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 둘레길 산행기

 

서울 건축사 등산동호회 올해 마지막 행선지로 북한산 둘레길을 가게 되었다. 한 달 내내 경황없이 지나느라 산을 찾는 마음의 여유를 채 갖지 못했서인지 산을 찾고 싶은 욕구가 쌓여 다시 작은 설렘으로 산을 그리워하게 된 마당에 소문으로만 들은 둘레길을 걷는 것도 새로운 경험이 될 것 같았다.

 

제주 올레길을 시작으로 전국에 그와 비슷한 것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근래 둘레길 걷기가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산에 오르는 것을 힘들게 여기고 아예 포기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둘레길은 산에 오르는 부담 없이 일상에서 걷는 것처럼 언저리 길을 걷는 것이어서 편하게 임하게 될 것 같았다.그런데 그런 일로 자연을 더 해치게 되는 것이 아닌지 걱정스럽기도 하다. 길이란 그냥 걷고 싶은 사람들이 찾아 걷는 평온함이 더 좋을 것 같다.

 

올 추석이 지난 때 죽마고우처럼 막역한 친구로부터 부부와 함께 둘레길을 걸은 예기를 들었었다. 그 때 걸으면서 내가 리모델링 설계를 한 북한산 생태 자료관 옆을 지났었다고 했다. 둘레길을 걷기로 나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 때 이 길에 대한 궁금증을 갖고서도 통 시간을 갖진 못했다. 평소 언제 하루에 다 걸어볼 생각만을 하고 있었다.

 

북한산 둘레길은 2010년 1월 10일 수유분소-솔밭공원 사이 3.4km 시범구간을 개통하면서 시작되었다. 그 후 2010 8월 31일 41.8km북한산 구간 개통하였고 2011년 사패산 도봉산 구간 26km 개통할 예정이다.

 

 

 

이번에 걷는 구간은 1구간에 해당되는데. 둘레길 전체를 1. 소나무 숲길 2. 순례길 3. 흰구름길 4. 솔샘길 5. 사색의 길 6. 평창마을길 7. 성너머길 8. 하늘길 9.마실길 10. 내시묘역길 11. 효자마을길 12. 충의길 13.우이령 길로 구분하고 있다.

 

그리고 북한산 둘레길은 북한산, 사패산, 도봉산 자락을 연결한 환상(環狀)의 길로 서울시 6개구와 경기도 3개시에 걸쳐 접하고 있다. 담당 기관에서 둘레길을 소개한 글에는 “환경부와 국립공원관리공단이 공동으로 기획 개발한 북한산 둘레길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이가 찾는 북한산 국립공원을 국민의 걷기 문화 욕구에 부응하면서 체계적으로 북한산국립공원을 관리하고, 무분별하게 조성된 비지정탐방로인 샛길 등을 폐쇄, 정리하며 자연생태계를 보전하기 위한 것이다. 또한 자연을 보호하면서 탐방객들에게 자연과 문화, 역사 등을 느낄 수 있는 자연 친화적인 걷기 편한 길을 제공하는 것이다. 북한산 둘레길은 기존의 샛길을 연결하고 다듬어서 북한산 자락을 완만하게 걸을 수 있도록 조성한 저지대 수평 산책로이다.” 라고 되어 있는데 개발이라는 단어와 자연 친화적이라는 말을 다 유리하게 해석하는, 주관 하는 측의 ‘관공서 논리’처럼 여겨졌다.

 

이맘때 어떤 일이건 ‘한해의 마지막’이라는 말이 쓰이기 쉽다. 그것이 매사에 더 쓸쓸한 느낌을 갖게 했다. 나는 연말 행사에는 가급적 적게 참석하려 하고 있다. 그런 분위기와 맞닥뜨려지고 싶지 않은 심정도 있고 그나마 남은 한 달이 분위기에 휩쓸려 더 빨리 지나기 쉽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마지막달에는 쏜살같이 흘러가버리는 한 해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만회하려는 의지를 갖곤 한다.

 

산행을 마치고 2시 30분에 대구로 갈 차편을 예약해 둔 상태여서 마음은 부산스러웠다. 그리고 내려갈 준비를 하느라 아침부터 마음이 부산스러웠다. 안동에 지으려고 하는 작은 집의 안을 오후에 내려가 보여 주기로 했다. 휴일이라 제 시간에 인쇄를 할 곳이 있을지 걱정이었는데, 약속장소로 오는 길에 출력소가 문을 연 곳이 있어 출력을 해 두어 조금 안심이 되었다.

 

전철역으로 가는 동안 청청한 하늘에 아침 공기가 서늘했다. 전철이 수유역에 당도할 쯤 전차 안에서 박기현 회장을 만나 함께 택시를 타고 솔밭공원으로 갔다. 회원 몇 분이 솔밭공원에 길을 건너기전 가게 앞에 모여 있었다. 길 건너에도 다른 회원들이 모여 있는 모습이 보였다. 별로 내킬지 않을 것 같지만 습관처럼 물을 한 병 사고 길을 건너가 회원들과 인사를 했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몇 분을 기다리다 당초 예정과 달리 4.19 표지와 보광사를 들러 나와 예정된 우이령 입구까지 걷기로 했다.

 

 

 

 

조금 늦게 걷기를 시작했다. 4.19 묘역을 보고 보광사에 들러 다시 이곳으로 돌아 나와 예정된 우이령 입구까지 진행하기로 했다. 오르는 입구의 길은 인근 주민들은 늘 다니던 일상의 길이었다. 조금 안으로 들어서자 공터와 낮은 집 너머로 인수봉과 능선이 올려 보였다. 산길로 들어섰다. 그 곳 둘레길은 새로 개발하지 않고 전부터 나있 던 길이어서 조금 안심이 되었다. 산길을 걸어 가다보니 숲 너머로 4.19탑이 보였다.

 

 

 

 

그 곳은 전에 정문으로 들어왔다 돌아보고 간 일이 있는데 산에서 내려다보는 것을 대하는 풍광이 새로웠다. 전에 왔을 때는 올려 보이는 경계너머로 이런 길이 있는지 모르고 있었다. 북한산을 오르는 대표적인 코스 외에 각각의 위치에 이렇게 나 있는 길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새로운 길을 걸으며 새롭게 펼쳐 보이는 풍광을 대할 수 있어 좋았다.

 

그리고 서울에 살아가는 사람들 가운데 각자의 집이나 직장이 있는 이곳저곳에서 이처럼 북한산을 느끼며 살아가는 사람이 많을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리고 그만큼 북한산이 일상의 삶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4.19묘지에서 보광사로 향했다. 겨울 숲길을 걷는 동안 투명한 내음이 느껴졌다.

 

보광사에 이르고 보니 전면에 큰 규모로 지어 놓은 건물이 나타났다. 그 과도함이 상상속의 산사의 아늑함을 깨뜨리고 있었다. 아니 그 것을 보면서 전체 경내가 그리 큰 절도 아닌데 왜 이렇게 무지막지하게 느껴지도록 크게 지으려고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건물에 가로 막혀 뒤에 놓인 산세의 모습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하다 그 옆으로 난 길로 뒤쪽으로 들어가니 너른 마당 뒤로 적당한 크기의 대웅전이 보였다. 그 곳에서는 배경 산세가 평온하게 느껴졌다. 거기서는 앞에서 거대해 보이던 앞 건물도 단층으로 보여 부담이 완화되었다. 그리고 주변에 몇 채의 당우가 더 보였다.

 

포장길을 내려오다 보니 아까 산으로 들어선 곳을 지나게 되었다. 다시 솔밭 공원으로 들어섰다. 솔밭 공원 외곽 길을 지나 다시 건물 사이의 골목길을 지났다. 그 곳도 일상의 길이었다. 너른 대지에 놓인 단독 주택도 보였다. 그 건물 표정에서 이미 흘러간 지난 시대의 시대성을 느끼게 했다.

 

 

 

 

가다보니 우측 산길로 들어서는 지점이 보였다. 그 조금 위쪽에 이용문 장군 묘가 놓여 있었다. 이 회장이 그 분 노력으로 우리 문화재를 지킬 수 있었던 사연을 예기했다. 전에 다른 사람으로부터도 같은 예기를 들었던 기억이 나서 그 묘 앞에 다가가 돌아보고 나왔다. 산길 입구에 아치문을 만들어 놓았다. 둘레길을 알기 쉽게 하려고 만들어 놓은 것 같지만 그런 조형물이 산길의 평온함을 수더분한 분위기로 하는 것 같았다.

 

‘만고강산’ 약수터에 닿아 일행이 멈춰 쉬었다. 앞서 도착한 김준식 건축사가 가지고 온 막걸리를 꺼내어 회원들과 돌려 마셨다. 약수물을 마시려고 가까이 다가가 보니 낙엽 등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작은 문을 달아 놓은 모습이 보였다. 그 것을 열어보니 웅덩이에 고여진 물을 떠먹도록 되어 있었다. 옆에 걸린 빨강색 프라스틱 바가지로 물을 떠 마시고 일행이 쉬는 동안 스케치를 했다. 앞쪽의 공터 주변을 산자락이 감싸고 그 너머로 멀리 불암산이 보였다. 앙상해진 나무와 푸른 소나무가 계절 감각을 자아냈다.

 

일행이 앞서 출발한 다음 스케치를 마치고 뒤따라갔으나 산자락을 넘어섰는지 보이지 않았다. 굽이진 낮은 구릉의 산길을 걸어갔다. 흙길에 그림자가 선명하게 앙상한 나무줄기의 형체를 그리고 있었다. 기온은 낮고 날씨는 맑아 모든 숲들이 다 투명해져 보였다.

 

나지막한 산등성이를 지나다보니 오측 표지에 만델라의 글이 쓰여 있었다. “자신이 어떻게 변했는지 알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아직 변하지 않은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투명해 보이는 이맘때 분위기에 더 어울리는 말 같았다. 맞은편에서 다른 일행이 걸어오고 있었다.

 

숲사이로 교회가 보였다. 건물 숲 사이로 볼 때마다 더 좋은 장소로 다가왔다. 교회에서 손병희 선생 묘소 쪽으로 걸었다. 좌측 산자락에 겨울 숲과 파란 하늘이 명상적인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한해의 마지막 달 즈음이 되면 산천초목이 시든 허전함과 들녘의 쓸쓸한 풍경도 마음 안에서 웬만큼 삭여져 있다. 그리고 이제 시린 계절 풍경에 살가움을 느낄 수 있다.

 

이맘때는 하늘 보기가 좋다. 맑은 날 앙상해진 키 큰 나무 가지를 따라 그 너머로 시리고 투명한 쪽빛 하늘은 보면 속세에 찌들며 허겁지겁 살아가다 문득 정신이 맑게 돌아오는 듯 한 느낌이 든다.

 

 

 

 

 

 

 

몇 일전 청주에 내려가 일을 보고 충북대에 아는 분을 뵈러 간 일이 있다. 그 때 그 분을 뵙고 나오다 교정 한 귀퉁이 구릉진 길을 걸어 내려오다 올려본 하늘이 앞서 말한 바로 그런 풍경이었다. 그 모습이 귀하게 느껴져 마주 오는 두 학생에게 잡시 하늘을 보고 가라고 권했었다. 그 때 이맘때쯤 느끼던 지난 시절의 감각이 불현듯 깨어나는 것 같았다.

 

농사짓는 집에 살던 시절에 일상에서 느끼던 느낌이다. 그 풍경에는 시리고 애잔한 기억들이 함께 서려 있다. 마음이 가난했던 시절 그 투명함은 마음을 더 시리고 외롭게 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련하고 아름다운 인상으로 그립게 다가온다. 겨울 숲길을 걷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 때 풍경들이 기억 속에 되살아났다.

 

잎새를 떨구고 찬바람을 맞고 서 있는 이맘때는 되레 나무, 땅, 하늘, 공기, 모든 우주의 존재감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생명력과 경이로움이 더 크게 와 닿는다. 새 봄에 약동하는 사물의 감각은 정신을 몽롱히 취하게 할 정도지만 모든 것이 움츠려들고 그 약동의 생명력이 자취를 감추어 가는 이즈음은 상상력이 더 해진다.

 

산길이 주택가 옆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숲에서 나오다 보니 길과 마주친 건물 담벼락에 표지가 붙어 있었다. 주택가 담벼락과 산자락이 경계를 이루고 있었다.

 

길을 돌아 손병희 선생 묘역을 지났다. 손병희 선생은 본관은 밀양. 초명은 응구(應九)·규동(昑). 호는 소소거사(笑笑居士), 도호(道號)는 의암(義菴).이다. 1897년 북접대도주가 되었으며 1898년 최시형이 관군에 체포되어 처형되자 동학교문을 통솔하게 되었다. 천도교 지도자이며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이다.

 

우이 매표소 다리를 건너가다 뒤돌아 개울 옆을 따라 걸었다. 타워 크레인이 서 있어 솥뚜껑보고 놀란 자라 가슴이 되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내려오면서 보니 전에 그린파크가 있던 곳에 새로 건물을 지으려는 것 같았다.

전부터 건물이 있었던 곳이긴 하지만 너무 깊숙이 건물이 들어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연의 품을 헤집고 들어서는 모습이었다. 그냥 자연으로 복원되어야 마땅할 자리 같았다. 전에 우이그린파크가 있던 곳이다.

 

전에 우이령길이 열렸을 즈음 이 입구 다리에 서서 스케치를 했었다. 도시 내에서 그처럼 자연의 개울이 흐르는 것을 대하는 것에 한 가닥 희망이 느껴지는 듯 했었다. 그런데 건물이 서서 남보란 듯이 자랑하는 꼴만 쳐다보아야 될 것 같았다.

 

 

 

 

우이령 입구를 지나며 혼자 걸었던 불수사도북 종주 때 기억이 났다. 그 안으로 식당을 찾아가다 신왕선 회원이 다른 일행들이 뒤로 둘러 오기로 했다고 하여 다시 그 쪽길로 갔다. 서울 건축사 등산동호회가 결성된 다음 첫 창립 등산 대회로 북한산을 다녀 올 때 지났던 길이다. 영봉으로 올라서서 훤출한 모습을 대했던 기억이 좋은 인상으로 남아 있다.

 

안으로 가다 우측으로 식당 앞길과 연결되는 곳에 회원들 모습이 보였다. 한 식당 울타리에 동동주 빈 통을 주렁주렁 매달아 놓은 모습이 보였다. 그 것이 마치 아무 세상 근심 걱정 없이 살아가는 주선이 사는 동네 같은 공간을 연상케 했다. 아래쪽으로 내려가다 보니 길 가에 둥근 강돌을 박아 치장한 담장이 유선형을 그리고 있었다. 그 담장에 햇살이 밝게 비춰져서 물성이 드러났다.

 

식당으로 들어서니 앞서 도착한 회원들이 마당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푸짐한 먹거리가 나왔다. 막걸리병 소주병이 배당 되듯이 사이에 놓여졌다.

 

함께 차려진 음식을 먹었다. 다 도착하여 자리를 잡자 이 회장이 연장자인 윤원석 고문에게 건배 제의를 부탁했다. 윤 고문이 내년에는 회원 모두의 가정에 좋은 일만 있기를 기원하여 ‘’위하여“를 세 번 하자고 했다. 잔을 부딪치며 우렁차게 구호를 함께 외치고 즐거운 식사 시간을 가졌다.

 

 

 

 

안쪽에 앉은 안영수 건축사가 어느덧 등산동호호가 생긴지 4년차가 되었다고 했다. 그 말을 들으며 지난 시간들을 뒤돌아보게 되었다. 산행은 언제나 좋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거리끼는 느낌이 들 때도 간혹 있었다. 행사 스케줄 관리가 철저히 되지 않아 참가 신청을 받을 때 예고한 일정이 부분적으로 지켜지지 않은 일도 있었다. 사정이야 있을 수 있지만 그런 때는 제대로 알리고 공지를 하여 의견을 물어 보아야 할 것이다. 건축사 협회 이름을 걸고 하는 모임이니 만큼 형식과 내용이 잘 지켜져야 한다.

 

그리고 버스에 약장수가 타서 조용히 창밖 정취를 느끼며 가려는 시간에 짜증스럽게 된 일도 있다. 거리에서 파는 물건이라는 것이 거의 믿을 게 못된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파격적으로 깎아주는 데서 이미 다 드러나는 상황이다. 그런데도 여비를 보태준다며 접근하는 일들이 있다. 그런 일로 자칫 묻지마 관광처럼 될 수가 있다. 그것은 사회서 바라보는 “건축사”의 인식에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또 여러 명의 회원이 모이는 공간이라고 해서 그것을 하나의 세로 인식하고 도움을 얻고자 접근하려 하거나 영향력을 의식해서도 안 될 일이다. 산의 맑은 정기를 함께 마시고 심신의 건강함을 누리는 순수한 모임이어야 한다. 산행의 본질은 산을 만나러 가는 것이어야 한다.

 

산행은 쫓기듯 살아가는 일상을 벗어나 자연을 찾아 맑은 공기를 마시고 풍광을 대하며 음식까지 맛보는 즐거운 시간이다. 이번에도 그런 시간이 되었지만 차를 놓치지 않으려고 먼저 조용히 일어나 나왔다.

 

 

 

 

나오면서 건너는 개울에 살얼음이 낀 모습이 보였다. 하늘 나뭇가지 햇살 등이 맑은 개울물에 투명하게 반영되었다. 한해가 마감되어지는 때 비워지고 반영되는 투명한 풍경이 다시 나를 되돌아 볼 시간을 갖게 했다.

(20101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