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 안나푸르나 BC,푼힐,룸비니 트레킹 11일 [포카라 사랑코트전망대-룸비니].

 

 


포카라 사랑코트에서 본 다울라기리,안나푸르나 산군과,마차푸차레,람중히말모습. 
 

 

 

◈ 트레킹코스.

나야폴(1070m)-비레탄티(1025m.입산신고)-수다메(1340m)-힐레(1475m)-틸게퉁가(1540m.1박)-울레리(1960m.)-반단티(2300m.점심)-
나야탄티(2460m)-고라파니(2750m.2박)-푼힐전망대일출(3200m)-고라파니-데우랄리(2999m)-반단티(2520m.점심)-타다파니(2590m)-
출레(2245m 3박)-구르중(2050m .학교있음 )-촘롱(2170m.점심)-시누와(2340m.4박)-밤부(2335m)-도반(2540m 점심)-히말라야호텔(2840m.)-
힌쿠동굴(3100m)-데우랄리(3230m.5박)-MBC(마챠푸차레 베이스캠프.3700m.점심)-ABC(안나푸르나 베이스켐프.4130m)-MBC(6박)-
ABC-MBC-히말라야호텔(2840m.점심)-도반(2540m)-
밤브(2335m.7박)-시누와(2340m)-촘롱(2170m.점심)-지누단다(1750m.온천.8박)-
뉴브리지(1590m)-SIWAI-샤울리바자르(1170m.점심)-비레탄디(1025m)-나야폴(1070m)-포카라(820m.9박)-사랑코트일출-카트만두-룸비니-카트만두(11박).
 

 

◈ 일시 : 2010. 10. 21(목).11일째.

  

◈ 날씨 : 한여름 날씨같이 덥다.

 

◈ 대원 : 7명(오세춘님.최평칠님.김형식님.정영옥님.이선우님과 우리부부). 
              

◈ 일정정리.

 

11일 2010.10.21(목).11일째.


05 : 00. 랜드마크호텔을 출발하여 8km떨어진 사랑코트 전망대로 감.
05 : 50~06 :30. 사랑코트(Sarangkot)전망대에서 일출조망.
07 ; 00~08 : 00. 포카라 숙소로 돌아와서 아침식사.
08 :00 ~10 : 00. 포카라에서 경비행기로 30분걸려 카드만두로 돌아옴.
10 : 00~14 : 50. 점심먹고 바이라와 붓다공항으로 감(1시간10분 딜레이). 경비행기로 40분쯤 걸림.
15 : 30~17 : 30. 공항에서 18km떨어진 부처님탄생지인 룸비니관광.
18 : 00~ 19 : 05. 룸비니에서 카트만두로 돌아옴.
20 : 50~21 : 20. 경복궁식당에서 저녁먹고 네팔자이언트숙소에서 네팔에서의 마지막밤을 보냄.

 

<운행개요>.

 

새벽 5시에 호텔을 출발하여 8km떨어진 사랑코트 (Sarangkot)전망대로 가서 일출을 봤다.
푼힐에서 보는 일출같은 생동감은 없으나 히말라야군을 이렇게 발품안팔고 도시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는게 매력이다.

숙소로 돌아와서 아침을 먹고 30여분 걸리는 30인승 경비행기로 카트만두로 돌아왔다.
갈때는 20인승이라 기어들어가고 기어 나왔는데 30인승은 허리를 펴고 들어갈수 있다.

 

카트만두로 돌아와서 네팔 자이언트 사무실 겸 숙소로 가서 짐을 풀고
바이라와 붓다공항으로가는 비행기가 1시인데 국내선 공항이 워낙 붐벼 일찍 점심을먹고 공항으로 나갔으나 1시간 10분이나 딜레이되어
결국 2시가 넘어서야 룸비니로 떠났다.돌아오는비행기가 6시라 더 지연되면 낭패라 걱정했는데 그정도로 딜레이 된것이 다행이다.

 

룸비니는  바이라와붓다공항에서 18km떨어져 있는데 대중교통이 드물어 택시를 타야 한단다.
두시간정도 부처님 탄생지인 룸비니의 마야데비사원과 아쇼카석주,마야데비 연못,고대사찰유적지,한국사찰인 대성사를 둘러보고
6시 경비행편으로 카드만두로 돌아와서 경복궁식당에서 저녁먹고 네팔자이언트숙소에서 네팔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사진으로 보는 운행일지>.

 

<사랑코트(Sarangkot)>의 일출.

 

 

사랑코트(Sarangkot)전망대.
포카라시내에서 멀지 않은곳에 있는 전망대로 안나푸르나산군과 마차푸차례를 조망하기좋은 전망대다.

 

 

 

안나푸르나 사우스(7219m.좌),히운출리(6441m), 안나푸르나 1봉(8091m.중뒤),마차푸차례(6993n.우측 뾰족봉),안나3봉(7555m.맨우측뒤).

 

 


 

 

06 : 17. 다울라기리(8167m.좌측뒷쪽) 안나푸르나 사우스(7219m.가운데),히운출리(6441m).안나주봉(8091m.우측 꺼진곳뒤).


 

 

히운출리(6441m.좌),마차푸차례(6993n.중 뾰족봉),안나3봉(7555m.가운데뒤).안나4봉(7524m.우측 낮은봉),안나2봉(7937m.우측 높은봉).

 

 

 

06 : 18. 안나4봉(7524m.좌측 낮은봉),안나2봉(7937m.좌측 높은봉),람중히말(6983m.가운데 둥근봉).

 

 

 

히운출리(6441m.좌), 마차푸차례(6993n.중 뾰족봉),안나3봉(7555m.가운데뒤).안나4봉(7524m.우측 낮은봉,안나2봉(7937m.맨우측)

 

 

 


 

 

06 : 19. 안나4봉(7524m.좌측 낮은봉),안나2봉(7937m.좌측 높은봉),람중히말(6983m.가운데 둥근봉).

 


 

 

06 : 23.  안나푸르나 사우스(7219m.좌)와 히운출리(6441m),마차푸차례(6993n.우).

 

 


 

 

06 : 23. 마차푸차례(6993n.좌 뾰족봉),안나3봉(7555m.가운데뒤).안나4봉(7524m.우측 낮은봉,안나2봉(7937m.맨우측 높은봉)

 


 

 

 

06 : 26. 땡겨본 다울라기리(8167m.좌측뒷쪽) 안나푸르나 사우스(7219m.가운데),히운출리(6441m.우).안나주봉(8091m.우 뒤)
우측 히운출리뒤로 안나푸르나 1봉(8091m)이 겹쳐 보인다.

 


 

 

 

06 : 26. 땡겨본 안나푸르나 1봉(8091m.좌뒤),마차푸차례(6993n.중 뾰족봉),안나3봉(7555m.우)

 

 

 

06 : 26. 땡겨본 안나3봉(7555m.좌),안나4봉(7524m.중),안나2봉(7937m.중 높은봉),람중히말(6983m.우 둥근봉).


 

 

 

06 : 26. 땡겨본 람중히말(6983m)과 그 우측모습.


 

 

 

06 : 26. 땡겨본 람중히말(6983m) 우측모습.


 

 

 

08 : 16.깨끗하고 조용한 포카라공항.


 

 

 

08 : 17.포카라공항에서 본 마차푸차례와(좌) 안나4,2봉과 람중히말라야(우).


 

 

09 : 22. 카트만두행 경비행기에서 본 포카라시내와 마차푸차레(우)


 

 

 

09 : 25.카트만두행 경비행기에서 본 히말라야 설산.


 

 

 

카트만두의 네팔 GIANT 베에스캠프.
여기도 우리와같은 풍습인지 나뭇가지를 꼽아 금줄을 쳤다.


 

 

10 : 40.카트만두의 네팔 GIANT 베에스캠프.
이구 대장이 우리와 같이 들어가서 우리가 ABC를 다녀오는동안 집정리를하고 우리가 첫 손님으로 하루 묵었다.


 

 

 

11 ; 40. 국내선 공항이 붐벼서 1시 비행기이지만 좀 일찍  점심을 먹고 공항으로 나갔다.


 

 

 

점심 후식(?)인 해바라기씨.


 

 

14 : 56.바이라와( Bhairahwa)붓다공항.
1시 비행기가 1시간 10분 딜레이되어 2시 10분에 떠서 40분정도걸렸다.
포카행과 같은 20인승이다.


 

붓다공항에서 룸비니 가는길은 ABC쪽에서보던 풍경과는 전혀다른 너른 곡창지대로 여기서나는 쌀로 식량을 자급자족 한단다.
네팔에서 인도로가는 길목이라 그런지 인도나 베트남,캄보디아와 풍경이 비슷하다.

 


 

15 : 33.룸비니동산에 도착했다.
공항에서 룸비니까지는 18km로 대중교통이 없어 택시를 탈려면 요금이 꽤 나오겠다.

 룸비니는 불교 4대 성지중의 하나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는데
 부처님이 탄생지인 름비니만 네팔에 있고 나머지 3곳인  깨달음을 얻은 보드가야(현재 인도 비하르),
최초로 설법을 전파한 사르나트(현재 인도 바라나시 북부), 열반에 든 쿠시나가르(현재 인도 고락푸르 인근)는 북인도에 있다.

 


 

입구풍경.

 


 

 

입구에서 유적지까지는 걸어가면 10여분정도 걸려 대부분 자전거 인력거인 락샤를 타고간다.

 


 

 

15 : 47.중간에 있는 갈림길이다.
우측은 한국사찰인 대성 석가사를 비롯한 각국 사찰들이 있고 좌측으로 가면 부처님 탄생지다.


 

 

 

15 : 56.부처님 탄생지 마야 데비사원.

 

2천 5백년 전 히말라야의 발치에 있던 많은 지역이 해체되어 갠지스강 강 평원에 기반을 둔 거대한 제국의 작은 공국으로 흡수되었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카필라바스투(Kapilavastu) 왕국을 통치하던 숫도다나(샤카족)와 이웃 나라인 데와다하(Dewadaha)의 공주인
마야 데비(콜리야족)의 아들이었다. 마야 데비가 그녀의 친정인 데와다와를 방문할 때는 만삭의 몸이었다.

 

카필라바스투를 떠나 그녀 일행은 사라수 나무로 둘러싸인 연못이 있는 아름답기로 유명한 룸비니를 지나가기로 했다.
그날 마야 데비가 룸비니에 도착한 기원전 563년 오월, 사라수 나무는 활짝 피어 있었다.
그래서 마야 데비는 경치를 감상하고 목욕도 하기 위해 길을 멈추었다.

 

목욕을 마치고 물에서 나올 때 그녀는 갑자기 산기를 느꼈다. 그녀는 팔을 뻗어 길 게 늘어져 있는 보리수 나무를 잡았다. 그리고 아기가 태어 났다.

 

마야 데비는 카필라바스투로 되돌아 갔다. 싯다르타는 보호받으며 특권을 누리며 자랐다.
29세 때 궁궐 밖을 돌아다닐 때 그는 늙은 사람, 아픈 사람, 시체, 그리고 은자를 만났다.
고통과 죽음을 목격한 싯다르타는 화려한 삶을 포기하고 카필라바스투를 떠나기로 마음 먹었다.

 

처음 5년 동안 싯다르타는 존재의 본성을 이해하기 위한 행각에 나섰다. 대부분의 여정은 금욕의 고행자로서 였으며
그 모습은 오늘날 힌두 사두들과 다름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극단적인 자기부정으로는 결코 아무런 해답을 얻을 수 없음을 발견했다.

 

마침내 보드가야 보리수 아래에서 49일 간의 명상 끝에 그는 깨달음을 얻어 붓다가 되었다.
보드가야에서 바라나시 근처의 사르나트(녹야원)까지 여행한 끝에 붓다는 다섯 제자들에게 첫 설법을 배풀었다.

 

붓다는 46년 간 중도(middle way)를 가르쳤다. 그는 고통이란 존재의 본래적 속성이며 그 원인은 집착과 욕망과 미혹 때문인데
만일 이런 부정적인 힘이 고귀한 8가지 길(팔정도)에 의해 제어되면 열반(깨달음)에 이르는 것이 가능하다고 가르쳤다.

 

붓다의 카트만두 밸리 방문을 믿고 있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것에 대한 확실한 증거는 없다.
붓다의 설법 대부분은 북인도와 갠지스 평원에 걸쳐 이루어졌다. 붓다는 80세에 고락뿌르 근처,
룸비니 남동쪽 100km 지점에 있는 쿠시나가르에서 열반했다.

 

전 인도 대륙의 통일이라는 위업을 달성한 마우리아 왕조의 세 번째 왕인 아쇼카 왕(b.c 273~236)은 기원전 245년
부처님 탄생지 룸비니를 참배하고 훗날 아쇼카 석주로 유명한 돌기둥을 룸비니에도 하나 세웠다.
중국의 구법승 법현스님은 403년 황폐해진 카필라바스투(석가족의 왕국)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 후 636년 룸비니에 온 당나라 현장스님은 1000 여개의 사원터와 번개에 맞아 파손된 석주에 대한 이야기를 썼다.
15세기 말 무갈제국의 침입으로 이 지역은 완전히 황폐해지고 말았다. 전 지역은 버려져 야생의 정글이 되어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져 갔다.

 

룸비니가 다시 살아난 것은 고고학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통치자 랄파 라나(Ralpa Khadga Shumsher Rana)에 의해서였다.
그의 후원으로 독일의 고고학자 휘러(Fuhrer)는 1896년 석주를 발굴했고
그것은 나중에 아쇼카 왕이 룸비니를 참배한 기념으로 세운 것으로 판명되었다.

비옥하고 온화한 평야지대에 있는 룸비니는 현재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주변에 16개 나라의 사찰과 10여개의 세계 각국의 민간 불교단체가 들어서 있는 불교 최대의 성지이다.  


 

 

마야 데비사찰과 푸스카르니(Puskarni)라고도 불리는 싯다르타 연못.
앞에 하얀건물이 부처님이 탄생한곳에 세원 마야데비사원인데 원래것은 1993년 발굴당시에 허물고 새로지은 건물이다.
앞에 연못이 마야데비 왕비가 출산 후 목욕을 했던 장소라 믿어지는 싯다르타 연못, 혹은 푸스카르니(Puskarni)라 불리워지는 연못이다.

 

 

 

 

연못가의 보리수나무.
마야부인이 연못가에 있는 보리수 나무를 잡고 싯다르타를 낳았다는데 그 보리수나무인지는 모르겠다.


 

 

 

보리수나무.

 

 

 

아쇼카 석주.

 

마우리아 왕조의 아쇼카 대왕에 의해 세워짐.이 석주는 현재 싯다르타 연못 북쪽에 위치하며
약 7.2m의 높이로서 지면으로부터 약 3.3M 지점에 아쇼카 왕의 비문이 새겨져 있다.

 

석주에 새겨진 명문에는  "많은 신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피야댜시(아쇼카 왕의 다른 이름)왕은 즉위한지 20년이 지나 친히 이곳을 찾아 참배했다.
여기에서 붓다 샤카무니께서 탄생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돌로 말의 형상을 만들고 석주를 세우도록 하였다.
이곳에서 위대한 분이 탄생했음을 경배하기 위함이다. 룸비니 마을은 조세를 감면하여 생산물의 1/8만 징수케 한다."라고 새겨져 있다.
(다른 지역은 생산물의 1/6을 징수함.).

 

현장의 大唐西域記(대당서역기)에 의하면 "사천왕이 태자를 안았던 스투파쪽에서 멀지않은 곳에 큰 돌기둥이 있다.
위에는 馬(마상)이 만들어져 있는데. 아쇼카 왕이 세운 것이다.나중에 악룡의 벼락 같은 큰 소리에 그 기둥은 가운데쯤에서 부러져 땅으로 넘어졌다." 고 기록하고 있다.현재 말의 형상을 한 머리부분은 유실되고 벼락으로 인해 그 자체에도 조금은 손상된 흔적이 남아 있다.


 

 

 

아쇼카 석주에 새겨진글씨.

 

석주에 새겨진 명문에는  "많은 신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피야댜시(아쇼카 왕의 다른 이름)왕은 즉위한지 20년이 지나 친히 이곳을 찾아 참배했다.
여기에서 붓다 샤카무니께서 탄생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돌로 말의 형상을 만들고 석주를 세우도록 하였다.
이곳에서 위대한 분이 탄생했음을 경배하기 위함이다. 룸비니 마을은 조세를 감면하여 생산물의 1/8만 징수케 한다."라고 새겨져 있다.

 

 


 

 

아쇼카 석주.
떨어진머리부분.


 

 

 

아쇼카 석주.
BC 245년에 아쇼카왕이 부처님 탄생지를 참배하고 세운 세운 석주인데 그는 이런 석주를 여러곳에 세웠다.

 

아쇼카(Ashoka.?~BC 238(?) 인도)는 누구인가?.

 

인도 마가다 국의 제3왕조인 마우리아 왕조의 제3대 왕으로 인도사상 최초의 통일국가를 이룬왕(BC 265경~238 재위, BC 273경~232 재위설도 있음)이다.

 

한자 문화권에서는 아육왕(阿育王)으로 표기한다. 치세 동안 불교 장려책을 강력하게 추진하여 인도 전역에 불교가 전파되도록 했다.
동부 해안의 칼링가국에 대한 피비린내 나는 정복전에서 승리한 이후 무력 정복을 포기하고
그 대신 비폭력과 사회 윤리에 기초를 둔 '다르마(dharma:올바른 삶의 원리)에 의한 정복'이란 정책을 폈다(→ 마우리아 제국).
자신의 가르침과 사업을 널리 알리기 위해 아소카는 구두 포고뿐만 아니라 마애(磨崖)와 석주(石柱)에 그것을 새겨 적절한 장소에 세워두는 방법을 썼다.
사르나트에서 발굴된 석주 주두(柱頭)의 사자상은 현재 인도의 국장(國章)이 되었으며,
바위 조칙(詔勅), 석주 조칙이라고 불리는 이들 명문(銘文)은 대부분 아소카 치세 동안 일어난 여러 사건이 기록되어 있고
그의 사상과 활동이 서술되어 있기 때문에 이를 통해 아소카의 생애와 업적을 알 수 있다.

 

 

아소카 자신의 설명에 따르자면 그는 즉위한 지 8년째 되던 해에 칼링가국(지금의 오리사 주)을 정복했다.
전쟁으로 패전국의 백성이 겪는 고통을 본 그는 양심의 가책을 느껴 무력 정복을 포기했다.
그가 불교를 접하고 믿게 된 것은 바로 이때였다. 불교의 영향과 그 자신의 추진력있는 성격에 의해 아소카는 다르마에 따라 살며
자기 백성과 모든 인류에게 봉사하기로 결심했다. 아소카가 반복해서 밝힌 것처럼 그는 다르마를 통해서 정직, 진실성, 동정심, 자비, 자선, 비폭력,
모든 사람에 대한 인정있는 행동, '죄 짓지 않고 선행을 쌓는 일', 검약, 무탐욕, 불살생 등과 같은 사회적·도덕적 덕목들의 철저한 실천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는 특정 종교 교리나 숭배 양식, 그리고 어떠한 주장도 말하지 않았다. 또한 같은 신도끼리만 불교에 대해 말했을 뿐 다른 사람에게는 하지 않았다.
모든 종파에 대해 각기의 교리에 따라 살 수 있도록 완전한 자유를 보장하고 존중해주었다.
그러나 이와 아울러 그들에게 '내면의 가치를 함양하는 데' 스스로 노력할 것을 요구했다.
나아가 다른 종파의 신조를 존경하고 그들의 좋은 점을 칭찬하도록 권고했으며, 다른 이들의 관점에 대해 적의를 품은 비판을 하지 못하도록 했다.

 

 

다르마를 적극적으로 실천하기 위해 아소카는 농촌의 백성들을 주기적으로 찾아가서 다르마를 설파하고 그들의 고통을 구제하려고 했다.
고관들에게도 그들의 직책상 업무 외에 이와 같은 일들을 하도록 명령했다. 아소카는 관리들에게 끊임없이 일반 백성들의 좋은 일과 나쁜 일을 살펴보고
신속하고 공정하게 정의를 행하라고 권고했다. '다르마의 사절(使節)'이라는 고위 관리들을 특별히 임명하여 백성들에게 다르마 사업을 장려하고
어디서나 눈에 보이는 백성들의 모든 고통을 구제해주며 여자, 변경지역의 주민, 인접한 민족들, 그리고 다양한 종교 공동체의 고유한 요구들을 보살피도록 했다.
공공복지에 관한 문제들은 언제든지 그에게 보고하도록 명령했다. 그는 말하기를 자신이 추구하는 유일한 영광은 다르마의 길에 따라
자기 백성을 인도하는 것뿐이라고 했다. 그의 비문을 읽은 사람들은 백성을 위하려는 그의 진지한 열정에 대해 어떠한 의심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 하는 일에서는 명령보다는 백성들을 설득함으로써 더욱 큰 성공을 거둘 수 있다고 아소카는 말했다.

 

 

공공사업도 많이 벌여 병원과 가축병원을 세우고, 의약품을 공급했으며, 가로수와 과수를 심고 우물을 파고 분수와 휴게소를 세웠다.
백성이 해이해지는 것과 동물학대를 막기 위해 법령을 만들었다. 아소카의 죽음과 함께 마우리아 제국은 분열되고 그의 사업은 중단되었다.
그가 성취하려던 목표와 그가 품었던 높은 이상에 의해 아소카는 지금까지도 기억되고 있다.

 

 

불교에 대한 아소카의 공헌은 더욱 영속적이었다. 수많은 탑과 사원, 그리고 종교적 교리에 대한 단상들을 새겨놓은 많은 석주들을 세웠다.
전설에 따르면 그가 세운 불탑은 8만 4,000기이다. 그는 교단(불교의 종교 공동체)의 분열을 억제하는 강력한 정책을 썼고 신도들의 경전 학습과정을 정했다.
실론의 연대기인 〈마하방사 Mahāvaṃsa〉에 기록된 전승에 따르면 교단에서 해외로 포교단을 파견하기로 결정하자 아소카는 이를 열렬히 원조했고
자신의 아들과 딸을 실론의 포교사로 보냈다. 당시까지만 해도 특정 지역에 한정된 소규모 종파에 불과했던 불교가 인도 전역에 퍼지고
곧 국경을 넘어 다른 나라에까지 전파된 것은 바로 아소카의 후원 때문이었다. 아소카를 이끌었던 정신을 잘 보여준 예문을 하나 들어본다.
"모든 사람들은 나의 자식들이다. 내가 내 아이들에게 이 세상과 저 세상의 모든 행복과 건강을 가져다주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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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야 데비사원내부.

 

 

 

마야 데비사원내부에 있는 붓다의 탄생장면을 묘사한 부조(浮彫).


1992년 실시된 발굴 작업을 통해 기원전 3세기 아쇼카 왕이 남긴 기록과 일치하는  붓다가 탄생한 곳임을 입증하는 부조란다.

 

오른쪽에는 마야데비가 그의 오른손으로 사라수 나무를 잡고 아이를 낳는 모습과.
그 아래 중간쯤에는 새로 태어난 아기가 光背(광배)를 드리운 채 연꽃대 위에 서 있는 모습이,
그리고 왼쪽에는 창조신 브라흐마가 태어난 아이를 받혀드는 모습이
그리고 나머지 두 天女(천녀)는 마야데비를 시중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한편 윗부분에는 하늘의 천신들이 아이를 씻는 물과 연꽃을 뿌리고 있는 장면이 새겨져 있는데,
아마 그것은 하늘의 구름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이 새로운 탄생불의 부조는 약 11세기에서 15세개까지 네팔의 카르날리(karnali)지방에서 융성했던 나가(Naga)왕조의
한 통치자 말라(Malla)왕에 의해 조성되었다고 한다.1976년~1978년까지의 발굴 당시 이 사찰 밑에서는
마우리야 왕조대의 것으로 보이는 황금제 사리용기 뚜껑과 탄화된 유골의 조각이 발굴되기도 하였다.

 


 

 

마야 데비사원내부에 있는 마야 부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발자국.


 

 

 

룸비니 유적지.
BC 2세기에서 AD4세기 사이에 건설된 사원들의 기단이 많이 있고
이런초기 투쿠파들이 많이 있다.

 


 

 

나온면서 뒤 돌아 본 룸비니 유적지.

 

 


 

대성석가사가는길.<나올때 찍은 사진이다>.
두명씩 타니 자갈길을 밟는패달이 힘겨워 보이지만 요금은 여기 택시비 수준이다.

 


 

 

대성 석가사앞에 있는 중국사찰.
중국절이 오히려 더 한국절 같아 보인다.


 

 

 

대성 석가사(大聖釋迦寺).


 

 

대성 석가사 알림판.


예약하시면 1인 1일 600루피(10000원) 예약 없이 오면 250루피.
1,2층 100루피.3층 500루피.도미노토리 250루피.식사는무료.
아침6시~6시30분.점심 11 :30~12시 저녁 6시~6시30분.

정문에서 대성사 락샤 100루피.
정문에서 카트만두버스시간표.아침 7시30분 600루피(에어 마이크로버스)
정문에서 카트만두버스시간표.아침 7시.저녁 5시  430루피.

자전거 1일대여 50루피.
 


 

 

대성 석가사(大聖釋迦寺)대웅전.


 

 

  

대성 석가사(大聖釋迦寺).


 

 

 

대성 석가사(大聖釋迦寺).대웅전.

 


 

  

대성 석가사(大聖釋迦寺)에서 나오면서 우측으로 본 룸비니 유적지.

 


 

 

바이라와( Bhairahwa)붓다공항에서 카트만두행 경비행기.
네팔의 국내선은 대부분 이런 20~30인승 경비행기다.
양쪽으로 한줄씩 앉고 조종석이 앞에 보이며 여 승무은 귀마개용 솜과 사탕을주고
이륙하면 과자와 음료수를 준다.

 

 

국내선 경 비행기 요금은 편도로 카트만두 에서  포카라 $92, 루크라 $114, 버이라와(룸비니) $108    포카라 - 좀솜 $80
( 네팔사람 항공료는 훨씬 저렴하여 포카라 $45, 루크라 $47, 버이라와(룸비니) $58, 좀솜 $27 입니다.2010.8.기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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