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서던 알프스3 블랙피크

헬기 타고 해발 1,800m 캠프지로 올라 ‘별잔치’ 야영

와나카호수는 뉴질랜드에서 네 번째로 큰 호수다. 남북으로 길이가 45km이니 소양호 정도 될 것이다. 최고 수심은 316m나 되는 자연호다. 그러나 크기보다는 그 ‘실용적’ 아름다움이 우리를 매혹했다. 우리가 그간 보아온 두 호수 푸카키와 테카포호수는 밀키블루의 기이한 호수 색깔로 바라보는 아름다움은 대단했지만, 그 두 호수면에서 작은 보트나마 본 기억이 없다.


▲ 블랙피크 남릉을 걸어 내려가고 있는 일행. 오전에 흐렸던 하늘이 푸르게 갰다.
반면 와나카호는 사람과 한결 친숙했다. 손을 담그면 푸르스름하게 물이 들 것 같은 짙은 감청색 호수 위로 날렵한 유람선이 떠 있고, 유유자적하며 맑은 호수면 가운데로 나아가는 카약 몇 척도 보였다. 이를테면 보기만 하는 호수가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직접 교감하며 즐기는 호수였다. 호숫가를 따르는 산책 코스도 여럿 있다고 했다.

와나카 시가지는 와나카 호숫물이 카르도나강으로 흘러나가는 출수구 옆 호숫가에 면해 있었다. 호반을 따라 늘어선 두 아름도 넘는 오랜 수양버드나무 고목들의 긴 가지들은 아래의 잔디밭 그늘에 앉아 호수를 바라보는 사람들을 쓰다듬기라도 할 듯 너울거렸다.

호수 가운데를 가로질러 보고픈 충동을 미리 예측하고 있었다는 듯 제프씨와 김태훈씨는 선착장에 멋진 유람선 한 척을 대기시켜두고 있었다. 조타실 뒤 식탁이 놓인 갑판에 올라 커피와 과자를 들면서 우리는 와나카호의 풍광을 더불어 음미했다.

▲ 블랙피크 남릉을 오르는 일행. 풍화작용으로 부서진 얇은 편마암들이 깔려 있다.
이 날 우리는 상류쪽으로 20km쯤 거슬러 오른 지점의 호수 서안에서 내려 호숫가를 따라 8km 정도 걷는 트레킹을 즐겼다. 굵은 모래사장 호숫가에 가지런히 떠밀려 나와 기나긴 이랑을 이룬 고사목들, 숲속의 작은 여울, 샛노란 브룸꽃밭, 완만한 구릉 너머 가파른 절벽 아래로 펼쳐진 호수면, 흰 구름을 인 건너편 산봉우리 등으로 2시간 남짓 이어간 와나카호반 트레킹이 실은 보름간의 뉴질랜드 여정 중 가장 그립게 회상된다.

다음날 우리는 블랙피크 산행을 위해 헬기에 올랐다. 헬기로 일단 해발 1,800m 고지대까지 가 하룻밤 자고 다음날 블랙피크 정상으로 오르는 것이다. 헬기 양옆에 매단 짐 박스에 텐트며 침낭, 먹을 것 등속을 넣고 나서 조종간을 잡은 뉴질질랜드 처녀 조종사 알렉산드라 양(29)은 마치 소형 자가용차 몰듯 생글생글 웃어가며 가볍게 날아올랐다.

▲ 햇살이 비추고 있는 블랙피크 남릉과 와나카호. / 블랙피크 정상. 서던 알프스의 만년설과 푸른 와나카호수도 바라뵈는 멋진 조망처다.
헬기로 1,800m 지점 야영지까지 올라

블랙피크는 정상부가 검은 색 바위로 된 암봉이어서 준 이름이다. 검은 바탕에 잔설이 길쭉하게 남으며 영락없이 흰 얼룩말 무늬를 이루었다. 처녀조종사는 해발 2,289m의 블랙피크 정상부를 시계 반대방향으로 한 바퀴 빙 돌며 구경시켜준 다음 정상 남쪽 약 2km 지점의 능선 상에 이루어진 아늑한 분지의 눈밭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헬기가 사라지고나자 갑자기 사위는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아무도 없는 깊은 산중의 대청봉보다 더 높은 곳에 우리만 홀로 남은 것이다. 얘기를 주고 받다가도 말을 그친 순간이면 이내 밀도 짙은 적요가 공간을 채웠다. 햇살이 닿아 바스라지는 미세한 소리라도 들릴 듯 맑은 적요였다.

▲ 블랙피크 남릉의 절벽 위. 와나카호수와 호수로 사행하고 있는 와투키투키강 줄기가 시종일관 바라뵈는 능선이다./ 헬기에서 짐을 내린 뒤 한 데 모여 앉은 일행.
분지 서쪽 저 앞 둔덕엔 자그마한 대피소가 세워져 있다. 거기서는 두 안내자만 자고 손님들에겐 고지대에서의 고요한 막영을 체험케 할 것이라 한다. 평평한 눈밭에 텐트를 친 뒤 제프는 그물을 뒤집어씌운다. 키아(Kea)라는 새 때문으로, 커다란 닭만큼 큰 이 새는 텐트 안에 먹을 것이 있나 해서 갈고리 모양의 날카로운 부리로 텐트를 찢는다는 것이다.

둔덕 위 대피소 서쪽 벽 앞은 오후 햇살로 따스했다. 대기는 미동도 없었다. 거기에 식탁을 펴고 두툼한 쇠고기와 양고기로 스테이크를 만들어 포도주를 곁들인 고산 만찬을 즐기는데 역시, 키아라는 녀석들이 음식 냄새를 맡고 사방에서 몰려들었다. 사람이 자신을 해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아는 키아들은 바로 옆까지 다가와서 먹을 것을 노렸다.

잠시 한눈 파는 새 한 마리가 눈밭에 파묻어둔 맥주 캔을 파내어 부리로 구멍을 뚫은 다음 반 남짓 마셔버렸다. 취기에 겁이 없어졌는지, 이 녀석은 바로 앞까지 다가와 접시를 기웃거렸지만, 제프는 단 한 조각도 던져주지 말라고 했다. 물론 자연적응력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한 배려지만 녀석들은 야속하다는 뜻임이 분명한 소리로 키악 키악 하면서 대피소 주변을 맴돌다가는 계곡 저 아래로 사라졌다. 키아들이 사라져간 계곡은 물론, 흰 눈이 긴 얼룩무늬를 이룬 블랙피크 주변을 제외하면 이 일대도 첫 트랙이었던 에리카피크 능선처럼 온통 누런 투속의 왕국이었다.

▲ 블랙피크 정상을 향해 편마암 능선을 오르고 있는 일행. 왼쪽 동사면은 매우 급준한 절벽 지대다.
단 한 점의 구름도 없는 푸른 하늘이 오후 내내 이어졌다. 의자를 대피소 밖에 내놓고 앉아 나른한 졸음기에 몸을 맡겼다가 섬뜩한 한기에 눈을 떠보니 막 해가 아마득히 저 멀리 서던알프스의 무수한 침봉 능선 뒤로 넘어가는 중이었다. 밤이 되며 블랙피크의 하늘은 가루를 뿌린 듯한 숱한 별로 가득 찼다.

패스트리처럼 얇은 편마암 능선

간단히 조식을 마치고 오전 7시30분경 우리는 설계 밑으로 흐르는 물로 수통을 채운 뒤 블랙피크 정상으로 향했다. 아직 아침녘이어선지 설면은 단단하여 킥스텝이 먹히지 않았고, 아이젠은 미처 준비하지 않은 상태였다. 자칫 미끄러지면 저 아래 검은 바위가 드러난 계곡 바닥까지 대책 없이 미끄러져 내릴 것이다. 위험했다. 제프는 오른쪽 위의 암릉으로 방향을 틀었다.

검고 종잇장처럼 얇은, 흡사 패스트리 같은 편마암 능선은 전에 보지 못한 기이한 풍경이었다. 능선 너머 저 먼 곳에는 우리가 어제 유람선을 타고 가로질렀던 와나카호수가 면경처럼 번들거리고 있었다.

블랙피크의 동사면 기슭으로는 넓고 큰 마투키투키강이 흐른다. 장구한 세월 이 강물이 흐르며 침식작용을 한 블랙피크 동면은 급경사를 이루었다. 그 위의 능선을 걸으며 보는 경치는 당연히 좋을 수밖에 없다.

▲ 대피소 지붕 위에 앉은 키아.
돌을 날릴 듯한 강풍이 몰아쳤다. 패스트리처럼 얇은 면이 수십 겹으로 드러난 것은 이 세찬 바람의 풍화작용 때문일 것이다. 모자를 뒤집어쓰고 고개를 숙인 채로 걷다가 너무 한기가 들어 능선 너머로 북서풍을 잠시 피해 옷을 겹쳐 입은 다음 다시 능선으로 나섰다.

능선은 평평하여 걷기 좋았으나 중간에 험상궂은, 넓적바위들이 함부로 쏟아부은 듯 얼키고 설킨 가파른 암부가 가로막고 나선다. 자칫 잘못 디디면 발이 미끄러지거나 바위 한쪽이 들먹하면서 균형이 깨지곤 해 다들 긴장했다.

정상 턱밑으로 다가든 이후 제프는 왼쪽으로 설면을 가로질러 나아갔다. 눈이 다소간 녹은 상태이긴 했지만 가파르고 긴 설면 위여서 또한 긴장 속에 전진했다. 대개 이 시기에 여기 눈이 이렇게 많은 것은 극히 이례적이라며 제프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서릉 위로 올라선 다음 바윗길을 얼마 걷지 않아 블랙피크 정상이었다. 물론 사방이 장관이었지만 뭐, 이제 특별히 감격스러울 것은 없었다. 우리의 눈은 그새 배가 부를 만큼 불렀던 것이다. 편안한 마음으로 바위지대 여기저기 자리 잡고 앉아서 따끈한 차와 간식을 들며 주변 풍치를 완상했다. 만년설로 희디흰 띠를 이루며 뻗어나간 서던 알프스 산맥은 아직 구름장이 채 걷히지 않았지만 광채로 빛났다.
▲ 블랙피크 설면을 오르고 있는 일행. 아침에는 다소 미끄러워 조심스러웠다. / 블랙피크 대피소의 따스한 벽 앞에 식탁을 차려놓고 스테이크를 굽고 있는 일행.
부드러운 호안선을 드러내며 누운 와나카호수는 흐린 하늘로 잿빛의 금속면이거나 아니면 굳게 얼어붙은 얼음벌판 같았다. 하늘은 흐렸으나 대기는 역시 맑아서 아마득히 저 먼 곳까지도 선명했다. 여기서 마운트쿡까지는 직선거리로 약 150km이니 서울~대전간 거리보다 더 긴데, 아슴하니 멀기는 해도 그 윤곽은 또렷했다. 그 모든 풍경을 모두가 충분하다고 느낄 만큼 오래도록 앉아 바라본 뒤 하산을 시작했다.

긴 엉덩이썰매로 하산

하산은 한결 안전하고 쉬워졌다. 출발 후 3시간쯤 지나며 이미 설면이 부드러워져 발디딤이 확실해졌고 제동 또한 쉬워져서 너나없이 엉덩이썰매를 탔다. 그렇게 길게 엉덩이썰매를 타보기는 아마도 모두들 처음일 것이다. 3km 거리의 하산은 그렇게 재미있고 편하게 단 1시간만에 끝났다.

캠프지에 다달아 다시 스테이크와 적포도주로 맛있는 점심을 들고 난 다음 잠시 쉬었다가 텐트를 걷었다. 곧 알렉산드라 양이 헬기를 몰고와 짐을 모두 싣고 갔다. 우리는 아래로 능선을 따라 두어 시간 더 걸어보기로 했다.

왼쪽이 급준한 절벽을 이룬 기나긴 능선을 따라 천천히 내려가며, 어느덧 파랗게 구름이 걷힌 하늘과 그 하늘빛을 받아들여 역시 검푸른 빛을 되찾은 와나카호수를 이윽히 바라보기도 하며 블랙피크 남릉 트랙을 즐겼다. 한낮이 되며 따끈한 햇살과 서늘한 대기의 앙상블이 또한 감미로웠다.

4km쯤 그렇게 내내 조망이 좋은 능선을 따라 간혹 쉬기도 하며 두어 시간 걸어내려간 다음 아늑한 안부의 풀밭에 앉아 해바라기를 하는 사이 다시 헬기가 날아왔다.

오후 들며 다소 거칠어진 기류 때문일까. 10분도 채 되지 않는 비행에도 멀미기가 느껴져 버스에 오르자마자 눈을 감고 졸다가 누군가의 긴 감탄사에 눈을 떴다. 와나카 시가지의 그 호반 잔디밭 옆이었다. 바람이 불며 늘어진 수양버들이 일제히 춤을 추었고 와나카호수면은 크고 작은 파랑으로 파르르 몸을 떨었다. 그 생동하는 호반으로 불그스레한 노을이 비추며 만물을 황금빛으로 옅게 도금하듯 했다. 그 비길 데 없이 찬란한 와나카호반의 초여름 석양 풍광을 나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글·사진 안중국 차장 tksdkr@chosun.com
* 관리자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8-06-05 07: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