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과 인간세계를 연결 했던 태산을 등정하고...                                                                                          산으로  

태산을 가려고 하니 어렸을 때 암송했던 태산에 대한 시조가 떠 올랐다.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건 마는
사람이 제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태산을 비유해서 씌어진 시조로 아무리 어려운들 계속해서 이룬다면 않될게 어디 있겠냐 하는 그런 의미로 해석된다.  그런데 중국인들은 왜 태산을 그렇게 높게 보았을까?  왜 그들은 그렇게 칭송하고 숭배했을까?

▲(서해의 상공)
태산을 2004년 01월 12일에 올랐다.
태산은 중국 산동성 태안시에 위치하며 해발 1545미터의 그리 높지 않은 산이다. 그런데 이곳에 와 보면 태산을 바라보는 느낌이 조금 다르다.
▲(화북평원)
 이산은 예로부터 중국의 뭇 제후나 황제들로부터 숭배의 대상이 되어 태산을 오르지 않으면 않되는 산이었다.
 이로인하여 태산은 고대로부터 중국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그결과 지금은 국제 유네스코에 산자체가 문화재로 등재되었으며 개활된 유적 박물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태산은 중국의 5악 중에 제1악인데, 5악에는 태산,항산,화산,숭산,형산 이렇게 5개의 산이 있는데 그중에 서도 가장 으뜸으로 치는 산을 태산이라고 하는데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중국의 삼대 평원중에 하나인 화북평원!   산동지방에 펼처진 끝이 보이지 않는 평야 지대!
 이 평원을 가로질러 고속도로를 자동차로 5~6시간을 달려가도 끝이 나타나지 않는 그런 광활한 평원이 전개되는 상상을 초월하는 그런 평야 지대!   이평원을 화북평원이라 하는데, 이런 평원지대에 우뚝선 산이 있으니 바로 이 산이 태산이다.
 그래서 고대로부터 이지역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들은 우뚝 솟은 이 山을 보고 경외스럽고 두려운 대상이였으며 숭배의 대상으로 여겼을 것이다.
 한국에서 이만한 높이의 산을 굳이 찾는다면 함백산이나 태백산 정도 높이의 산이라 할까???
 아무튼 평원위에 우뚝선 태산은 산동지방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평원에서 보게 되면 그 위용이 대단하다.
 그리고 이 태산이 있는 곳에서 멀지않은 곳에 황하강이 흘러 가고 있다.
 황하는 동북아시아의 문물의 발상지를 만든 젖줄이 였음을 우리는 익히 안다.
 이런 황하강이 산동성의 비옥한 화북평원을 만들었고 그로 인하여 산동성의 수도인 제남시가 구성되었다.  상류로부터 실려온 황토는 광활한 화북평원을 비옥한 토질로 구성하며 전개한다. 그런 지역에 우뚝 서있는 태산을 보고 경외스런 마음이 일지 않는다면 이상하리라.
 이런 환경 속에서 인간은 태산을 숭상의 대상으로 삼을 수 밖에 없었던 것 같다.
하물며 공자께서도 중국 전체를 주유 하셨으면서도 태산에 올라서서 산아래를 보고는 세상이 좁다고 하였다하니, 공자의 사상은 저버리더라도 조금은 이해가 되는 것 같은 심정이든다.
▲(태안시에서본 태산자락 모습)
태산을 오르기전에 거쳐야 하는 관문이 있다.
 제1관문을 통과해야 하는데 태산을 오르기 위해 신고식을 하는 곳으로 예로부터 황제가 태산에 올라 하늘에 제천의식을 거행하게 되는데 먼저 땅의 신에게 제를 올리고 가야한다.
 그게 바로 태안시에 위치한 대묘다.
 중국에는 3대 고 건축물이 있는데 그 크기나 규모는 모두 같다고 한다.
 이는 북경의 자금성, 곡부에 있는 공자의 사당이 있는 공부, 그리고 태안시에 있는 대묘라 한다.
▲(위의 사진은 대묘 정문임)
▲(위의 사진은 곡부에 공자사당인 대성전임)
대묘가 지어지게 된 전설이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옛날 이곳 대묘자리에 태산신을 믿는 도인이 있었다 한다.
그런데 이 도인은 근검절약으로 초근 목피로 연명을 하며 비가 새고 하늘이 다 보이는 그런 집에 살면서 오로지 태산신하나만 믿으며 의지하고 살았다.
그런데 하루는 태산에 올라같다 왔는데 그렇게 절약하여 모아둔 돈을 도둑이 들어 몽땅 가져 가고 말았다.  이를 도둑맞고 나니 태산신을 의지하며 그렇게 근검하게 살았는데 그 보람도 없이 이런 변을 당함에 도인은 하늘이 무너지는 서러움으로 목놓아 울다가 그만 실신을 하고 말았다.
 그런데 실신한 상태에 비몽사몽 간에 꿈 같은 느낌을 받았는데 자신의 몸이 태산의 위에서 구름같이 가벼운 듯 황홀한 느낌을 받으며 자신이 있음을 느꼈다.
 이때 하얀 도포를 입은 신령이 나타나서 도인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내가 그대의 지극정성을 모두 알고 있으니 너무 상심하지 말라.” 하며 말하더니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다.
“지금 이나라에 공주가 위중한 병에 걸려서 몸져 누워있으니 그대는 지금 이것을 가지고 황궁으로 가서 이런 저런 처방으로 공주의 병을 고쳐 주거라.” 하고는 사라지고 말았다.
 

 그래서 도인은 신령의 말대로 황궁을 찾아가서 황제를 알현하고 공주의 병을 낮게 하여 주었다.
이에 황제가 감사의 댓가로 도인에게 “그대의 소원을 하나 들어 줄 테니 말하라” 하고 하명을 하니 도인은 엎드려 아뢰기를 “이 황궁만한 집을 태산아래에다 지어 주십시오.” 라고 했다.
 이에 황제는 자신이 약속한 사항이라서 거부할 수는 없고 하여 대신들과 의논을 하여 황실보다는 벽돌3단이 낮게 하여 짓기로 결정을 하여 지금의 건물을 지어 주었던 것이다.’
 이래서 이곳 태산아래 대묘의 건물이 지어지게 되었으며 오늘날 중국에서 3대 고건축물로 남게 된 것이라 한다.
 아무튼 이곳 대묘는 역대 황제나 제후들이 태산을 올라 천신께 제를 올리려면 일단은 이곳에서 먼저 태산을 오르겠다고 지신[地神]인 황비호에게 고하고 태산을 오르게 되었다 한다.

▲(대묘의 주인장 황비호 제당임)
 ▲(누구나 쉽사리 태산을 오를 수있도록 케이블카가 놓여 있다.)
 예전에는 오로지 발품을 팔아야만 이곳을 오를 수 있었기에 신성한 태산을 오를 때는 언제나 대묘를 통과하여 대묘에 신고를 하고 오르게 되었다.

 고대부터 이길을 통하여 뭇 제후나 황제가 오르게 되다보니 등정길을 수없이 다듬고 고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이곳에 오르는 등정길은 산정상까지 화강암을 쫗아서 계단을 만들었으며 그주변은 골동품 같은 유적이 구석구석 산재해 있다.
 이렇한 역사가 깊게 묻은 태산!!!   그러다 보니 이곳 태산은 수많은 전설과 설화가 산재해 있다. 그래서 그중에 하나 태산과 대묘에 연관된 전설을 소개해 보면...
 

 옛날 옥황상제의 자식인 오뉘가 이곳 태산에 놀러 오게 되었다.
그런데 태산이 하도 높고 아름다워 서로 둘은 자신이 그 산을 갖고 싶었다.

▲(황비호 제당) 그래서 둘은 내기를 하기로 하고 먼저 태산에 올라 가는 자가 태산의 주인이 되기로 약속을 했다.
 그런데 동생인 백화원군은 가만히 생각하니 여자의 몸으로 남자를 경주에서 이길 수가 없을 것 같아 잔꾀를 내게 되었는데 그녀는 황비호 몰래 전날 먼저 올라가서 자신의 꽃신 한짝을 정상에다 벋어 두고 왔다.
 다음날 둘은 경주를 하기로 하고 산을 오르게 되었지만 오빠인 황비호가 태산 정상에 올라가서 아무리 백화원군을 기다려도 올라 오지 않으니 황비호는 하는 수 없이 아래로 내려 올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내려 와서 보니 백화원군은 아직도 그곳에 있었다.
 그래서 황비호는 자기가 이겼다고 백화원군에게 얘기하니 거꾸로 백화원군은 자신이 이겼다고 우겼다.
황비호가 무슨 근거로 너가 이겼다고 하느냐고 물으니 백화원군이 말하기를 태산정상에 가보면 내가 오빠보다 먼저 올라갔다오면서 근거로 자신의 꽃신을 두고 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둘은 확인을 하러 올라 가보니 사실이었다.
 결국은 백화원군이 태산의 주인이 되고 황비호는 대묘의 주인이 되었는데 대묘의 주인은 땅을 관장하는 신이 되었고 백화원은 태산을 관장하는 신이 되었다 한다.
 

 어찌 되었든 간에 중국의 지배자들은 태산에올라 제천의식을 거행하기위해서는 먼저 황비호에게 고하여 태산을 오르게 허락을 받았던 것이었다.
 대묘 후문을 통과하여 지금의 매표소를 지나면 본격적인 태산을 오르는 계단이 나타나고 이 계단을 지나 중문을 오르게 되는데 이곳까지의 계단 수만 하더라도 7421계단이라고 하며 중문에서 남천문까지가 가장 급경지대로 계단수가 1633개라고 하니 도합 9054계단이다.
 그러나 남천문에서 정상까지의 계단은 이에 포함이 않되었으니 약 1만개가 넘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산을 타보면 가장 힘들어하는 것이 돌계단을 오르고 또 내려 오는 것이다.
 올라 갈때는 힘에 겹겠지만 내려올때가 더욱 곤란함은 모두 아는 사실이니…

▲(남천문) 남천문을 지나면 비교적 근대에 만든 것 같은 탑문이 있는데 天街[하늘길]라고 각인 되어진 석문 탑이 있다.
 하늘길이다.
 비교적 평지로 된 이길은 해발 고도가 1400여미터 정도 되는데 이곳에 넓다랗게 길을 만들어서 바닦에 화강석을 다듬어서 깔아 놓았다.
 예전부터 깔린 돌 같았다. 물론 황제나 제후들이 이곳을 올라야 했기 때문에 당연히 그렇게 해야만 되었을 것이다.
 하늘길을 걷다보면 태산의 남쪽 방향으로 태안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고 멀리 화북평야지대가 지평선에 닿아서 아주 작게 보이니 하늘에 놓여있는 길 같아서 하늘길이라고 이름 지어 진 것 같다.
 ▲(천가)평원위에 우뚝선 태산!
 그래서 중국인들은 고대로부터 태산을 더욱 신령스런 산으로 여겼을 지도 모른다.
 하늘과 맞다아 있는 산으로 평원에서 쳐다보면 더욱 웅장하고 장엄한 산으로 숭배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것 같다.
하늘길 입구에는 조그만 호텔이 있다.
 우리는 거기에 들어가 보지 않아서 내부의 시설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시설이 잘되어 있을리는 만무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 높은 지역에 물도 변변찬을 것이고 그러면 당연히 시설관리도 그렇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시내의 특급 호텔도 한국에 오면 일반 여관 수준 정도 밖에 않된 노후된 시설과 인테리어 그리고 내부 비치물들….
아무튼 이러한 이미지가 내게 다가왔으며 중국의 생활상과 현실태가 오늘을 대변해 주는 듯 하다.
그리고 문화재 관리도 잘 되어 있지는 못하다.
모든 문화재는 경제적 여건 때문에 그런지 투자가 되지않아서 시설물 관리가 부족하다.
특히 단청이 모두 하나같이 노후되어 밝은 느낌이 없다.
이런 이미지가 처음부터 시야에 들어오니 모든게 그런 생각으로 내마음에 다가 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이렇게 훌륭하고 찬란한 문화재를…

중국이 잠에서 깨어 나고 있다지만 내마음의 구석에는 아직도 10년은 더 지나야 오늘날 한국의 90년대 수준으로 다가 올 것 같다.
기우일까?
나는 기우가 아닐 것 같이 느껴지며 그게 현실로 보여 진다.
▲(대묘에서 태산을 오르는 주 통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표지) 하늘 길을 지나다 보면 유네스코에서 태산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기념비가 있으며 이를 더 지나 계단을 타고 오르면 우로는 기상대가 고건축양식으로 주의 배경에 맞게 지어져 있다.
그리고 좌로는 백화사가 있는데 이곳이 바로 태산의 주인인 백화원군이 모셔진 사원이다.
▲(백화사 전경)

 백화원군 정문을 통과하여 내부로 들어가면 마당 한복판에 향로 같은게 있는데 이를 보호하기 위하여 철재로 울을 쳐 두었다.
 그런데 이곳에 온통 붉은 천조각과 자물통이 수없이 잠겨 있는데 이 자물통이 중국인의 도교적 믿음에서 나온 하나의 양식으로 보이는 재미있는 풍습이 있다.
 중국의 청춘남녀가 사랑에 빠지면 시내에서 자물통을 사서 대묘뒤에서 열어 가지고 이곳 태산에 올라 둘이서 영원히 헤어지지 말고 서로 잠겨있어야 한다는 의식으로 자물통을 이곳에 잠그고 그 열쇠는 태산 절벽 아래로 던져 버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곳에 오면 정상 구석구석에 자물통을 걸 수만 있다면 줄줄이 잠겨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세계 이혼율 1위인 우리 한국의 청춘남녀도 이런 의식을 하여 보고 결혼을 한다면 어떻 할까!!!!

▲(백화사 경내)

 백화사를 옆으로 빠져 나가면 대관봉이라는 암반이 수직으로 절개되듯 서있는데 이곳은 뭇 황제와 제후가 필체를 휘날려서 이암벽에다 자신을 드러 내 놓았다.
모두 알 수가 없어 안타 깝다.
이곳은 중국의 황제들을 위하여 존재하는 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곳인데....

오늘 나도 이곳에 섰다.
그리고 과거의 그들의 영화속에서 태산을 올라야만 했던 심정을 조금은 알 것 같고 느낄 수 있을것 같다.

▲(대관봉


 대관봉에 당현종이 쓴 ‘기태산명’ 이란 글귀가 황금색을 띄고 우측 상단에 보인다. 그는 이곳에서 봉선을 하기위해 백마를 타고 재상과 제사관들과 함께 올랐다.
 제사를 마치고 손수 붓을 쥐고 자신의 공덕을 드러내는 비문을 썼는데, 그게 유명한 정상의 대관봉[大觀峰] 절벽 우상단(즉 당마애[唐摩崖])에 새겨져 있는 기태산명[記泰山銘](일명 당마애비 [唐摩崖碑])이라는 글귀다.
 누구도 비밀로 천제께 자신의 소원을 말했다는데, 드러내 놓고 자신의 등정기를 바위에다 1800자를 기록한 사나이다.
 양귀비를 희롱하면서…    혹자들은 이곳이 중국의 살아있는 서체의 전시장이라고 까지 했다 한다.
 일리가 있는 느낌이다. 무지한 본인이 보아도 휘날린 멋들어진 글자를 보며 아! 잘 썼다란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으며 저렇게 멋들어진 체로도 쓰는 구나하고 느껴 본다.
 왼쪽 상단 옆을 보면 청대 강희황제가 썼다는 운봉[雲峯]이란는 글이 보인다.  뭐라고 해석을 해야 할까? 구름운[雲]에 메 또는 봉우리 봉[峯] 구름의 봉???
 태산이 높아서 구름위에 자주 가리니 그런 뜻에서 이렇게 썼을까?  아무튼 모두 알 수가 없으니 이를 뒤로 하고 올라서면 또다른 특이한 비가 하나 우뚝 서있다.

▲(무자비)비문이 없는 비석 일명 무자비[無字碑]!
 이비석은 글자가 없다.
 그래서 무자비라 하며 이 비는 한나라 때 한무제가 세웠다는 설도 있고 진시황이 세웠다는 설도 있다. 누가 세웠건 간에 비문이 없는게 특이하다.
 일설에는 한무제가 자기의 공덕이 특이하기 때문에 글을 넣을 필요가 없다고 하여 글을 넣지 마라 했다나!!!???
 역시 호걸스런 제왕답게 멋진 구석도 있는 것 같다.
 그런 그였으니 나라를 얻기보다 유지 하기가 더 어렵다는 고조 유방의 말을 잘 실천 하였을까!!!???
 한무제 그는 고조의 힘을 얻어 18세에 등극하여 50년이 넘게 통치자로서 나라를 튼튼히 하므로서 제왕의 길을 다졌다는 사실로 보아 그가 고조할아버지인 유방의 지략과 덕행을 이어 받은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여휴 지겨워라 50년을 통치자로….^^
▲(옥황정) 드디어 옥황정이다.
 옥황정은 태산정상에 4면으로 휘둘러서 건물이 지어졌고 그 한가운데 태산 정상석이 1545미터를 알리고 서 있다.
 정문이 남향으로 있고 옥황정의 문을 들어 서면 정상석이 마당 한 중심에 세워졌으며 문을 바로보고 북향으로 옥황정 본당이 있다.
본당에 들러 잠시 약식의 예를 하여 삼배를 하여 본다.
내마음의 소원을 기원해 본다.
부질없고 연약한 인간이기에
소원을 빈다.
소원 없는 소원을 빈다.
무소원이 소원입니다.
라고….
……

▲(태산 정상석) 이렇게 해서 태산을 올랐다.
뭇제후나 제왕들이 올라야 했던 태산을…
산의 형세를 관찰 한바 그렇게 뛰어난 용모도 아니고 비경을 간직한 것 같지도 않은데…
이름만큼 유명세로 온천하에 수천년을 내려온 산이란 것 밖에...
그래서 더 유명한 산이 아닐는지 하고 생각을 하면서 태산을 내려 왔다.

더만은 사진 구경은 : http://www.san2.co.kr 을 누루세요
2004/01/17 정 신기



▣ 永漢 - 재미있는 상세한 설명과 글, 잘 읽었습니다. ^^
▣ 팔봉 - 아주 재미있는 후기였습니다.꼭 가고싶은 산인데.....
▣ 팔봉 - 아주 재미있는 후기였습니다.꼭 가고싶은 산인데..... * 운영자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5-02-20 21: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