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일째 2017년 8월 16일 수요일

밤새 깊은 잠에 못 들고 자다깨다를 반복하다. 잠자리가 춥 다. 옆구리와 종아리에 한기가 느껴진다. 침실 바닥은 여전 히 물을 뿌려 놓은 듯 미끌미끌하다. 난방이 안되니 마를 리가 있겠는가. 새벽녘에 화장실을 다녀오며 밖을 내다봤 다. 아이폰 불빛을 비추니 물안개가 흰 눈처럼 흩날리고 있 다. 아내에게 카톡을 몇 번 시도했으나 연결이 안 된다. 셀 룰러 데이터 기능도 작동이 더디다. 아이폰 환경을 아날로 그 환경에 맞게 조정해야 겠다. 300여 개 앱을 대부분 비활 성화하든지 삭제해버려야 하나 어쩌나.

물안개를 맞으며 도로 건너편에 있는 본채 식당으로 건너 가서 아침 스낵을 먹었다. 헛된 생각이지만 뜨거운 해장국 이 간절해진다. 일찍 식사를 끝낸 순례자들은 원색의 우의 를 둘러쓴 채 알베르게를 나서고 있다. 대부분 알베르게는 아침 8시 이전에 알베르게를 떠날 것을 고지하고 있다. 요 령 있게 배낭을 풀고 꾸리자. 발바닥 물집 등의 치료 및 예 방 처치는 전날 밤 잠자리에 들기 전에 미리 하자. 아침에 기상해서 배낭을 다시 꾸리고, 아침식사를 알베르게 주방 에서 손수 지어 먹고, 발가락 물집 처치 등을 하다보면 출 발 시간이 늦어질 수 있다. 뭉그적거리다 늦게 출발할 경우 에 등 떠밀려 문밖으로 쫓겨날 수 있다. 당일 도착하는 순례자들을 맞이하기 위해 대청소를 해야 하니 일찍일찍 떠 나자. 침낭을 배낭 속 밑바닥에다 꾸리다 보면 잠자리를 펴 기 위해 배낭 속 전체를 뒤집어 엎어야 한다. 배낭 밖에 고 정하면 시간을 더 아낄 수 있다. 또한 도착하면 알베르게에 체크인이 끝나는 대로 땀과 먼지로 범벅이 된 등산화를 벗 어 외부 신발장에 넣어두고 침실방으로 안내를 받는다. 체 크인 줄이 길게 늘어져 있어도 침실 안내는 각기 한사람씩, 한팀씩 진행된다. 쌍 스틱도 좁은 내부 공간을 오갈 때 주 의하자. 평소 일상에서 하지 않는 순례 중 행동들에 신속히 익숙해지자. 부주의로 인해 자기가 상처를 입거나 남에게 입힐 수 있음에 주의하자.


8시가 다 되어 마지막 무리들과 함께 알베르게를 나섰다. 세장피드포르 쪽에서도 벌써 부지런한 순례자들의 발걸음 이 밀려오고 있다. 짙은 물안개로 인해 앞이 잘 분간이 안 된다. 눈앞에 군인들의 행군을 연상시키는 순례자들의 거 룩하고 아름다운 발걸음의 흐름들이 펼쳐지고 있다. 물안 개 속에서 보니 이들의 움직임이 신비스러워 보인다. 그래 나는 지금 거룩하고 신비스런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와중에도 탑차들의 왕래가 틈틈이 이어지고 있다. 불빛이 나 자동차 엔진 소리가 인지되면 조심히 걸음을 멈추고 까 미노가로 비켜 서서 차가 지나간 후에 움직이도록 하자. 그 들에게는 연중의 일상이지만 외지 순례자들은 분명 낯설고 조심해야 할 환경이다. 까미노 바닥에 너부러져 있는 소똥 말똥들도 가급적 덜 밟아야 바엔레스토랑 출입 시 눈총을 덜 받는다.

피레네 산줄기의 풍광이 참으로 아름답다고 했거늘 이처럼 물안개가 짙게 깔렸으니 기대를 접어야 할 것 같다. 2013 년도에도 피레네 산기슭은 오늘처럼 물안개가 짙게 깔려있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지리산 천왕봉 일출은 3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데 군 입대를 앞둔 아들 지훈이와 함께 지리산에 입산했을 때 그 천왕봉 일출을 보았던 기억 이 난다. 그 덕인지 아들은 GP 근무를 잘 마쳤다. 슬프게도 입대 바로 전 그리고 얼마 후에 인근 GOP에서 총기 난사 사건이 잇따라 발생하여 나라 전체가 침울했을 때였다. 국 군통합병원 인근에 살다보니 시신 및 부상병들을 실어나르 는 헬기가 지붕 위로 날아다녔다. 부대장으로부터 안심하 라는 서신도 수차례 받았다. 3대가 덕을 쌓은 집안 사람이 피레네 발치에 두 번째 왔거늘 어찌하여 오늘도 그대는 수 줍은 듯 아름다운 자태를 감추고 있는 것인가. 까미노는 서 서히 고도를 높히면서 굽이치는 물줄기마냥 휘어지고 감돌 며 물안개 속으로 빠져들어 가고 있다. 자동차들도 헤드라 이트들을 켠 채 언덕길을 오르내리고 있다. 식당에 순례자 양식을 납품하는 차량도 있으렸다.

경사진 언덕 울타리 안에 어슴프레 보이는 것들이 바위들 이려니 했는데 자세히 보니 양 떼들이다. 개미 떼처럼 앉 거나 섰거나 어슬렁거리고 있다. 밤새 이곳에서 이렇게 있 었던 것인가. 아니면 순례자들을 환영하러 나온 것인가. 양 의 목에 매달린 올리브 깡통 닮은 종에서 딸랑딸랑 들리는 종소리가 순례자들을 환송하고 있는 듯 하다. 춥다. 스틱을 쥔 손도 곱아온다.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우의 후드를 썼건만 물안개가 뺨을 적시고 물줄기가 되어 아이폰 화면에 떨어진다. 아이폰 입력 화면으로 현장 기록을 할 수가 없 다. 사진 촬영 및 영상 녹음으로 대체한다.

프랑스에서 스페인으로 넘어가는 구릉의 초지에 이른 것 같다. 국경선을 확연하게 구분해 놓은 것 같지 않다. 탑차 노점상이 순례자들에게 과일 등을 팔고 있다. 프랑스에서 의 마지막 세요라며 찍고 가란다. 오리손을 나선지 세 시간 정도 지났다. 뒤이어 오리손 알베르게에서 서로 인사를 나 눴던 꼬마 숙녀 가족이 탑차 매대로 다가온다. 꼬마 숙녀들 에게 음료수 한 병씩 프레젠트라면서 권했다. 해맑은 미소 를 지으며 땡큐한다. 옆에서 지켜보던 엄마가 땡큐를 한국 말로 뭐라고 하느냐고 물어본다. 딸들에게 한국말로 감사 인사를 다시 하라고 시키자 예쁜 꼬마 숙녀들이 “감사합니 다”라고 따라한다.

피레네 산줄기를 따라 물안개를 뚫고 스페인 땅으로 넘어 선 것 같다. 아직 짙은 물안개가 자욱하지만 순례자들의 발 걸음들은 앞뒤로 시야에 항시 잡히고 있다. 아마 프랑스길 초입 구간이라 많은 순례자들이 동시에 움직이고 있음이렸 다. 잔디밭에 잔돌을 뿌려놓은 듯한 까미노의 좌우로 물푸레나무 숲이 병풍을 이루듯 하늘로 치솟아 있다. 인기를 끌 었던 영화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신비스런 숲속 광경이 이 곳에서 재현되고 있는 것 같다. 낙엽이 깔린 너덜 길도 나 타난다. 우리는 이제까지 살아 오면서 많은 길을 걸어왔다. 흙길, 바윗길, 풀밭길, 모래밭길, 가시밭길, 비단길, 카페 트길, 아스팔트포장길, 시멘트포장길, 우레탄포장길, 비단 길....... 이처럼 하고 많은 길들을 인간이 만든 용어로 어찌 다 일컬을 수 있을 것인가. 비단길만 걷는 사람들. 가시밭 길만 걷는 사람들. 나는 이제까지 어떤 길을 걸어왔을까.

이 순간을 그대로 기록하고자 까미노가에 멈춰 서서 아이 폰에 문자를 입력해 본다. 그런데 멈춰 서다보면 주행 리듬 이 깨지는 것 같다. 음성 입력기는 오타가 많이 발생해 터 치 펜으로 수정타를 치느라 시간이 더 걸린다. 현장 기록 방법을 달리해야 할 것 같다. 신성한 숲속 까미노를 가며 방귀가 자꾸 나온다. 연달아 따발총처럼 내뿜는다. 앞으로 나가는 힘을 보태라는 듯이 한동안 계속 나온다. 뱃속으로 집어 삼킨 음식물들이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다. 쌀밥 김치 에 익숙한 뱃속에서 다른 음식물들을 적응시키느라 한동안 이런 생리현상이 계속될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냄새도 약간 변한 듯하다. 잠시 동안 앞뒤 시야에 사람 모습들이 끊겼다

가 다시 나타난다. 현지 중년 남성이 마라톤 복장으로 앞 에서 열심히 뛰어오고 있다. 땀에 흠뻑 젖은 채 조깅 중이 다. 물안개가 사라지고 골짜기를 덮고 있던 운무들도 서서 히 걷히고 있다. 햇볕이 비친다. 따갑게 비친다. 물먹은 판 초 우의가 바싹 말랐다. 한국인 모녀가 큰소리로 말하며 옆 을 지나친다. 언덕 안부에 배낭을 부리고 판초 우의를 깔고 그 위에 드러누웠다. 참으로 하늘이 맑다. 새파란 물과 하 얀 솜털 구름들이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하다. 구름이 비켜 가자 햇볕이 따갑게 내리비친다. 까미노는 이제 내리막길 로 이어진다. 수목들이 족히 수십 년, 수백 년을 자란 듯하 다. 빗물로 고랑이 페인 너덜길이 반복되며 내려가고 있다. 앞에서 일군의 젊은 여인들이 단촐한 복장으로 다가서고 있다. 한 처자가 중절모자에 붙은 태극기 문양을 발견하고 ‘꼬레아’라고 인사말을 건넨다.

숲속에 고즈넉하게 자리 잡은 작은 마을 론세스바예스에 도착하다. 순례자들이 이곳에 들어서는 길목은 한적한 뒷 길이다. 마을 중심 도로 쪽으로 걸어가 알베르게를 찾았다. 실버들이 유창한 영어로 순례자들을 안내하고 있다. 2013 년에 만난 실버도 있다. 침실 시설은 호텔 수준이나 주방 시설은 갖추지 않았다. 불로 인해 발생한 아픈 역사 때문 이란다. 숙박, 저녁식사, 내일 아침식사를 예약하고 25유 로를 지급하였다. 명함 크기의 침실 티켓를 받았다. 301번 에 배정되었다. 4층 1호 침대를 가리킨다. 스페인에서는 건 물 층수를 가리킬 때 숫자 표시가 우리와 다르다. 우리식 1 층이 여기서 0층이다. 우리식 3층은 여기서 4층이다. 엘리 베이터에도 그리 표기되어 있다. 알고 있으면서도 외부 식 당으로 저녁밥을 먹으러 갈 때 헷갈려 0층에 내리지 않고 1층에 내려 계단으로 한 층을 더 내려갔다. 저녁식사 자리 는 4인석 테이블에 나홀로 안내되었다. 잠시 후 독일 여대생 2인, 프랑스 여인 1인이 합석을 하였다. 이들은 오늘 아 침 세장피드포르를 출발하여 이곳에 도착한 것 같다. 전식 은 소파와 빵, 본식은 생선 또는 치킨 및 감자튀김, 후식은 아이스크림 또는 요구르트다. 선택해서 주문을 한다. 드링 크는 와인과 아구아Agua (물) 중 택일. 이 나라 식당에서 는 식수가 무료리필이 아니다. 메뉴에 포함이 안된 경우 유 료로 추가 주문해야 한다. 500-600mL에 2유로. 식사하며 이들과 잠시 대화를 나눴다. 각자가 한국어, 독일어, 프랑 스어는 원어민처럼 잘들 하는데 영어는 다들 푸어Poor했 다. 구글 번역기를 서로 보여주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생 선을 다 먹지 못하고 남겼다. 식사 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배가 고파 자판기에서 캔디 두 통을 사서 먹었더니 배가 꽉 찬 모양이다. 기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1식 정량은 반 드시 다 먹어 치우자.

GPS트립을 로딩하려해도 자꾸 다운된다. 데이터 부하가 걸리는 모양이다. 첫날 기록도 로딩을 못한 상태다. 트립에 서 미디어를 전부 삭제해버리고 시도하니 느린 속도로 로 딩이 되었다. 겨우 트립 리포트에 공유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었다. 아이가 태어나 처음으로 혼자 일어서서 첫 발을 내 딛던 그 환희의 순간을 기억합니다. 걷는 기쁨을 다시금 일 깨워 주셔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오늘 걸은 거리 15.8km 걸은 시간 7시간 53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