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산동성의 옥황산(589m), 적산(369m), 장보고유적지 팸투어.2편

 

◈ 산행지.

인천항-화동페리호 배에서 1박 -석도항--옥황산(589m)등반-대유산리조트(2박)-대유산-석도 적산(369m)등반- 장보고유적지-배에서 3박 -인천항.

 

◈ 일시 : 2011. 03. 11(금)~14(월). 일본 대지진이일어난날.

 

◈ 날씨 : 완연한 봄날이나 바람이 많이 불고 황사가 낌.

 

◈ 인원: 산이 좋은 사람들 31명.

 

◈ 지도.

옥황산(玉皇山.589m)과 적산(赤山.369m)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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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황산(玉皇山.589m)과 대유산,적산(赤山.369m)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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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황산(玉皇山.589m)과 대유산(大乳山)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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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행후기.

 

3일(2011. 3. 13. 일). 대유산리조트,적산과 장보고 유적지.

05 : 40. 숙소를 나와 대우산으로 출발.
05 ; 45. 삼거리에서 우측 대유산으로
06 : 00. 대유산밑 도로에서 좌측 대유산으로 오름.
06 ; 09. 대유산(유방봉)정상 암봉밑.정상꼭지는 직벽의 암봉이라 포가함.
06 : 16. 다시 임도위.
06 ; 35. 원주민 마을촌.
06 ; 57. 숙소로 돌아옴 .
07 ; 30/08 : 20. 경허호텔(耕漁)에서 아침식사. 식당은 발밑으로 바닷물이 들어오는 바닷가다.
10 : 20. 석도로이동하여 법화원앞도착.
10 : 30. 적산산행시작.
11 ; 15/20. 적산(赤山.369m)정상.법화원과 석도일대가 한눈에 내려다보임.
11 : 42. 7층탑인 법화탑.
12 : 07/10. 관음전앞.
12 : 18. 주차장도착.
12 ; 30/13 : 10. 점심식사.
13 : 25/14 ;07. 다시 적산으로 돌아와 바다의 수호신인 적산명신(赤山 明神).
14 : 11/23. 장보고기념관과 장보고 기념탑.
14 : 30/45. 15분간 관음전앞의극락보살계 수륙대제.
15 :10/40. 석도시내의 대형마트에 들림.
16 : 00~석도항으로 이동하여 입국수속.
21 : 30. 화동페리호편으로 석도항 출항.


4일(2011. 3. 14. 월).

11 : 10. 화물이 많아 2시간 정도 늦게 인천항도착.
12 : 00. 하산하여 36번 숭덕여고가는 버스로 인천터미널로 감.
13 : 20. 인천터미널에서 천안행버스탐.
14 ; 40. 천안도착.

 

 

※ 대유산 해변관광리조트.

대유산(大乳山) 해변관광리조트는 교동반도 남쪽 위해 유산시에 위치하며 청도,연대,위해등에서 1시간거리에 있는 해안관광지로
총넓이 52㎢의 산,바다,모래밭,항만,섬으로 된 아름다운 해변관광리조트로 중국 10대 관광리조트에 선정된 리조트다.


대유산(大乳山)해변관광리조트 안내도.


대유산(大乳山)해변관광리조트전경.<리조트 홈피에 있는 자료사진>
앞쪽에 유방같이 생긴 대유산이 보이고 그 좌측 아래로 원주민마을과 홍마방이 보이고
사진 우측으로 아침식사를한 경허회관과 우리가 묵은 동해회관이 그 좌측에 보인다.


대유산(大乳山).<리조트 홈피에 있는 자료사진>
대유산아래 하얀계단위에 모애상들이 있고 좌측마을이 원주민마을이고
사진 우측이 우리가 묵은 동양회관이다.


대유산(大乳山)해변관광리조트.<리조트 홈피에 있는 자료사진>


우리가 묵은 동양회관.<리조트 홈피에 있는 자료사진>
이런풍경을 봤을텐데 안개가 잔뜩끼어 아무것도 못봤다.


우리가 아침을 먹은 바닷가의 경허호텔.<리조트 홈피에 있는 자료사진>


대유산(大乳山)해변관광리조트의 야경.<리조트 홈피에 있는 자료사진>


우리가 아침을 먹은 바닷가의 경허호텔.<리조트 홈피에 있는 자료사진>


대유산(大乳山)해변관광리조트의 여름풍경.<리조트 홈피에 있는 자료사진>


대유산(大乳山)해변관광리조트.<리조트 홈피에 있는 자료사진>

대유산(大乳山)해변관광리조트.<리조트 홈피에 있는 자료사진>

 

 

대유산(大乳山)해변관광리조트.<리조트 홈피에 있는 자료사진>

 

 

대유산(大乳山)해변관광리조트를운행하는 경내차.<리조트 홈피에 있는 자료사진>

 

 

아침 새벽에 대유산(大乳山)을 올랐는데 날씨가 이모양이다.
유방의 젖꼭지에 해당되는 정상 바로밑인데 뺑둘러 라이트 시설이 돼있다.

 

 

대유산(大乳山.유방봉)의 젖꼭지에 해당되는 정상모습인데 뺑둘러 직벽에 가까운 암벽이다.
올라가면 조망이 좋을텐데 오늘은 꽝이라 포기했다.


원주민들이 사는 마을인데 리조트를 개발하며 이일대를 다 사들였지만 원주민마을은 놔뒀단다.
큰길가엔 이마을의 100세이상되는 사람들의 사진이 걸려있다.


홍마방(紅摩房)인듯싶은데 들여다 보니 식당이다.
경모산앞인 모양인데 빨간그림과 조형물은 아마도 어머니가 아들을 양육하는 모습을 형상화한게 아닐까싶다.


경내를 운행하는 빵차 노선과 정류장 표시인 모양이다.


여기서 우측길이 대유산가는길이고 좌측은 마을과 모애 천년문화원가는 갈림길이다.
모애천년문화원은 하얀 긴 계단위에 역대 성현들의 모자상을 조각해놓은 조형물이 있는 듯 싶은데 시간이 없어 가진 못했다.


동해식당.


우리가 묵은 핀란드식 숙소.



우리가 아침을먹은 경허호텔.
우측이 식당인데 발밑으로 바닷물이 보인다.

 

 

※ 적산과 장보고 유적지.

10 : 20. 석도로이동하여 법화원앞도착.
10 : 30. 적산산행시작.
11 ; 15/20. 적산(赤山.369m)정상.법화원과 석도일대가 한눈에 내려다보임.
11 : 42. 7층탑인 법화탑.
12 : 07/10. 관음전앞.
12 : 18. 주차장도착.
12 ; 30/13 : 10. 점심식사.
13 : 25/14 ;07. 다시 적산으로 돌아와 바다의 수호신인 적산명신(赤山 明神).
14 : 11/23. 장보고기념관과 장보고 기념탑.
14 : 30/45. 15분간 관음전앞의극락보살계 수륙대제.
15 :10/40. 석도시내의 대형마트에 들림.

 

 

석도 적산(赤山.369m)과 법화원 안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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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 20. 석도로이동하여 법화원앞도착.


만수석.

 

 

적산으로 들어서는 길목에서 좌측으로 본 법화탑과 적산각.


적산으로 들어서는 길목에서 좌측으로 본 극락보살과 관음전.


적산(赤山.369m)오름길에 뒤 돌아 본 적산명신과 장보고탑.


적산(赤山.369m).


적산(赤山.369m).


적산(赤山.369m)정상모습.

 

 

 

 

적산(赤山.369m)에서 내려다 본 법화탑.

 

 


적산(赤山.369m)에서 본 법화사전경.


적산(赤山.369m)에서 본 법화사전경.


적산(赤山.369m)에서 본 주차장쪽모습.


적산(赤山.369m)에서 내려올땐 저 남근석앞에서 우측 법화탑뒤쪽으로 내려왔다.


법화탑.


법화탑내부의 벽화.


법화탑아래에서 본 관음전앞의 보살상과 적산명신과 장보고탑.

 

 

적산선원.

 

 

엔닌[圓仁] 입당구법관.
안엔 엔닌상과 구법승들의 입당경로를 그린 지도가 있다.

 

 

엔닌[圓仁]상.
일본인 승려 엔닌(圓仁)의 저술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의 내용을 근거로 법화원이 1998년 중건되었다.

 


장경루와 적산.


雲峰法界, 赤山閣.

 

 

법화원.
이곳이 원 장보고가 세운 법화원자리로 일본인 승려 엔닌(圓仁)의 저술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의 내용을 근거로
일본인들에 의해 법화원이 1998년 중건되었다.

 


적산법화원 [赤山法華院]
통일신라 시대 때 당(唐)나라의 산둥반도[山東半島]와 장쑤성[江蘇省] 등 신라인의 왕래가 빈번한 곳에는
신라인의 집단거주지인 신라방(新羅坊)이 있었으며 이곳에 세운 사찰을 신라원(新羅院)이라 하였다.

 

적산법화원(赤山法華院)은 통일신라 흥덕왕(826∼836) 때 장보고(張保皐)가
신라인 집단거주지였던 산둥반도 적산촌(赤山村)에 세운 사찰로서
'신라원' 중 가장 유명하였다. 장보고는 재당시절 적산지방에서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였으며,
당나라 무령군(武寧軍)의 소장(少將)으로 있을 때 적산법화원을 창건하였다(832년).


이 사찰은 1년 수확량이 500섬이나 되는 토지를 기본재산으로 건립된 것으로,
장보고는 이를 통해 향후 무역활동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였다.

적산법화원은 당나라에 거주하는 신라인의 신앙 거점인 동시에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는 예배처였다.


이외에도 신라와의 연락기관 역할을 하였고, 당나라로 건너가는 신라의 승려는 물론
일본의 승려들도 이 곳을 거쳐가며 많은 도움을 받았다.
일본 천태종(天台宗)의 승려 엔닌[圓仁]이 쓴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는
신라 불교의 의식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 기록에 따르면 당나라의 승려로서 신라의 승려를 시봉(侍奉)하여 스승으로 섬기는 자도 있었다고 한다.


일본 승려 엔닌 일행이 머물다 돌아가 쓴 이 기록 때문에 한때 '일본의 절'로 잘못 알려지기도 하였으나
한중수교 이후 이를 바로잡고 적산법화원 경내에 장보고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적산법화원은 많은 재력을 지녔으며, 이름있는 승려들이 상주하였다.
불교의식인 강경회(講經會)를 정기적으로 일년에 2차례씩 개최하였으며
이때 행해진 강경의식(講經儀式)에서는 신라와 당나라의 불교의식을 동시에 엿볼 수 있다.
여름에는 《금광명경(金光明經)》을, 겨울에는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강론하였는데,
그때마다 많은 신라인들이 참석하였다고 한다.

 

적산법화원은 당나라 무종(845년)때 불교 탄압으로 파손되었으나
일본인 승려 엔닌(圓仁)의 저술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의 내용을 근거로 1998년 중건되었다.
현재 롱청(榮成)시 스다오진(石道鎭) 치산(赤山)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赤山法華院 관음전앞의 청동불상.
매일 오후2시 30분부터 15분간 물,불쑈(?)가 거행된다.


관음전앞에 있고 손에 호리병을 든걸보면 관음상같은데
높이는 25.8m이고 맨밑의 좌대엔 극락보살계(極樂普薩界)라고 적혀있다.


赤山法華院 관음전앞의 청동불상과 뒤로 적산.


네귀에 있는 사천왕상 입에선 불을 토해내고 사방에선 물을 뿜어 관욕을하고
아래의 천사들은 춤을추고.


전체의 동상은 회전을하며 가운데 칸의 문이 열리고 시봉자들이 봉양을하는데
관광객을 위한 물,불쇼가 아니라 수륙제나 관욕같은 불교위식이 아닐까싶다.


다리를 건너면 이승세계로 돌아온다.

 

 

바닷가 식당으로 나가 점심을 먹고

 

 

식당앞 경치좋은 바닷가 풍경.

 

 

경치좋은 바닷가 풍경.

 

 

다시 적산 관광지로 돌아와 적산명신으로 오른다.


적산명신은 바다를 지켜주는 해신인데 그걸 묘사한 부조다.


적산명신.
중국인들이 믿는 바다를 지켜주는 신인데 이동상은 높이가 58.8m로 산위에서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고
안에는 천연 옥으로 만든 벽화들이 있다.


옥으로 만든 적산명신 벽화.

 

 

옥으로 만든 적산명신 벽화.

 

 

적산명신상옆에서 본 적산과 법화원.

 

 

적산명신상옆에서 본 석도시내모습.

 

 

적산명신상옆에서 본 장보고기념관(앞),장보고탑과 법화원전경.


장보고기념관앞.

 

 

 

장보고기념관의 장보고동상.

 

 

 

장보고기념탑.

 

장보고기념탑.

적산 법화원 장보고기념비(赤山法華院張保皐記念碑)는 1990년 4월 1일 건립되었습니다.
한국해양경영사연구회가 한국선주협희의 후원을 얻어
장보고의 옛 청해진(淸海鎭) 터인 전남 완도군민(莞島郡民) 대표들을 초청하여 제막식을 가졌습니다.
법화원은 장보고가 820년 신라방(新羅坊)이었던 당시의 원덩현(文登縣:문등현) 적산촌에 세운 그의 본원사찰(本願寺刹)로,
845년의 회창법란(會昌法亂) 때 헐려서 황폐화한 것을,
이 절의 도움을 받은 일본 승려 엔닌(圓仁:원인)을 기리는 일본측 관계자들의 협력을 받아
중국 당국이 중건하였으며, 중건과 때를 맞추어 한국학계에서도 기념비를 세우게 된 것입니다.


비문의 내용은 장보고가 신라와 당나라, 일본 등 3국과의 교역을 주도한 것과, 구법(求法)을 위해 법화원에 온 일본 승려 엔닌이
신라의 도움으로 무사히 귀국했다는 사실, 그리고 한국과 중국의 역사적 유대를 강조하였습니다.

 

 

장보고(長寶高)

?~846(문성왕 8).신라 하대의 호족·대상.

장보고 /장도 청해진 유적지, 사적 ...본명은 궁복(弓福)·궁파(弓巴).
일본 승려 엔닌[圓仁]의 〈입당구법순례행기 入唐求法巡禮行記〉에는 장보고(長寶高)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의 생애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지만 서남해안 지방의 토호 출신일 가능성이 크며,
장씨 성은 당나라에 있을 때 칭한 것으로 추정된다. 무예에 자질이 있어
당나라로 건너가 서주(徐州)의 무령군(武寧軍) 소장(小將)이 되었다.


당에서 귀국한 뒤 828년(흥덕왕 3) 왕에게 청해(淸海)를 진수(鎭守)할 것을 청했다. 당시 서남해안에서는 당의 해적들이
신라인을 노략질하여 노비로 팔거나 무역선을 약탈하는 경우가 빈번했다.
그는 왕의 허락을 받아 군사 1만 명을 모아 청해진(淸海鎭 : 지금의 완도)을 건설했다.


청해진은 7세기말에서 8세기초에 걸쳐 설치된 군진(軍鎭)의 하나이지만 건설 당초부터 독자적인 성격이 강했다.
그에게 내려진 대사(大使)라는 직명도 다른 군진의 진두(鎭頭)·두상(頭上) 등
신라의 정규 관직과는 다른 것이었다는 점도 이러한 사실을 말해준다.

 

청해진이 건설된 뒤 그는 해적을 소탕하여 서남해안의 해상권을 장악했고,
당·신라·일본을 잇는 해상무역로를 통한 무역활동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신라 지배체제의 외곽적 존재로서 해상무역을 통해 일종의 해상왕국을 형성한 그는
당나라에 견당매물사(遣唐賣物使)와 함께 교관선(交關船)이라는 무역선을 보내 교역활동을 했다.


840년(문성왕 2)에는 일본에 회역사(廻易使)를 파견하여 서신과 물건을 보냈다.
일본측은 이를 사교(私交)라 하여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무역은 허용했고,
그 사자와 이충(李忠)·양원(楊圓) 등에게 식량을 지급하기도 했다.
그의 세력은 국제적으로 극히 번성하여 중국에 유학한 일본 승려 엔닌은
그에게 정중한 편지를 써서 귀국할 때의 뱃길을 부탁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무역활동을 통해 확보한 경제력을 배경으로
중국의 산둥 성[山東省] 원덩 현[文登縣] 츠산춘[赤山村]에 법화원(法華院)이라는 절을 세웠다.
이곳에는 500석을 수확하는 장전(莊田)이 속해 있었는데,
많은 승려가 머물며 정기적으로 법회를 열었고, 청해진과의 연락기관 구실도 했다.

 

그는 경제력과 무력을 배경으로 중앙의 권력쟁탈전에도 개입하게 되었다.
836년(흥덕왕 11) 왕위계승분쟁에서 패한 김우징(金祐徵)이 청해진으로 와 그에게 의탁했다.
838년(희강왕 3) 희강왕이 피살되고 민애왕이 즉위하자 김양(金陽)은 군사를 모집하여
청해진으로 와서 먼저 와 있던 김우징을 만나 장보고에게 도움을 청했다.
장보고는 정년(鄭年)으로 하여금 군사 5,000명을 이끌고 김양과 함께 경주로 진격하게 했다.
이들은 중앙군을 물리치고 경주에 침입하여 민애왕을 살해하고 김우징을 신무왕으로 즉위시켰다.
신무왕은 장보고를 감의군사(感義軍使)로 삼고 식읍(食邑) 2,000호를 봉해주었다.


신무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문성왕은 즉위와 함께 그를 진해장군(鎭海將軍)으로 삼고 장복(章腹)을 내렸다.
그러나 진골귀족들은 그가 중앙정부에서까지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845년(문성왕 7)에 왕이 장보고의 딸을 차비(次妃)로 들이려 했으나
진골귀족들은 그가 '해도인'(海島人)이라는 이유로 반대하여 성사되지 못했다.
그러자 그는 이듬해 중앙정부에 반기를 들었다. 중앙정부는 무력으로 그를 토벌할 능력이 없었으므로
한때 장보고의 부하였던 염장(閻長)을 자객으로 보내 그를 살해하게 했다.


청해진의 세력은 그뒤에도 얼마 간 유지되었으며,
851년에야 청해진을 없애고 주민을 벽골군(碧骨郡 : 지금의 김제)으로 옮길 수 있었다.

 

<終>.

<산경표를 따라서 http://cafe.daum.net/yul66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