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래포구 여행 . . .남한 1대간, 1정간, 8정맥 완주 기념 *




비릿한 갯냄새가 떠오르는 소래는 인천 남동구 論峴洞에 있는 어항. 소래포구라고도 한다. 蘇萊란 지명 유래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멀리 삼국시대 때부터 비롯됐다는 설이 유력하다. 이에 따르면 신라 무열왕 7년(660), 나/당 연합군을 결성한 뒤 당나라 장군 蘇定方이 백제를 치기 위해 중국 산동성 萊州를 출발하여 지금의 인천시와 시흥시 사이에 있는 소래산(299.4m)에 도착하였는데, `蘇'자와 萊州의 `萊'자를 따서 이 지역을 蘇萊라고 불렀다고 한다. 소정방이 머물거나 찾았다는 이유에서 그의 이름을 딴 지명은 이 말고도 여럿 있다. 전북 부안군 변산반도 남쪽에 위치한 來蘇寺가 그렇고, 경기도 양주군은 한때 來蘇郡(신라 경덕왕)으로 불렸다고 한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도 있는데, 가천문화재단 이형석 문화부장은 `인천의 땅이름' 이란 책을 통해 소래와 소래산을 소정방과 결부하는 건 무리이며, 소래란 지명은 주위 산과 냇가에 소나무(松)가 많아 松川→솔래→蘇來=蘇萊로 변화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다. 그 유래야 어찌됐든, 소래는 이제 전국 어느 곳에 내놔도 손색이 없는 관광어촌으로 알려져 있는데, 소래가 소래포구란 이름으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 무렵이다. 일제는 당시 경기도 지역의 쌀과 함께 소래 주변에서 많이 생산되는 天日鹽 등을 수탈하기 위한 수단으로 수인선 철도를 건설했다. 그 때 작업인부와 염부(염전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실어 나르기 위해 나룻배 1척을 소래포구에 대면서 포구가 활성화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처럼 소래포구는 일제가 대동아 전쟁에 쓸 물자를 수탈하려고 수인선을 건설하면서 수송기지로 이용됐던 셈이다. 그 후 1960년대초 실향민 6가구 17명어업인이 (어촌계구성) 전마선으로 고기를 잡아 생계를 이어가면서 돼지그물, 지금의 연안낭장망 어업에 범선(돛단배)을 이용하여 아주 가까운 바다에 나가 새우젖잡이를 하여 머리에 이고, 지고, 인천, 부평, 서울 등지로 나가 팔아 오다가 1970년대 새마을 운동과 더불어 무동력선을 동력선으로 개량하였으며, 그 때부터 어선수도 차츰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그 당시 수인선을 이용하여 수원, 인천등지에서 상인들이 몰려오고 일반소비자들이 구경삼아 찾아오기 시작하면서 직접거래가 활발히 이루어지면서 물량장 및 선착장, 공판장을 조성하였으며, 많은 예산이 드나 예산이 없어 돌과 모래, 흙을 섬에서 배에 가득 실어다가 어린이에 서부터 어른까지 총동원되어 포구 기반시설을 만들어 왔다고 한다. 이 때부터 주변에 튀김집, 횟집이 하나 둘씩 생겨 나오며 소래어촌계가 중심이 되어 관광객 유치에 앞장서 80년대 초반 각종 시설물 확충과 더 불어 각 TV 방송사에서 홍보용 방송은 물론 어촌에 관계된 프로, 연속극 등이 방영되면서 점차로 관광객이 해마다 늘어나 이곳을 찾는 사람들과 선주 아주머니들의 넉넉한 인심이 외래객들에게 매력을 느끼게 한 것이다. 여기 어촌 인심이 돈주고 사는 것도 있지만, 어지간한 생선은 그냥(덤) 주기도 하고, 잡어 속에서 줍는 것만으로도 꽤 재미가 있었던 것이 도시민이 소래포구를 찾는 것 중 하나이며, 점점 소래포구가 발전되고 살기좋은 고장으로 소문이 나자 여기저기 타지방에서 맨손으로 올라와 어민만 사용토록 된 물량장에서 생선장사를 억척스럽게 하여 지금 다들 거부가 되어 이제는 어엿한 소래포구의 주인노릇을 하고 있으며, 시집가서 잘못되면 모두가 친정동네인 소래로 다시 와서 재기한 사람도 많습니다. 이런 모습들이 소래포구를 어시장으로 변화시킨 것입니다.
예전의 소래포구는 진흙탕 갯벌 속에서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없이는 못사는 달동네였다고 한다. 수돗물이 나오지 않아 1Km 밖 오봉산 자락 우물에서 뱃사공들이 선주 아낙네들에게 잘 보이려고 물길어 나르던 곳...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등잔불에서 새벽밥 지어 뱃사공 점심도시락을 차리던 어촌이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80년대 대단위 관광어촌으로 발전하게 되어 오늘에는 일일 수천명에서 주말, 공휴일, 사리때(고기가 가장 많이 잡히는 시기)면 3만 - 5만명의 관광객이 몰려든다고 한다. 소래포구는 천연적인 포구인데, 폭이 100M 남짓한 갯골을 따라 썰물때면 바닥이 완전히 드러난단다. 서해 간만의 차가 최고 9M로 동해, 남해에서는 보기드문 현상이며, 밀물때가면 물따라 배가 들어오는 모습은 어디에서나 찾아보기 드문 신비하다고 한다. 이렇듯 소래포구는 과거에 인천항을 이용하던 작은 어선들이 항만 개발이후 이곳을 찾으면서 생겼는데, 인천앞 근해에서 잡은 새우와 각종 잡어들을 소비자와 직거래하므로 서울 ·인천을 비롯한 수도권의 많은 주민들이 즐겨 찾는 당일 코스 관광지로 정착하였다. 이곳 어시장에서는 특히 일일조업으로 그날그날 어획한 鮮度가 높고 맛 또한 우수한 생선을 공급하고 있다. 싱싱한 젓갈용 새우, 꽃게, 민어, 농어, 병어, 광어, 망둥어, 소라, 우럭, 홍어, 낙지 등 다양한 어종이 많이 생산되는 고장이다. 소래포구에서 월별 다량으로 생산되는 어족을 중심으로 볼 때 계절별 어획물을 표기하면 다음과 같다.
1월 참새우, 농어 (소량) :어한기 출어어선 10척미만
2월 참새우, 농어
3월 새우(젓갈용), 참망둥어, 웅어
4월 새우, 꽃게, 민어, 농어, 광어, 주꾸미, 낚지, 소라
5월 - 7월 새우, 꽃게, 민어, 농어, 광어, 주꾸미, 낚지, 우럭, 놀래미, 소라, 대하, 물텅벙이, 장뎅이
8월 휴어기
9월 - 10월 꽃게, 기타잡어
11월 - 12월 동백하(새우), 기타잡어 .
배들어 오는 시간에는 선주와 흥정하여 싸게 살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리고 특히 주말에는 싱싱한 횟감을 먹기 위해서, 가을철에는 김장용 젖갈을 사기 위하여 들통을 든 아주머니들이 즐비하게 장사진을 이루는 등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으며[젓갈류의 집산지로 생새우, 육젓, 추젓이 유명하다], 앞으로도 이곳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확충되면 더욱더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 될 것으로 보인다. 서해안고속도로 ·인천시 외곽순환도로 등이 연결된다.

1999년 9월에는 소래포구 인근에 포대가 있었다는 사실이 새롭게 밝혀져 관심이 집중되었다. 고종 14년(1877) 일본이 서해안을 측량, 개항지를 물색하자 고종이 인천을 개항 후보지로 요구할 것에 대비해 인천 연안에 화도진을 설치한 것은 이미 알려져 왔는데 금번에 그 무렵 소래에도 포대를 설치했던 사실이 새로 확인된 것이다. 소래 `댕구산 포대'는 고종 15년 8월 어영대장 신정희로 하여금 화도진과 연희진을 착공케 한 뒤 이듬해(1879) 7월 준공했다. 이는 화도진도(조선총독부 1917년 발간, 축적 1:50,000지형도)에 나타나 있다. 화도진도(군사지도)에 따르면 포대가 설치된 곳으로 묘도북변포대(5문), 묘도남변포대(5문), 북성곳(북성포) 북변포대(5문), 북성곶남변포대(5문), 제물(포)북변포대(8문), 제물(포)남변포대(5문), 호구(논현)포대(2문)[유형문화재 제6호] 및 댕구산(일명 장도)포대(3문)를 들고 있다. 그 전까지 알려진 화도진도엔 `댕구산 포대'가 없었던 것이다.
남동구청은 `댕구산 포대'의 존재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수년간에 걸쳐 지역주민들과 문헌을 통해 확인작업을 벌이던 중 비로소 지난 99년 9월 국립중앙도서관 자료실에서 화도진도 원본을 찾아내어 이 사실을 밝혀내는 개가를 올렸다. 1993년 발간된 인천시사에는 화도진도의 총 포수는 7곳의포대와 35문의 포로 기록되어 있으나, `댕구산 포대'의 발견으로 총 포대 8곳, 포 38문으로 늘어나게 됐다. `댕구산 포대'는 소래포구를 가로지르는 소래철교 옆에 40m정도 높이의 작은 산(구릉)에 있었다. `댕구'란 대포를 뜻하는 옛말로 `대완구'로 부르기도 했다. 화포중 가장 큰 대완구는 지름이 30㎝나 되는 쇠나 돌로 만든 둥근 탄알을 발사하였다고 한다. 결국 `댕구산'이란 대포가 있었던 산이란 뜻인 셈이다. 소래 주민들은“댕구산에 포대가 있었다는 얘기를 어릴 때부터 마을 어른들에게 들었다”며 “ 원래 포대 자리인 댕구산은 수인선 철도를 놓을 때 그 일부가 허물어졌기 때문에 반쯤만 남아 있고, 현재는 포대의 흔적도 없는 상태이다. 현재 소래 철교 옆 해발 약 40m의 구릉이 바로 그 곳”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산이 언제부터 `댕구산'이라고 불렀는지 문헌이나 자료 등을 통해선 정확히 확인되지 않지만, 포대를 설치한 후부터 `댕구산'으로 부르지 않았는가 추측할 뿐이다. 주민들은 그냥 언제부터인가 자연스럽게 댕구산이라고 불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댕구산 포대'[일명 獐(장)島포대로 알려짐]의 자리는 `노루목' 또는 `노렴'이라고 부르는데, 산 모양이 노루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라고 소래 주민들은 전한다. 화도진도상 장도포대의 3문의 포 배열을 보면 2문은 바다쪽인 뱀내(만수천 장수천 은행천 내하천의 물이 모여 소래포구 앞에서 바다로 흘러드는 하천을 말함) 하구쪽을 향하고 있고, 1문은 동남쪽을 향해 외곽과 내곽의 수비를 목적으로 했음을 알 수 있다.

서울 근교의 젊은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로서 한껏 정취를 자아냈을 뿐 아니라 서민들의 삶의 애환이 깃들어 있었으며, 마냥 터덜대던 수인선 협궤열차는 이미 비록 철거되었으나, 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추억으로 아스라이 간직되고 있다. 지금 저 많은 인파들 중엔 그 때의 낭만과 추억을 더듬기 위하여 온 분들도 무척 많으리라! 수인선은 인천 송도역과 수원 사이를 잇는 협궤철도로서 당초엔 총연장 52km, 선로 너비 0.762m, 좌석 54석이었다. 경기만에 있는 전국 최대 규모인 蘇來·南洞·君子 등의 염전지대에서 생산되는 소금[天日鹽]을 대동아전쟁 당시 화약제조 원료로 사용하기 위하여 그 수송수단으로서 1937년 8월에 개통되었다. 해방후에는 남인천역에서 수원역까지 상인, 학생들의 교통수단으로 주로 이용되어 왔다. 1970년대 불어온 새마을 운동과 더불어 국민소득이 향상되고 이곳 소래포구가 관광어촌으로 각광을 받으면서, 한때에는 하루 왕복 10회를 운행하였으며, 1일 이용객수도 1~2만명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남인천역과 수원역에서는 열차시간에 맞추어 반짝시장이 형성될 정도였다. 그러나 1973년 7월 14일 인천 항만의 확장 건설로 인해 5.1km가 단축된 수원~송도 간 46.91km만 운행되다가 인수산업도로, 서해안 고속도로의 개통과 함께 기능을 잃어버린 협괘열차는 경제성이 낮아져 1995년 12월 31일 철거, 폐선되어 55년간의 추억만을 남긴 채 그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협궤철도란 궤도 간격이 標準軌間(1,435 mm)보다 좁고, 소형의 기관차나 차량을 사용하여 운용되는 철도로서 일반적으로 건설투자비·운행비·보수비 등이 적게 들지만, 廣軌鐵道에 비해 열차의 운행속도가 느리고 안전하지 못하다. 협괘철도는 교통량이 적은 지방철도로 사용되었으나, 자동차 교통의 발달에 의해 별로 사용되지 않는다. 한국의 협궤철도로는 위 水仁線외에도 수원 여주 간을 있는 수려선이 있었으나 이것도 1972년 3월 31일 폐선된 바 있다.

소래의 성수기는 6월, 9월, 11월이다. 이때도 물때를 잘 맞춰야 싱싱한 생선을 맛볼 수 있다. 매월 음력 보름 3일후까지, 그믐 3일전부터 3일후까지가 적당하다. 그날 당일 썰물을 따라 배를 타고 나갔다가, 밀물이 밀려올 때 만선의 꿈을 안고 배들이 들어오는데, 배에서 내려진 생선은 바로 공매장인 수협소래지소 공판장으로 옮겨져 경매한다. 배가 들어오기 시작하면 경매사가 쉰 목소리로 고함을 지르며 어가를 높이기 위하여 경매하는 모습 또한 볼거리라고 한다. 하여튼 경매를 통해 각 횟집에서 구입한 생선을 바로 내놓는 그 시간을 택하면 싱싱한 맛을 즐길 수 있다. 어시장 입구에 100여곳의 횟집들이 즐비하다. 어시장 주변의 좌판(생선판매 하는 조그만 가게)도 350개 정도라고 한다. 어시장 안에도 노천횟집이 있어 앉아서 먹을 수 있다. 횟감을 사서 자리를 잡으면 양념과 매운탕을 끓이는 값만 지급하면 되는데, 3~4인분에 2만원이면 충분하다. 소래의 명물은 뭐니뭐니해도 김장철에 나는 생새우이다. 매년 11월에 소래 어시장은 이 때문에 더 붐빈다. 젓갈은 물론 꽃게와 바지락, 우럭 등 온갖 생선을 사시사철 구입할 수 있다. 주차시설은 소래포구 입구에 민영과 공영주차장 들이 많이 있다.
횟집[여수 오동도회센타 032-446-9933]에서 점심을 먹고 소래포구에서 단연 볼거리인 수산시장으로 다시 갔다. 시장치고는 그리 크지 않지만 서해에서 나는 온갖 수산물이 눈에 띄이고, 좁고 복닥거렸다. 시장을 한바퀴 둘러보면 풍성한 수산물 덕분에 마음도 부자가 된 듯하다. 가장 시선을 끌고 군침을 돌게 하는 것은 갯가재와 꽃게였다. 갯가재를 너무 맛있게 먹은 기억이 있어 더욱 군침이 났지만 집사람은 이런 나의 마음을 모르는지 마냥 무관심하다. 맛이 있다면서 몇 kg 사가자고 하고 싶으나 집사람이 요리를 할 수 없을 것같아 참는다. 회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갯가재만큼은 매우 좋아한다. 마침 사가는 사람이 요리법을 몰라서 묻자 시장 아줌마는 친절하게도 가위로 멀쩡한 갯가재 한 마리를 잘라가며 찐 다음 그렇게 가위로 잘라 속을 꺼내 먹으라고 시범을 보여 주고 있었는데 설명을 들어보니 재미있다. 그리고 저울의 눈금이 사가려는 무게[kg]을 한참 넘었는데도 주섬주섬 서너 번을 더 담아 넣어주었다. 인심이 후해 보였다. 그런데 갯가재를 산 사람이 지나가면서 갯가재가 든 검은 비닐 봉지로 내 다리를 치는 바람에 갯가재의 몸 주변으로 난 단단한 가시들이 내 다리를 아주 심하게 따갑게 했다. 다시 지나가는데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길래 비집고 들어가 자세히 보니 사람들이 한 아줌마가 회 뜨는 것과 횟감을 진지하고도 열심히 구경을 하고 있었다. 그냥 지나가면서 보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일삼아 서서 그렇게 열심히 보는 것을 보니 한국인들이 회를 얼마나 좋아하는지를 알 수 있다. 이런 모습은 소래 어시장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다. 그리고 소래 포구의 상징인 새우젓을 쌓아놓은 모습이 참 이채로왔다. 세계 여러 민족 중에서 이렇게 작은 새우를 발효시켜 먹는 민족은 그리 흔하지 않다. 새우젓의 깊은 맛을 모르는 외국 사람은 소래에 오면 의아해 할 것같다. 이윽고 홍합이 보이니 집사람은 갯가재 대신 홍합을 잔뜩 샀다. 애들도 이것은 무척 좋아한다. 집사람도 홍합에 대해서는 거의 광적이다. 요리하기도 쉽기 때문이다. 외국인도 우리처럼 홍합을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미국 LA의 태평양 연안인 산타모니카 해안의 방파제에는 홍합이 새까맣게 붙어 있는데 알이 굵다고 한다. 한국에는 그런 곳이 남아있을 리가 없지만... 만약 한국 사람들을 며칠만 그 산타모니카 해안에 내려 놓으면 홍합이 까맣게 덮인 방파제가 금새 하얗게 변할 것이다. 그리고 어시장에는 조개모듬을 구워 먹을 수 있는 곳이 있다. 비싼 것도 많고 종류도 참 많다. 이를 캐려고 정말 많은 사람들이 갯벌에서 고생했을 것이다. 또 개불도 보인다. 이 개불은 횟집에서는 조그맣게 잘려져 나오기 때문에 어떻게 생긴 것인지 알 수가 없었는데, 정말 볼품도 없고 맛도 없게도 생겼다. 개불을 먹어본 적이 없는 사람은 웬간한 비위와 용기가 없이는 개불을 먹지 못할 것이다. 꼭 갯지렁이가 같기도 하지만 이와는 다른 바다 지렁이 같이 생겨서 그러하다. 그러나 일단 맛을 들이면 그 꼬돌꼬돌한 맛을 잊지 못하고 다시 찾게 된다고 한다. 해삼도 보이는데, 씹을 때 미끌하면서도 오돌도돌한 맛이 기가 막히고 영양이 많아 초장에 푹 찍어 막 먹게 되는 것인데, 아내들이 남편에게 많이 권하는 식품이기도 하다. 이처럼 이곳 어시장의 풍성한 먹거리는 눈으로 보기만 해도 참 즐겁다. 나처럼 즐거움과 맛을 찾으려는 인파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싱싱한 횟감을 떠주는 상인과 좋아하는 물건을 사려는 사람들......그런데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는 으례 트러블이 있게 마련인데 소래에 온 사람들은 모두 아주 여유들이 있고, 얼굴을 찡그리지도 않고 있다. 참으로 바람직한 모습들이다. 우리 나라의 모든 사람들이 이런 모습이면 어떨까 하고 생각해 본다. 시장통 거리에서 한 아주머니가 머리를 갈색으로 염색하고 한껏 화장으로 예쁘게 꾸미고 새우젓과 새우, 조그만 망둥어를 팔고 있다. 아직도 시장 주변의 환경과 소래의 전반적인 환경이 아직도 후진성을 면하지 못하고 있는 것에 다소 입맛이 씁쓸해진다.
수산물 이외에도 다른 잡동사니 먹거리 장사도 짭짤한 것 같다. 참 질기게도 우리의 입맛을 떠나지 않는 호떡과 붕어빵, 각종 엿, 옥수수빵 등이 그것이다. 사람이 먹지 않고 살 수 없는 한 이것들이 우리 곁을 언제까지나 떠나지 않을 것 같다. 특히 엄청 큰 옥수수 빵이 이채로왔다.

어시장에서 철교로 가기 위해 인산인해를 이루는 사람들을 따라 우측으로 오르면 철길 좌우로 터널처럼 되어 있었다. 산이 있어서 낸 터널이 아니라 천막을 길게 쳐 놓아서 그렇게 보인다. 이처럼 이어진 천막굴안에는 먹거리 잡상인들은 잡초같은 삶과 끈질진 더부살이를 해 나가고 있다. 우리 나라 어디서나 사람이 모이는 곳이면 장사진을 치는 잡상인들의 기지로 인해 미관이 크게 헤쳐치고 눈살을 찌푸려 지지만, 이미 그것에 나름대로 익숙해져 버린 우리들은, 잡상인들의 그런 모습을 혐오면서도 그들이 파는 감칠맛나는 먹거리를 결국 돈을 주고 사먹고 만다. 언젠가는 그런 모습도 다른 모습으로 변하거나 사라지겠지만........ 천막 터널 안으로 들어가니 정말 종류의 먹거리를 팔고 있다. 잡상인 박물관 같다. 가래떡을 핫도그처럼 꼬치 막대기에 끼워 구운 것, 오뎅, 호떡, 고기 말린 것, 설탕을 구워 만든 뽑기, 군밤, 쭈꾸미 등 온갖 구질구질 해보이는 것들이 그것이다. 하지만 그것들을 보면서 지나는 재미가 있다. 한 아저씨는 빨간색 좌판에 쭈꾸미를 올려 놓고 묶어 팔고 있다. 쭈꾸미는 낙지도 아니고 오징어도 아닌 것인데, 그 비슷하게 생겼다. 살짝 데쳐서 초장에 찍어 먹으면 나름대로 감칠 맛이 난다. 주당들의 술안주로 안성마춤이다. 또 다른 사람은 빵도 팔고 설탕을 녹여 구운 "뽑기"도 팔고 있다. "뽑기"는 그 옛날 몇 전인가 몇 원인가 하던 것이었는데 여기서는 500원이란다. 이제 이런 것도 100원 단위가 되었으니 우리 나라에 십원 단위 물건과 십원짜리 동전은 없어질 수밖에 없다고 본다. 그래서 인터넷 전자상거래에서나 쓰이는 가상 화폐가 된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혹자는 전자상거래에서 10원 단위의 짜투리 돈은 인터넷에 놔두고 100원 단위의 돈만 주고 받게 규약을 만들면 불특정 거래 대상이 많을 경우에는 보이지 않는 큰 돈을 만들 수도 있을 것이라고 제언하기도 했다. 오후가 되면 사람들이 더욱 붐비게 되어 이 좁은 터널 안은 더욱 움직이기가 어렵게 된다고 한다. 그래서 한 가지 걱정이 되는 것은 여기에 불이라도 나면 적지 않은 사상자가 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여러 구질구질한 것이 화재/안전 사고의 원인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불이 텐트에라도 옮겨 붙는다면 정말 어처구니 없을 것이다. 단순히 하나의 포장마차에서 불이 나는 것과는 차원이 틀릴 것이다.

여기서 잠시 아까 그 어시장이 세계적인 명소가 되게 하는 방안은 없을까 하는 생각이 불현 듯 스친다. 어시장엔 구질구질한 볼거리가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과연 외국인을 데리고 올 수 있을까는 의문이다. 그들이 과연 관심을 가지고 우리처럼 재미있어 할까라는 모르기 때문이다. 한국 사람은 그저 그 구질구질한 것을 보고 감칠 맛 나는 것을 먹는 재미로라도 온다고 하지만.... 그래서 소래 어시장이 세계적인 관광 명소가 되기에는 여러 가지로 부족한 면이 많아 보였다. 우리 나라 사람이 명소라고 생각해도 이 곳이 세계적인 명소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국민들의 의식 수준이 세계적인 수준이 되어야 할 것이다. 잘 사는 나라의 손님도 맞이할 수 있는 수준의 높은 위생 관념, 상대방의 마음을 배려하는 여유와 찾아오는 사람으로 하여금 왕같은 편안한 기분을 느끼게 만드는 우아한 매너와 정성 등 그런 무형의 의식들이 구축이 되어야 하고 또 교통과 주변 시설이 받쳐주어야 한다. 용산 전자 상가도 수천 개의 상점이 모여 뭔가 좀 복닥러리기는 도떼기시장 같지만 그래도 주변이 정리가 되어 깨끗며, 주차장 시설이 잘 되어 있고, 교통망도 그리 불편한 것은 않는 편이라 외국인이 가도 그리 꿀릴 것이 없는 곳이다. 소래 어시장도 최소한 그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본다. 그런데 깨끗하게 정리하거나, 주변 경관을 자연 경관과 어울리게 자연친화적인 환경으로 꾸미는 데엔 돈이 필요하다. 돈이 몰리면 여러 분야의 인재도 몰려, 정말 외국인이 기념으로 사가고 싶은 한국과 그곳의 특징이 담긴, 그리고 디자인과 아이디어가 멋진 기념품과 풍류가 있는 공간도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쾌적하게 즐기며 돈을 쓰고 가고 싶은 맘이 생기는 부대시설과 공간도 만들 것이다. 소래포구는 이러한 것들이 부족하여 한국에 온 외국인에게 보여주기는 민망한 곳이다. 한국에서 좀 시간을 보내어 김치를 비롯한 발효 식품과 찌게와 국이 기본을 이루는 한국 음식에 적응되어 있고 한국에는 회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고 회맛까지 아는 외국인이라면 소래의 그 구질구질한 시장 주변 풍경에 대해 흥미있어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정도의 외국인이 아니라면 소래에는 절대 데리고 갈 일이 아니다. 제조업과 관련되어 내한한 외국인을 구경시켜줄 일이 있다면 소래포구나 노래방 같은 음침하고 구질구질한 곳에 데려가지 말고 경복궁이나 경주 같은 고궁에 데리고 가는 것이 우리 나라 제조업의 품질 수준에 대해 신뢰감을 주는 방법이 될 것이다.


*낭만과 추억의 소래철교

.80년대 이전에 남인천역과 수원역을 다녔던 당시 학생들과 상인들의 추억과 낭만이 서려 있는 이곳에는 지금도 그 시절의 어렵고 낭만적인 추억을 되새겨 보려는 듯 소래 철교를 찾는 이가 많다. 그러나 추락위험이 많은 이유로 철도청에서는 통행을 금지시켰고, 이것마저 여의치 않자 96년 6월에는 교각을 철거한다는 내용으로 한 공문을 남동구청에 보내왔다. 이에 인천 남동구에서는 5천만원의 예산을 들여 완벽하게 보수하고 안심하고 통행할 수 있도록 소래철교 정비공사를 실시하여 남동구의 영원한 추억의 명소로 보존시켰다. 특히, 6.25 사변중에는 소래철교를 이용해 많은 사람들이 피난길에 오르다 희생자를 남긴 애환이 서려 있기도 하다. 그 옛날 협괘열차만이 지나던 길이었고, 얼마전까지만 해도 이 철교는 걸어서 건너지 못할 정도로 너무 위험했는데, 이제는 사람이 북적거리고 있다. 열차가 다닐 땐 없던 고급스러운(?) 난간을 만들고 밑에 철판을 깔아서 사람들이 안전하게 오갈 수 있다. 철길이 그대로 보존되고 있어 건너보며 낭만을 느껴볼 만하고, 그 옛날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황량한 갯벌과 낡은 철교, 갯벌에 누운 고깃배 그리고 멀리 보이는 아파트 건물들과는 너무 기괴해 보일 정도로 어울리지 않는 풍경이다. 이제 새우젓 상인이 상권을 휘어잡고 협궤 열차에 새우젓을 실어 내륙의 곳곳으로 옮기던 곳, 사람들이 여러 목적으로 이용하던 그런 곳이 아니고, 주말에 보통 사람들이 관광 삼아 건너보며 복작거리는 그런 곳으로 완전히 바뀌었다. 철교 인근엔 물과 땅이 만나는 곳에 갈매기가 보인다. 가까이서 본 갈매기는 잘 먹어서 아주 덩치가 커서 징그러웠다. 야간에는 가로등 불빗과 바닷물이 조화를 이루어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로 이용되고, 가을에는 망둥어 낚시로도 유명하다고 한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여기가 바다구나.., 여기에 갯벌이 있구나" 하는 느낌은 사람들에 시달리느라 느낄 겨를도 없었다. 일단 사고 없이 이 철교를 빠져나가자 하는 생각 뿐이었다. 솔직히 철교엔 아무 것도 없다. 그냥 다리였다. 장정 한 사람이 팔 벌리고 서면 양쪽이 닿을 듯하게 좁은 그곳에 오고 가고 많은 사람들이 건너고 있었다. 그 곳을 건너는데 가다 서다 하면서 30분이 걸린 것 같다. 사람이 많지 않으면 5분도 채 안 걸릴 거리이다. 중도에 돌아갈까도 했는데 거기서 돌아나온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혹시 아이들을 데려 오면 무척 힘들 것 같다. 사람들에 치여 힘들어 하면 어른들이 아이를 들쳐 업고 건널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모두들 영락없이 피난민 꼴이다. 바로 옆에는 소래대교가 보여 웃음이 터져 나오려고 했다. 사람들이 뒤엉킨 곳으로 이끌려 생고생하는 것도 그렇고…하지만 초고속 초스피드 시대에 이런 곳이 있다는 게 재미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저 옆에 저렇게 뻥뚫린 다리를 놔두고… 이 철교에 비하면 어시장 통은 넓고 넓은 대로에 광장이라는 느낌이 든다.철교 끝 무렵에는 온갖 상인들로 더 비좁았다. 바닷물이 충분히 들어오지 않은 상태인데 작은 고깃배 한 척이 바다로 나가고 있었다.

어시장 쪽에서 철교를 건너가면 시화이다. 구경과 먹는 것을 끝내고 철교를 건너면 러브 호텔이 군집을 이루고 있는 곳이 있다. 뭔가 수상했다. 온갖가지 형형색색의 러브호텔들과 위락시설이 주변 경관과 전혀 어울리지 않게 몰려 있었다. 이 부근에 주택가는 없으니 큰 문제는 될 것 같지 않지만, 회 먹는 곳에 이런 러브호텔이 군집해있는 것을 보니 묘한 생각이 듭니다. 러브호텔이 모여 있는 곳 중앙에 "자유의 여신상"이 있다고 여기가 뉴욕이라고 생각하는 분은 없겠지요? 오른쪽에 있는 전봇대를 보면 금방 탄로가 난다. 다음 번에는 자가용으로 서울 순환 고속도로를 따라 돌다가 "월곶"에서 내려 소래포구로 가다가 소래대교를 건너기 직전에 좌회전하여 시화쪽 주차장에 차를 대고 소래철교를 걸어서 건너 소래시장으로 가야겠다. 이렇게 하는 방법이 차를 주차시키기도 편하고 철교도 한 번 건너보는 이점이 있을 것 같아서다.

철교를 건너 시간을 보낸 다음 다시 철교를 건너 빠져 나오려는데 사람이 너무 많아 철교를 되돌아 건너오는데 시간이 엄청 걸렸다. 더구나 그 좁은 다리 입구에는 사람들이 뒤엉켜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했다. 거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고행의 길을 가는 것같다. 거기에 과연 무엇이 있는 것일까 ? 구경꾼으로 둘러싼 동그란 원 안이 궁금해 비집고 들어가서 봐야만 직성이 풀리는 그 심리 때문인지 저기에 뭐가 있지 ? 하면서 사람들이 계속 몰려 들었다. 그리고 터널 속 잡상인들 덕에 불편함이 더 했다. 오후 늦은 시간에 되돌아 나오는데도 엄청 많은 사람들이 꾸역꾸역 계속 물밀듯이 들어오고 있었으니 말이다. "야, 이런 데는 뭐하려고 오는 거야?"라는 불만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 온다. 그런 말을 하는 자는 왜 왔는지 묻고 싶었다. 우리를 앞서가던 사람이 갑자기 '으악' 소리를 내어서 살펴보니, 마주오던 꼬맹이가 들고 있는 검은색 비닐봉지에 정갱이를 부딪친 사람이 영문도 모르고 비명을 질러댄 것이다. 아마도 그 비닐봉지엔 갯가재가 들어 있어 그 가시에 찔린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상대가 꼬맹이인지라 비명을 지르고는 금방 사람들에 떠밀려 그냥 지나가면서 자기의 다리를 고통스럽게 한 것이 뭔지도 모른다는 표정을 지었다. 틀림없이 꼬맹이가 검정 비닐 봉지만 들고 있을 것이니 이상한 생각을 할 여유도 없을 것이다. 이어서 또다른 누군가의 비명 소리가 들리면 꼬맹이는 눈을 질끈 감고 입을 '뜨아' 벌리면서 미안한 기색을 하다가도 비명소리가 우스운지 재미있어 한다. 순진한 녀석의 표정이 굉장히 개구쟁이 같다. 그 보호자가 조심하라고 한 것 같으나 사람이 너무 많아 어쩔 수가 없이 비명 소리는 계속 나고 있었다. 그래서 소래에서는 검은 비닐 봉지를 조심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구질구질한 것에 시달려 가면서 빠져 나온 다음, 다시 버스 종점으로 돌아온 집사람은 소래에 다시는 오지 않겠다는 푸념이다. 집에 돌아와서 홍합을 몽땅 삶으니 감칠맛나는 냄새가 온 집안에 진동한다. 큰 양푼에 담아 내오니 이걸 다 먹을 수 있을까 생각을 했으나 집사람과 아이들은 금새 촛점 잃은 눈을 하고 먹는 것에 빠질만큼 홍합의 맛에 도취되었는가 싶더니 금방 바닥이 나 버린다. 겉으로 보기와는 달리 큰 알맹이 살이 풍성했다. 그 나름대로 홍합은 맛이 기가 막혔다. 모두들 아쉬운 표정이다. 이즈음에서 집사람은 소래에 다시는 가지 않겠다더니, 약간 수정하여 붐비지 않는 평일에 소래에 가서 홍합 및 새우/갯가재 등을 사와야겠다고 한다. 올해의 늦가을 소래포구는 우리 가정에 홍합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 준 셈이다. 홍합을 삶아먹고 난 껍질이 엄청납니다. 먹고 난 후의 껍질 양이 한 양푼인 만큼 넷이 아쉽지 않을 정도로 먹을 수 있는 양이었다. 그런데도 모자라는 눈치이니 이제 아이들도 크긴 큰 것인가 봅니다.

소래포구 물량장

물량장이란 어선의 출항전에 선원용품, 어구등을 싣고 어선 및 어구 수리를 하고 잡아온 수산물을 어민이 직접 판매등을 하는 장소를 말한다. 약 997평(자연매립 197평, 인공매립 800평)인 소래 물량장은 종전에는 순수한 물량장이었으나 현재 그 기능이 물량장과 어시장이 함께 운영되고 있으며 최근에는 소래포구 물량장 보다는 소래포구 어시장이라 불리고 있다.

나는 거의 4년 6개월이라는 긴 세월동안 남한의 1대간 1정간, 8정맥을 완주하고 나서 머리도 식힐 겸 쉬기 위해서, 그리고 관광하러 온 사람한테는 냉정하지만 외로움을 달래러 온 사람에게는 한없이 다정하다는 소래포구. 협궤열차 덕에 입소문을 타고 유명해졌던 소래에 가고 싶어서 이번 주말엔 특별히 집사람과 함께 나들이의 목적지로 택한 것이었다. 그러나 협궤 열차가 없어진지가 꽤 되었고 우리 나라에선 유명세를 타면 반드시 망가지고 만다는 정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애초에 소래에 대하여 큰 기대감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 포구니까 새우젓이외에도 좀 맛있는 게 있으면 좀 살 수 있을까 하고 간 것이다. 뚜렷한 목적이 없긴 했으나 신경림의 <간이역>에 나오는 소래포구를 기억하며 뭔가 위안을 얻을 거리가 있겠거니 하고 마음 한 켠에 기대감이 조금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 배낭 하나 메고 협궤 철도 간이역에 내린다.
물이 썰어 바다는 먼데도
몸에 엉키는 갯비린내
비늘이며 내장으로 질척이는 수산시장
손님 뜸한 목로 찾아 앉으니
처녀적 점령군 따라 집 떠났다는 황해도 아줌마는
갈수록 한만 늘어 대낮부터 사연이 길다
갈매기가 울고 뱃고동이 울고
긴 장화로 다리를 감은 뱃사람들은
때도 시도 없이 술이 취해 유행가 가락으로 울고
배낭 다시 들쳐메고 차에 오르면
폭 좁은 기차는 마차처럼 기우뚱대고
차창으로 개펄이 긴
서해바다 가을이 내다보인다. "
그러나 상인들은 저마다 호객행위를 하고, 좀처럼 지나갈 수 없을 정도로 집요한 점과 너무나 변해버린 월곶을 보고 느낀 점으로 인하여 아쉬운 가슴을 쓸어 내렸다. 아무리… 이렇게 까지 막가면 안될 것 같아서.... 갯내음이 나는 가운데에도 차들이 즐비한 모습은 싫었다. 거의 대부분 가족 단위로 와서인지 주차한 차량이 끝이 보이지 않았다. 이러한 점에서는 몹시 식상하게 했다. 신경림의 시에서 나오는 그런 작은 포구가 아니라 생각보다 규모가 컸다. 젓갈만 전문으로 파는 집만도 십여 군데가 넘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아직 직접 배가 들어오는 포구라면서도 중국산 생선과 건어물 투성이였다. 집집마다 중국산과 한국산을 구별해 놓고 "이것 보세요. 중국산과 한국산은 이렇게 달라요. 한국산은 한깡통에 삼만원"이라고 하고(너무 싼 것이 수상했다), 어느 집에는 중국산은 한국산의 반값이라고 한다. 눈으로는 잘 구별이 가질 않았으나, 이집 저집 다녀 본 결과 중국산을 한국산이라고 속여 팔고 값은 중국산으로 받는 집도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일단 중국산이라고 하면 들여다 보지도 않으니까 한국산이라고 하고, 값은 중국산 값을 받아서 만약에 있을지도 모를 단속이나 위법을 피해가자는 속셈인 것 같았다. 나중에 오리발 내밀면 되니까..... 돈은 중국산 값을 쳐 받았으니 사러 온 사람이 잘못들은 것으로 돌릴 것이다. 이런 것들이 또 몹시 식상하게 만든다. 솔직히 얼마 전 납 파동도 있고 해서 찜찜해서 비록 냉동 게가 아니고 살아 꿈틀거리는 게라도 선뜩 살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괜히 집에 와서 찜통에 넣고 쪘는데 뚜껑을 여는 순간, 밝은 주황색을 띄어야 할 게가 짙은 황토색을 하고 있고 살은 문드러져 먹을 수가 없으면 그 배신감은 엄청날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중국산 게이니 엄청 짤 것이 틀림 없을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젓갈 뿐 아니고 거의 모든 품목에서 일종의 판매 전략을 구사하면서 말만 한국산이고 가격은 중국산으로 계산해서 준 것을 후회하기 싫어서..........
외로움을 달래러 온 사람에게 다정하다는 소래포구이라고 하더니, 외로울 틈이 없을 정도로 사람 많고 시끄럽고 정신이 없었다. 선착장에서 석양의 대향연이 기대된다고도 하지만 이 또한 바라기 어려울 것 같다. 여기 온 사람들이 속아서 해산물을 산 것을 생각하면 그 값어치 이상으로 속이 상할 것이리라. 중국산에 점령당한 우리 포구, 휴일이면 갈 곳이 없어 그나마 다행이라 여기고 몰려드는 사람들. 지역 경제를 위해선 이렇게 몰려드는 사람들이 반갑겠지만 뭔가를 기대하고 갔던 사람들로서는 낭패였다. 사람 많다고 투덜거리는 것은 잠깐 지나가는 관광객이 가지는 이기적인 생각일 수도 있겠지만(그곳은 시장이니까.) 다시 가보고 싶지는 않은 곳이었다. 누구처럼 내가 너무 현실적이고 메마른 사람이라서 소래의 왁자지껄함 속에서 삶의 활력을 찾는데 무디거나, 대강 속아주고 원래 장사치들은 다 그렇거니 하고 껄껄 웃으며 초월하지 못하는 성미라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앞으로라도 소래포구에 가실 분은 가능하면 일요일은 피하라고 권하고 싶다. 우리 집사람이 앞서 한 말처럼.....한국산이라고 한다고, 살아있다고 다 믿을게 못된다는 말도 더하여서..

끝으로 뱃시간이 기다리기 지루해지면 논현동, 도림동 일대의 과수단지에서 참외, 수박, 복숭아, 포도, 배등을 맛볼 수도 있고, 조선말 외세침략을 막기 위하여 설치한 논현동 호구포에 있는 논현포대(고종이 개항 후보지로 빼앗기지 않으려고 만듬)를 구경하는 것도 좋다고 한다. 여하튼 현재의 소래포구는 10톤 미만 어선이 234척이 연일 팔미도, 이작도, 풍도, 조치도, 용유도, 덕적도, 울도, 서해 특정해역에서 일일조업으로 연간 800톤, 금액으로 300억원 가량의 어획고를 올리고 있으며, 기타 회집, 어시장에서 올리는 총매출이 1,000억원대로 지역 경제 활성화에 기여하고 있으며, 1997년 1월 27일에는 그동안 시설이 낙후된 물량장 포장, 지붕설치, 소래철교 인도화 등 소래포구 새단장/개장으로 더 많은 외래 관광객이 찾아오며, 앞으로 주변이 다 변해도 어선이 있는 한 소래포구는 도심속에 자연포구로 영원히 남을 것이라 본다.(조위간격 12시간 42분; 관광객 평일 1만 5천명, 휴일: 3만명선이라 한다.
소래포구로 향하는 시골길에는 곳곳에 농원이 조성돼 있어 오고가며 가족끼리 들러 포도 등 각종 신선한 과일 맛을 보고 또 한 보따리 사서들고 갈 만하다. 음식점 간판이 붙은 가든이 곳곳에 있어 먹거리도 염려없다.


대중교통

동인천역이나 제물포역에서 내려 21번을 타거나 동암역이나 주안역에서 내려 38번을 타거나 백운역에서 내려 20번 버스를 타면 소래포구 종점까지 올 수 있다
자가용 : 경인 고속도로를 이용하려면 부평 요금소 가기 전에 우측으로 빠지면 서울 외곽순환로가 있으며 이 길은 인천 대공원을 지나 서해안 고속도로와 제2경인고속도로로 이어지는데 이때 인천항 이정표방향으로 우회전하여 불과 얼마 못가 남동 나들목이 있다 이곳을 나와 남동공단로를 지나 논현동에서 소래포구로 이어진다. 그전에 조금 가까운 길은 인천대공원 입구에서 빠저 나와 만수 3지구를 지나 수산동을 거처 소래포구로 가는 길이 있다. 수인산업도로를 탈 경우 인천대공원입구를 지나 수산동 에서 소래포구로 이어지는 길을 이용한다. 주말이면 소래로 들어가는 이용객들이 많아 교통이 혼잡한 편이다.
경인고속도로 종점 해안도로 통과 ; 남동공단 I.C교차 남동공단 경유 ; 서창분기점 교차 남동구청 경유 ; 월곶 I.C교차 인도화 소래철교 경유 .



2001. 11. 18. 일요일 여행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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