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일째 2017년 8월 28 월요일

느지막하게 일어났다. 배낭을 꾸리며 짐을 1kg여 줄였다. 텀블러 보온통, 간식통, 과일통, 야구양말 2족, 면류 속옷가지 등을 과감히 버렸다. 등산에서 면류 옷가지는 죽음의 복장으로 치부한다. 땀이 벨 경우 더디 마르기에 근육 수축을 방해하여 부상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설사는 멎은 듯 하다. 호스텔 비데로 개운하게 뒷처리할 수 있었다. 대변을 본 후 비데로 세정을 해오던 일상 속에서 살다 이곳에 오니 순례중 비데는 언감생심이다. 그래서 변기에 앉기 전 티슈에 물을 적셔 손에 쥐고 있다 용변 후에 뒷처리하였다.되 도록이면 고약한 냄새를 풍기지 않도록 하자.

일전에 한번은 바엔레스토랑 라운딩 데스크에서 스낵을 먹고 있는데 웨이터가 식당홀로 나와 등뒤에서 방향제를 뿌려대고 있다. 이 녀석이 도대체 뭐하는 짓인가. 눈에 힘을 주어 쳐다보자 멈칫하며 잠시 동작을 멈춘다. 커피를 한잔 주문했는데 개무시하고 다시 방향제를 뿌린다. 참 버르장 머리가 없는 녀석이로세. 잠시 옷매무새와 용모를 둘러보았다. 수염이 덥수룩한 채 몰골이 꾀죄죄하다. 몸에 걸친 옷가지에서는 퀴퀴한 냄새가 난다. 그래 미안하다. 고약한 냄새를 피워서. 걷느라 바빠서 그리되었다. 그러나 이방식대로 계속해서 순례하는 도리밖에 없다. 해가 비치는 시간동안은 무조건 걷고자 했더니 3-4일간의 일정이 단축되어 가고있는 것 같다. 밖은 비가 내리고 있다. 판초 우의를 뒤집어 쓰고 호스텔을 나섰다. 한 시간 남짓 걸었다. 부르고스 대학교 본관으로 들어가 세요 여부를 물어보니 차도 건너편 건물을 가리킨다. 건물 출입구 주변을 살펴도 까미노 싸인이 발견되지 않는다. 순례자 여권에 기록된 세요 받는 건물 명과 사무실 명을 찾을 수 없어 사무실 문을 노크하고 들어갔다. 이런 회의중이다. 세요 모션을 취하자 남성 두 분이 여권에 표시된 사무실 명칭을 들여다 보더니 지금은 공사중이라며 건물 위치를 가리킨다. 비가 내리고 있기에 리오하 대학교에서와 같은 친절한 길안내를 기대할 수는 없다.

공사 중으로 입구가 폐쇄되어 있다. 출입구를 찾을 수 없 다. 공사중이니 어느 쪽으로 출입하라는 안내문이 있을 법도 한데 없다. 이끼가 끼고 담쟁이잎이 휘늘어진 고풍스런 담장과 돌판 보도들은 참으로 우아해 보인다. 안으로 이어 지는 통로가 외지인 눈에는 띄지 않는다. 추적대는 빗속에서 통로를 찾느라 주변을 맴돌며 두리번거렸다. 탑차가 멈 추고한 남성이 내리더니 카페테리아에 물건을 납품하기 위해 손수레를 밀며 바로 그 고풍스럽고 우아한 통로로 바퀴소리를 요란하게 내며 입장한다. 어째 좀 안 어울린다. 납품업자 뒤꽁무니를 따라갔다. 카페테리아 안으로 들어가 홀을 지나 다시 가게 문을 밀고 복도로 나서니 도서관 출입구와 만난다. 사서 마담이 힐끗힐끗 쳐다보며 자기 일을 계속한다. 세요를 어디서 받지. 순례자 여권을 펼치고 다시 들여다보니 여기가 세요 장소 맞다. 사서는 여전히 힐끔힐끔 쳐다본다. 하기야 쌍스틱을 짚고 판초 우의를 뒤집어 쓴 모습이 괴이하리라. 2층으로 올라가야 하나 어쩌나. 할 수 없어 눈 앞에서 열심히 일하는 척하는 사서에게 물었더니 여기가 맞단다. 젠장. 똥개 훈련시키나. 한두 번 장사하나. 순례자 차림에 세요 여권을 손에 들고 두리번거리면 세요를 받으러 온 순례자 말고 또 있을까. 거참 먼저 알아 봤으면 아는 척을 해야지. 알베르게나 바엔레스토랑 등의 세요 문양은 구구각색 다 다르지만 5개 대학교의 세요 문양은 한결 같이 똑같다. 사서가 빈 종이에다 세요 도장을 시험적으로 찍어서 여권에 찍힌 세요와 똑같다는 표시로 손가락으로 짚으며 웃는다. 이 마담 왜 웃는 거야. 이쁜 얼굴을 해 가지고 . 징그럽게. 아까는 모르는 척 딴청을 부리더니.

부르고스 대학교는 캠퍼스 단지 형태로 되어 있지 않고 강의동 등이 일반 상가나 회사 건물들과 혼재해 있는 듯하다. 미국 뉴욕 대학교도 도심지에 강의동 등이 혼재되어 있고 학교가 팽창하면서 필요에 따라 주변 건물을 하나둘 사들 였다고 하던데 이곳 부르고스 대학교도 유사한 것 같다. 대학교는 한 나라 국력의 원천이며 국가와 민족의 미래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대학교 캠퍼스를 볼 때마다 대학인의 지 고한 의무를 새삼 느끼곤 한다. 베트남 독립의 아버지 호치민은 미국과 전쟁이 계속되는 와중에도 유능한 젊은이들을 선발해 세계 각국 대학교로 유학을 보내면서 당부를 하였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학업을 마치기 전에 돌아와서는 안된다. 우리가 승리한 다음 너희들은 전쟁으로 파괴된 조국의 강산을 과거보다 세계의 어느 나라보다 아름답게 재건해야 한다. 너희들은 공부하는 것이 전투다.'

나머지 다른 세요 장소인 UNED는 8월에 문을 아예 닫아서 받을 수가 없단다. 오늘이 8월 28일이니 4일 후에나 받을 수 있기에 UNED 세요는 포기했다. 이래저래 오전 시간이 훌쩍 지났다. 비는 계속 내리고 있다. 뇌성도 예보되고 있다. 따르다호스 마을 초입에 있는 바엔레스토랑에 들려 이것저것 시켰다. 젊은 마담이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주문을 받는다. 따끈한 소파 한 그릇이 간절하건만 안된단다. 너무 많이 주문했나. 뱃속 거지의 아우성 때문에도 못살겠다. 입안으로 자꾸자꾸 집어넣었다. 뱃속에 음식물이 다 차고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느낌이다. 이런 폭식이 안좋은데 접시 세 개를 다 비웠다. 서비스로 무료 커피 한 잔을 주겠단다. 그라시아스. 배를 채웠으니 이제 걷자. 설사도 잦아진 듯하다. 뱃속의 허기졌던 거지가 설사고 나발이고 다 정리를 끝낸 모양이다. 깔사다스 마을을 지나는데 바엔레스토랑 입간판에 소파Sopa 메뉴가 쓰여져 있다. 뱃속이 든든 하지만 안으로 들어가 주문을 하였다. 인상 좋아 보이는 이국적인 검은 피부의 젊은 부부가 운영하는데 벽면 게시판에 순례자들이 남긴 메모지, 악세사리 등이 그득하게 메꿔 져 있다. 나도 즉석에서 배낭에 담아둔 조가비 큰 것 하나와 작은 것 하나 등 두 개를 꺼내 매직펜으로 Start is small. End is large.라 써서 게시판에 붙였다.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리라는 뜻으로 썼다고 설명해주었다. 한국에서 기념품용으로 갖고 온 명함 크기의 태극기 문양을 하나 주려다 이미 게시판에 몇 개가 붙어 있기에 그만뒀다. 주인 장도 조가비 목걸이를 하나 건넨다. 게시판 앞에 둘이 서서 기념사진을 두 방 찍었다.

빗줄기가 굵어지고 있다. 워터 프루프니, 고어텍스니 요란스레 선전한 등산화지만 소용이 없다. 등산화 속에 물기가 느껴진다. 바지에 베어 들어 흐르는 빗물이 양말 목을 적시며 발가락까지 축축해진다. 4시를 넘기며 오르니요스 델 까미노 마을에 진입하였다. 알베르게 안내판이 보인다. 아직 하루 일정을 마무리하기는 이르다. 더 걷자. 레스토랑을 지나는데 이 곳 입간판에도 소파 메뉴가 있다. 한 그릇 더 하자. 마을 주민들이 가족 단위로 식사하다가 시커먼 물체가 들어서자 다들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본다. 수더분하게 보이는 마담이 주문한 소파를 대령시킨다. 배에 구멍이 뚫린 것인가. 오늘 참 많이도 먹는다. 이래도 되는 것인가. 오늘 일정을 마감하려는 온따나스 마을까지는 10km여를 가야 할 거리다. 아침에 배낭 무게를 1kg여 줄였건만 이리 가볍게 느껴질 줄이야. 가자. 걷자. 바람처럼 구름처럼 걸어 가자. 마을을 벗어나자 잠시 뜸했던 빗줄기가 다시 뺨을 때린다. 나란히 달리고 있는 지방도로도 오가는 차들이 없다. 까미노상에는 사위를 둘러보아도 개미 새끼 한 마리 안 보인다. 걷기에 흠뻑 빠진 어느 순례자만 비를 맞으며 나홀로 길을 가고 있을 뿐이다. 빗속을 나홀로 걷는 이 기쁨을 어디에 비하리까. 이러한 환희와 감흥의 순간들을 실감나게 기록하고 싶다. 키워드라도 기록하고자 아이폰 자판을 눌러 입력하려 했지만 흘려내리는 빗물 때문에 화면 작동이 안된다. 사진 촬영이나 영상 녹화도 폭우 속에서는 속수 무책이다.

까미노 앞으로 걸어 갈수록 빗줄기는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잔돌들로 다져진 까미노에 고랑이 패이고 물이 고인다. 고랑을 잘못 디디면 등산화가 고랑물에 잠긴다. 판초우의 안쪽으로도 습기가 자욱이 느껴진다. 배낭 위로 걸쳤기에 우의 기장이 짜리몽땅하게 무릎까지 올라온 관계로 우의를 타고 내려가는 빗줄기가 그대로 바지를 뚫고 등산화 속으로 물을 채우고 있다. 다음 번에 올 때는 망또처럼 땅바닥 까지 내려오는 긴 우의를 갖고 오자. 앞이 분간이 안된다. 바람도 거세다. 날씨 앱이 초속 5m/s를 나타내고 있지만 평원 안부이다보니 바람이 거세게 느껴진다. 까미노가 물바다가 되어버렸다. 비가 아예 양동이로 퍼붓 듯 쏟아진다. 뒤쪽에서 사람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바이커 무리 5-6명이 총알처럼 거침없이 지나간다. 세상에. 오늘 따라 질주하는 바이커들이 되게 멋져 보인다.

삼볼 알베르게 안내 입간판이 서 있다. 까미노에서 수백 미터 정도 비켜 서있다. 영화 반지의 제왕의 한 장면이 숨어 있는 듯하다. 드넓은 평원에 서 있는 모습이 바다 한가운데 떠있는 돛단배 같다. 빗속을 뚫고 그냥 지나치는 순례자들을 물망초처럼 바라보고 서 있는 것같다.

누구의 시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프랑스길 까미노에는 알베르게 460여 개소가 있는데 평원에 이처럼 나홀로 위치한 알베르게는 아마 삼볼이 유일하지 않나 싶다. 농부의 차량이 헤드라이트를 켠 채 나타난다. 부지런한 농부가 우중에 밭을 보러 나온 것인가. 우리네 농부들도 비가 올라치면 도롱이 두르고 삽 들고 논밭 살피러 가듯이 말이다. 온따나스 마을이 가까워지면서 빗줄기는 가늘어지고 있다. 온따나스는 샘이라는 뜻인데 주변의 비옥한 평원을 지탱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폭우 속을 걷는 동안 수년 전 지리 산을 찾던 초엽에 대원사에서 화엄사까지 종주하던 중 태풍을 만나 폭포처럼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마루금을 걸었 던 기억이 났다. 비를 맞으며 걷는 것도 별미를 느끼게 한 다. 감기만 안 걸리면 걸을 만하다.

까미노 마을을 들어설 때마다 항상 아름답고 고풍스런 분위기를 느껴오고 있다. 참으로 은혜로운 느낌이 아닐 수 없 다. 마을 어귀나 말미에는 어김없이 아담한 정원처럼 꾸며진 마을 조상들의 묘원이 있다. 마을 안길은 시루떡 같은 돌판을 깔아 모자이크 형태로 포장되어 있다. 흙탕물길을 걸어왔으니 배수가 잘되는 마을 안길이 비단길처럼 느껴진 다. 가가호호에는 대부분 마당이나 울타리가 없다. 집대문 인 현관문을 열고 나오면 바로 마을 안길이다. 집 벽들도 대부분 돌판을 사용하여 모자이크 형태로 축조되어 있다. 바렌다식 작은 창문 틀에는 화분이 놓일 수 있게 돌받침대를 참 운치 있게 만들어 놓았다. 창문에 놓인 화분이나 벽면에 걸어 놓은 화분 등을 앵글 속에 담아서 바라보면 그 아우라가 바로 멋진 예술사진이다. 안길 위로 널려 있는 가축들의 분뇨는 이제 친근감을 주는 풍경이 되었다. 순례 초기에는 냄새가 좀 거시기 했는데 지금은 무덤덤하게 느껴진다.

알베르게에 딸린 식당에서는 순례자들이 깔끔하게 차려 입고 저녁 만찬을 즐기고 있다. 식당 카운터에서 체크인하였다. 숙박비 5유로다. 1회 사우나비 정도밖에 안되는 요금이다. 2013년에 왔을 때는 3유로 받는 알베르게도 여러 곳 있었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니 살 것 같다. 감기 기운도 없고 설사도 멎은 것 같다. 아마도 딸아이가 특별히 챙겨준 홍삼정진을 매일 빠트리지 않고 복용한 덕분에 저항력이 좀더 증진된지도 모르겠다. 배낭 무게 줄이려고 제외시키려 했는데 가져와서 복용하길 참 잘 한 것 같다. 여하튼 힘든 하루 일정을 무사히 마쳤다는 뿌듯함을 느껴본다. 알베르게에 딸린 수페르메르까도에서 이것저것 구입하여 손수 요리해서 저녁식사를 하였다. 달걀 한 꾸러미를 사서 다 삶 았다. 내일 아침용 및 주행중 간식용으로 먹으려 한다. 마담 순례자 세 사람도 요리하러 주방으로 들어선다. 여러 알베르게에 비치되어 있는 인덕션 모델들이 저마다 다 달라 처음에는 다들 잠시 더듬거린다. 이들 마담들도 잠시 그러 하기에 좀 거들어 주었다. 주방에는 탁자 1개 의자4개만 놓여 있다. 참 거시기하게 네명이 합석하여 식사를 하였다. 커다란 냄비에 물을 1.8L 넣고 소파 및 찐쌀을 함께 넣고 끓여서 바게트를 뜯으면서 참 맛있게 먹었다. 마담들은 파스타 요리를 먹으면서 한 숟가락 권했다. 몇 마디 주고받으며 멋진 식사를 하였다. 간 치료약은 하루 한 알 아침 식사 후에 복용해야 하는데 아침 식사를 하지 않고 알베르게를 나서는 경우가 있어 약 먹는 것을 깜빡하여 저녁 식사 후에 먹을 때가 더 많았다. 오늘도 그렇다. 까먹지 않으려고 7알 을 통에 따로 담아 일요일부터 토요일까지 1주일 동안 복용한다. 물먹은 하마 신세가 된 등산화가 내일 아침에는 좀 말라야 할 텐데. 속건 기능이 뛰어나다고 선전을 하던데 기대해본다. 새끼발가락 피부 주위가 너덜거린다. 너덜거리 는 피부를 가위로 도려내고 싶었지만 그냥 둔 채 약을 바른 후 밴드로 동여맸다. 비우면 편하건만 이를 깨닫지 못합니다. 움켜진 손 펴게 해주셨습니다. 폭풍우속을 건강하게 걸을 수 있게 해주시고 풍요로운 음식과 따듯한 잠자리를 주신 은혜에 감사합니다. 오늘 걸은 거리 34.3km 걸은 시 간 10시간 7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