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가계 유감


 계림에서 버스로 두 시간 남짓 달려 유구 역에 도착했다. 밤 10:40분발 열차를 타고 밤새워 내일 am11:00쯤에 장가계에 도착한다니, 더구나 우리부부가 난생 처음 침대칸 열차로 12시간을 여행한다는 설렘과 기대는 좀 각별한 것 이였다.

중국열차는 최상급인 4인1실의 연와(軟臥)와 6인1실의 경와(硬臥) 그리고 1등석인 연좌(軟座)와 2등석인 경좌(硬座)로 분류된다는데 우린 어느 중년부부와 함께 연와침대칸을 사용케 되었다.

 

무릇 열차여행이란 지나치는 풍경을 편히 앉아서 구경하는 재미가 더할 수 없는 쏠쏠함인데, 밤에 그것도 짙은 어둠만이 넓은 중국 땅을 삼키고 있어 칠흑미궁 속을 헤매는 셈이라 기대를 접어야 했다. 그래 2층 침대로 기어들어 잠을 청하려는데 엊그제의 계림여행이, 그리고 내일에 대한 여정이 쉬이 숙면으로 안내하질 않는다.

아래층 아내도 쥐죽은 듯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지만 필시 잠들진 안했으리라. 허나 건너편 부부의 취침에 방해가 될까 싶어 얘기는커녕 무엇 하나도 언감생심뿐 몸만 뒤척거렸다.

 

새벽 2시쯤 됐을까 화장실 생각이 났던지 아내가 일어나 열차 미닫이 도어를 열려다 조심스레 나를 부른다. 문이 열리지를 아니한 것이다. 침대에서 내려와 철제 도어를 열려고 용을 써봤지만 덜커덩거릴 뿐 요지부동이 아닌가? 등쌀에 옆 부부도 합세하여 온갖 수단을 다 해 보았으나 허사였다. 할 수 없어 승무원을 호출하였던바 그는 정말이지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순식간에 철제문을 열어 제켰다. 그 방법이란 게 손잡이 문고리를 두서너 번 세게 후려치고 난 후 밀치기만 하는 거였다. 황당하고 어이없어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중국의 최고급 침대열차의 문짝에 상상을 불허하는 잠금장치(?)가 있을 줄이야!

 

애초부터 우리부부에겐 엿 먹은 잠자리였는데  건너편 부부도 자리를 털고 1층 침대에 걸터앉는다. 우린 드디어 통성명으로 시작하여 얘기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작년에 정년퇴임한 노신사는 그간 가고 싶었던 지구촌 이곳저곳을 부인과 함께 탐방하고 있단다. 그들 부부가 터키 여행 때 이용한 야간침대열차 얘기를 할 때는 어둠이 기차에서 한 옴큼씩 떨어져 나가는지 차창에 여명이 기웃거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노란빛 너울이 날름거렸는데 그 색은 더욱 선명해져 차창 밖을 넘나보니 벌판이 유채꽃으로 도배를 하고 있지를 않는가!

 

유채밭 끝머리엔 희뿌연 안개가 산등성이를 기어오르고 빛바랜 인민복차림의 농부들이 듬성듬성 무리지어 있음이 세상 어느 곳이나 사람 사는 모습은 엇비슷함을 느끼게 되어 한결 마음 푸근해진다. 아침 햇살이 퀴퀴한 침대구석구석까지 찾아들자 우리는 어설픈 아침식사를 때우기로 했다. 노신사부부가 준비한 라면과 커피 그리고 우리가 내 놓은 빵으로 말이다.

유채꽃의 환영을 받으며 만만디 중국에서 열차는 그래도 정시에 장가계역에 도착했다.

 

점심 후, 장가계 입문은 삭계곡(索溪谷)자연보호구역을 탐방하는 걸로 시작했다. 석영사암들로 이루어진 기기묘묘한 바위기둥들이 죽림처럼 솟은 석봉들의 열좌를 열병하던 나는 나도 모르게 ‘아! 이렇게 멋있을 수가?’라고 감탄사를 연발하는 외에 유구무언이 되었다.

‘저 봉우리 이름은?’ ‘저기 호수 이름은?’ ‘저 깊은 계곡의 이름은?’하는 나의 연 탄성 질문에 가이드 왈, “선생께서 연상되는 데로 이름을 지으세요?!”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까닭은 700m~1500m가 넘는 바위 봉우리들이 무려 3600여 개나 되고 그 바위산들을 가르는 계곡이 얼마나일 것이며, 계곡에 흐르는 물길이 이룬 소(沼)가 몇 십 개일까를 유추할 때 나의 질문은 짐짓 우문일 수밖에 없으렷다. 그래도 하 이상하고 장엄하여 그럴싸한 이름을 갖고 있는 석봉과 호수와 계곡이 인구에 회자되고 거길 찾아 관광객들은 장탄식을 늘어놓기에 바쁜 발품을 시간과 싸우게 된다. 헤아릴 수 없는 비경을 제 나름대로 명명하여 카메라에 담아 간직해 옴이 또 다른 관광의 오묘한 맛일 것 같았다.

 

연평균 기온이16°c인 아열대의 장가계가 4계도 뚜렷하다니 그 변화무쌍할 계절속의 이름도 상상을 해 본다면 이 태고의 자연풍경화를 곱빼기로 즐기는 방법이리라.

3억 칠천만년 전엔 바다가 지구의 지각변동으로 융기되어 생성된 산이 수천 년을 두고 풍화에 깎이고 물길에 폐여 깊은 계곡과 뾰쪽한 석순들의 신비경을 이루었는데, 그 바위들은 저마다 푸른 소나무를 안아 키워 공존함이니 산수화의 극치미를 이루고 있음이다.

 

해서 장가계를 일컬어 “인생부도장가계(人生不到張家界), 백세개능친노옹(百歲豈能稱老翁)?(사람으로 태어나 장가계를 가보지 않고는, 100살을 먹었어도 어찌 늙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이란 시구로 찬탄함이라.

이 깊고 울창한 협곡과 석산이 도적들의 은신처로썬 딱 이였던지 장가와 원가의 양대 도적 떼들의 아지트였기로 감히 개발할 수가 없었단다. 하여1982년에야 도적들을 소탕하고 ‘國家森林公園’으로 지정하였고, 1992년엔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에 등제되었단다.

 

장가계의 혼-천문산(1518m), 세계에서 제일 높은 천연동굴(해발1300m)인 천문동과 길이가 10km에 이르는 황룡동굴(이곳의 27m나 되는 종유석은 중국평안보험공사가 1억위완의 보험에 가입)의 불가사이한 신비경하며, 300m 절벽의 두 바위봉우리사이(폭2m)를 잇는 20m의 바위다리-‘천하제일교’는 인공이 가미되지 않은 천연의 바위다리라는데 양쪽 바위위에 걸쳐있는 정교함에 놀라게 되고 아찔한 현기증에 다시 정신까지 뺏기게 된다. 

 

모노레일을 타고 5km의 협곡을 달리며 감상하는 기암괴석의 봉우리들과 소나무의 거대한 산수화병풍, 울창한 숲길 7.5km를 트래킹하면서 맑은 개울물에 잠시 발을 적셔보는 시원함이란 말 그대로 금편계곡(金鞭溪)에서의 신선놀음이라 하겠다.

미혼 대, 하룡장군동상 전망대에서 조감하는 천자산의 위용, 황석채의 웅장함, 무릉원이라 부르는 백장협(百丈峽), 패전 후 황제가 분하여 자기가 쓰던 붓을 던졌는데 그게 땅에 꽂혀 생성된 어필봉(御筆峰), 2km남짓의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오면서 조감하는 천자산의 비경들, 335m의 백룡엘리베이터(독일. 프랑스 합작품으로 156m는 바위 속을 뚫었고 그 위 170m는 수직바위벼랑에 철골구조물로 만듦)의 수직바위 오름길도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였다.

 

수력발전을 위해 협곡을 매운 인공호수 보봉호(寶峰湖)는 자연을 어떻게, 지혜롭게 선용해야 산업과 관광이란 두 마리의 토끼를 다 잡을 수 있는지를 명료하게 확인시켜주는 현장이기도 했다.

장가계가 부러운 관광특구이긴 하였지만 나는 보봉호 관광이 더욱 애착이가는 부러움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것은 자연을 슬기롭게 이용하여 관광객들의 넋과 호주머니의 돈을 흔쾌히 털어내게끔 하고 있어서였다.

 

알면 알수록 거대해지는 중국! 땅덩어리가 무진장 큰 탓도 있겠지만 중국은 문화, 역사, 자원, 인력 면에서 조건이 풍성함이다. 그네들이 이제 밖으로 눈길을 돌렸으니 발전의 속도가 어떨지 상상하기 어렵지 않았다.  부럽기 한없는 그들의 자원(땅)이였다. 이틀간에 걸쳐 장가계 원가계를 관광하면서 다소 의아해 했던 것은 원시림이란 계곡에 아름드리 고목이나 시목(屍木)의 삭정이들이 보이질 않음은 땔감으로 몽땅 훑어버림일까? 하는 점이였고, 그네들의 불친절 이였다.

 

관광객의 90%는 우리나라 사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진데, 하여 우리네가 그들을 먹여 살린다고 할 수 있음직한데 진솔한 친절미가 없어보였다. 아니 어떻게 하면 한 푼이라도 더 뜯어낼까? 하고 별짓을 다하고 있었다. 

갓길에 늘어선 좌판의 상인들은 관광지 어디에서나 얼토당토 않는 호객행위로 열을 올린다.

 

그 하나, 황룡동 관광 후에 젊은 아낙네에 속은 우리내왼 씁쓸함을 넘어 허탈감에 자조해야했다. 세 살배기 딸애와 갓난애를 업고 한 평도 못되는 좌판에 몇 가지 물건을 팔고 있어서 우리내왼 수제 슬리퍼 3개를 사주었다. 슬리퍼를 비닐봉지에 싸주는 젊은 아낙 옆의 귀엽게 생긴 코흘리개 딸아이가 안쓰러워 난 1000원(중국에선 효용가치가 꾀 크다)짜리 우리지폐 한 장을 덤으로 그 애에게 쥐어 주었었다. 그리고 그날 밤, 호텔에서 비닐보자기를 풀어보니 3개여야 할 슬리퍼가 2개뿐이지 않는가.

 

또 중국공항(지방)에서 목격하는 실랑이 하나는 관광객의 선물꾸러미의 포장에 대한 공항직원들의 생트집 이였다. 포장이 잘 됐고, 무개가 초과하지도 않았어도 재포장을 요구하는 사례를 나는 몇 번이나 목도했었다. 재 포장으로 얻게 되는 공항의 수입이 아니면 괜한 트집으로 급행료를 좀 뜯어내자는 속셈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 내가 이상한 놈일까.

 

그네들의 불친절과 생트집(?)은 다분히 우리들에게도 일단의 책임이 없지는 않는지? 어쩌면 우리들이 그네들을 그렇게 만들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직은 우리가 그네들에겐 시혜자(?)의 입장에 있기에 그런 생각을 해 보게 되는 것이다. 주지하는 바이겠지만 중국 어디 관광지에서도 흡사 한국의 관광지로 착각할 정도로 한국인이 대다수이기에 하는 말이다.

더구나 그런 현상은 해가 거듭할수록 더 해지는 것 같고, 그런 불협화음의 상심이 농해지는 것 같아 서글프다.

 

어찌됐던 장가계는 ‘사람으로 태어나서 한 번쯤은 구경하고 늙어야 늙은이 축에 낀다’는 명소임엔 틀림이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