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도호텔 전경


 

석도에서 바라보는 황해. 이곳에서 해가 뜬다. 우리 간 날은 흐려서 볼 수 없었지만...

 

호텔 앞에 조성된 임도와 소나무와...

 

밤새 내린 비로 촉촉해진 숲길.

 

 숲속 산책에 나선 일행들... 이들은 잠도 없다.ㅠ

 

 무화과에서 잘 익은 과일도 따 먹고... 저 속이 붉으리라고 짐작이 되는지...

 

 드디어 도착한 신라절 법화원. 이 뒤가 적산이다.

 

 

 

 

 

절 마당에 있던 만수석. 정말 그리 오래 되었나???

 

 

 해태 암수가 놓여 있다. 가이드가 누가 암컷인지 누가 수컷인지 아느냐고??? 발바닥에 새끼를 깔고 있는 바로 요 해태가 암놈.

 

 세계를 깔고 있는 이 해태가 수컷. 뭬야??? 왜 남자만 세계를 움켜 쥐고 있지???

 

법화원터였음을 알려주는 표지. 여러 책을 참고해서 측정한 결과라고 하는데 예전에는 청도에서 가장 큰 절이었다고 한다.

장보고가 여기 저기 흩어진 신라인을 한데 모은, 요즘의 교포사회의 교회 같은 역할을 했던 절.

 

어김없이 그들이 좋아하는 붉은 소망이 나무마다 달려 있고...

 

 한국사람들이 세운 장보고 공적비

 

절 앞의 향을 사르는 장소. 한 묶음의 향을 사서 소망을 빌며 향로에 꽂는다.

 

우리나라의 불상하고는 비슷하면서도 달라 보인다.

 

 

 

 대웅보전 뒤에 있는 삼불보전. 세 분의 불상을 모신 곳이다.

 

 

 삼불보전을 뒤로 하고 그 뒤안을 돌아서 적산으로 오른다.

높이는 400m도 채 안되지만 계단이 장난이 아니다. 40여분을 오르고 40여분을 돌아야 한다.

거기서 잠깐 보였던 황해의 작은 어선들... 이곳에 장보고가 절을 세운 이유를 알 것 같다.

이곳을 전진기지로 삼아 황해에 모여드는 적군들을 몰살시켰을 거다. 해상왕답게 중국인도 벌벌 떠는...

 

구름안개를 헤치며 올라간 정상에는 이런 표지가 다다. 佛祖山 382m라고 쓰여 있다.

신라인들이 쓰던 명칭들을 안 쓰려는 의도가 보인다.

 

 안개를 뚫고 내려와서 젤로 젊은 막내가 찍힌다. 이 친구 다음날 졸도해서 병원신세를 져야 했다.

고산에 약한 것이 나이 어린 순서라더니, 산행에 약한 것도 그러했다.

이렇게 멀쩡히 따라 다니다가 다음 날 토하고 울렁증이 난다고 휠체어 신세를 졌으니...

인천에 도착하고 보니 젤 먼저 나가서 인사도 없었다.

 

 법화탑.

 

 

적산에서 하산한 길에 만난 연못.

 

적산선원 안의 외벽 조각

 

적산선원이 지금은 관람객 때문에 강원역할을 할지... 

 

일본고승이 와서 늘 음용했다던 우물

 

 

관음전 앞의 분수가 있는 거대한 불상. 설악산의 불상쯤 되는 크기였다.

 

 11시에 분수쇼를 시작했다. 여름에 하루에 세 번 불쇼, 물쇼를 한단다.

 

 

 

 

 

같이 산행한 언냐 선글라스에 박힌 우리 모습이 재밌어서 초상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진을 올린다.

사진 찍는 나와 옆에서 찍히길 거부하는 아저씨가 보고 있다.

 

 

 법화원 맞은편에 있는 명신상을 보러 간다.

 

 저 무수한 계단 끝에 거대한 명신이 앉아 있다.

 

가까이 가서 본 明神像. 다들 올라가기 싫어해서 나만 올라갔다.

장보고를 누르려고 장보고상이 있는 傳記館 언덕에

더 크게 바다가 잘 보이는 언덕배기에 상을 세웠다는 설도 있고,

청도 더 크게는 중국사람들이 밝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에 세웠다는 설도 있고...

불상이 아니고 토속신을 이렇게 크게 만든 데 놀랐다.

 

 

 명신을 기리는 법당.

 

 

 그 언덕에서 바라본 황해 배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누가 오는지 알 것 같다.

 

올라오지 않고 바다를 보고 있는 일행들. 

 

장보고 기념관(전기관) 입구에 서있는 거대한 장보고 동상. 

 

장보고가 무녕군에 종군했다고 해서 이런 기념관 명칭을 부쳤나 보다.

 

 매서운 보고 아저씨 초상.

 

전시실에서 볼 수 있었던 예전의 적산포 모습. 풍속화

 

 

장보고 장군의 다른 인물화

 

 

 

장보고가 당으로 입당할 때의 모습

 

 

 

 

 양귀비 인형이 왜 여기 있는지 모르겠지만..

또 얼마나 우스꽝스런 몸매이던지... 풍만을 넘는다.

 

 

 

 

드라마 해신의 한 장면.

 

 

기념관 전관 

 

한국인이 세운 장보고 기념탑. 벽돌로 지은 초라한 탑이 기념탑의 전부이다.

 

 

기념탑에 출자한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졌다.

 

적산선원과 기념관만 운행하는 셔틀버스

 

 

적산선원 앞은 영화를 많이 찍기로도 유명하다. 이 날도 무속영화를 찍고 있었다.

 

우리가 점심 먹고 나온 호텔에서 우리말로 된 서비스 품목을 보니까 재미있어서 찍었다.

 

2007년 9월 24일 장보고의 적산과 법화원

 

석도 호텔에서 룸메이트랑 밤늦게까지 수다 떨고 책을 보느라고 1시가 넘어서 잠든다. 잠은 늦게 잤지만 아침 일찍 요란한 모닝콜 벨소리에 일어난다. 번쩍 일어나서 바로 앞 바닷가로 산책을 나가서 비 내린 아침 숲길을 걸어본다. 이곳은 석도에서 가장 좋은 호텔인데, 공산당 회의가 있다고 하면 갑자기 숙박객들을 내보내는 통에 예약이 취소되는 경우도 더러 있다고 한다. 석도 바닷가에 위치에 있어서 전망이 더 없이 좋고, 여름이면 바로 해수욕도 할 수 있기 때문에 인기 있는 바닷가라고 한다. 그 앞에 조성된 인공 숲길을 걸어서 아침 산책을 가벼이 한 다음에 뷔페식 아침 식사를 한다. 뷔페식이 내게는 나쁘다. 음식에 욕심이 많으므로 어찌나 많이 가져다가 먹던지... 다른 사람들이 모두 일꾼의 밥이라고 할만한 양을 먹어댄다. 게다가 가져온 커피까지... 중국여행시 팰요한 것은 이런 봉지 커피이다. 중국은 차를 마시기 때문에 커피점을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이다. 우리나라는 어디에서나 있는 커피머신이 이곳에서는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다. 호텔에서도 커피를 내려주기는 하는데 아무 향도 안 나고 맛도 쓰지 않은 오래된 커피같은 커피를 가져다 준다. 하여 우리가 가져간 커피만이 요긴했다.


 

기사가 난감해 하며 밤새 누가 바퀴를 칼로 찢어 놓았다고 하여 공업사에 가서 1시간여를 보낸 뒤 적산으로 간다. 그들은 그것도 15분만 할애해달라고 해서 웃겼다. 그 15분이 150분이 아니냐고 우리가 질문할 정도로 느슨하다. 어찌 타이어 교체하는데 15분만 걸리겠는가? 타이어만이 아니고 다른 부분도 정비하는 모양이다. 차가 워낙 오래 되어서 한번 공업사에 들리면 고칠 곳이 많은가 보았다.


 

9시 반경 장보고가 세웠다는 절, 법화원에 도착한다. 우리 신라인을 위해 세운 절이라고 하는데 지금 절은 그 때 지어진 게 아니고 이후에 중국에서 지은 절이라고 한다. 해서 법화원터였다고 하는 표지만이 이를 알려주고 있었다. 법화원을 지나서 적산에 오르는 오르막길은 안개로 뽀얗다. 우리가 올라가면 걷히기를 희망하며 안개만이 무성한 고갯길을 허위허위 올랐으나 황해바다조차도 보이잖는다. 황해에서 이곳을 쳐다보면 붉은 바위로만 이루어진 산이라 하여 적산이라는 이름이 붙었건만, 우리는 붉은 바위만 보고 황해는 보지 못했다. 일행 중에 장씨가 두 분이나 있어서 선조한테 절하고 잘 좀 해보라고 했지만, 여전히 그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 382m인 정상에는 정상 표지도 없었고, 불조산정상이라는 팻말만 있었다. 중국산은 어디를 가도 정상 표지석이나 해발표고의 m가 표시되어 있지 않다. 그런 건 높은 봉우리를 좋아하는 우리에게만 해당되는가 보았다.


 

1시간 반여를 돌아서 법화원 관음전 앞에 이르렀을 때, 11시에 분수쇼를 한다고 한다. 그래서 조금 기다리노라니 거대한 불상 앞의 분수들이 물을 뿜기 시작한다. 처음엔 가장자리의 미미한 물줄기들이 뿜어져 나와서, 애개, 이게 분수쇼야? 했는데... 서서히 멋진 음악에 맞춰서 점점 큰 분수가 나오기 시작하고 여자같기도 남자같기도 한 꽃미남 불상이 돌아가기 시작한다. 거대한 불상 앞의 춤추는 듯한 자세의 자그마한 불상들도 돌아간다. 나중엔 용의 입에서 불꽃이 나오기도 하고 분수가에 있던 용의 입에서는 최루탄 쏠 때 나오는 듯한 거대한 폭탄같은 물줄기가 뿜어져 나오기도 했다. 온갖 뿜어져 나올 것들이 모두 나오기 시작하니까 쌀쌀한 날씨인데도 얼마나 통쾌하던지... 잠시 동화의 나라에 다녀온 기분이다. 모두 적산에서의 실망을 분수쇼의 화려함으로 달랬다고 하니... 재미있고 환상적인 시간이었다. 동화는 여전히 살아있다.


 

분수쇼를 보고는 적산 맞은편에 있는 명신상에 오른다. 거대한 중국에 맞게 明神像은 바다를 굽어보는 언덕에 바다를 지키는 해신같은 존재로 거대하게 세워져 있다. 노산과 적산의 고단한 계단길을 걸어온 일행은 계단만 보면 진력이 나서 멀리서 바라보고 아무도 올라갈 생각을 안 한다. 올라갈 필요가 뭐가 있냐며 다들 전망만 보는데, 누군가가 대표로 가야하지 않느냐고 나 홀로 올라가서 상 아래 있는 명신을 모신 절도 보고 바다와 일행을 내려다 본다. 그들은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모두 박수 쳐준다. 이곳은 모두 암반지대라서 곳곳에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산이 얼마나 멋지던지... 도봉산만 보던 눈으로는 다 멋질 수밖에 없는 바위산들이다. 암반지대여서 물을 그냥 먹어도 된다고 한다. 그래서 물이나 맥주나 싸고 맛있게 먹고 다녔다. 청도맥주가 5위안 밖에 안 하니

 

장보고기념관에 오르며...


 

장보고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관에 오르며 미흡하게 장보고를 본 것 같아서 다른 자료를 참고해본다. 적산법화원은 산동성 영성시 석도진(石島鎭) 적산(赤山)기슭에 자리잡고 있으며, 당조(唐朝)시기, 신라인 장보고(張保皐)가 지었다고. 무예가 능하고 전쟁에 용감하였기에 그는 당시 산동성 서주 절도사 휘하 주력부대 무령군의 군중소장(1,000명 병사를 지휘하는 장교)으로 있었다고 한다. 흥덕왕 3년에 신라로 귀국하여 청해진을 창설하고 대사를 봉해 받음으로써 한·중·일 삼국의 해상무역을 독점하고 한·중·일간의 '해상 실크로드'를 개척하여 해상 무역왕으로 불리웠다. 그는 해상운송사업이 번영하기를 기원하면서 적산에 불교사찰을 지어 많은 스님들을 모셔와 <법화경>을 읽어 <적산법화원(赤山法華院)>이라고 이름을 지었다는 것이다. 1987년 일본학계의 저명한 한 인사가 영성시정부의 협조아래, 200만 인민비를 투자해 이곳을 중건했고, 중건사업을 거쳐 국제적인 투자와 지지를 받게 되었다고 한다.


 

중국 산둥성[山東省] 룽성시[榮成市] 스다오전[石島鎭]의 적산 법화원 터에 장보고의 업적을 기려 세운 기념비는 1990년 4월 1일 건립되었다. 한국해양경영사연구회가 한국선주협희의 후원을 얻어 장보고의 옛 청해진(淸海鎭) 터인 전남 완도군민(莞島郡民) 대표들을 초청하여 제막식을 가졌다. 법화원은 장보고가 820년 신라방(新羅坊)이었던 당시의 원덩현[文登縣] 적산촌에 세운 그의 본원사찰(本願寺刹)로, 845년의 회창법란(會昌法亂) 때 헐려서 황폐화한 것을, 이 절의 도움을 받은 일본 승려 엔닌[圓仁]을 기리는 일본측 관계자들의 협력을 받아 중국 당국이 중건하였으며, 중건과 때를 맞추어 한국학계에서도 기념비를 세우게 되었다고 한다. 비문의 내용은 장보고가 신라 ·당나라 ·일본 등 3국과의 교역을 주도한 것과, 구법(求法)을 위해 법화원에 온 일본 승려 엔닌이 신라의 도움으로 무사히 귀국했다는 사실, 그리고 한국과 중국의 역사적 유대를 강조하였다.


 

산동지역 ‘장보고 역사연구회’의 장샤(張峽·중국 향토사학자)는 “장보고는 아버지가 스다오 출신이며 신라에 귀화한 인물”이라고 주장하였다 한다. 고구려사 왜곡도 모자라 장보고까지 왜곡하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지만 장보고를 기념하는 기념관도 우리쪽에서 지은 게 아니고, 한 중국인 기업가가 34억원의 거금을 쾌척해 지었다고 한다. 현재의 법화원 건물은 옛터에 1988년 중국측이 재건한 것이라고 하니 아마도 대대적으로 복원작업 및 조성 공사를 해서 한국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한 행사인가 보았다. 중국측은 거대한 불상을 산 위에 짓고 장보고 기념관을 짓는 등 그의 업적을 매우 공들이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1991년 한 대학 교수의 노력으로 장보고 기념탑이 세워진 게 전부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세웠다는 그 기념탑은 벽돌로 세워진, 매우 초라한 외형을 보여주었다. 크고 화려한 돌로 만들어진 다른 탑이나 동상에 비해 협소하고 작은 기념탑이 우리가 기리는 우리 선조의 모습이라니... 그의 기념관에는 장보고가 청년 시절에 중국으로 가서 무녕군에 들어갔다는 소개와 용맹하고 의협심이 강한 모습을 부각시켰다. 거기서 교육을 받은 후 신라로 돌아가 완도에 청해진을 세우고 대사로 임명되어 신라노비매매를 근절시키는 등 국제해상무역을 주도하는 일을 했다고 한다. 특히 당나라와 신라는 우호적인 관계를 오래 지속했는데 그 중심부에 장보고가 있었다. 그걸 기념하여 중국적산그룹유한회사가 많은 자금을 투척하여 지금의 다섯 전시실을 가진 기념관을 만들었다는 설명이 우리말로도 중국말로도 되어 있었다. 이후에 드라마 <海神>을 찍었고, 해신의 탤런트들까지 사진으로 전시되고 있었다. 조금 조악한 그림으로 옛시절을 재현해 놓은 것이 흠이었지만, 예전의 적산포를 풍속화로 그려 놓아서 미루어 짐작할 여지를 남겨 놓았다.


 

중국 사람들의 특징은 그 고장과 아무 연관도 없는 유물을 함께 전시한다는 점이다. 그것도 예전의 유물을 그대로 전시하는 것이 아니라 시멘트로 새로 만든 조악한 물건을 함께 전시한다. 그래서 이번 전시관에서 본 것은 조악한 풍경화가 전부였고, 유물은 우리 박물관 수준에 훨씬 못 미쳤다. 어울리지 않게 양귀비 인형을 왜 그곳에 전시하고 있는지... 보면 웃음이 나오게 역사의식이나 개념이 없이, 그냥 오래된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을 연대도 없이 마구 전시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