폼페이(Pompeii) : 2011.8.29(월요일).

 

지금은 내륙()이지만, 당시에는 베수비오산 남동쪽, 사르누스강() 하구에 있는 항구도시였다.

비옥한 캄파니아 평야의 관문에 해당하여 농업,상업 중심지로 번창하였으며,

제정() 로마 초기에는 곳곳에 로마 귀족들의 별장들이 들어선 피서,피한의 휴양지로서 성황을 이루었다.

폼페이의 기원은 매우 오래 되었으며, 처음에는 오스키인()들이 취락을 이루고 살았다.

BC 470∼BC 424년경에는 에트루리아인()이 차지하였고,

그 뒤 BC 80년까지는 삼니트인들이 도시를 지배하였다.

그리스인들의 지배를 받기도 하였으며,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도 많이 받았다.

특히 BC 3세기 중반부터는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이 매우 컸다는 사실이 발굴 결과 밝혀지고 있다.

그후 동맹시전쟁(, BC 91∼BC 88) 때에는 동맹시 쪽에 가담하였으므로

BC 89년에 로마의 장군 술라의 공격에 굴복,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었으며,

그 뒤부터 급격히 로마화()하였다.

  

제정로마 초기에 전성기를 맞이한 폼페이는 그 시대때에는 규모가 상당히 컸으며,

인구는 2만∼5만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인구가 일정하지 않은 것은 인구의 계절적 변동폭이 크기 때문이었다.

폼페이에서는 대폭발이 있기 이전인 63년 2월에도 큰 지진이 일어나 큰 피해를 입었으며,

그 뒤 다시 복구되어 전보다 훨씬 훌륭한 도시로 재건되었으나,

79년 8월 24일 베수비오 화산의 대폭발로 2∼3m 두께의 화산력()과 화산재로 시가지가 덮혔다.

대부분의 주민은 참화를 면했으나 2,000여 명이 사망하였다.

  

분화가 멎은 뒤 재보()를 발굴한 사람도 더러 있었으나, 15세기까지 폼페이의 존재는 잊혀졌다.

1738년 나폴리 농민이 우물을 파던 농부가 항아리를 발견하고부터 소규모 발굴이 시작되고,

1748년부터 본격 발굴에 착수하여 꾸준히 발굴이 계속되었으며,

옛 시가의 거의 절반 정도가 발굴되었다.

  

독일 고고학자 빙켈만(Winckelmann)이 체계적인 발굴을 건의했으나 거절당했다.

1762년 <헬르쿨레늄 발굴에 관하여>란 책을 출판하여 체계적인 발굴이 이루어졌다.

벽화를 포함한 초기의 발굴품은 대부분 나폴리의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나,

가급적 현지에서 복원한다는 방침이다.

전성기에 갑자기 멸망하였으므로,

당시 로마 도시의 일상생활을 자세히 알 수 있는 자료들이 발굴되었으며,

그것들은 상당히 쾌락적이고 현세 향락적인 도시 생활을 하고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또한, 폼페이의 많은 벽화를 통하여 유품이 적은 헬레니즘 회화를 엿볼 수 있다.

(네이버 백과사전)

  

  

  

비행기에서 본 베수비오 화산

  

8월 26일 피렌체에서 로마로 가는 버스속에서

허성민 인솔 가이드와 이종경 현지가이드가 나폴리는 지저분 하고 볼게 없다며

카프리섬을 선택관광 하는게 더좋다고 강권하며

속히 결정해야 예약 한다며 등떠밀듯 한다.

  

카프리섬은 가고 싶었으니 모두들 찬성하는구나.

카프리섬이 좋으면 옵션으로 돈 따로 받고 할게 아니고 일정에 포함하고

여행경비를 더 받으면 안되었을까.

나폴리 일정은 세계3대 미항의 하나인 산타루치아 항구의 전경,

황제와 귀족들의 별장지인 티볼리 관광이던데(티볼리는 다음날 갔었다.)

별 볼일 없는 곳이라면 애시당초 왜 일정에 넣었을까나.

  

시칠리아의 팔레르모에서 알이탈리아 항공으로

오후 3시반경에 떠나 4시반경 나폴리 공항에 내려

내일 폼페이 일정을 오늘(8월 29일) 하기로 하여 공항에서 폼페이로 바로 갔다.

  

  

 

폼페이 가는길에 보이는 베수비오산

  

AD 79년 8월 24일 2800여m의 베수비오산이 화산 활동을 하며

바람 방향도 폼페이(Pompeii)로 불어

유동인구 포함 2만~5만여명이 살던 사람들 중에 2천여명이 죽었단다.

지금의 베수베오화산은 높이가 1281m라니 대단한 재앙이었겠다.

  

  

  

폼페이에 5시반에 도착하여 입구 성앞.

늦은시간에 가게되어 사람들이 많지않아 호젓하게 보게되어 좋았다.

  

  

  

  

 

유적지 입구인 마리나문을 지나서.....

 

 

  

  

  

  

  

  

  

  

  

  

  

  

 

공회당(Foro),신전, 바실리카, 그리고 목욕탕까지 모든 공공건물이 모여 있는

이 지역은 폼페이의 정치 종교 경제의 중심지 이다.

 

 

  

포로(Foro) 앞에서

  

  

  

  

  

포도주 항아리는 아래를 뾰족하게 하여 찌거기가 가라앉게 한단다.

  

  

  

말(馬)

  

화산재에 묻힌 모든것은 형태를 유지하는데 사람이나 동물은 부패하여 가스가 되어 발굴때에

위에 구멍을 뚫어 물게 한 석회를 부어 성형 하여 발굴 했단다.

  

  

  

임신부

 

 

  

코 틀어막고...

  

  

  

  

  

  

  

목욕탕

  

  

  

  

  

  

  

길에 3덩이의 튀어나온 돌은 마차 과속 방지턱이란다.

  

  

  

상인의 집이라 했던가(?)

  

  

 

실내에 벽화도 있고

  

  

  

이런 급수대가 마흔여덟군데라 했던가

물 나오는 파이프가 짧아 손잡이를 잡고 마셨단다.

  

  

  

 

  

인도쪽으로 수직으로 서있는 돌 두개도 마차 과속 방지용이란다.

집에서 오물을 집밖으로 버려 인도가 높단다.

  

  

  

  

  

우리네 연자방아인지 맷돌이라는데,장정 여럿이 돌려야 했겠다.

  

  

  

빵집의 화덕

  

  

  

이제 유곽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줌마들이 왜이리 좋아하시나.

  

  

  

글 모르는 사람을 위해 자세를 그림으로 그려두고 값을 흥정 했다네.

  

  

  

  

  

뱀쇼라도 하는지,

나중에 알고보니 보건소라네 창녀촌 옆에 보건소라 성병은 잘 고쳐줬겠다.

  

  

  

  

  

2천년이나 지난 벽화가 지금도 선명하다.

  

  

  

당시의 하수구

  

  

  

  

  

  

  

작은 원형극장의 음향을 점검하느라고

검은 안경과 푸른옷 입은 젊은이에게 노래를 청하여

생음악으로 노래를 들었다.

  

  

  

  

  

  

  

이태리 소나무들은 수세(樹勢)가 좋은데 소나무와 잣나무의 교잡종이란다.

우리나라에 옮겨심으면 살지 못한단다.(이종경 현지 가이드의 말이다.)

  

  

  

소렌토 호텔로 가는길에 본 일몰(8월 29일 오후 7시 37분)

  

  

  

소렌토 Grand Hotel Moon Valley 에 들어 방배정을 받으니 4층 바닷가로구나.

넓은 베란다로 나가 보니, 절로 탄성이 나온다.

여행 다니던 중 최고의 전망이 펼쳐지고 처도 행복해 하니 흔적을 남겨야지.

  

  

  

밤새워 먼버다에 끊이지않고 이어진 불빛이 고깃배 인줄 알았더니

나폴리란다.

저녁식사 후 포도주를 주문하여 식당 밖 베란다로 나가니

수영풀 옆에서 결혼을 하는구나.

한참을 구경하다가 방으로 올라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