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째 2017년 8월 23 수요일

5시 30분에 알베르게를 나섰다. 삶은 달걀 두 개로 요기를 하였다. 작은 마을이라 곧바로 마을 안길을 벗어났다. 어두 운 까미노가 헤드램프 불빛을 받으며 길을 열고 있다. 까미 노싸인이 어둠 속에서 길을 안내하고 있다. 다음 도시인 나 헤라까지는 중간에 마을이 없이 3시간 정도 까미노만 이어 질 것이다. 오늘도 은혜 속에서 축복받으며 어둠을 뚫고 호 젓하게 나홀로 까미노를 걸어간다.

가장 먼저 시작하고 최선두에 나서는 데는 항상 위대한 용 기가 따른다. 탄자니아 세렌게티 국립공원에서 누우들이 이동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 벅찬 감동을 느낀다. 특히 맨 처음 건너는 누우를 보면 인간사에서 최초를 기록한 위 대한 영웅들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무시무시한 악어들이 강을 건너는 길목에서 살육 잔치, 죽음의 항연을 벌이기 위 해 우글우글 모여있건만, 가장 선두에 선 누우는 결코 주저 함이 없이 힘차게 강으로 뛰어들어 악어 떼 숲을 헤치며 강 을 건넌다. 이 용감한 누우를 따라 수만 마리의 누우들이 동시에 강물 속으로 뛰어든다. 많을 때는 120만 마리가 한 꺼번에 건넌다고 한다. 오늘 이 시간 이곳 까미노를 맨 처 음 지나며 느끼는 감흥과 저 용기 있는 누우가 맨 처음 앞 서 뛰어들며 느꼈을 감흥을 어떻게 견주며 평가할 수 있을까. 깊은 상념에 잠겨보며 그렇게 그렇게 나는 오늘도 까미 노를 가고 있다. 어둠이 걷히고 여명이 밝아 오고 있다. 이 제 몇몇 순례자들이 뒤를 따라오다 앞서 나간다.

오늘의 까미노 일상이 열리고 있는 것이다. 부지런한 농부 들의 차량들도 이제 바삐 움직이고 있다. 끝이 보이지 않게 뻗어 있는 이곳 포도농원, 올리브농원들을 돌보는 일이 보 통의 힘이나 정성이 아니면 어찌 가능할 것인가. 세계 최고 의 포도주, 세계 제일의 올리브유라는 자존심에는 이들 농 부들의 고귀한 정성들이 담겨져 있는 것 같다. 우리가 평소 먹는 포도 알갱이는 도토리나 밤 크기인데 이곳 포도농원 의 포도 알갱이는 콩알 크기 정도다. 손이 큰 성인 남성이 두 손 모으고 기도하는 손 모양 크기로 한 묶음씩 풍성하게 주렁주렁 참으로 탐스럽게 매달려 있다. 포도 송이를 볼 때 마다 한 알갱이를 떼어서 입에 넣고 싶지만 결코 만지지도 서리하지도 아니했다. 농부들의 정성에 흠집을 내서 되겠 는가. 먹고 싶으면 돈 내고 사 먹자.

알레손 지역을 지나치는 까미노 벽면에 어느 신부가 순례 자를 위해 지은 시가 쓰여져 있다. 왕릉이 많이 소재한다는 나헤라 도시에 진입하였다. 왕릉이 많다는 것은 영욕의 역 사가 그 만큼 깊다는 이야기이다. 뱃속의 거지가 뭐라도 좋 으니 빨리 목구멍 속으로 음식물을 집어넣어 달란다.

상점 유리창에 어떤 순례자 모습이 비쳐 보인다. 걸음을 잠 시 멈추고 쳐다보니 그 순례자도 걸음을 멈추고 나를 쳐다 보고 서 있다. 새벽을 달려왔을 순례자 머리에 빵모자가 씌 워져 있고 모자 위에 헤드램프를 걸쳤다. 수염이 덥수룩한 얼굴을 버프로 반 정도 감싸고 있다. TV 화면에서 본 히말 라야봉 등반 차림 같기도 하고 노숙자 모습 같기도 하다.

아침 요기는 간단한 스낵 정도로 족할 수밖에 없다. 아침 일찍 문을 여는 바엔레스토랑이 그리 많지 않을 뿐더러 당 일 부식 거리를 배달받기 전이기도 하기에 그러리라. 하지 만 아침녘이나 이른 오전에 바엔레스토랑을 지나칠 때면 혹시나 하고 깔리엔떼한 즉 따스한 소파Caliente Sopa를 먹을 수 있는지 눈을 부릅뜨고 알아보건만 역시나 항상 허 탕을 친다. 지리산 천왕샘 발치의 나무계단에 안내판을 세 워놓았다. 이곳을 지나다 심장마비로 숨을 거둔 이의 사연 을 알리는 내용이다. 까미노에도 순례하다 불의의 사고를 당해 삶을 마감한 순례자들의 사연들이 곳곳에 담겨져 있 다. 나바레떼 지역을 조금 벗어난 지점에도 어느 순례자의 영혼이 잠들어 있다. 어떻게 죽는 것이 잘 죽는 것인가. 형 벌을 받고 교수형이나 참수형이나 총살형이나 독살형으로 죽는 경우. 불의의 사고로 죽는 경우. 병으로 죽는 경우. 살 해당하는 경우. 자살하는 경우. 잠을 자다 자기 침대에서 죽는 경우. 길을 가다 바닥에 쓰러져 죽는 경우. 인공호흡 기 도움으로 질긴 생명 이어가다 결국은 안락사하는 경우. 성직자 등 거룩한 분들이 숨을 거두면 선종(善終)했다라고 말한다. 선종은 선생복종(善生福終)을 생략한 말이다. 착 하게 살다가 복되게 죽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대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

마을을 벗어나 붉은 향토 언덕을 끼고 까미노는 아소프라 로 다시 이어지고 있다. 아소프라에는 까미노를 가다 숨을 거둔 순례자들의 묘지가 있다고 한다. 말을 탄 낯익은 3인 조 순례자들이 뒤따르더니 다시 앞서 나간다. 말을 타고 달 려가기에 며칠간의 일정을 앞서 나가리라 생각했는데 나 와 이동 템포가 같다. 시루에냐 마을 초입에는 골프장이 있 다. 철판을 뚫어만든 순례자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마을 한 복판 구역은 재개발이라도 한 것인지 새로이 신축된 가옥 들이 바둑판처럼 늘어져 있다. 동네 구멍가게가 눈에 띄지 않는다. 축제가 많이 열리는 마을로 소개되고 있지만 한낮 의 마을 안길은 인적이 뜸하다. 자전거를 타는 어린아이와 마실을 다녀오는 아낙네만 보일 뿐이다. 마을 말미에는 전 통 가옥 주택단지가 인접해 있다.잠시 까미노를 벗어나 마 을 안길로 들어가 요기거리 등과 아구아를 샀다. 입간판에 몇 개의 알베르게가 소개되어 있다. 현재 시간 오후 4시 34 분이다. 해가 지려면 아직 멀었다. 산또 도밍고 데 라 깔시 다까지의 거리 5.8km이고 일몰 시간이 9시로 예고되고 있 으니 슬로우 앤드 스테디하게 걸어도 일몰 전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발가락이 말썽이다. 등산화를 벗고 살펴보니 발가락 부위 하얀 양말이 상처 진물로 검붉게 적셔져 있다. 처치하기 번거로워 그냥 다시 신고 출발하였다.

산또 도밍고 데 라 깔시다에는 남녀 사랑이 얽혀 있는 닭 의 기적에 관한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까미노를 가면서 수 탉이 우는 소리를 듣는 것은 매우 좋은 징조라고 한다. 닭 은 세계 어디를 가나 흔히 볼 수 있다. 멸종이 되지 않은 채 인간과 함께 삶을 이어온 생명체다. 겁없이 자기보다 몸집 이 몇 배 더 큰 동물들과 한바탕 싸움이라도 붙으면 참으로 장관을 연출한다. 계란 프라이는 세계인의 공통 요리가 아 닌가. 이처럼 닭은 인간에게 참으로 친근한 생명체이다. 어 린 시절의 기억이다. 집에서 닭을 대여섯 마리를 키우고 있 었는데 유독 한 녀석이 다른 녀석들과는 달리 내가 보이기라도 하면 항상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발에 기댄 채 졸기 도 하였다. 어느날 하교해 보니 나를 따르는 녀석의 엉덩이 부분의 깃털이 한 움큼 뽑힌 채 오돌하게 살갗이 노출되어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도 나를 보자 내게 다가와 내 주위를 맴돈다. 직감적으로 느껴졌다. 분명히 다른 녀석들이 집단 적으로 이 아이의 엉덩이를 부리로 쪼아 댄 것 같았다. 어 린 마음에도 화가 치밀어 나머지 녀석들을 빗자루로 후려 쳤다. 아마도 이들 사이에서 왕따를 당해오다 변을 당한 것 같았다. 그 왕따 이유는 아무래도 자기들과는 달리 나를 따 르고 내가 이 아이를 달리 대하고 있다는 것에 시기와 질투 를 느꼈으리라 생각해본다. 이 아이는 그 후 며칠을 매가리 없이 시름시름하다가 이내 죽어 버렸다. 이에 마음을 상한 필자는 며칠을 끙끙대며 밥도 제대로 못먹었던 기억이 난 다. 집에서 반려동물을 키우자는 주문이 쇄도하건만 내가 허락을 하지 않고 있다. 그 이유로는 반려동물과 생활한다 는 것이 가족처럼 생활하는 것과 진배가 없기에 그들과 헤 어질 때의 아픔을 당하고 싶지 않은 탓도 일부 있음을 느낀 다. 그러고 보니 올해가 닭띠 해가 아니던가. 알베르게 체 크인 시간이 오후6시 57분이다. 오늘 걸은 거리 31.1km 걸은 시간 13시간 32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