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째 2017년 8월 24 목요일

5시 30분경에 알베르게를 나섰다. 어제 저녁 머물었던 알 베르게는 220베드 규모이다. 안내서에 따르면 몬떼 도 고 소Monte do Gozo에 소재한 400베드 알베르게 다음으로 큰 곳이다. 베드수가 많은 알베르게에 묵을 경우 다음 날 아침 순례자들이 같은 시간대에 한꺼번에 몰려서 출발을 하게 된다. 반면 작은 곳에서 출발할 경우 시간대가 비켜가기에 까미노를 나 혼자 호젓하게 걸을 수 있어 좋다. 그래서 가급적 규모가 큰 곳을 피하여 한두 마을 앞에 위치 한 알베르게에 투숙하여 호젓한 새벽길 출발의 기회로 삼았다.

어둠이 깔린 새벽길에 청소차들과 미화원들의 손길이 바삐 움직이고 있다. 오늘도 구름이 낀 날씨를 예보하고 있다. 마을을 벗어나면서 까미노싸인을 찾지 못해 잠시 머뭇거리 다 안길에서 나오는 승용차를 향해 손을 들어 물어보려 했으나 차는 그냥 지나친다. 걸음을 멈추고 실눈을 하고 사위를 자세히 살피자 까미노싸인이 눈에 들어온다. 가로등 기둥에 희미한 화살표를 발견하니 마음이 놓인다. 날이 밝은 후 출발한다면 이런 불편은 발생하지 않으렸다. 차량 왕래가 끊긴 채 가로등만 외로이 켜진 긴 다리를 건넌다. 다리 위로 부는 바람은 평지보다 더 세게 느껴진다. 몸이 잠시 휘청거릴 듯하다. 어둠이 서서히 걷히면서 어디서 나타난 것인지 앞서 가는 순례자 모습이 보인다. 분명 옆을 지나친 순례자가 없었다. 바람처럼 구름처럼 닫더니 어느새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까미노는 N-120번 고속도로와 나란히 달리고 있다. 커다란 십자가가 세워져 있다. ‘용감한 자들의 십자가Cruz de los Valientes’인 듯하다. 리오하주의 마지막 마을인 그라뇽 마을이다. 마늘소파Sopa de Ajo가 유명하다지만 이른 아 침이라 먹을 수가 없어 간단한 스낵으로 끼니를 때웠다. 레 데시아 델 까미노는 리오하주를 벗어나 부르고스Burgos 지방으로 들어서서 만나는 첫 번째 마을이다.

부르고스는 유럽 인류의 발상지로 기록되어 있으며,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호모 안테세소르Homo Antecessor의 유적지가 있다. 부르고스시에서는 2곳에서 유니베르시따리아 세요Sello 를 받을 예정이다. 토요일과 일요일은 문을 닫기에 금요일근무 종료 시간인 4시 전에 당도해야 세요를 받을 수 있다. 거리를 계산해보니 63.9km를 가야 한다. 하루 30km 이상을 주파해 오고 있기에 오늘 목요일, 내일 금요일 2일간에 주파가 가능한 거리다. 허나 양쪽 발가락들이 물집으로 부르트고 벗겨져 절뚝절뚝 걸어서 일몰 직전에 도착하는 걸음걸이로는 근무시간 내에 도착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래서 걸음을 멈추고 몇 가지 방법을 가늠해 보았다.

제1의 방법은 택시를 타고 부르고스대학교와 UNED를 방 문하여 세요를 받은 후 다시 택시를 타고 출발했던 곳으 로 원위치해서 가는 방법. 제2의 방법은 아무리 발버둥쳐도 금요일 근무시간 중 도착은 어렵고 천생 토요일 늦은 오후에나 도착할 것이니 일요일 하루를 부르고스시에서 머무르고 월요일 오전에 방문하여 세요를 받는 방법. 제3의 방법은 일요일도 계속 걷다가 월요일 오전에 택시를 타고 가서 세요를 받은 후 다시 택시를 타고 출발했던 곳으로 원위치해서 까미노를 이어가는 방법. 그런데 택시를 타는 방법은 어째 쪼까 거시기하다. 걸을 수 없으면 기어서 가겠다고 다짐을 하지 않았던가. 부르고스 말고도 두 지역 세 곳에서 세요를 받아야 하는데 그때도 택시를 탄다면 이건 더 거시기 해지는 것 아닌가. 쓸데없는 생각으로 시간을 너무 지체 하였다. 일단 걸으면서 더 생각하자. 레데시아 델 까미노마 을 안길로 접어드니 낯익은 쉼터가 나타난다.

2013년 이 쉼터 벤치에 앉아 바싹 마른 바게트를 뜯어 먹으며 허기를 달래던 기억이 난다. 그때 작업 차를 몰고 지나가던 농부가 잠시 차를 세우고 윈도우를 내리더니 생수 한 병을 건네주었다. 곧이어 동네 할머니 한 분이 광주리에 방금 딴 듯한 과일을 넣고 가다 한줌을 집어서 내 손에 쥐어 주었었다. 벤치 맞은편 가옥 현관에서 아들인 듯한 남성이 이 모습을 지켜보고 서 있었다. 할머니는 아들이 지켜보는 모습을 보고 약간 멈칫하는 듯하였었다. 나도 따라서 약간 멈칫하였었다. 아들이 엷은 미소를 짓는 듯했었다. 오늘 바로 그 벤치에 그 할머니와 그 아들인 듯한 주민들이 앉아 있다. 아들이 할머니를 부축하듯 팔로 감싸고 앉아 있다. 더 연로해진 듯하다. 불쑥 아는 척하기도 그렇고 해서 벤치 앞을 지나치며 잠시 바라보며 목례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마을 모퉁이를 돌며 뒤돌아보니 그들도 나를 배웅하 듯 바라보고 있었다. 다른 곳을 찍는 척하면서 앵글을 줌인 하여 사진 몇 컷을 찍었다. 부디 강녕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 나라는 장수 국가다. 공기 좋고 물 맑으니 당연한 것 아 닌가. 마을 안길을 지나다 보면 혼자 보행기로 산책을 하거나 양손에 지팡이를 잡고 마실을 다니는 80-90세를 넘겨 보이는 노인들의 모습들이 자주 눈에 띈다.

아름다운 벨로라도 마을로 들어가는 초입의 알베르게에 태 극기가 각국 국기와 함께 펄럭이고 있다. 국제회의라도 열리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마을 안쪽에 위치한 알베르게에 들려 택시를 부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물었더니 마을 광장에 있는 바엔레스토랑으로 가서 알아보라며 메모를 건네준다. 이 곳에서 부르고스대학교 까지는 택시로 왕복 시간만 2시간 정도다. 지금 오후 6시가 다 돼가기에 오늘은 어렵고 내일 오전 중에 다녀올 경우를 예상해 보았다. 마을 광장 인근에 있는 근사한 알베르게에 체크인하였다. 저녁식사 예약도 함께 접수하였다. 샤워후 먹을 것을 사러 나갔다. 수페르메르까도문이 닫혀 있다. 문 열리는 시간이 되려면 기다려야 하기에 마을 광장을 어슬렁거리다 벤치에 앉아 잠시 졸았다. 먹을 것을 사들고 알베르게에 들어서니 홍콩에서 온 젊은이가 인사를 한다. 까미노에서 몇 번 마주치며 부엔 까미노를 나누던 사이다. 체크인한 알베르게는 다른 곳인데 이곳 알베르게 저녁식사 메뉴가 좋다고 해서 식사만 하러 왔단다. 소문처럼 식사는 맛있었다. 붙임성이 좋아 보이는 그 홍콩 젊은이는 방금 만난 듯한 아름다운 숙녀와 다른 식탁에 함께 앉아 웃음꽃을 피우며 식사한다.

오늘 밤은 모처럼 여유있게 침낭 속을 찾았다. 오늘 일정을 좀 메모하려 했지만 양 손가락이 불편하여 간단히 키워드만 터치 펜으로 입력하고 잠을 청했다. 기록하는 일이 점 점 더 게을러지는 것 같다. 삶에서 가장 경계하고 뛰어넘어야 할 장애물이 게으름이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영혼의 성숙을 방해하고 병들게 하는 것은 게으름이기 때문이다. 기록에는 좀 게으름을 피우더라도 잠에는 게으름을 피우지 말고 열심히 잠을 자자. 오늘 걸은 거리 26.6km 걸은 시간 12시간 17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