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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상왕 장보고 유적지 (중국여정 1일째)

천년을 거슬러 역사의 숨결을 느껴지는 장보고의 유적지속에 적산법화원지와 철차산!

 

2005년 2월18일 일행 19명은 인천 연안부두 국제터미날 수속을 마치고 승선한다. 중국 산동성에 자리한 천하 제일명산 태산준령을 답사하기 위해 긴 여정 6박7일 일정을 화동페리호에 몸을 싣는다.


 
19일 05시 공해상에 접어들었는지 배 간판을 후려쳐 갈가리 부서져 내리는  파도소리와 잠못 이룬 방황자만이 정적을 깨우고 있다. 선실을 나가 1.2.3층을 돌아보니 많은 상인들이 천태만상으로 잠을 자는가 하면 마작을 즐기는 자, 늦도록 주(酒)를 사랑하는 사람, 까만 창가를 응시하는 사람, 무얼 생각하고 있을까?........


포효하는 파도의 거친 숨결에서도 항해는 계속되고 어김없이 여명이 밝아온다. 선상 조식을 마치고 나니 육지가 시야에 들어오고 간간히 대형선박들이 우리를 환영한다. 거친 파도도 수그러들어 평온의 입국절차를 마치고 11시간 바다 길을 마감하며 중국대륙 산동성 석도항에 내려선다.


 
40분 이동하니 적산법화원지 사찰과 도교성지 사원들이 자리하고 있다. 사찰 뒷편으로 암갈색 암봉 적산주봉이 자리하고 주봉 10시 방향으로 대형 적산팔층탑정이 능선위에 우람하게 보인다. 뒤돌아 주봉 6시 방향에 와불봉이다. 마치 거대 거인이 뉘어있는 모습을 연상케 하고 그 옆에 이곳 석도시를 지킨다는 거대 좌상이 산9부 능선에 해안을 바라보고 있다. 인민폐 3.000만원을 들여 건립하였다 한다.


 
도보로 10분이동하니 해상왕 장보고의 유적지 작은 산정에 해상왕 장보고의 탑신이 건립되어 있다. 그 아래 장보고의 사원 박물관이 미개 봉된 상태이며 우리는 이곳 책임자의 선처로 위대한 선조의 초상 및 동상을 관람할 수 있었다. 이곳을 지배하고 호령하던 궁복이의 찬란한 위상을 느끼며 반도 민의 기상과 한민족의 존엄함으로 뿌듯한 마음을 어찌하랴!


 

장보고 [張保皐, ?~846] 전남 완도 장좌리 출생(추측)

일명 궁복(弓福)·궁파(弓巴). 일찍이 당나라 서주(徐州)에 건너가 무령군 소장(武寧君小將)이 되었으나 신라에서 잡혀간 노비(奴婢)의 비참한 처우에 분개하여 사직하고 귀국했다. 해적들의 인신매매를 근절시키기 위해 왕의 허락을 얻어 1만의 군사로 해로의 요충지 청해(淸海:莞島)에 진을 설치하고 가리포(加利浦)에 성책을 쌓아 항만시설을 보수, 전략적 거점을 마련했다. 그리고 청해진 대사(淸海鎭大使)가 되자 휘하 수병을 훈련시켜 해적을 완전 소탕했다.


 
837년(희강왕 3) 왕위계승 다툼에서 밀려난 우징(祐徵:神武王)이 청해진에 오자 이듬해 우징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839년 민애왕(閔哀王)을 죽이고 우징을 왕위에 오르게 하여 감의군사(感義軍使)가 되었다. 신무왕이 죽고 문성왕(文聖王)이 즉위하자 진해장군(鎭海將軍)이 되었다. 840년(문성왕 2) 일본에 무역사절을, 당나라에 견당매물사(遣唐賣物使)를 보내어 삼각무역을 했다. 845년(문성왕 7) 딸을 왕의 차비(次妃)로 보내려 했으나 군신들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846년(문성왕 8) 그의 세력에 불안을 느낀 조정에서 보낸 자객 염장(閻長)에게

살해되었다.


 
산동성 영성시 남부해안에 자리한 구정철차산 검푸른 빛을 띤 9개의 봉우리가 해상 안개속에 떠있는 모습이며 또는 9개의 뗏목이 망망대해를 표류하는 모습이라 하여 명명된 구정철차산! 전용버스가 멈추고 흰 눈 덮인 미끄러운 도로를 따라 철차산 입구에서 기념사진을 남기고 등로를 따른다. 20여분 후 커다란 건물이 자리한 관리소에 도착하니 중국의 민속악기를 두들기며 우리를 환영한다. 책임자가 나와 반갑게 맞이하고 나더러 북채를 주며 같이서 화음을 맞추며 신명나는 음율을 산정 곳곳에 흐르게 한다.


 
관리사장의 철차산에 대한 브리핑을 마치고 기념사진을 남긴다. 뒤돌아보니 빼족빼족한 만물상이 너울너울 춤 사래하는 흰 눈 속에 숨었다 지기를 반복하고 안내인의 보폭에 맞추어 그룹을 형성하여  등로를 따라 아기자기한 산허리를 휘감으며 설빙된 바위군상이 자리한 정상부에 올라선다. 사방으로 쪽빛 찬란한 바다의 풍광이요 천불상을 방불케 하는 건너편 봉우리와 봉우리가 활짝 웃고 있으며 철차산 아래 빙 둘러 해안도시가 형성되어 있다.


 
빙판인 정상부의 위험을 피해 전망 좋은 곳에서 가지고 온 주과를 진설하여 산신께 올리고

잘 다듬어진 등로로 하산을 한다. 도교사원 삼청궁 도인이 영접한다. 우리는 대한민국에서 왔으며 산신께 참배를 드리겠다. 하니 손수 징을 들고 일배 할 때마다 소리를 낸다. 9배를 마치니 도인께서 도교의 진리는 동아시아 어디인들 같음이며 국가에 따라 조금은 다르나 진리를 추구함은 영원함이랴 라고 전언해 주신다.


 
등정의 행복 접견하는 소박한 미소 품을 듯 가시거리의 망망대해 기암은 요동치듯 사라졌다 다시금 윤회한다. 적갈색을 품은 적산처럼 이곳 철차산 역시 검붉은 적갈색의 푸름이다. 흙냄새를 맡기란 후미진 별자리만큼이나 어렵고 온통 거대 암봉과 오밀한 바위군 이다. 우리는 한 덩어리가 되어 하산한다. 내일을 생각하며 일사불란한 일정을 소화하며 첫날 맞이하는 중국의 거대한 숨결을 작은 몸으로 방위태세를 취해 보리라!


[참고 문헌 퍼옴]

1) 해상왕 장보고의 생애

장보고는 우리나라 역사상 특기할만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전 생애에 관한 기록은 희소하고 그것도 분명치가 않다. 우선, 장보고를 부르는 이름은 우리측 기록에는 궁복(弓福), 궁파(弓巴), 장보고(張保皐)로 되어 있고, 중국측 기록은 모두 장보고(張保皐), 일본에서는 장보고(張寶高)로 기록되어 있다. 당시 신라 관습상 평민은 성(姓)을 갖지 못하였기 때문에 장보고가 중국에 있을 때 궁복의 '궁'자와 비슷한 장씨라는 성(姓)을 갖게 된 것이고, '보고'라는 이름은 '복(福)'의 음을 그대로 따라 지은 것으로 추측된다.


장보고의 출신지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문성왕(文聖王 839~856)의 차비로 장보고의 딸을 맞이하려 할 때 조정의 신하들이 그가 해도인(海島人)이라는 점을 들어 반대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섬사람임을 확인시켜 주고 있으며, 그의 고향은 청해진이 설치되었던 오늘날의 완도라고 보여진다. 왜냐하면 첫째로 그가 해상왕국의 근거지를 하필이면 청해진에 설치하였던가 하는 점이며, 둘째로 자기보다 10세 가량 어린 동향(同鄕) 후배 정년(鄭年)이 뒷날 당나라에서 실직하여 사주(泗州)에서 굶주림과 추위에 허덕이고 있다가 고향에 돌아갈 결심을 하면서 청해진으로 돌아오고 있는 점을 들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청년으로 성장한 장보고는, 정년과 함께, 풍운의 꿈을 안고 당으로 건너가서 30세 쯤에 서주(徐州) 무령군 소장(武寧軍 小將)이라는 군직(軍職)에 올랐다고 한다. 그런데 무령군이라는 군단명이 805년에 처음 생겼다고 하니, 장보고가 무령군 소장직에 오른 시기는 아무리 빨라도 805년 이전으로 올라갈 수는 없겠고, 그가 당에 건너간 시기는 일단 805년 전후였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런데 그가 신라에 귀국한 시점이 828년이었으므로, 그의 재당(在唐) 기간은 9세기초 20여년간으로 압축될 수 있을 것이다.


 ▶저희 한국등산중앙연합회가 최초로 북태산-남태산 코스 루트답사를 현지팀과 함께 개발하였습니다.

▶다음 중국명산 태산 답사기가 이어집니다. 네티즌들의 참여를 기원하며 한국등산중앙연합회를 지켜보아 주시고 지속적인 사랑을 부탁합니다.

▶탑사에 참여해주신 양평산악연맹팀과 본연합회 단체장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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