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1월 24일

도선사입구-봉황각-둘레길-솔밭근린공원-보광사-섭다리-이준열사묘역-

본원정사-화계사-삼성암-칼바위능선 넘어서 -내원사- 정능청수장

 

봉황각(鳳凰閣)은 독립운동가로서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인 의암(義庵) 손병희가

1911년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우이동이었던 이곳 27,900여평을 매입하여,

보국안민(報國安民)을 내세우고 일제에 빼앗긴 국권을 찾기 위해

천도교 지도자를 훈련시키는 목적으로 1912년에 세운 건물이다. 봉

황각은 우이동 버스종점에서 도선사(道詵寺) 입구 쪽으로 올라가면

 좌측으로 나오는 천도교종학대학원(天道敎宗學大學院) 건물 뒤에 있다.

봉황각 뒤에는 봉황각과 동시에 지어졌다고 하는 'ㄱ'자 평면의 살림채가 있으며, 봉황각과 담으로 구획되어 있다. .

 봉황각이 건립되었을 당시에는 봉황각 오른편 아래 우이동 버스종점 주변에 12동의 건물이 더 있었다고 하는데,

3·1운동 후 일제에 의해 철거되었다고 한다.

봉황각을 포함한 건물의 숫자가 13인 것은 천도교의 신앙 방법 중의 하나인 '13자 주문'과 통한다.

봉황각 오른쪽인 동북쪽에 봉황각과 직교하며 동북향으로 서 있는

천도교종학대학원 건물은 1960년대 말 천도교수운회관(종로구 경운동 88 소재)을 새로 지으며

그 자리에 있던 벽돌조 건물을 이건한 것이다.

 

 

보광사는 1788년정조에 금강산에서 수도한 원담스님이 신원사를 창건한 것이 그 시초이다

이후 한국전쟁으로 인해 소실되고 일부 건물만이 남아 법등을 겨우 이어 왔었다

그러던 것을 1979년 남산당南山堂정일스님이 포교의 원을 세우고 이곳에 주석하면서

불사를 시작하여 1980년11월 보광사로 절 이름을 바꾸었다

 

본원정사는다만 사찰 입구에 세워진 「본원정사 창건주비구니손덕선공덕비」에

비구니 손덕선스님이 지금의 자리에 도성암을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한때 도선사보다 많은 신도들의 기도행렬이 이어지던 곳이었다고 한다

1980년대 초 절 이름을 본원정사로 바꾸고 불사를 일으켜 대웅전과 명부전나한전 등을 건립하였다]

그러나 1996년5월 인근에 있는 삼성암화계사로 이어진 연쇄 방화사건으로 대웅전과 나한전이 모두 불타고 말았다

화재후 다시 세운 대적광전人寂光殿은 비로자나 부처님을 비롯해 세분의 부처님과 세분의 보살님을 모시고 있다

보현보살석가모니불대세지보살비로자나불문수보살노사나불관세음보살이 연화대위에 봉안 되어 있다

본원정사는 지장보살과 약사여래가 영험있는 곳으로 옛부터 유명하다

명부전에 봉안되어있는 목조지장보살유형문화재은

본래 북한산태고사에 모셔져 있던 상像인데

6.25 전쟁 당시 사찰이 전소되자지금의 자리로 이운했다

약사여래 역시 본원정사를 이야기 할때 빼놓을 수 없는 분이다

대적광전 왼쪽 편에는 서울에서 제일 큰 법체를 지닌 약사여래가 중생들의 아픔을 달래준다

 

화계사는 조계사의 말사로 중종신월선사가 창건 하였다

원래는 고려 때 에 보덕암을 세우고 오랫동안 법등을 이어왔는데

신월선사가 현재의 자리로 옮겨 짓고 절 이름을 화계사라고 하였다 그

래서 화계사에서는 보덕암을 화계사의 전신으로 여긴다

화계사는 창건 때부터 왕실 가족이 참여하였다

신월선사가 서평군 이공의 도움을 받아 법당 삼처와 요사칸을 짓고 절 이름을 화계사라 한 것이다

그러나1618년광해군에 화재로 전소된 것을이듬해월 도월스님이 재건하였는데

이때는 덕흥대원군가문에서 시주하였다

덕흥대원군은 중종의 일곱째 아들로 선조의 생부이다

그리고1866년고종 에 용선과 범운양 선사가 불전과 승방 건물들을 중수할 때 시주한 사람은 흥선대원군이다

왕실의 비호 아래 절의 특색을 살리면서 착실히 발전해온 화계사는

특히 흥선대원군의 원찰이라 불릴 정도로 흥선대원군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대원군이 화계사와 인연을 맺은 것은 부인 여흥 민씨가 이 절에 자주 드나들었기 때문이다

특히 대원군의 둘째 아들이 왕위에 오르게 된 일화가 이 절에 전해진다

어느 여름날대원군이 남루한 차림으로 화계사를 찾았다

너무 목이 말랐는데때마침 느티나무 아래에서

 동자승이 기다렸다는 듯이 물 사발을 건네주는 것이 아닌가

신기해서 연유를 물으니 만인이라는 스님이 시켰다는 것이다그

래서 대원군은 만인스님을 만나게 되었으며

만인스님은 대원군의 심중을 꿰뚫어 보고는 자손이 왕위에 오를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충청도 덕산 의 가야사금탑 자리가 제왕지지帝王之地이니

남연군 묘소를 그곳으로 이장하면 제왕이 될 귀한 왕손을 얻을 것이라고 한 것이다

후에 대원군이 가야사를 찾아가 돈을 써서 금탑을 허물고

그 자리에 남연군의 묘를 썼다

본래 남연군의 묘는 경기도 연천에 있었고

묘를 이장한 지7년 후인1852년에 둘째 아들 재황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조선의 제26대 왕인 고종이다

이러한 인연으로 대원군은 절 중창을 위해 시주를 하였으

며전각 곳곳에 자신의 글씨를 써놓기도 하였다

1933년에는 한글학회 주관으로 이희승최현배 등 국문학자인이 화계사에 기거하면서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집필한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근대에 들어와 화계사는 해외에 널리 알려졌다

1960년 중반부터 숭산 행원 큰스님께서 화계사의 조실로 계시면서

다년간 전 세계를 돌며32개국120여 개의 홍법원을 개설5만 여명이 넘는 외국인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화계사는 1991년 대적광전을 창건하고4층에 국제선원을 개원하여 외국인 불교도들을 수용하고 있다

현재 이곳에서 승려가 된 외국인은 현정사 주지 스님을 지낸 현각스님 외

 무상사 조실 대봉스님주지 무심스님 등 백여 명에 이른다

현재는 송원당 설정 큰스님을 회주 스님으로 모시고

수경스님이 주지직을 맏아 모든 사부 대중이 열심히 정진하고있다

대지의 경내에 당우로팔작지붕다포계의대웅전'명부전 삼성각 천불오백성전 범종각

보화루 학서루등이

있다절입구의 주차장에서 삼성암으로 가는 개울가로정도 올라가면

오탁천이란 유명한 약수가 있는데 오랜세월에 오염되어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또 절 마당에는 수령 430년된 느티나무가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유형문화재로 1870년고종7에 중건된 대웅전은 정면 3칸측면3칸의 팔작지붕 다포집 건물이다

벼에 흑벽이 아니고 판벽나무로 되어 있다

법당에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모시고 있다

이 삼존불상은 근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원래 대웅전에 모셨던 삼존불 중 주불은 손상되었기 때문에 따로 보관하고

있다대웅전의 현판 글씨는 조선 후기의 명필인 몽인정학교의 필체이며

주련의 글씨는 신관호가 쓴 것이다

 

화계사동종은 조선 숙종 때 경기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한

승려인사인스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조선시대 종이다

사인스님은세기 뛰어난 승려이자 장인으로 전통적인 신라 종의 제조기법에 독창성을 합친 종을 만들었다

현재 그의 작품8구가 서로 다른 특징을 보이며 모두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화계사동종은 보존상태가 양호하며 사인비구의 종 경북 희방사에 있던 종으로

1898년에 이곳으로 옮겨왔다

종에 새겨진 명문에 따르면1683년에 사인스님에 의해 제작된 종이라고 하고 무게는300근에 달한다

 

삼성암은 창건이전부터 나반존자에게 기도를 올렸던 청정도량이었고

절이 창건된 이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나반존자께 소원을 빌어 성취하고

난치병을 완치했다는 영험담이 전하고 있어 중부제일의 독성기도 도량으로 유명하다

독성각에는 나반존자가 머무르고 있다는 천태산과 그 속에서 수행하고 있는 나반존자를 부조로 봉안하였다

 

 내원사의 존재를 밝혀주는 것은 현재로서는 김정호가 제작한

「수선전도와 1859년철종 10년에 만들어져 사찰에 전하는『백의대사불도라는 목판이 유일하다

수선전도에는 현재 내원사가 자리한 곳과 같은 위치에 내원암이 표시되어 있고

『백의대사불도白衣大士佛圖목판에는 삼각산내원암三角山內院庵이라는 기록이 있어19세기 전반만 해도 법등을 이어오고 있었던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그러던 내원사가 언제 어떠한 이유로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는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오늘도 무상함 속에 범종루 아래 길게 이어진 이끼 낀 석축에서는 세월의 흔적이 배어나고

바위틈에서 솟는 감로수는 사찰의 흥망성쇠를 잊은 듯 말없이 흐르고 있다

대웅전에는 삼존불석가모니불, 관세음보살, 지장보살이 봉안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