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운남성을 돌아보고

권용옥

  아카시아 향이 서서히 시들어 가는 그 어느 날부터 컴퓨터 앞에 앉아 해외여행에 대한 검색을 자주한다. 준비된 예산과 일정에 맞고 추억으로 남을 수 있는 여행지를 찾기 위하여 열심히 마우스로 검색을 해 보지만 마땅한 여행지를 찾을 수가 없다.

  이번 여행은 산을 좋아하는 우리 가족이 황산을 목적지로 여행을 준비했지만 황산은 계단으로 된 오르막이 너무 많고 상해, 소주, 항주 등의 연계 관광이 중복이 되기 때문에 또 다른 목적지를 찾기 위하여 오늘도 컴퓨터 앞에 앉을 수밖에 없다. 인터넷에 접속하여 우리나라 유명한 관광회사 홈페이지도 방문하고 중국을 다녀온 여행기도 열심히 살펴보다가 내 마음에 드는 여행지가 나타났다.

  설레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중국 서쪽에 있는 세계 자연문화유산에 등록된 구체구의 멋진 사진과 여행기 등을 가슴조리며 살피다가 나는 이곳이 우리 가족 여행지로 최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야! 찾았다, 찾았어”

  소리를 치니 집사람이 깜짝 놀라 내 곁으로 온다. 눈이 휘둥그레진 집사람이

“무엇을 찾았다고 소리치고 손뼉치고 법석이에요”

  하고 말한다.

  벅차고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면서 구체구에 대한 여행 가이드가 시작된다. 내 설명이 끝나자 집사람도 우리 가족이 함께 여행하는 곳으로는 손색이 없다고 나를 칭찬을 해 준다.

  목적지를 정해 놓고 우리 가족의 여행 일정과 예산, 주변의 연계 관광지를 찾아보고 하나투어와 모두투어에 전화를 하여 상담도 해 보았다. 모든 조건들이 완벽하지는 못하지만 80%이상은 합치되어 구체구로 결정을 하였다.

  며칠의 날짜가 손쉽게도 지나간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구체구 가까운 곳에서 강진이 일어나 수만 명이 죽고 건물이 어마어마하게 부서져 엉망이 된 TV화면이 자주 방영되더니 우리의 목적지 구체구는 여행 금지구역으로 지정되고 말았다.

  잔뜩 부풀어 있던 마음을 진정시키고 또 다른 목적지를 찾아본다. 일본, 동남아 등의 유명한 관광지도 찾아보고 중국의 여러 관광지를 검색하다가 우리 가족의 여행 목적지를 중국의 서남부에 있는 운남성 일원으로 결정하였다.

  운남성은 지정학적 위치로는 아열대기후인데 해발이 평균 1500m되는 고원지대라 피서지로도 알맞고 곤명, 석림, 구황동굴, 대리, 여강 등에 산재되어 있는 자연환경과 문화의 다양성을 체험할 수 있어 최종 목적지로 결정하고 5월 9일에 가족 모임을 가졌다. 여행지와 일정들을 하나하나 소개하고 설명을 하여 우리 가족의 우레 같은 박수로 가족 동의를 얻었다. 두 번째 해외 가족 여행이라 그런지 들뜬 마음이 아니고 차분한 마음들이지만 내심으로는 기대가 되는 표정들이다.

  이제 가족 모임에서 동의도 얻었고 여행사와 상담하여 여행을 추진하면 된다. 실질적인 가족여행이 시작 된 것이다. 국내 유명한 여행사와 익산에 있는 여행사에 문의도 하고 정보도 얻고 우리 가족을 편하고 즐겁게 여행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여행사를 찾다가 넷째 처형의 추천으로 새만금 관광 여행사로 결정하고 계획에 의해 하나하나 추진하였다.

  5월 27일 저녁에 신동의 한 호프집에서 새만금 관광 여행사의 김사장과 처음 대면을 하였다. 첫 인상이 성실하고 직업의식이 투철한 사람처럼 보여 호감이 간다.  우리 가족 여행의 목적지와 일정 등을 설명해주고 운남성 일원에 대하여 자세한 설명을 들었다. 이번 관광의 주 목적지인 곤명, 석림, 구황동굴, 대리, 여강 지역에 있는 관광 지역에 대하여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 다시 만나기로 하고 계약금 일부를 전달했다.

  계절은 따뜻한 봄날에서 여름의 문턱으로 접어들었다. 날씨는 점점 더워지고 산야의 녹음이 더욱 짙어져 간다.

  7월 3일 우리 가족이 모두 모였다. 중국 여행지에 대한 설명을 듣고 여행 준비를 하기 위해서다.  셋째 처형과 조카, 넷째 처형 가족, 우리 내외, 처남내외 8명이 모여 새만금 관광 김사장의 운남성 일원의 여행 코스에 대하여 설명을 들었다. 모두들 즐거움으로 설명을 듣는 모습이 행복하게 느껴진다. 넷째 처형의 황산 이야기, 셋째 동서가 함께 하지 못하는 서운함, 중국의 음식 등 다양한 이야기가 웃음꽃 피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계속된다. 우리 가족은 생맥주를 마시면서 김사장의 여행 전의 준비 사항을 듣고 계약 잔금을 건넸다.

여행 기간은 8월 3일부터 8월 8일까지 5박 6일로 하고 목적지는 운남성에 있는 대표적인 관광지로 정하였다.

  여행 준비는 모두 끝났다. 각자 준비물을 챙기고 집을 나오면 된다. 그 동안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었지만 최종 결정을 하고나니 마음이 홀가분하다.

  7월의 마지막 날에 여행 중에 사용할 커피, 고추장, 김, 과자, 안주 등을 구입하였다. 중국의 기름진 음식이 입맛에 맞지 않기 때문에 구입한 물건들이다. 이제 정말 가족 해외여행을 떠나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가족이 함께 해외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가 곁들어 있다. 가족 모두의 화목은 물론이고 함께한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여행 내내 서로를 챙겨 주고 즐거움을 나눌 수 있어서 더욱 좋다.

  8월 2일 여행에 필요한 물품을 간소화하면서도 꼼꼼하게 준비를 하였다. 새만금 관광 김사장이 나누어준 체크리스트를 보며 다시 확인하면서 가볍게 꾸미려고 노력하였다.

  8월 3일 우리 가족이 해외여행을 떠나는 날이다. 다른 날보다 일찍 기상을 했다. 들뜬 마음이라 그런지 아침 일의 순서가 잡히지 않는다. 아침을 먹고 다시 여행 가방을 살펴보았다.

  지난 5월초부터 오늘까지 여행을 떠나기 위한 준비과정이 하나 둘 기억이 난다. 황산에서 구체구로 또 다시 운남성 일원으로 결정되기까지 넷째 동서 형님의 조언이 오늘 여행을 떠나도록 뒷받침해 주신 것이 고맙게 느껴진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12시에 집을 나섰다. 간단하게 문단속을 하면서 혼자 남아 있을 딸 지아가 걱정이 된다.

 ‘식사는 거르지 않고 먹을 수 있을 것인지? 직장은 시간 맞춰 잘 출근하려는지......’

 모든 것이 걱정 반 믿음 반이다.

 “엄마, 아빠 걱정하지 말고 재미있게 여행 하세요”

 하고 밝은 표정으로 말은 하는 딸이지만 내심 걱정이 되면서 딸에게 미안한 마음이 자꾸 드는 것이 부모의 마음인 것이다.

  12시에 집을 나서 집결지로 향하였다. 오늘따라 택시 창밖으로 보이는 모습이 아름답게 느껴진다. 다른 날 같으면 12시의 태양 볕이 너무도 강렬하여 짜증도 나겠지만 오늘은 태양 볕이 뜨겁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우리 내외가 제일 먼저 집결지에 도착을 하였다. 먼저 와서 기다리는 것도 지루하지 않다. 조금 떨어진 곳에 셋째 처형과 조카가 여행 가방을 끌고 나타난다. 발걸음이 힘차고 가볍게 걸어오고 있다. 우리 가족은 정해진 시간 안에 모두 도착하여 리무진 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도심을 가로질러 영등동으로 달렸다. 이번 여행에 함께 할 귀동이내 가족 4명을 태우기 위해 서다. 영등동에서 귀동이내 가족과 처음 인사를 나누었다. 귀동이내는 초등학교 2학년 귀동이와 5학년 귀정이, 한전에 다니는 아빠, 원대병원에 근무하는 엄마 4명인데 단란하고 행복한 가정처럼 느껴진다. 나도 저런 시절이 있었는데 귀동이내 가족처럼 마음 놓고 여행한번 하지 못한 것이 마냥 아쉽고 부러운 생각이 자꾸 든다.

  우리 일행을 태운 버스는 경부고속국도로 인천 국제공항을 향하여 달린다. 창 너머 들판의 벼들이 바람에 춤을 추고 저 멀리 산등성이의 능선이 부드러움을 자아내어 내 마음을 가볍게 해 준다. 버스는 2시간쯤 달리다 우리 일행을 장안 휴게소에 내려놓는다. 이곳에서 점심을 먹기 위해서다. 점심 메뉴에서 비빔밥을 주문하였다. 이제 며칠 동안은 우리 음식 맛을 느끼지 못하겠지 생각하며 참기름의 고소한 냄새와 함께 비빔밥을 맛있게 먹었다.  우리 가족은 언제나 그랬듯이 식사 후에 커피 자판기 앞에 모여 한 잔의 커피로 입가심을 한다. 코끝에 전해오는 커피의 향이 달콤하게 느껴진다.

  버스는 다시 2시간여를 달려 인천 국제공항에 도착하였다. 수많은 여행객이 가방을 끌고 왔다 갔다 하고 짐수레에 가방을 수북하게 쌓아 운반하는 사람, 총을 메고 공항의 안전을 살피는 경찰 등 인산인해라는 말이 실감난다.

  우리 일행은 잠시 로비의 의자에 앉아 쉼을 하였다. 유리창 너머로 공항버스의 오가는 모습이 분주하고 버스에서 내리는 승객의 모습도 평화롭고 질서 있게 보인다. 기다리는 동안 집사람은 sk 자동 로밍 코너에 가서 휴대폰을 해외 여행지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휴대폰 설정을 하고 돌아와 기술 발달에 감탄을 한다.

  탑승 수속과 출국 수속을 끝내고 공항 면세점을 둘러보았다. 술, 가방, 화장품 등 고급스럽게 생긴 물건들이 화려한 조명아래서 관광객들을 유혹한다. 집사람은 딸에게 줄 화장품 몇 가지를 산다. 예뻐지라는 엄마의 마음이 딸에게 잘 전달되길 빌어 본다. 시간이 여유가 있어 이곳저곳을 무료함을 달래기 위하여 기웃 거렸다. 처형들과 조카들도 화장품 가게에 있고 넷째 형님은 담배 가게에서 국산 담배 2보루를 사가지고 나온다. 담배 피우는 식구가 없는데 의아한 생각이 들어서 여쭈어 보니 이번 여행에 참석치 못한 둘째 처남에게 선물을 하려고 구입했다고 대답을 한다. 나는 생각도 못한 일인데 가족을 생각하는 형님을 다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형님은 모든 면에서 박식하시고 언제나 온화하면서도 정이 깊고 자신보다는 남을 먼저 생각하시는 형님의 성품이 평상시에도 존경스럽게 느껴지곤 했는데 오늘도 형님의 진면목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지정된 출구에 다시 집결하였다. 저녁 7시발 비행기인데 시간이 남아있다. 저녁식사가 기내식이고 9시가 넘어 나온다고 생각하니 배고 고프다. 제과점에 빵과 물을 구입하여 허기질 배를 생각하며 맛있게 먹으면서도 지나치게 비싼 빵 가격이 마음에 와 닫는다.

  굳게 닫혀 있던 출구의 문이 열리고 긴 통로로 곤명 행 MU2004기에 탑승을 했다. 지금까지 여러 차례 비행기를 탑승해 보았지만 이륙과 착륙 시 느끼는 불안감은 여전하다. 비행기 안에서 비상시 행동 요령이 설명되고 안전벨트를 착용하라는 방송이 있고 난 후 비행기는 활주로로 서서히 이동을 한다. 비행기의 광음 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인천 공항의 야경을 아래에 두고 창공 속으로 힘차게 날아간다.

  우리 일행을 태운 비행기는 4 시간여를 날아 중국 곤명 국제공항에 사뿐히 내려앉는다. 입국 수속을 받고 공항 밖으로 나왔다. 모두를 이국의 정취가 눈에 보이니 긴장감에서 기대감으로 바뀐 표정들이다. 시계는 밤 11시를 넘어 하루 밤을 지새울 세기 금원 대 주점 호텔에 도착을 하였다.

  8월 4일 6시 30분 모닝 콜 전화 벨소리에 눈을 떴다. 오늘부터 실질적인 여행의 시작이다.

창문을 열어보니 예쁘게 건축된 빌딩 사이로 아침 햇살이 나를 반겨 준다. 상쾌한 하루의 시작이다.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하여 우리 내외는 식당으로 내려갔다. 많은 사람들이 식사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아침 식사는 호텔식 부패인데 중국 음식이 주이고 빵과 음료수, 죽이 있고 배추김치가 따로 준비되어 있었다. 우리 내외는 각자 식성에 맞게 음식을 담아와 식탁에 앉았다. 나는 밥에 중국 반찬으로 집사람은 빵과 죽에 음료수를 곁들인다.

  아침 식사 후 8시에 전용 버스에 몸을 실었다. 조금 전까지 햇살이 비치던 날씨가 구름으로 덮여 오늘 관광이 걱정이 된다. 오늘 관광은 구황동굴→ 석림→ 운남 영상 가무쇼 순으로 진행 된다. 버스에서 우리 일행은 현지 가이드와 인사를 나누고 목적지인 구향동굴로 출발하였다.

  현지 가이드가 우리 여행에 대하여 간단히 소개하고 운남성에 대하여 설명을 해준다.

중국은 56개 민족이 서로 다른 문화와 역사를 가진 국가로 넓은 국토와 풍부한 지원을 자랑하며 다양한 기후와 자연의 모습을 가진 나라다. 운남성은 중국 서남쪽에 위치하여 베트남, 미얀마, 라오스 등의 국가와 국경을 함께하고 서북쪽의 히말라야 산맥의 끝자락에 걸쳐 천해의 비경을 간직한 성으로 25개 소수 민족이 함께 하는 다양한 문화를 체험 할 수 있는 곳이라고 설명한다.

  운남성의 곤명은 정치, 경제, 문화, 교통의 중심지인 수도로 운귀고원의 중부에 위치한 평균 고도가 해발 1500m이상 고원의 도시라고 할 수 있다. 위도 상으로 아열대 기후대인데 고원지대라 기후가 온화하고 혹서와 혹한이 없어 사계절 꽃이 핀다고 하여 ‘춘성’이라고 칭하며 언제라도 여행하기 좋은 곳이라고 한다.

  곤명은 한족, 이족, 백족, 태족, 합니족 등 여러 소수 민족들이 모여 살며 2400여년의 역사를 지녀 명승고적이 많고 자연 환경이 아름답다. 특히 세계 자연 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석림을 중심으로 곤명호, 서산공원, 대관루, 운남 민속촌 등 볼 것이 많은 도시라고 설명을 해 준다.

  곤명 시내는 신흥 도시처럼 편도 3~4차선의 넓은 도로인데 자전거와 오토바이 행렬이 뒤 섞여 곡예 운전을 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그런데도 교통사고율은 우리나라보다 적다고 하니 중국인의 서두르지 않고 차분하게 일을 처리하는 국민성에서 그 까닭을 찾아 볼 수 있다. 전용 버스는 도심을 빠져 산속으로 접어든다. 길가에 운남성 소수 민족들의 집들이 보이고 논경지도 보인다. 곤명을 떠난 후 2시간 넘게 달리다 구황동굴 앞에 우리 일행을 내려놓는다. 동굴 정문에는 여러 가지 꽃으로 꾸며 놓고 여행자의 눈을 즐겁게 해 준다. 우리 일행은 중국 여행의 첫 관람지라 단체 사진 촬영으로 기억 속에 담아 둔다.

(구황동굴 정문의 모습)

  입구에서 조금 내려가니 길이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부터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가 보니 웅장하고 장엄한 절벽 사이로 황토색 물이 잔잔하게 흐른다. 우리는 잔잔한 협곡에서 두 대의 노 젓는 배로 래프팅을 시작하였다. 80m이상의 장엄한 바위 절벽 사이에 좁은 협곡을 이루고 바위 절벽에는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바위가 울퉁불퉁 튀어나와 아찔한 생각도 든다. 높다란 절벽에서 뚝뚝 떨어지는 차거운 물도 맞으면서 배를 열심히 젓는다. 이국에 와서 이러한 체험을 하면서 자연 풍광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것이 진정한 여행의 참맛이 아닌가 생각하며 구황동굴 입구에 섰다.

(구황동굴 입구)

  절벽 사이로 작은 길은 이어지고 절벽 아래 협곡에는 황토물이 요리저리 힘차게 흐른다. 길을 따라 걷다보니 동굴 안으로 들어선다. 높고 넓은 굴 안에는 위에서 쉼 없이 내려오는 물이 공명을 일으켜 천둥치는 소리처럼 웅장하다. 태고에 석화암 지대였던 이곳에 실 같은 물줄기가 생기고 이 물줄기는 수 십 억년 흐르고 흘러 지금의 구황동굴을 자아내고 있으니 자연의 위대함을 어찌 인간의 힘으로 대적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커다란 지구 속에서 점 같은 지역을 터전으로 자기의 희망을 위하여 아웅다웅 살아가는 속세의 삶이 한낱 부질없는 행동이 아닌가 생각 되지만 우리 인생은 그 무엇을 위하여 서로 뒤엉켜 하나하나 풀어가는 것이 진정한 삶의 목표라 생각하면서 발걸음을 옮긴다.

(동굴 안애서 본 하늘)

  조금은 어두운 굴 안을 요리저리 걷다보면 이따금 하늘을 볼 수 있는 동굴이다. 각종 괴암괴석이 절경을 이루고 천태만상의 석순과 조명이 아름다움으로 단장하고 있다. 추울 정도로 시원한 동굴 안 선녀동 폭포가 최고의 절경으로 여행객을 사로잡고 넓은 공간에서는 민속춤과 노래로 여행객을 즐겁게 해준다. 3년 전 여행에서 본 장가계의 황룡동굴과는 대조적이다. 황룡동굴은 종유석과 석순이 아름답게 서 있는 여성적인 동굴이라면 구황동굴은 장엄하고 웅장하며 꾸밈이 적은 남성적인 동굴이라고 생각이 든다.

  동굴 밖으로 나오는 길에 가마꾼들이 서서 여행객들에게 호객행위를 하는 것으로 보아 오름이 쉽지 않는 길임을 짐작케 해 준다. 수백 개의 계단을 오르고 오르니 저 멀리에서 하늘빛이 보이기 시작한다. 동굴 밖의 햇살은 더욱 싱그럽게 느껴지고 공기 또한 상쾌하게 느껴진다.

  우리들은 다시 리프트를 타고 산을 넘으면서 구황동굴과 자연의 위대함을 생각하며 다음 관광지인 석림(石林)으로 향했다.

  차창너머로 옥수수 담배가 산꼭대기까지 재배되고 있는 농경지가 보인다. 현대식 기계가 접근할 수 없는 계단식 농경지인데 사람의 힘으로 높은 곳까지 경작할 수 있다는 것은 인구가 많은 중국에서는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가는 도중 남탄강이 보이고 이 강물은 멀리 베트남까지 흐른다고 설명을 한다. 남탄강 협곡 사이에 높다란 다리를 걸쳐 놓아 한 장의 그림으로 아름답게 보인다. 강과 다리와 협곡이 하모니를 이뤄 나의 시선을 묶어 두기 충분한 곳이다.

  차가 다니는 길가 옆에는 말 달구지들이 지나가고 대나무로 만든 원통형의 망태를 어깨에 메고 다니는 농부들도 보인다. 내가 어렸을 때 눈으로 보고 겪었던 모습이 떠오른다. 1960년대 지게로 짐을 나르고 쇠스랑으로 땅을 파서 농사짓던 모습, 비가 오지 않아 모내기를 못하여 마음 고생하시던 부모님 모습 등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 간다.

  전용 버스는 한적한 산길을 돌고 돌아 어느 식당에 우릴 내려놓는다. 오늘 점심은 중국 현지식이다. 기름지고 향이 있는 반찬에 작은 바람에도 날아 갈 것 같은 쌀밥과 오리 훈재다. 다행인 것은 상추쌈이 준비되어 가지고 간 고추장에 점심을 과식 한다. 위장이 약한 나는 걱정이 앞선다. 식사를 마치고 일회용 커피를 뜨거운 물에 타서 마신다. 나는 매일 식사 후 커피를 마시는 습관이 몸에 배어있다. 어쩌다 마시지 못하면 어느 한 구석이 빈 것처럼 느껴진다. 높은 산을 겨울에 등반 할 때도 커피를 마실 정도로 커피 광이 되어있다. 중국에도 커피가 있지만 너무 진하고 쓴맛이 강하여 먹지 않는다.

  우리 일행은 커피의 향이 입가에서 가시기도 전에 석림으로 향하였다. 전용 버스가 산모퉁이를 돌아가니 외석림이 눈앞에 전개된다. 돌로 쌓아 놓은 것처럼 만물형상의 바위들이 우뚝우뚝 솟아있고 그 사이사이로 농경지가 펼쳐져 있다. 커다란 마당바위로 기단을 만들고 조물주가 자기의 생각대로 조각 바위를 쌓아 올린 자연의 신비에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석림은 크게 외석림과 내석림으로 나누고 내석림은 소석림과 대석림으로 나눈다. 차는 외석림의 아름다움을 뒤로하고 소석림 입구에 우리 일행을 내려놓는다.

  석림은 곤명에서 120Km쯤 떨어진 남쪽에 위치하고 넓이가 350인 세계에서 가장 광활한 카르스트 지형 중의 하나이고 돌기둥들이 하늘 위로 자라면서 커다란 산림 모양을 하였다하여 돌석(石), 수풀림(林)을 써서 이곳을 석림이라고 정하였다고 한다.

우리는 전동차를 타고 소석림을 둘러보다가 경치 좋은 곳을 배경으로 개인 사진과 단체 사진을 찍었다. 그 누가 말하기를 여행을 끝내면 남는 것은 사진뿐이라고 한 말이 생각나서 여행도중 멋진 곳이 나타나면 셔터를 눌러 대곤 하였다.

  내석림은 돌로 쌓아 놓은 바위가 군데군데 큰 병풍을 이루고 여러 가지 만물상을 나타내면서 주변의 풍경과 잘 어우러져 있다. 바위 기단에 수만 가지 조형물들을 차례로 올려놓았는데 모진 풍파에 바위가 씻겨 하얀 속살을 드러내고도 아무 말 없이 자기 자리를 지키고 서 있다.

(소석림의 전경)

  ‘내가 잘 났다, 아니 내가 더 멋있다.’

소리치고 우쭐대는 자랑만 앞세우는 우리의 인간사와는 전혀 대조적인 모습이다.

석림은 내가 지금까지 본 자연 모습 중 세상 어느 곳에도 없는 기경(奇景)으로 기묘한 바위가 서로 감싸 안고 기대면서 바위 숲을 이룬다.이 바위 숲의 아름다움은 조물주가 마음껏 연출한 대자연의 변신으로 세계 자연 유산으로 등록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우뚝 솟은 촛대바위가 푸른 풀밭 사이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서 있고 그 사이를 맑은 물이 흘러 작은 호수를 이루고 있는데 호수에 비치는 석림의 모습에 또다시 감탄사를 연발하였다.

  우리 일행은 다시 내석림에서 외석림으로 발길을 옮겼다. 입구에 들어서니 중국 현지인의 여행객 수가 인산인해를 이룬다. 그들이 멋진 바위를 배경으로 전통의상을 입고 사진을 찍는 행복한 모습에서 중국의 발전상을 느껴 볼 수 있다. 우리 일행도 그들과 함께 하면서 빨간색으로 석림(石林)이라고 새겨 놓은 커다란 바위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 남겨 놓았다.

(외석림의 입구)

  바위 사이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외석림에 도착한다. 웅장한 바위 숲이 나의 가슴을 짓누른다. 커다란 고목나무 뿌리처럼 땅속에 기단을 두고 뻗어 나온 줄기들이 서로 뒤 엉켜 원시림을 조성하듯이 바위가 하늘로 치솟고 자란 바위들이 서로 어울려 원시림을 방불케 한다. 이 원시림 중에는 내가 제일이라 하며 엄지손가락을 세운 바위도 있고, 콧날이 예쁘게 솟은 여인의 얼굴상과 맹수가 먹이를 잡아먹기 위하여 포효하는 모습도 있고 금방이라도 땅으로 떨어질 것 같은 바위, 아슬아슬 서커스 하는 바위들의 생생한 모습을 글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짧은 가방이 못내 아쉽다.

  외석림 바위 숲 사이에는 수십 개의 길이 미로처럼 나있다. 우리는 길을 잃을까봐 안내하는 가이드의 뒤를 열심히 따라 다니다 보니 외석림의 중심부에 있는 팔각정에 오를 수 있었다.

(외석림의 바위 원시림)

팔각정에서 본 외석림은 크고 작은 바위 숲들이 큰 산을 이루고 하늘을 향하여 멋있게 자리 잡고 있는 비경이다. 오랫동안 팔각정에 앉아서 비경에 취하고 싶지만 수만은 여행객과 정해진 일정 때문에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외석림에서 다시 내석림으로 빠져 나오는 길목에 사람의 심장과 흡사한 바위가 있었다. 이 바위를 손으로 만지면 장수한다하여 뭇사람들이 얼마나 만졌는지 울퉁불퉁한 바위 흔적은 없고 반질반질 윤택이 난다. 앞에 가던 셋째 처형이 심장바위를 손으로 만지면서

  “심장바위를 만졌으니 천년만년 무병장수 하겠지”

  하며 환하게 웃으신다.

  셋째 처형은 셋째 동서 형님이 함께할 수 없어 조카인 윤희와 함께 여행에 참석 하였다. 언제나 생각이 깊고 판단이 예리한 처형은 속마음이 깊고 인정이 많아 친구들이 많다. 요리 솜씨가 맛깔스럽고 항상 웃음을 잃지 않는 환한 성격을 가지고 밝게 사시는 분이다.

우리 일행이 외석림을 빠져 나오니 광장에서 어느 소수민족이 전통무용을 여행객들에게 선물하고 있었다. 전통 악기를 연주 하면서 호루라기 소리에 맞춰 추는 춤사위가 부드럽고 흥겹다.

  석림의 출구에 섰다. 다시 오기 힘든 발길을 생각하며 뒤돌아보았다. 정말 아름다운 세계 자연 유산이다. 소석림은 잔디밭 사이에 호수를 만들어 놓고 그 사이사이에 인위적인 바위들을 심어 놓은듯하고 대석림은 크고 작은 바위들이 한데 어울려 웅장한 숲을 이뤄 커다란 원시림을 연상케 하는 조물주의 손장난이 빚져낸 절경이다.

  석림을 뒤로 하고 정해진 일정에 따라 저녁 식사를 북한 해당화 식당에서 된장찌개에 김치와 나물을 곁들여 한식으로 먹었다. 이국에 와서 전통 우리 식단으로 짜놓은 식사를 하니 그 맛이 궁중 요리를 먹는 것처럼 맛깔스럽고 뿌듯하다.

  여행을 떠나기 하루 전에 집사람에게

  “여행을 떠나는 것이 무엇이 제일 좋아?”

  하고 물었더니 생각도 하지 않고

  “내가 반찬, 국거리 걱정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해 주는 밥을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는 것 이  제일 좋지”

하고 대답을 한다, 평소에 반찬이나 밥에 대하여 투정을 해 본 일이 별로 없는데도 항상 신경이 쓰이는가 보다. 워낙 우리 식구가 찌개와 국이 없으면 반찬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집사람이 끼니에 대하여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도 우리 가족의 별난 식습관이라 생각하니 집사람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었다.

  우리는 저녁 식사 후 첫날 여정의 끝인 운남 영상 가무쇼를 감상하기 위하여 곤명 시내 중심가로 버스는 달리기 시작한다. 도로 옆에 잘 조성된 화단에는 부갠베리아의 붉은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고 그 사이에 노란 꽃과 키 작은 사루비아, 메리골드 등 수 많은 꽃들이 활짝 피어 있다. 곤명의 다른 이름 춘성(일 년 내내 꽃이 핌)이라는 명칭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한다. 시원한 도로와 활짝 핀 꽃들이 어우러져 신흥도시다운 냄새가 물씬 풍긴다.

  운남 연상 가무쇼는 극장식으로 중국의 한 연출가가 세계 민속 공연 대회에서 금상을 수상함으로서 널리 알려진 작품이라고 한다. 7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연극은 이 지구에 태양이 열리고 땅이 생겨나 그 곳에서 사람이 태어나 나라가 만들어지고 어지러운 세상이 전개되다가 믿음이 있는 종교가 생겨나면서 인간과 만물이 평화를 찾고 행복하게 살아간다는 내용처럼 나는 느껴졌다.

  운남 영상 가무쇼는 전통악기인 북의 연주가 힘차고 일사불라한 춤사위가 무대 구성과 조명과 함께 조화를 이룬다. 출연자 한 사람 한 사람 혼과 열정이 배어있고 꼬마 소녀의 가무와 소리가 내 마음을 압도한다. 가무쇼의 클라이막스인 봉황 춤은 황홀하고 우아하면서도 고상한 춤으로 모든 관람객의 가식 없는 갈채를 받기에 손색이 없는 훌륭한 가무쇼였다.

운남 영상 가무쇼의 잔상을 머리에 새기면서 중국의 첫날 관광을 마치고 숙소에서 망과의 향과 맛에 취하면서 소주 한잔으로 피로를 풀고 하룻밤을 묵었다.

  여행 이튼날 사방은 어둠의 천지인데 모닝콜 전화 벨소리가 새벽 4시 30분에 울린다. 낮선 이국의 하룻밤 때문인지 어제 하루의 여행 때문인지 피로가 풀리지 않은 듯 몸은 찌뿌등 하지만 7시 20분 대리행 비행기 탐승 때문에 서둘러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꼭두새벽인데 우리 일행 중 늦은 사람 없이 비행기에 탑승하니 40분 정도 비행하여 대리 비행장에 도착을 한다.

  오늘 여행은 이해호수와 창산, 대리 고성, 백족 민속 쇼 관람 후 여강으로 이동하는 여정이다.

  아침 식사를 중국식 부패로 먹고 이해호수로 이동한다. 깨끗한 거리에 새로 지어진 건물들이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해호수는 사람의 귀처럼 생겼다고 귀이(耳) 바다해(海)를 붙여 명명한 곳이다. 해발 1972m 높이의 고원에 위치한 호수는 면적이 248로 익산시 보다 넓고 길이는 45Km나 된다. 설산에서 흐르는 맑은 물을 담수하여 깨끗하고 각종 민물고기의 보고라 이곳 사람들은 어머니의 호수라고 부른다 한다. 호수엔 낚시를 하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보이고 노를 젓는 배 위에서 통발 같은 어구를 이용하여 고기를 잡는 모습도 보인다.

  우리는 작은 유람선에 승선하여 이해호수를 유람 한다. 호수 왼편에 백족이 사는 구도시가 편안하게 자리 잡고 호수 뒤쪽은 신도시가 아름답게 조성되어 신구의 조화로움이 안정감과 편안함을 선사한다.

  1900m 고원지대에 자리 잡은 대리는 창산을 뒤로하고 옆으로 이해호수의 물이 흐르는 차마고도의 교통 중심지로 역사와 문화가 잘 발달된 도시다. 주 생산물은 마늘, 완두콩, 유채이고 백족이 많이 사는 곳이다.

  여행 이튼 날의 두 번째 코스인 창산으로 발길을 돌렸다.

창산은 히말라야 산맥의 끝자락으로 높이가 2600m가 넘는 10개의 봉우리로 된 산이다. 큰 도로에서 갈라진 진입로는 도로에 자갈을 심어 놓았고 그 길옆에는 전통 상가가 쭉 늘어서 있다. 옛날부터 이 거리에서 3월 14일부터 21일까지 물물교환을 하던 장소였는데 지금까지 그 명맥이 이어진다고 한다.

  창산의 입구에 도착하니 희뿌연 하던 하늘이 비를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우산을 쓰고 리프트에 올랐다. 리프트 양 옆에는 잣나무 숲이 우거져 있고 잣 열매가 주렁주렁 열려 손으로 잡을 수 있다. 탐스럽게 익어가는 잣 열매와 구름으로 덮여있는 좌우측의 능선을 감상하다 보니 목적지에 도착 되었다.

  리프트에서 내려 5분정도 걸으니 중화사라는 사원에 도착을 하였다. 중화사는 도교, 본주교, 불교가 함께 있는 사원이다. 우리나라에는 여러 종교가 함께 어우러져 있는 곳을 찾아 볼 수 없는데 중국에서는 여러 종교가 함께하는 것을 보니 중국인들의 종교관이 새롭게 느껴진다. 중화사의 문을 들어서면 도교에서 현세의 삶을 중요시하는 재(財), 복(福), 수(壽)를 붉은 글씨로 새겨 놓은 비석이 있으며 그 뒤로는 도교의 신인 옥황상제를 중앙에 안치한 사원이 있다. 사원의 왼쪽에는 본주교가, 건물 오른쪽에는 관음전이 나란히 자리 잡고 평화스럽게 참배객을 맞이한다.  해발 2600m에 있는 사원을 우리는 리프트를 타고 손쉽게 올라왔지만 그 옛날 사람들은 어떻게 올라와 참배를 했을까? 생각하니 참선을 위한 고행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짐작할 수 있다.

  우리 가족은 한 달에 한두 번 정도로 산행을 함께 한다. 인근에 있는 산을 중심으로 다니지만 먼 곳에 있는 산도 이따금 산행을 한다. 가족이 함께하는 산행의 즐거움은 오름을 하면서 흘리는 땀과 대화를 통한 가족 간의 화목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 즐거움 중의 즐거움이다. 그래서 우리 가족의 산행은 언제나 웃고 떠드는 수다스러움의 산행이다. 지금 우리 가족이 중국을 여행하는 것도 가족 산행의 결과이다. 중국의 황산을 등반해 보자고하여 계획을 세워 추진한 것이 더위와 건강 때문에 운남성 일원으로 목적지가 바뀐 것뿐이다.

  가랑비가 계속 내린다. 저 아래 대리 시내가 구름에 가려서 보이지 않는다. 우산 위에 떨어지는 비 소리가 사라지면서 백족들의 하얀 전통 가옥이 눈에 보이기 시작 한다.

(대리 고성의 정문)

  고성은 창산을 뒤에 두고 옆에는 이해 호수가 흐른다. 그리 크지 않은 성은 20분정도 걸으면 반대쪽 성문으로 나갈 수 있는 작은 성이다. 4개의 성문으로 둘러싸인 성안에서 왕이 살던 곳으로 길이 동서남북으로 뻗어 있으나 옛 걸물은 없고 그 흔적만 군데군데 남아있다. 고성 안에는 전통 수공예품인 은, 실크, 대리석 등을 직접 가공하여 판매하는 가게들이 즐비하고 백족의 전통 의상을 입고 여행객에게 물건을 팔고 있지만 옛날 고성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우리는 고성 안에서 여러 가지 열대 과일을 구입했다. 잘 통하지 않는 말로 과일의 이름을 묻고 가격을 흥정하여 여려가지 열대 과일을 충분히 먹을 만큼 샀다. 오늘 저녁 만찬을 기대하며 고성을 빠져 나와 대리삼탑에 도착하였다.

  전동차로 숭성사 경내부터 돌아 보기로 하였다. 전동차로 10여분 오르니 제일 먼저 천황전이 우리 일행을 맞이한다. 천황전은 인도의 전통신앙을 불교에 접목한 것으로 우리나라 불교와 비슷하였다.

(미륵전의 불상)

  천황전 뒤에는 미륵전이 있는데 우리나라 미륵전의 불상 모습과는 전혀 다른 형상이다. 달마 상처럼 웃음을 머금고 있는 포대상으로 사람의 모습을 불상으로 나타낸 인상의 모습이다. 미륵전 좌우의 협시 불로는 인도의 전통 신앙인 8대 용왕을 안치한 모습도 특이 하였다.

관음전은 미륵전 뒤에 있는데 11면 관세음보살 입상을 주불로 모셔 놓았는데 그 모습이 매우 크고 아름답다. 또한 관세음전 법당의 좌우에는 나한전이 있는데 나한 하나의 크기가 180cm정도 되는 500나한을 금으로 도색하여 모셔놓았다.

(대웅보전의 석가모니 불과 협시불)

  숭성사 제일 높은 곳에 대웅보전이 있다. 이곳에 석가모니를 주불로 하여 협시불로 보현보살, 지장보살을 오른쪽에 문수보살과 관세음보살을 왼쪽에 두고 앞쪽에 아난존자 가섭존자 등을 안치한 법당이다. 우리나라 법당은 이렇게 많은 협시 불을 한 법당에 안치한 곳이 없다.

  중국 불교에서는 부처의 등급에 따라 법당을 세우는데 아래쪽부터 천황전 → 미륵전 → 관세음전 → 대웅전 순으로 법당을 세워 놓았다.

  숭성사의 여러 법당을 살펴보고 내려오면서 대리삼탑을 살펴보았다. 대리삼탑은 가운데에 있는 천신탑을 중심으로 2개의 좌우의 탑이 천신탑을 감싸듯 우뚝 솟아 있다. 천신탑의 높이는 70m, 16층으로 중국 당대에 세워진 3대 불탑 중 하나이며 다른 탑과는 반대로 위에서부터 아래로 깎아 만든 탑이며 보주에 진산사리를 보관한 탐이라고 한다. 특이한 것은 3개의 탑 모두가 기단이 없이 대리석 암반 위에 세운 탑인데 천신탑을 남성다웁고 협시 탑은 여성스럽게 느껴진다. 우리나라 불국사의 석가탑과 다보탑도 음과 양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중국의 탑도 음과 양으로 구분할 수 있어 우리가 중국의 영향을 받았을 거란 생각이 든다.

(대리 삼탑)

  숭성사와 대리삼탑을 살펴보고 백족 민속 쇼를 관람하기 위하여 버스에 올라 창밖을 본다. 저 멀리 산등성 허리를 감싸는 흰 구름이 보이고 드넓은 논밭에 관수를 위한 시멘트로 된 수로가 들판 여기저기에 설치되어 있는 모습도 보인다.

  길가의 백족 가옥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백족 가족은 벽을 하얀색으로 칠하고 대문을 화려하게 장식한 솟을대문 형식으로 만들었고 집 또한 화려하고 그 구조가 매우 크다. 백족 가옥의 특징이 또 하나 있다. 처마 밑에 여러 가지 동양화를 남자 주인이 직접 그려 놓았는데 솜씨가 대단함을 엿 볼 수 있다. 그래서 백족 남자는 담배와 차 맛과 그림에 능통하여야 진정한 남성으로 인정을 받는다고 가이드는 설명을 한다.  백족은 모계중심 사회여서 여자가 모든 일을 하고 남자는 일을 하지 않는다고 설명하니 사리 분별이 정확한 넷째 처형이

  “남자가 놀고먹어, 나는 이런 곳에서는 태어나지도 않고 살지도 못 할 것이야”

  하며 환한 웃음을 짓는다.

  평소에 자신감이 충만하고 넷째 동서와 아이들을 끔찍이도 아끼고 사랑하는 현모양처의 전형적인 주부이다. 여기에다 매사 긍정적인 생각으로 밝게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하고 싶은 말은 감추지 않고 표현하는 신세대 주부상도 가지고 있어 대화하기에 부담이 없는 처형이다.

  백족 민속 쇼를 하는 가옥에 들어섰다. 창살 문양은 십장생을 조각하여 부귀, 영화, 장수의 기원을 빌고 지붕아래 그림도 여백의 미를 잘 살려 안정감이 들도록 그려 놓았는데 단청의 푸른색, 녹색, 주황색들과 매우 잘 어울린다. 백족 민속 쇼의 춤사위는 동작이 빠르거나 크지도 않으면서 부드러운 손동작과 여유로운 발동작이 전통악기 연주소리에 맞추어 춤을 춘다. 춤이 시작할 때마다 3잔의 차가 나온다. 처음 차의 맛은 떱덜음 하고 2번째 차의 맛은 달콤하고 3번째 차의 맛은 맵고, 쓰고, 달고, 떱덜음한 맛이 뒤섞여 인생의 희로애락으로 비유 된다고 설명을 해 준다.

  우리 일행은 비가 오락가락하는 날씨에도 여정에 따라 여행을 계속하여 다음 목적지인 여강으로 버스는 달렸다. 대리에서 여강까지는 버스로 3시간 정도 달려야 하는 먼 거리다. 버스는 산골짜기를 돌고 돌아 점점 고도를 높이면서 쉼 없이 달린다. 창 밖에 부슬부슬 내리는 비가 집 떠나온 나그네의 몸과 마음을 서럽게 하는데 소 떼를 몰고 가는 농부와 담배 잎을 수확하는 농부들의 모습도 보인다.

  차는 산등성이의 허리를 휘감은 길을 거침없이 달리고 지금 차가 달리는 이 길도 그 옛날 차마고도의 하나라고 설명 한다.

  우리 일행은 3시간여를 달려 여강 관광호텔에 도착하여 각자 방을 배정 받고 여행의 피로를 풀기 위하여 발 맛사지를 받았다. 체구가 작은 처녀의 손끝으로 지압과 맛사지로 여행객의 피로를 말끔히 풀어 준다. 우리 일행은 맛사지가 끝나고 4째 동서 침실에 모두 모여 대리에서 준비한 열대 과일로 여행의 즐거움을 만끽하였다.

  여행 4째날 여강 지역의 관광이다.

  여강은 운남성의 서북부에 위치한 작은 도시로 옥룡설산을 뒤로하고 있는 나시족의 주된 거주지다. 나시족은 철저한 모계 사회였는데 그 숫자가 점점 줄어들어 그들의 문화도 사라져 가고 있다고 한다. 여강은 옥룡설산과 설산에서 흐르는 맑은 물이 곳곳으로 흘러 주변 경관과 잘 어우러진 아름다운 곳이다.

  여강의 처음 여행지는 벽사 벽화와 고성이다. 벽사 벽화는 나시족의 심장부로 동파 문화의 발원지이다. 동파문화란 나시족의 독특한 문화로 세계유일의 상형문자와 동파를 사용했는데 지금까지도 그 습성이 있다고 한다. 벽화는 높다란 벽에다 나시족의 역사와 풍습을 새겨 놓았고 조금 걸어가니 상형 문자를 적어 놓은 나무판이 있는데 앞쪽은 상형문자를 뒤쪽은 해석을 하여 걸어 놓았다.

  여강의 고성은 사방가(四方街)를 중심으로 곳곳에 맑은 물이 흐르고 성벽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맑은 물을 따라 걷다보면 붉은 등이 걸려있는 홍등가가 흐르는 물 양쪽에 옛 모양 그대로 있고 그곳에서 음식과 차와 음료수를 팔고 있다. 밤에는 붉은 등이 불빛으로 물들면 흐르는 맑은 물에 그 빛이 비치고 하늘의 달빛과 함께하면 ‘동방의 베니스’라 불릴 만큼 운치있고 아름답다.

(홍등가의 모습)

  홍등가의 높은 곳에서 고성의 고택들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고택들은 좁은 길을 사이에 두고 오밀 조밀 서 있는데 그 규모가 전주 한옥 단지보다 넓은 것 같다. 규모가 대단한 고택들이 지금까지도 보존되고 있다는 것을 우리도 배우고 느껴야 할 것 같다.

여강의 고성은 인위적으로 꾸미지 않고 자연을 최대로 이용하여 아름답고 평화스럽고 옛것이 잘 보존되어 있다. 그래서 이 고성이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통 의상을 입고 춤을 추는 사람)

  전망하는 곳에서 다시 홍등가로 내려오니 광장이 나왔다. 그곳에서는 어느 소수 민족이 전통의상을 입고 녹음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있었다. 연세가 있으신 남녀가 손을 잡고 추는 춤사위도 백족의 춤사위나 석림에서 본 춤사위와 흡사하다. 평상시 춤에 관심이 많은 집사람이 그들의 동작을 뒤에 해보더니 그들과 함께 손을 잡고 춤을 추기 시작한다. 입가에 웃음을 띠고 이따금 나를 바라보면서 발동작과 손동작을 그들과 함께한다. 춤이란 언어나 풍습이 달라도 그 느낌은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고성의 고택 사이로는 맑은 물이 언제나 흐른다. 좁은 골목길에도 맑은 물은 흐른다. 이 물은 그 옛날 생활용수로 사용하다가 화재가 나면 소화수로 사용하여 목조 건물인 고택들이 오늘날까지 보존될 수 있었다고 짐작을 해본다.

  우리 일행은 여강 고성을 빠져나와 흑룡담 호수로 향했다. 흑룡담은 여강 상산 북쪽에 자리 잡고 있으며 호수 안에는 검은 용이 산다고 하여 흑룡담으로 불리고 호수 쪽으로 뻗어 내린 버드나무와 정자가 조화롭게 배치되어 한 폭의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이곳을 배경삼아 사진 몇 장을 찍었다. 흑룡담은 왕서방의 이화원보다 그 규모와 시설물들은 적지만 뒤쪽의 성산과 잘 조화를 이루는 아담한 호수이다.

(흑룡담을 수놓은 꽃)

  발길 닿는 곳마다 베고니아, 메리골드 등이 화려하게 수를 놓고 나무와 물과 정자가 아름답게 서로를 감싸고 있는 아담한 공원이다.

  오늘 점심 식사는 기름진 중국 현지식이다. 그러나 동행한 김사장의 배려로 상추와 오이가 충분하게 배식되어 준비해간 고추장과 함께 맛있게 먹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우리 일행은 일회용 커피 한잔으로 망중한을 달랬다. 점심 후 해발 5596m의 만년설이 있는 옥룡설산으로 발길을 옮겼다.

  옥룡설산은 1년 내내 눈이 녹지 않는 만년설산으로 여강에서 20Km 서북쪽에 웅장하게 서 있는 산맥이다. 이 산맥의 능선이 은색 용이 춤을 추는 모습과 비슷하다고 하여 옥룡설산이라 부른다.

  옥룡설산의 입구에는 여러 가지 야생화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고 셔틀버스 타는 정류장에는 전통 약재를 전시 판매하는 곳이 있어 여기저기를 구경하였다. 야생 천마, 동충하초, 여러 가지 산야초 등이 판매되고 있는데 누구하나 약초에 대한 설명이 없다. 전시장을 구경만 하다가 클로렐라를 파는 곳에서 우리 일행은 걸음을 멈추었다. 가격과 용량, 복용법 등을 꼼꼼히 물어보고 가격이 저렴하여 가족 당 1봉씩 구매했다. 전시 판매장 출구에 산소를 팔고 있어 만약을 대비하기 위하여 40위안을 주고 1통을 구입했다. 사실은 나도 가슴이 약간은 답답하고 무겁게 느껴졌기 때문인데 가족 모두가 신기한 듯 한번 씩 코에 대고 체험을 해보고는 기분이 상쾌하다고 말을 한다.

  우리 일행은 옥룡설산의 셔틀 버스를 타고 옥룡설산 아래까지 이동하였다가 곤드라를 타고 또 하나의 산을 넘었다. 해발 3600m지점까지 편하게 오르기 위하여 곤드라를 탈 수 밖에 없다. 곤드라에서 내려 30분정도 걸으면 설산을 조망할 수 있는 광장이 나온다. 이 광장까지는 나무 침목으로 산책로를 만들어 여행객에게는 편의를 제공해주면서 자연을 보호하려는 중국인의 마음도 엿볼 수 있다.

  등산로 주변에는 전나무 원시림이 우뚝우뚝 솟아 있고 죽어 있는 나무에선 온갖 버섯들이 자라고 있다. 살아서 맑은 공기와 동물의 삶의 터전이 되어주고 죽어서는 목재와 버섯 등을 아낌없이 주는 식물들의 고마움을 생각하면서 걸었다.  전나무 숲길은 시원스럽게 느껴지기 보다는 조금 추운 듯하다. 우리 일행은 이 전나무 숲길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걷다 보니 광장에 도착 되었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옥룡설산의 만년설은 구름 속에 숨어서 보여주지 않는다. 허전함과 실망이 겹친 나는 마음속으로 기도를 드려 본다.

 ‘하느님 만년설을 보기 위하여 저 멀리 이국땅에서 우리 가족이 함께 하였으니 굽어 살피 셔서 짧은 시간이라도 옥룡설산의 주봉을 보여 주 세요’

  그러나 구름에 가린 옥룡설산의 주봉은 열어주지 않는다. 우리는 구름 속 주봉에서 눈이 녹아 흐르는 물줄기 폭포로 만년설을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구름에 가려진 설산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휴식을 취했다. 저만치 처남 내외가 다정하게 몸을 맞대고 사진기 앞에서 멋진 연출을 하고 있다.

  처남 내외는 가부장적인 처남과 삼종지덕을 지키려는 처남댁이 한 쌍의 원앙부부와 같았었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 처남이 가부장적인 의식이 사라지고 민주적이고 부드러운 남편과 아버지로 변하여 현대 사회에 민감하게 적응을 해 버렸다. 항상 먼저 서로를 챙기고 음식이 있으면 밝은 표정과 부드러운 말로 천천히 많이 먹으라고 권하곤 한다. 자식도 중요 하지만 아내를 먼저 챙기는 신세대 부부 같다.

  조금 더 기다리다 설산을 보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아쉬움을 간직하고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다시 곤드라를 타고 하산을 하여 셔틀 버스에 몸을 맡겼다. 셔틀 버스는 작은 소나무 숲 사이 구부러진 길을 달리다가 우리 일행을 옥수채에 내려놓는다.

(옥수채의 전경)

  옥수채는 옥룡설산의 만년설이 녹아내린 옥빛 물로 하늘의 선인이 내려 준 가장 맑은 물이다. 옥수채 맑은 물이 유유히 흐르다가 작은 폭포를 이루니 뭇사람들이 탄성을 자아낸다. 대단한 자연의 신비와 조화이다. 이 자연의 오묘한 섭리에 머리 숙여 바라 볼 뿐 가져갈 수 없는 것이 서운하다.

  옥수채의 맑고 깨끗한 물은 여러 돌 틈 사이를 요리저리 흐르다가 속세에서 흐르던 물과 하나 되어 먼 세상을 위하여 계속 흐를 것이다. 옥수채의 물은 원래의 모습을 잃으면서도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고 적응해 가면서 자기가 갈 길을 꾸준하게 갈 것이라고 생각하니 지금까지 그 무엇을 잡으려고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고 적응하지 못하고 속절없이 살아온 나의 인생이 후회스럽고 허무한 생각이 든다.

  옥룡설산과 옥수채의 비경을 뒤로 하고 동파만신원을 들렸다. 동파만신원은 모계사회인 나시족의 생활상을 볼 수 있는데 그들의 신들을 장승처럼 세워 놓았으며 땅위에 새겨 놓은 벽화에서 나시족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이제 여행의 끝자락이란 생각과 피로감이 겹쳐 지루한 느낌이 든다. 혼자 있는 딸이 이따금 걱정 반 염려 반으로 자꾸 생각이 난다.

  저녁 식사는 한식요리를 하는 음식점에서 그 귀한 자연산 송이의 향으로 입맛을 돋우고 삼겹살 몇 첨으로 배부르게 먹었다.

  우리 일행은 저녁 식사 후 여강 비행장에서 곤명으로 이동하여 처음 묵었던 호텔에 투숙 하였다. 마지막 중국에서의 밤이라 중국 꼬치에 술 한 잔 하기로 했지만 비가 우리 계획을 시샘한다. 할 수 없이 꼬치를 사다가 방에서 술 한 잔을 서로 권하면서 중국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취침 전에 집으로 돌아가기 위하여 여행 가방을 하나하나 다시 챙겨 놓고 잠자리에 들었다. 가방을 정리하다 보니 조금은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평소 보다 눈이 일찍 떨어진다. 아마도 마지막 날 여행이라 아쉬운 마음 때문에 일찍 일어 난 것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중국에서의 마지막 5일째 관광이 시작된다. 아침 식사는 호텔식인데 흰죽에 빵1개로 가볍게 먹었다. 평상시의 반도 못되는 식사양이다. 식사를 마치고 다시 호텔로 들어와 양치를 하고 여행 가방을 끌고 호텔로비로 나왔다. 일찍 나온다고 했는데 먼저 나온 형님 가족의 모습이 눈에 띈다. 내가

  “마지막 관광이네요"

  “다음에 다시 오면 새로운 시작이 잔아”

  하시며 화답을 하신다.

  전용 버스에 올라 서산 공원으로 몸을 움직였다. 시원스레 뻗은 도로에 일터로 나가는 중국인의 자전거와 오토바이가 자동차와 뒤엉켜 하루를 시작하는 모습이 어지럽게 보인다.

  서산 공원은 곤명시를 병풍처럼 둘러싼 커다란 산으로 곤명시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해발 2500m, 2만나 되는 웅대한 산림 공원이다. 산세가 미인이 잠자는 듯하다하여 미인산, 부처가 누워있는 모습이라 하여 와불산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고 한다.

  우리는 리프트를 타고 용문석굴까지 올라간다. 리프트 아래로 보이는 등산로는 잘 정비되어있고 그 등산로에는 산을 오르는 등산객의 모습도 이따금 보인다. 10여분 리프트에 몸을 의지하니 용문석굴에 도착되었다. 용문석굴은 서산공원의 최고의 경치다. 돌 벽 사이를 깎아 사람이 접근할 수 있도록 돌계단이 곳곳에 설치되어 있고 미끄럼을 방지하기 위하여 계단 하나하나를 울퉁불퉁하게 만들어 놓았다. 돌 벽을 깎아서 만든 길을 내려가다 보면 곤명호수를 전망할 수 있는 탁 트인 광장도 나온다. 이 절경을 그냥 눈으로만 보기가 아쉬워 사진 속에 담아둔다.

  용문석굴은 13년에 걸쳐 70여명의 석공들이 하나하나 돌을 조각하여 만든 인공적인 등산로다. 이 돌 벽 사이를 돌고 돌아 내려오면 도교 사원 여러 개가 바위틈에 의지하여 자태를 뽐내고 있다. 깍아 세운 절벽사이의 등산로와 도교 사원이 저 아래 곤명호와 어우러져 또 다른 비경을 관광객에게 선물을 한다.

  서산 공원의 관광을 마치고 대관루로 향했다. 대관루는 곤명호를 사이에 두고 서산과 마주하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

  대관루는 평지 공원으로 근화포, 누외루, 화원 등의 볼거리가 있어 중국의 시인과 문인들이 자주 찾는 곳으로 유명한 곳이다. 대관루 입구에는 사루비아, 메리골드, 다알리아, 홍초, 불꽃맨드라미 등이 여행객들에게 아름다움을 선사해 주고 나무 꽃으로 만든 용과 봉황의 모습이 금방이라도 하늘로 날아가는 느낌을 준다. 대관루를 휘감은 호수에 발로 저어가는 오색 보트가 둥둥 떠다니고 호수를 배경으로 인공 암벽을 세워 놓아 지루함이 없는 공원이다.

  우리 일행은 마지막 관광지인 운남 민속촌을 관광하기 위하여 이동하였다. 운남 민속촌은 운남성의 소수 민족의 삶을 체험할 수 있도록 곤명시 남쪽 교외에 자리 잡은 대형 민속촌이다. 총 넓이 83만ha에 25개의 소수 민족의 생활 모습과 건축물, 의상, 전통춤 등을 재현하여 여행객이 직접 찾아가지 않고 이곳에 오면 손쉽게 체험 할 수 있도록 조성해 놓은 민속촌이다.

  운남 민속촌의 입구에 잘 가꾸어 놓은 나무숲이 멀리서도 아름답게 보인다. 커다란 나무 가지가 하늘을 뒤 덮고 뜨거운 태양빛의 통과를 허락하지 않는 웅장한 나무숲이다. 그런데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시멘트 구조물로 나무 모양을 세워 놓고 그 구조물 사이사이에 덩굴 가지가 잘 자라는 등나무 같은 나무를 심어 하나의 숲을 만든 것이었다. 조금은 허탈 하지만 멋진 풍광을 꾸며 내기 위한 중국인들의 기지를 엿볼 수 있는 곳이었다.

  입구를 막 들어서니 하늘에서 소낙비가 주룩주룩 내려 관광객의 마음을 고달프게 만든다. 우리 일행은 어느 건물 아래에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다 태족이 사는 건축물로 발길을 돌렸다. 마을 입구에 놋쇠 편각이 있는데 3번치면 건강과 행복이 온다하여 힘차게 두드렸다. 편각 소리가 청아하게 울려 퍼진다.

  우리 일행은 고량족 마을에서 와족 마을 쪽으로 관광을 하였다. 와족은 피부가 까맣고 통나무를 악기로 만들어 연주를 하고 있었다. 그들의 전통 가옥 앞에는 야크의 머리가 걸려있는데 이 수가 부의 척도가 된다고 한다. 와족 부락에서 몽골족의 하얀 천막집을 거쳐 이족부락으로 발길을 옮겼다. 이족 부락 입구에는 긴 장대에 오리를 끼어 훈재한 것에 전통주를 팔고 있었다. 우리는 오리 훈제를 안주 삼아 전통주 한잔으로 목을 축이고 코끼리 쇼 장으로 갔다. 가는 도중 5명의 여자들이 높다란 말에 올라 퍼레이드를 하는 모습도 보인다.

하늘에서는 비가 오락가락하고 구름의 변화가 심상치 않게 느껴진다. 코끼리 쇼가 막 시작하려고 하는데 또다시 굵은 빗줄기가 억수같이 쏟아진다. 한참을 기다리다 생략된 부분이 많은 코끼리 쇼를 관람하고 밖으로 나왔다. 이 민속촌을 자세히 관찰하려면 3일정도 걸린다고 하니 우리들은 다음을 기약하고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중국의 마지막 저녁 식사를 오골계 우려낸 국물에 버섯 샤브샤브를 해서 먹고 쌀국수를 끓여 맛있게 먹었다. 해는 서산으로 넘어 가고 거리의 가로등이 반짝 거리는 곤명 시내의 모습이 아름답다. 우리나라 간판처럼 휘황찬란하지는 않지만 정갈하면서도 추하지 않는 간판의 모습이 정겹게 느껴진다.

  우리 일행은 여행의 마지막인 전신 맛사지를 받기 위하여 이동을 하였다. 깨끗하게 정리해 놓은 입구에서 2층으로 올라가 남자와 여자로 구분하여 1시간 30분 정도 맛사지를 받으니 그간의 여행에서 쌓인 피로감이 사라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늘은 무거운 구름으로 뒤 덮여져 있어 영롱한 별빛과 환한 달빛을 보지 못한 것 같다. 고국의 하늘이 그리워진다.

  전용 버스는 곤명공항으로 달리기 시작한다. 30분 정도 달리니 공항이 눈앞에 전개되고 우리는 귀국 수속을 밟고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는 칠 흙 같은 창공 속으로 숨어 버린다. 이국땅의 낯설음과 피로감이 겹쳐 어느 사이 잠에 취해 버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기내 방송소리가 내 귀에 들리기 시작한다. 우리나라의 날씨는 폭염 주의보가 내리고 최고 온도가 34도 되는 무더운 날씨고 현재 기온이 24도라고 방송을 한다. 평균 1800m되는 고원지대의 서늘한 기온 속에 5일 동안을 보낸 나는 또다시 더위의 시달림 속에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앞선다. 마음이 무겁다. 그러나 인간사 모두가 그러하듯 모든 일이 닥치면 슬기롭게 대처하며 살아가듯이 더위 역시 슬기롭게 피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앞선다.

  비행기는 서서히 고도를 낮추더니 인천 국제공항에 사뿐히 내려앉는다. 무사히 여행을 마친 것이다. 내가 외국 여행을 마치고 언제나 느끼는 것이 있다. 우리나라 산야에도 참으로 좋고 갈 곳이 많다 생각이다. 오천년 역사와 문화, 구름 한 점 없는 가을 하늘, 해 맑은 동해의 일출, 깨끗하게 보호되고 있는 철새의 낙원, 부드럽고 아름다운 산야 등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있다. 이것을 외국에 널리 알리고 후세에 그대로 물려주어 길이길이 빛나게 해야 한다.

우리 가족이 고국을 떠난 지 6일 만에 돌아왔지만 떠나 갈 때 산야나 도착할 때 산야나 모습은 똑같은데 더 새롭고 정겹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짧은 5박 6일의 여행이었다. 순수한 자연이 숨 쉬고 그 곳에 살고 있는 소수 민족의 삶을 보고 듣고 체험하는 동안 우리 가족은 행복을 몰고 다녔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 가족 여행을 함께 한다면 값지고 소중했던 이번 여행을 거울삼아 더 멋있고 알찬 여행 계획을 세워 행복이 함께 공유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하고 싶다.

후기

이 글은 중국 운남성 일부분을 여행하면서 현지 가이드의 설명과 필자의 개인 생각을 적어 놓아 정확하지 못한 내용도 있으리라 사료됩니다. 혹 이 글을 인용할 때는 정확한 정보 확인이 필요 합니다.

끝으로 직업의식이 빈틈없는 프로정신의 새만금 관광회사 김사장의 철저한 관리와 세심한 배려로 가족 모두가 편안한 여행이 되었습니다. 또 이러한 여행을 함께 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길 바라며 가족을 대표하여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