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대마도 시라타케산과 아리아케산 트레킹 그리고 조선통신사 문화유적을 따라서...1

일본
일본은 우리나라와 제일 가까이에 있고 사면이 바다로 둘러쌓여있는 섬나라!
가까이에 있으면서도 멀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예전
후지산을 다녀오고나서 내가 왜 후지산을 왔지 하면서 후회를 했었던적이 있었다.
나무한그루없는 빨간흙의 휴화산!
약간의 고소를 느끼며 우리와의 산행이 격이 달랐던 것은 나만의 느낌이었을까?
분명한 것은 후지산을 다녀오고 내가 왜 이곳을 찾아왔나? 하고 후회를 했던일이다.

== 토속신앙터 ==


그이후
세월과 시간이 흘러서 대마도를 찾게되었다.
일본의 100대 명산안에 든다는 단 하나만 가지고 찾아가게 되었다.

쯔시마 (대마도) 의 개요
위치 : 동경129도, 북위34도, 일본큐슈에서 132킬로미터, 한반도에서 불과 49.5킬로미터의 위치의 거리에있는 큐슈 최북단의 국경의 섬이다.

면적 : 709평방킬로미터, 거제도보다 크며 제주도보다 작다.

인구 : 쯔시마 전체는 약43000여명, 섬의 중심지인 이즈하라는 약16000명 정도이다.

행정구분 : 나가사키현에 속해있으며 크게 윗섬(상대마도) 과 아랫섬(하대마도) 으로 구분하고, 6개의 쵸단위로 나누어져있다.

특징 : 대마도본섬 외에 109개의 작은섬을 가지고 있으며, 그중 사람이 살고있는곳은 5곳의 섬이있다.
섬전체의 80%가 울창한 원시림이고 일본 본토에서 볼 수 없는 대륙계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으며 산해진미 또한 풍부하다.

특히 옛부터 대륙(한반도)과의 인적,물적교류의 많은 사적등 문화유산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는 역사의 섬이기도하다.


== 돌신사문 ==


김수인, 김정순, 오창수님과 함께 동행을 하게되었다.
우리는 오랜친구처럼 소박한여행과 즐거운시간을 같이 했는데 참 좋은분들 이었다.

초행길의 대마도여행
현해탄을 건넌다.
일본 본토보다 한국이 더 가까운곳!
가까운곳이면서도 가보지않았던 이곳을 답사차 나섰다.

나와 김수인,김정순님 부부는 새벽1시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심야우등버스를 탔다.
김수인선배님은 주중 낙동정맥종주와 낙남정맥종주를 같이하고있는, 이해와 상대배려를 잘하는 사업을 하는 선배님으로,
사모님은 처음 뵈었으나 인자하신 모습이었다.
나는 금새 잠이들었었나보다.
고속버스가 휴게소에서 약20분 정차할 때 버스에서 내렸으니 단잠이 들었었나보다.
밖에는 굵은비가 내리고 있었다.
2003년 6월28일 오전5시30분경 부산노포동 터미널에 도착해 곧바로 오창수님에게 전화를했다. 야간열차로 부산에 일찍 도착했다고한다.
오늘현재 오후부터 전국적으로 철도파업으로 인해 6월29일 서울귀경편이 어려울것같아
(기차표는 미리 예매했었음) 같이 올라가는 것으로 예매를 하기로 통화를 마친후 부산국제선 여객터미널에서 합류하기로 했다.


== 산행중에 만나는 토속신앙터 ==

처음같이 하는 분으로 좋은분을 만났다.
오창수님은 현직 변호사로 첫인상이 수수하고 소박한 모습이어서 오랜친구처럼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유머감각이 좋아 웃음도 자아내게 하는 친근하고 편안한 사람이었다.

우리 네사람은 인사를 마치고 수속을 마친후, 그리고 초행길의 가이드, 이호준씨도 만나 총 5명이 짧은 만 이틀간의 여행길에 오른다.
부산항의 바닷내음이 코끝을 자극한다. 다행이도 비는오지않는 흐린날씨속에 썬플라워 (466톤, 약246명승선,) 에 올라 배가 물길을 가로지르기 시작한다.

대마도는
대륙과 가장 가까운 국경의섬 <쓰시마섬>으로
그 지리적 조건으로 인해 예부터 일본과 대륙과의 문화교류에 있어 중요한 거점이었다.
중세에서 근세에 이르기 까지 귀중한 역사적, 문화적 유산이 많이 남아있기도하다.


== 시라타케 정상 바로전의 안부 ==

대마도와 조선
14~15세기 왜구의 시대를 거쳐 소오(宗)씨가
조선무역의 실권을 독점해갔던 무로마치시대(1338~1578)에 일본과 조선은 대체로 평화로운 외교관계에 있었다.
이때의 대마도, 도주는 소오 사다모리 로서, 거처를 사가에 두고 도선과 활발히 무역을 하고있었다.
이러한 평화로운 양국관계에 있어 조선국왕은 무로마치의 장군 아시카가씨를 일본국왕으로 인정하고

1428년이래 수차례에 걸쳐 일본으로 정식 사절단을 파견하였다.
(조선통신사의 시초) 그러나 이러한 우호관계는 1590년이후 일본 국내외의 사정에 의해 중단되어 버린다.


== 시라타케 정상 암릉구간 ==

그후
단절된 조선과의 관계가 소오씨의 노력에의해 부활한 것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한 전쟁후인 1607년 이었다.

그 해 대마도를 개재한 도요토미 신정권의 요청에 의하여 수호(국교회복)의 사절을 보내온 것이다.
이후 조선국왕은 도코가와 이에야스의 우호적인 정책을 받아 에도에 대해 1811년 까지 약200년동안 12차례에 걸쳐 통신사를 보내왔다.

엄격한 쇄국정책하에 에도 에 들어올수 있었던 유일한 외교사절, 그것이 조선통신사였다.
이러한 사절을 맞이하는측인 일본, 그 실무를 담당하는 대마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이 아메노모리 호슈(1668~1755) 였었다. 등등.....

근세 에도시대, 선린우호 하에 일본과 조선사이에 이루어진 대등한외교, 오늘날 국가외교의 본연의 자세를 생각할 때
조선통신사가 상징하는 교린의 역사적 사실은 우리들에게 큰 계시를 준다... 일본대마도 역사민속자료관의 자료에서...


== 시라타케정상 ==

대마도로 향하는 배안에서도 잠깐 잠이들었다.
이내 안내방송이 흘러나온다. 잠시후 이즈하라항에 도착한다고.....

계속...


▣ 조금초보 - ㄴㅏ도가고싶다

* 운영자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4-11-12 13: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