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의미 있는 칠순기념 해외여행

여행지: 북경.> 고궁박물관.> 용경협. >만리장성.> 왕푸징거리. >시내야경. >

           토문강(두만강). >용정중학교. >일송정. >만주벌판 >백두산

일    시: 2007.8.13~8. 17일까지(4박5일)

인    원: 조응구(70세) 처하자(66세) 조남규(42세) 임은주(43세) 조은비(15세) 조정연(11세)

 

15일 3일째의 날 아침에 이르나 정연이가 밤새 열이 없이 잠을 잘 잦은지 궁금하여 물어보니 잘 잦다고 하여 한숨 돌리고 7시에 아침을 먹고 8시경 연길(延吉)행 비행기를 타고자 북경 국내공항에 10시 도착하여 수속하고 11시 출발 연길(延吉)행 비행기 앞좌석에 몸을 싫었고 비행기는 11시 정각에 북경 국내공항 활주로를 이륙하여 이내 비행기는 고도의 안정을 찾고 우리는 피로도 모른 채 기내식으로 간단히 식사를 하고 잠이 들었다.

잠을 깨니 연길 공항에 비행기가 하강하며 도착하니 1시 20분경이라 숙소에 짐을 풀고 바로 중국과 우리나라 이북의 국경지역을 보려고 출발하여 토문강(우리말: 頭萬江) 오후 3시경에 도착하니 강폭이 한강 10/1도 안 되는 이 강이 국경이라니 이 강이 민족에 통한이 담긴 두만강이란 말인가? 하고 생각을 하며 멍청하게 넋을 잃고 한참을 바라보며. 우리 국민이라면 김정구 선생의 노래(눈물 젖은 두만강) “두만강 푸른 물에” 이 노래를 모른다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북땅이 바라보이는 토문강 이북과 중국에 국경선에서 가족사진을 찍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중국쪽 대나무땜목 (배)를 타고 이북땅을 마음대로 넘나던다

이 한(恨)이 서린 두만강이 눈앞에 잊다니 믿어지지를 않아서 또 물어보고 또 물어봤다. 현지사람은 토문강이라 하지만 민족에 시름을 함께한 두만강(頭萬江)이 틀림없다고 한다. 비록 남의 나라지만 눈앞에 손만 내밀면 다 알 것 같이 이 짧은 거리를 바로 눈앞에 이북 땅을 두고 50년 세월을 민족 분단의 앞품을 겪고 있는 것일까? 생각하니 강에 뛰어들어 북쪽에 동포와 얼싸안고 싶은 마음이다.

잠시 머뭇거리다. 중국 쪽에서 운영하는 대나무로 만든 땜 목을 타고 현지인들의 말하는 토문강에 들어서니 토문강 폭의 반이 이북 땅이고 반은 중국 땅인데. 이 배들은 경계선을 넘어 이 북쪽까지 배를 대며. 이곳은 이북 땅이라고 설명까지 해주고 중국 배를 운영하는 사람이 이북당국과 협의하여 이북 땅 경계선을 넘나 던다고 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북과  중국의 사이에 일제강점기에 놓인듯한 큰크리트 다리가 있는데 국경선이 중간에

   그 려졌다. 

중국 쪽은 중국 경비병이 있고 이북 쪽은 인민군 경비병이 있다고 하는데. 우리는 중국의 국경 경비병을 봤지만 이북경비병 인민군은 보지는 못하고 중국 선착장 배에서 내리니 이북 쪽 산이 큰 나무는 보이지 않고 잡목만 보이고 국경지대라 그런지 북쪽 지역에 집들은 하얀 페인트칠을 잘해서 그래도 깨끗한 편이였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국경선에 중국 경비병은 우산을 쓰고 있는데 이북 인민군은 없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중국 경비병이 경비를 서고 있으며 관광객에게 입장료를 받고 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북과 중국을 잊는 다리에 이북쪽의 건물들이 보인다.

우리는 가이드 안내로 그곳을 나와서 다음 국경선에 가니 이곳은 콘크리트 다리가 내 짐작으로 2m 50cm 폭의 다리가 이북과 중국이 연결되어 있는데. 보기에 콘크리트가 부식된 정도나 형태로 보아 일제 강점기에 건설된 것으로 보인다. 이곳 다리에 중국 쪽에 경비초소가 있고 다리 가운데 하얀 페인트로 국경선을 그려놓고 중국 경비병이 서 있고 이북 쪽은 경비병이 없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중국 초소에서 이북 국경선을 가보려면 중국 쪽에서 입장료를 받고 있어 분단민족의 서러움을 이때도 맛보았다.

어떤 방법으로 던 꼭 통일이 되어 이 북쪽에서 마음 놓고 중국 국경선을 볼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도하며 이곳을 떠나 나라를 잃은 서러움을 달래며 타국에서 선조님 들이 독립운동의 산실인 용정(龍井)으로 출발하였다. 용정을 가는 동안 차창에 비치는 중국국경과 이북의 산들이 보이는데 중국의 산들은 나무가 울창하지만 이북 쪽 산들은 전부 우리나라 6.25. 당시 산으로 보면 될 것 같다. 국경 쪽에 산에”21세기 지도자 김정일 장군”이란 크게 쓴 광고문을 보고 지나며 북한에 실정에 허탈했다.

이 지역을 지나다 보니 중국 쪽에 다리공사를 하는데 우리나라 60년대 중반의 실정과 비슷하여. 철판과 삽으로 콘크리트를 배합하여 공사를 하는 모습이 중국에 도시와 농촌지역의 격차가 큰 차이가 느껴진다. 용정(龍井)에 오후 5시경에 도착을 해서 용정중학을 간다며 대충 설명을 해서 알기는 했다.

 

막 도착을 해서 용정중학 정문을 들어서 윤동주(尹東柱)시인의 기념비에 이렇게 “서시(序詩)”/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 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별은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尹東柱)님 시(詩)가 새겨져 잊어 놀랬고 학교 내를 돌며 가슴이 뭉클했다. 중학교 구 건물을 학교로 쓰지 않고 우리 선조에 독립운동사(獨立運動史)를 일목요연하게 정리 전시(展示)해 놓아 손녀 손자를 데리고 간 나로서는 훌륭한 교육적 효과를 얻겠다. 생각이 들었고 큰며느리는 중학교 사회교사이니 더더욱 새로웠을 것이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용정중학교 정문에 서있는 독립운동가 윤동주(尹東柱)님의 시비(詩碑)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용정중학교에 선조님들에 독립운동사가 잘정돈되어 있고 안내자의 좋은 설명을 들었다.

 

우리 식구들은 손녀 손자를 비롯한 방명록에 방문자임을 기록하고 적은 금액이지만 장학금을 봉투에 전하고 오는 마음이 적은 금액이라 흐뭇하지는 안 했지만 손녀 손자에게는 나라 사랑에 좋은 공부가 되었을 것이다.

길림성(吉林省)연길시(延吉市)는 조선 말기부터 한국인이 많이 이주하여 개척한 곳으로 옛 어른들이 (북간도)라고도 불렀다. 이곳은 1952년 9월 3일 자치구가 설립되고 1955년 12월에 연변조선족자치주(延邊朝鮮族自治州)로 되어 11개 민족이 거주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41%가 조선족이라고 한다. 연변시내거리에는 간판과 이정표는 한글을 먼저 쓰고 그 밑에 중국어(漢字)를 쓰게 법으로 정해져서 연변 시내거리를 거닐다 보면 한국에 어느 도시를 걷는 착각이 던다.

중학교 역사의 현장을 방문하고 이내 일송정(一松亭)으로 향하여 우리는 비암산(飛岩山) 산길에 접어들며 비포장 길이라 많이 흔들리는 기쁨도 맛보며 달려 일송정에 다다르니 비문에 새겨진 윤해영작사 조두남작곡 선구자(先驅者)의 노래를 교사인 큰 며느리의 선창으로 식구들이 힘차게 부르고 나서 돌아보니 눈앞에 만주 벌판이다. 이를 가로지르는 해란강(海蘭江)과 일송정(一松亭)을 서산에 지는 저녁노을이 토해내는 붉은빛이 보듬어 안으니 더욱이 빛나는 선조님 들에 독립운동의 산실인 일송정(一松亭)이 더욱이 빛나 보인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용정 비암산에 있는 독립운동의 산실 일송정(一松亭)이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용정에 선구자(先驅者)노래가사에 나오는 용문교이다.

 

자랑스러운 선조의 독립운동사에 매료되다보니 어둠이 깔리는 줄도 모르고 있다. 선조의 발자취와 숨결이 묻어있는 이곳을 뒤로하고 용정(龍井)시내에 선구자(先驅者)노래에 나오는 용문교(龍門橋)에서 어둠을 싸안고 기념사진을 찍고 손녀 손자에게 역사의 의미를 설명하고 식사를 하려고 연길중심가 중국음식점 <삼교신선로>연길에서는 꽤 큰 중국음식점으로 보여 경비 때문에 염려가 되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저녁식사를 하려고 들어온 연변에 중국음식점이다.

물론 경비는 아들이 쓰고 있지만 간단히 먹어도 될 일을 이렇게 큰 곳이 필요가 있을까? 생각했는데 이미 예약을 했다고 한다.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음식점을 들어서니 워낙 넓어서 객실을 찾을 수 없으니 조심하라고 했다. 식당의 안내로 객실을 찾아 한숨을 돌리고 있으니 음식이 나오고 생일 케이크가 들어와 나는 생각지도 못한 일이라 반가웠다.

 

그렇지 않아도 15일이 저의 엄마 생일인데도 여행 왔다고 오늘아침에 일언반구 말 한마디도 없이 그냥 넘어가는구나 생각해서 서운했었는데. 이렇게 외국에서 생일케이크까지 주문하여 손녀 손자와 큰며느리 아들과 함께 생일축하 노래를 부르며 축하해주니 나의 조급했던 마음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아내의 생일을 아들과 이렇게 하는 것은 처음이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생일축하를 하는 가족들 기념사진

생일축하자리는 무르익고 중국에 고급술을 먹으며 아내는 기뻐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아내위주로 아들과 며느리가 술을 따르고 북경 가이드 김진주 양과 연변가이드가 서로 권하며 중국 특유의 쇠고기 샤브샤브를 먹는데 3일간 먹은 음식 중에 가장 입에 맞아서 맛있게 먹는 중에 센스 있는 주인이 중국식 생일을 축하한다고 장수면이라고 하며 사골육수를 국수에 넣고 삶은 계란과 각종고기를 얹어서 가져와 장수하시기를 기원한다 하여 더욱 분위기는 고조되고 기뻐하는 아내의 얼굴을 보니 인간의 행복이 바로 이런 것이 구 나 생각이 던다.

15일은 우연히도 아내의 생일이 연변의 노인의 날과 맞아떨어져 불꽃놀이가 연변 하늘에 아름답게 수놓고 있어 뜻있는 하루가 되었다. 나는 70세이고 아내는 66세가 대도록 생일케이크를 놓고 거창한 생일을 맞아 보지도 못했고 그렇게 할 수 있는 환경이 못 되었다. 아들들은 큰아들은 결혼하고 서울에서 생활했고 둘째네 충남부여에서 결혼하고 얼마 안 되어 우리는 경기도 성남으로 자영업 하려고. 이주하는 바람에 서로 기회가 없었는데. 2007년 3월에 막내아들 직장 때문에 서울 큰아들 집 근처에 이사하면서부터 손녀 손자가 일요일마다 들려 귀여운 생각이 들어 사는 의미를 찾는다. 더욱이 7 순 기념으로 외국 관광을 손녀 손자와 함께하면서 가족에 소중함을 늦게나마 느끼고 삶에 보람을 찾아가는 것 같아 기분이 참 좋은 마음으로 밤 10시경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에 돌아오니 집을 관리하는 아주머니가 있어 중국의 인건비가 궁금해서 일하는 아주머니에게 일당이 얼마냐고 물어보니 연길은 좀 싸서 하루에 30원 (한화: 4.000원)정도이고 북경은 60원 (한화: 8.000원 정도 받는다고 하니 중국의 인건비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 관리자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7-09-04 18: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