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일째 2017년 8월 20 일요일

6시에 출발한다. 라면을 끓여 먹었더니 속이 든든하다. 로르까 마을은 아직 어둠에 잠겨있다. 전날 일정을 끝내면서 이튿날 이어질 까미노 방향을 미리 확인해 놓자. 간혹 이른 새벽녘에 마을을 빠져나가는 경우 어둠에 가려 까미노싸인을 찾지 못해 잠시 우왕좌왕 할 수 있다. 일출 직전 여명이 은은하게 깔린 호젓한 까미노를 걸어가는 이 기분을 어디에 비할 것인가. 이처럼 소담스런 기분을 갖게 해주시어 참 으로 감사합니다.

까미노 사위(四圍)가 밝아지며 순례자들의 발걸음들도 잦아지고 있다. 부부가 자녀를 대동하고 정겹게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지나쳐 간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무리들도 한 묶음이 되어 앞서 나간다. 기회가 되면 우리 학교 재학생들에게도 하계 방학 동안 이 곳 까미노 순례를 권유해 보고 싶다. 중고대의 건축문화 등을 현지에서 직접 접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뜻한 바 있어 이곳 순례길을 찾아 온 전 세계 젊 은이들과 교류하며 사유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까미노 마을의 안길변에 한국산 소형 자동차가 몇 대씩 줄줄이 주차되어 있다. 내노라하는 세계 유수의 자동차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위풍당당하게 주차되어 있다. 이 모습을 보며 갑자기 가슴이 벅차 오른다. 히말라야봉을 오르다 등로 한 귀퉁이에서 한국산 라면 봉투를 발견하고 옛 고향 친구를 만난 듯 눈물을 흘렸다는 어느 등정 대원의 고백을 십분 이해하겠다. 오후로 접어들면서 까미노에는 순례자들 의 모습이 띄엄띄엄해진다. 출발 초반에는 순례자들의 움직임이 한꺼번에 몰려가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게 된다. 이 시간 프랑스길을 걷고 있을 순례자 흐름을 하늘에서 조망할 수 있다면 참으로 어메 이징한 장관이 아니겠는가.

하늘이 가려진 수목 숲속 까미노로 진입한다. 3-4층 정도 높이의 불조심 감시 초소가 있다. 철제 사다리가 송전탑 사다리처럼 위로 길게 뻗어 있다. 철계단 밑에서 고개를 뒤로 젖히고 올려다보니 어질어질하다. 배낭을 부려놓고 나무늘보처럼 천천히 기어올랐다. 평상에 올라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오줌을 지릴 것 같고 똥구멍이 아려온다. 젠장 군대 시절 유격훈련 시 레펠을 타던 기개는 다 어디로 사라졌느냐. 숨을 가다듬고 사위를 둘러본다. 이 나라 풍광은 어디를 조망해도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참 아름답다. 녹색의 숲속에 묻혀 있는 아랫 마을이 망망대해에 떠있는 크루즈 여객선 같다. 가파른 사다리나 직벽을 오르내릴 때는 항 상 3점을 확보한 채 움직이자. 두 발 두 손 중 1개가 움직이는 동안 3개는 각 지점을 지지하고 있으라는 이야기다. 알베르게 2단 침상에서 윗층으로 오르내릴 때도 3점을 확보 하자. 방심하면 손목이나 발목을 다친다. 올라갈 때가 힘들까 내려갈 때가 힘들까. 등산시 갑자기 무릎 관절이 아플 때 보면 오르막 길에서는 덜한데 내리막길에서는 신음소리가 절로 난다. 산은 가슴으로 오르고 무릎으로 내려 온다는 말이 있다. 일상과 특히 다른 환경 조건에서는 항상 조심조심 또 조심하자. 특히 나홀로 이동시 변고를 당할 경우 몇 시간이나 한나절 동안 도움을 받지 못 할 수 있음을 유념하자. 몽골고원을 자동차로 여행하던 중 시동이 꺼져 동사한 사례가 보고되기도 했단다. 이곳 까미노라고 다를 바 없다.

까미노 마을에 들어섰다. 초입에 있는 수페르메르까도에서 바케트, 아구아, 과일 등을 한 보따리 샀다. 배낭 속에 3L 들이 물백에다 항상 예비로 500-600mL 정도의 물을 넣고 다니지만 주행 중에는 별도로 사서 먹는다. 마을 복판에 있는 멋진 수영장에서 남녀노소의 주민들이 모여서 물놀이 하며 태닝들을 하고 있다. 꼭 신천지 같다. 비키니 모델 같은 몸매를 한 여인들이 즐비하여 앵글 속에 몇 컷 넣고 싶었지만 자칫 변태 노인네로 몰려 두들겨 맞을까 봐 단념하였다. 까미노길에 세찬 바람이 불고 있다. 현지 예보에 초속 5m/s 를 나타내고 있다. 바람 속에서도 햇볕은 쨍쨍 내리 쬐고 있다. 수확을 마친 평원 들녘이 까미노와 나란히 끝없이 펼쳐지고 있다. 잔돌로 다져진 까미노 위를 사각사각 소리내며 걸어간다. 저 멀리 앞서가는 순례자의 모습이 좁쌀 크기로 보인다. 거구의 젊은 남성이 쌍스틱을 내디디며 한 쪽 다리를 절면서 앞서 나간다. 부엔 까미노하고 인사를 건넨다. 누가 이들을 이렇게 까미노로 끌어들였을까. 힘내시게. 아직 걸어야 할 길이 많이 남았네. 부디 무사히 도착하여 할레루야 하기를 소망합니다. 포도의 나라 답게 아예기 마을 어귀에 포도주 수도꼭지를 달아 놓고 무료로 시음하도록 하고 있다. 이라체 포도주양조장Bodegas Irache이란 간판이 걸려 있다. 바이커 한 무리가 시음을 한 후 떠나간다. 독일어 억양의 젊은이가 공손하게 옆으로 비켜서며 한 잔 시음하라고 권한다. 알콜을 입에 대지 않은 지가 꽤 됐다. 노 땡큐.

A-12 고속도로 굴다리 땅바닥 그늘에 드러누워 잠시 눈을 붙였다. 굴다리 벽면은 그라피티Graffiti 문양으로 어지럽게 채워져 있다. 먹는 양이 늘어난 것인가. 아내는 나를 소식가라고 하였다. 어쩌다 음식을 많이 먹을라치면 의아해 한다. 바게트에 딸기쨈을 발라서 입안으로 계속 쑤셔 넣었다. 한 보따리되던 행동식을 다 먹어치우고 바나나 2개만 남겼다. 잠깐 눈을 붙였겠다 배도 채웠겠다, 다시 열심히 걷자. 까미노는 밀밭을 뚫고 이어지고 있다. 순례자의 발걸음들이 시야에 보이지 않는다. 시야 밖에서 열심히 걷고 있으리라.

낯익은 마을이 나타난다. 로스 아르꼬스다. 2013년에 하루 머물었던 알베르게를 찾았다. 체크인 및 안내 오스피탈레노들 중 안면이 있어 보이는 이가 없는 듯하다. 모처럼 옷 가지를 죄다 빨아 널었다. 양말은 돌의자에 걸쳐 놓았다. 시장을 좀 보려 했건만 일요일이라 수페르메르까도가 모두 문을 닫았다. 바엔레스토랑을 기웃거려 보니 마을 주민들로 넘쳐난다.

마침 마을은 축제날이다. 소몰이하느라 마을 안길 도로와 골목길을 거치대로 막아놓았다. 소 세 마리가 사람 엉덩이를 들이박겠다고 도망다니는 사람들의 꽁무니를 쫓아다니고 있다. 마을 주민들은 하얀 상하복장에 붉은 띠를 허리에 매고 마을 복판 공터에 모여 함성을 지르며 축제를 즐기고 있다. 큰 아구아 한 병을 사들고 알베르게로 되돌아왔다. 배낭에 남겨진 행동식과 자판기에서 빼낸 스낵으로 저녁을 때웠다. 빨래해서 널어놓은 옷가지들이 금세 다 말랐다. 돌 의자 바닥에 널은 양말에 엉겅퀴가 달라 붙어 잘 떨어지지 않는다. 양말 바닥에 잔뜩 달라 붙은 억센 털을 손가락으로 일일이 떼어냈다. 알베르게 코앞에 임시로 설치된 간이 콘 서트장에서 음악 소리가 요란하게 들린다. 40여 개 침상이 다 비어 있다. 다들 구경하러 간 것 같다. 잠보다 보약이 없을 것 같아 귀마개를 하고 잠을 청하였다. 11시가 넘었다.

익숙함에 길들여져 있기에 낯설음을 만나면 긴장되고 불안합니다. 낯설음 속에서도 익숙함을 볼 수 있게 지혜를 주심에 감사합니다. 잠시 옷깃을 스치는 인연이지만 전생의 인연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깨닫게 해주심에 감사합니다. 오늘 걸은 거리 30.4km 걸은 시간 12시간 41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