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행일시 : 2009년 5월 16일~17일                

● 누 구 랑 : 경인일보 지리산둘레길 1,2구간 특별취재팀

● 산행코스 : 1구간(다랭이길) 전북남원 매동마을 ~경남 함양 금계마을

               2구간(산사람길) 경남 함양 마천 의중마을~휴천 세동마을

● 사진은 ? : 본인및 특별취재팀

  

  

  세상에는 여러 길이 있습니다. 아마 이세상이 만들어진 이후 동물들이 이동하면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길도 있을 것이고, 인간이 삶을 영위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형성된 길도 있을 것입니다. 장돌뱅이들이 봇짐을 지고 넘나들던 고갯길과 들길이 있었을 것이고, 사람들이 장을 보러가던 길도 있었을 것입니다. 한반도를 가로질러 문경새재를 넘어 한양으로 향하던 영남대로가 있었고, 신사임당이 친정집을 가기위해 걸었던 대관령 옛길이 있었습니다. 언젠가 걸었던 대관령 옛길은 참 곱기도 하고 정다운 길이었습니다. 이렇듯 우리에겐 삶의 길들이 지천으로 깔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길들은 거의 사라지고, 자동차를 위한 도로만이 전국토를 거미줄같이 연결해 놓았습니다. 결국 속도성은 우리의 마음과 몸을 점점 병들어가게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마음과 몸을 건강하게 유지하려면 두발만의 힘으로 걸어야 합니다. 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많은 사람들의 마음과 몸의 병은 치유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니체는 "가장 중요한 것은 길위에 있다"라고 했습다. 동의보감을 쓴 허준 선생은 "약보(藥補)보다 식보(食補)가 낫고, 식보(食補)보다 행보(行補)가 낫다"라고 일찍이 말씀하셨읍니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영국을 비롯하여 미국, 일본등에서는 오로지 걷는자만을 위한 길을 만들었습니다. 적게는 수천 킬로미터에서 십수만 킬로미터에 이르기도 한답니다. 그 길을 수많은 도보여행자들이 걸으며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하고, 독특한 그 지역의 문화에 매혹되기도 하며, 자신과의 대화를 통해 내면의 소리에 귀기울이기도 합니다. 특히 산티아고의 순례길을 30-40일간 걷고 나서 쓴 도보여행기는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제주도 올레를 구간구간 나누어 걷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바램에 지리산 둘레길이 열려 가고 있습니다.

지리산 둘레는 모두 800여 리(약 320km). 3개 도(전남 경남 전북), 5개 시군(구례 하동 산청 함양 남원), 16개 읍면, 100여 개 마을을 거칩니다. 숲길(43.8%) 농로(20.8%) 마을고샅길(19.9%) 임도(14%) 도로(1.4%) 논둑길 밭둑길 고갯길 강변길 걸어서 한 바퀴 도는 데 약 232시간(시속 1.3km) 걸립니다. 하루 10km씩 가면 약 32.5일 걸리는 셈. 때론 낮은 곳(구례 토지·해발 50m)을 걷기도 하고, 때론 산꼭대기(하동 악양 형제봉·해발 1100m)도 올라야 합니다. 그렇지만 수직의 정복이 아닌 수평으로 눈마추며 천천히 향유하며 걷는 그런 길이 목표랍니다. 그러나 아직은 둘레 길이 모두 이어진 것은 아니고, 작년에 1, 2구간 21km(전북 남원 산내면 매동마을∼경남 함양 휴천면 세동마을)가 겨우 첫선을 보였을 뿐입니다. 

  

지리산!

백두대간의 남쪽 끝자락을 책임지고 있는 거대한 산입니다. 해발 1,000m가 넘는 봉우리만해도 20여개, 재가 15곳이라 합니다. 지리산에서 발원한 물은 덕천강, 엄천강. 횡천강을 이뤄 흘러갑니다. 천왕봉 일출, 칠선계곡, 불일폭포, 연하봉 설경, 노고단 운해, 피아골 단풍, 벽소령 달밤, 반야봉 낙조, 세석의 철쭉, 섬진강 맑은물을 지리산10경이라 한답니다.  지금으로부터 23년전인 1986년 가을 노고단 운해, 천왕봉 일출과 만나는 행운을 얻었고 칠선계곡을 보고 걸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런 지리산에 둘레길이 열리고, 그 길을 걷는 행운을 얻었습니다. 경인일보 지리산 둘레길 1,2구간 특별취재팀과 함께하는 영광을 갖게 된것입니다.

  

1구간(다랭이길) 전북남원 매동마을 ~경남 함양 금계마을

  

        

         

  

  이구간은 약 10.68km입니다. 산비탈을 계단식으로 만든 다랑이논이 반 하늘에 걸려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이 둘레길을 잇고 있는 '사단법인 숲길'에서는 이 지방 사람들의 표현대로 '다랭이길'이라는 이름을 붙여놨습니다.

  수원을 아침 9시반에 출발한 차가 들머리에 14시경 도착했습니다. 점심은 오는길 휴게소에서 간단히 해결하였으므로 바로 출발입니다.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빗줄기는 강하지 않습니다. 이런비를 보슬비라고 해야 하나 이슬비라고 해야 하는 쓸데없는 의문을 갖게하는 그런 비입니다. 좀 거추장스럽기는 하지만 걷는데 큰 무리는 없습니다. 비에 젖은길이 미끄러울 것 같지만 오늘도 맨발이 되어봅니다. 지리산둘레길 1구간의 들머리는 전북 남원 매동(梅洞)마을 입니다. 마을 모습이 매화꽃을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랍니다.  마을뒤로는 울창한 소나무숲이 정답게 우리를 맞아줍니다. 그 소나무 너머로 고추모종도 심어져 있고, 고구마순도 심어져 있습니다. 고사리밭에는 비를 맞고 수줍은듯 고개숙인 고사리순들이 뽀족뾰족 우리에게 인사를 해옵니다.

  

          

           

           

           

           

  오솔길을 한참 걷다보면 다랑이 논이 펼쳐지는 중황마을과 상황마을과 만나게 됩니다.  옛날에는 천석꾼도 여럿 살고 있었다는 풍요로운 곳입니다. 지금도 완만한 지형에 치마폭처럼 펼쳐진 다랑이논이 장관을 이룹니다. 그 논뚝길을  걷습니다.  가는길 내내 하늘은 우리에게 운무를 선사합니다. 그저 신선이 되어 하늘나라 위를 걷는 기분입니다. 그저 머리를 비우고 자연을 벗삼아 나무늘보처럼 천천히 걷습니다. 다랑이논 너머로 날씨가 좋은날은 천왕봉, 반야봉이 바라보인다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은 우중이어서 천왕봉, 반야봉대신 아름다운 운무를 우리에게 선사합니다. 이마을 언덕배기에서 잠깐 막걸리판을 벌립니다. 모두가 한잔술에 기분이 좋아집니다.

 

          

           

           

 상황, 중황마을에서 등구재를 향해 한참을 오르니 간이매점이 있습니다. 비속이라 어디 앉을곳도 마땅치 않지만 또 쉼을 갖습니다. 몇몇은 차도 한잔씩하고, 누군가는 길섶에서 네잎크로버 찿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두분이 네잎크로버를 찿았다고 좋아라 합니다. 어느분은 머리에 찔레꽃을 꽂고 노래를 흥얼댑니다. 아마 아주 어린시절 뒷동산을 마구 헤메고 다니던 생각 때문이었을겝니다. 얼굴에 환한 미소를 머금은채 말입니다. 그모습에 덩달아 흥이 납니다. 정말 한없이 넉넉한 지리산 둘레길 걷기입니다.

  

           

  드디어 등구재에 도착입니다. 매동마을에서 5.5km 지점이니 어슬렁 어슬렁 벌써 절반이나 걸은것입니다. 해발 700m의 등구재는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로지르며 두곳을 이어주는 곳입니다. 거북이 등을 닮았다고 해서 등구재라 부른답니다.

   이길로 경남의 창원마을 사람들이 남원의 인월장을 보러 다녔답니다. 아마 장을 보고 막걸리 한잔을 걸치고 이 등구재에 다다를 즈음이면 서쪽 지리산 만복대엔 노을이 붉게 타오르고, 동쪽 법화산 마루엔 둥근해가 두둥실 떠올라 붉은 노을과 눈부신 달빛이 어우러져 장관을 이루었을테니 육자배기라도 한수 읇지 않곤 못배겼을겁니다.

  또 이고개길은 전라도 총각이 경상도 처녀에게 장가들기 위해 넘었던 길이기도 할 겁니다. 지금이야 지역색이 어쩌니 저쩌니 하지만 옛날에야 그렇게 혼인한 두사람이 알콩달콩 살며 자식을 놓았을 겁니다. 그 애들이 커서 외갓집을 왔다갔다 하기위해서도 이 고개를 넘었겠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이길을 '외갓집 가는길'이라는 애칭을 붙이기도 한답니다.

등구재에는 앉아 쉴 수 있는 쉼터가 있지만, 비속이라서 모두 서서 잠시 주변을 둘러봅니다.

  

          

         

          

          

  등구재에서 창원마을로 내려오는 길에 다시 다랑이논과 만납니다. 지리산 기슭의 운무와 어울어져 한폭의 동양화를 연출합니다. 모내기를 하기 위해 갈아논 논에는 개구리알이 여기저기 흩어져 우리를 방깁니다. 정말 자연과 인간이 함께 어우러져 하나가 되는 느낌입니다. 거기다 무인판매대가 우리를 맞이하며, 우리네 도시인들에게 무한한 감동을 선사합니다. 메뉴는 여러가지 나물류등과 그냥 흐르는 물에 담가논 음료수 정도이지만 얼마나 정다운 모습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정다운 모습을 두고 두고 오래도록 볼려면 이곳을 찿는 도회인들이 욕심을 버리고, 자연을 자연그대로 받아들이는 양심이 필요합니다.

  

           

             

             

           

 길은 이어져 창원마을에 다다릅니다. 조선시대 세금으로 거둔 물품을 보관하던 창고가 있었다고 해서 창말(창고마을)이었다가 창원마을이 되었답니다. 다랑논과 장작담, 정겨운 골목, 집집마다 줄지어 선 호도나무와 감나무가 있고, 마을 다섯곳에 당나무가 있어 넉넉한 정을 느낄 수 있는 그런 마을이랍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길을 걸을 수 없읍니다. 길이 새롭게 마을 외곽으로 돌려 나 있기 때문입니다. 마을 주민들 사이의 이런저런 이견으로 우린 그런 정다움을 함께하기가 어렵게 됬습니다. 아마도 거기에는 도시인들의 이기심이 한몫 했을겁니다. 그저 보고 즐겨야 할 농산물이나 임산물에 손을 댄다든지, 배설물과 각종 오물을 여기 저기 떨쳐 놓는 일들이 그러 할 것입니다.

 아무쪼록 좋은 쪽으로 결과가 뫃아져 둘레길을 걷는 이들에게 다시 정다운 마을 안길을 걷는 즐거움을 돌려주어야 할 것입니다.

  

        

         

        

  이제 1구간의 마지막 마을인 금계마을 입니다. 우리의 숙소인 '지리산롯지'로 향합니다. 천천히 마음껏 지리산 주변의 자연을 벗삼아 4시간여에 걸친 지리산 둘레길 제1구간 걷기의 대장정을 마무리합니다.  

 이제 저녁시간입니다. 한 열가지쯤되는 이곳 특산물로 마련된 나물 비빔밥을 먹었습니다. 정말 일품이었으며, 꿀맛입니다.

      

    

    

     

  저녁식사후 친교시간을 갖습니다. 구성원이 바우산악회와 화성시등산연합회 주요멤머로 구성이 되어서 대부분 초면이지만, 4시간여를 걸으며 쌓은 정 때문인지 금방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이지방 특산인 지리산흑돼지가 구워지고, 남원에서 나오는 주몽(복분자주)와 황진이(산수유술)가 동이납니다. 막걸리가 몇순배 도는가 했더니 이제 소주가 그자리를 찿이합니다. 어느분인가 배낭에서 꼬냑을 꺼내 그것마져 동을내니, 이번 산행을 기획한 경인일보의 송수복기자는 소주를 구하러 나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제법 흥이 오른 누군가가 노래를 부르고 다음 사람 다음 사람으로 이어집니다. 어김없이 찾아온 내차례입니다. 음치인 내가 노래를 부르면 판이 깨질것 같습니다. 그래서 시 한수 낭독합니다. 화담 서경덕이 반야봉에 올랐다가 읇어 <화담집>에 수록된 시입니다.

  

'지리산이 동녘 땅을 다스리고 있어

올라가 보매 마음의 눈이 끝없이 넓어지네

바위는 장난하는 듯 솟아 봉우리를 이루니

아득한 조물주의 공을 그 누가 알랴

땅에 담긴 현묘한 정기는 비와 이슬을 일으키고

하늘에 머금은 순수한 기운은 영웅을 낳게 하네

산은 나를 위해 구름과 안개를 걷어내니

천리길을 찾아온 정성이 통한 것인가'

  

노래순서가 돌고 돌아 다시 내차례가 되었을때는 이인로가 고려말 무신정권아래 참담한 생활을 하다가 이상세계를 찿아 이 지리산에 들어와 읇은 시를 낭독합니다.

  

'지나는 곳마다 선경이 아닌 곳이 없구나

천암(千巖)이 다투어 솟아 있고

온갖 골짜기에는 맑은 물이 소리 내어 흐르는데

대나무 울타리와 떼를 입힌 집들이

복숭화꽃 살구꽃에 어리어

인간이 사는 곳이 아닌 듯 하구나'

  

500년전이나 지금이나 지리산을 보고 느끼는 감정이 이리도 똑 같은지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모두 술에 취해 여흥을 즐기는데 옛 시귀나 읇조리는 내가 한심스럽게 보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그저 술한잔 걸치고 옛 시인묵객이 지리산을 보고 느껴 읇은 시를 오늘날의 내가 이 지리산을 찿아 읇는다는 것이 내겐 행복입니다.

 어디 조선의 화담과 고려의 이인로 뿐이겠습니까? 거대한 지리산은 그 웅장함 만큼이나 많은 시인묵객의 사랑을 받고, 그 사랑을 작품으로 승화하였으니 신라의 고운 최치운을 필두로 조선시대의 김종직, 김일손, 정여창, 남명, 서산대사등이 지리산을 둘러보고 그 느낀바를 작품으로 승화시켰다고 합니다.

 비록 비때문에 캠프파이어까지는 못하였지만, 지리산에 취해, 음주가무에 취해 밤이 깊어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