 서쪽 약 40km의 대서양 해안에 있는 북위 38도 47분, 서경 9도 30분. 절벽의 높이는 약 140 m이다.

포르투갈의 서사시인 카모잉스(Camoes)

이곳을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되는 곳'이라 표현했단다.

 

                                                              아담한 등대 

 

                                    잎이 두터워 꺾으면 눈물같은 물이나와 눈물꽃이란다. 

 

  

                                                           깎아지른 절벽이다.

 

                                                   땅끝 기념비를 배경으로

 

오토바이 동호회 모임이 있어서인지, 처는, 사람이 많아 가까이 가 사진을 못찍어 아쉬워 했다.

점심을 먹고 신트라(Sintra)로 갔다.

  

미국에서 온 모녀팀이 이곳에서 합류하여 총 19명이되었다.

서울서 온 인솔가이드,현지가이드 (이원희),

자국민 현지인 가이드 한사람, 한국말도 못하지만 ...고용 확대용인가.

  

예전에 왕실의 여름 거주지였던 신트라는

바이런 경의 시집 〈차일드 해럴드의 여행 Childe Harold's Pilgrimage〉에서,

또 다른 문인들에 의해 그 아름다움이 칭송되었던 곳이다. 

  

                                                               아담한 왕궁이다.

 

 

산 봉우리들 중 한 곳에 19세기에 세워진 페나 궁전이 있다.

 

산 꼭대기에 보이는 성터에 오르고 싶었는데 친구가 마차모양의 차로 동네 일주 하잔다. 

숲이 우거진 동화에나 있을법 한 마을이다.

지금도 아쉽다. 걸어다니며 보았어야 했는데.

 

 

                             동상같이 로보트처럼 서있다가도 동전 넣으면 움직인다.악수도 하고. 

  

  

신트라를 나와 로시우 광장(praça do Rossio)으로 갔다.

로시우 광장의 정식 이름은 '동 페드로 광장'이지만 로시우(공동) 광장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광장 중앙에 솟아 있는 원기둥 정상에 동 페드로 4세의 동상이 있다.

                             보라색꽃이 피는 가로수가 많은데, 쟈카르타 라고 한단다.

 

 동 페드로 4세는 독립 브라질의 초대 총독이었다.
광장은 13세기부터 리스본(포르투갈 사람들은 리스보아 Lisboa 라 한다.) 중심지로

모든 공식행사가 열려왔고 지금도 리스본의 중심지 역할을 한다.

다양한 노선의 버스와 트램이 많아 교통이 편리하며 리스본 시민과 관광객들로 항상 붐빈다.

주변에는 카페와 식당, 상점도 많다.

 

      구스타프 에펠(빠리 에펠탑 설계자)이 설계한 산타 후스타의 엘리베이터(Elevador de Santa Justa)

 

                                                                    노천까페 

 

돼지 뒷다리를 염장하여 2년이상 걸어두어 숙성시킨 하몽이란다. 

얇게 썰어 먹으면 좋던데 관광객따라 입국(?)은 안된단다. 

 

                                                            회랑같은 길도 있다.

 

                        대지진후 프랑스인 뽕발후작이 도시를 재건 하였단다.뽕발후작상이란다. 

 

사람 전차 택시 버스 모두 뒤섞여 다닌다.

 

                      조르제1세 기마상.그앞에는 공사중이라 펜스로 가려 강물을 볼 수는 없었다. 

 

                                    뽕발후작은 문위에, 조르제1세는 문안에 모두 뒷모습. 

 

                                                       왼쪽 꼭대기에는 성벽도 보이고. 

                                                                                            

                             호텔 가는길 다리에서 본 항구 요트들이 자동차 주차 한 것 같다.

 

저녁밥은 중국식당 동해(東海)에서 먹는다

 

                         대서양의 일몰 보려다 누구의 늦장으로 해가 거의 다 넘어가고 있다. 

 

저녁, 가져간 소주로 친구네와 우리방에서 마시는데 폭죽소리가 난다.

내어다보니 낮에 군인들의 행진이 있더니, 멀리서 불꽃놀이가 한창이다.

 

시차로 피로한 중에도 새로운 경관에 즐거운 하루 잘 보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