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간의 후끈 달아올랐던 월드컵경기도 끝이 났다. 한동안의 감동을 뒤로하고 그동안 등한시했던 산으로 시선을 옮긴다. 그런데 이맘때면 나타나는 불청객 태풍... 이름이 ‘라마순’ 촌스럽기는 하지만 규모와 세기가 엄청나게 커서 온 나라가 바짝 긴장하고 있다. 굳이 와야 한다면 쬐끄만게 하나 조용히 지나가던지.... 꼭 인명을 앗아가고 농작물을 박살내놓고 간다. 웬수 같은 것... 주말이면 태풍도 모두 물러가고 날씨도 차차 개어진다는 일기예보도 있지만 닥쳐봐야 알일... 그래도 애써 외면하고 동대문으로 향한다. 이런 내가 진정한 산 매니아인지 아니면 미련한건지....

비가 내리지 않는 새벽3시 빼재를 출발한 일행은 철탑을 지나 주능선에 붙는다. 높게 솟은 나무들은 세찬바람에 온몸을 흔들어대고 있으며, 이때 나는 소리는 마치 바다에서 나는 파도소리와 흡사하다. 그 흔들리는 나무에 랜턴을 비추면 꼭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괴괴함을 연출하고 있으며 하얀 안개까지 나무사이를 스칠 때는 더 한층 으스스하다. 사람들은 이 분위기를 아는 듯 저마다 한 가지씩 알고 있는 공포괴담을 펼쳐놓는다. 다행히 여럿이 모여 불안감은 덜 해보이지만, 만일 이런 분위기에서 ‘와!’ 소리를 내며 건드리면 아마 놀라 자지러질 것이다.

등로는 작은 뒷동산을 연상하듯 완만하게 오르고 내리고를 반복하고 있다. 널찍한 헬기장을 지나(3시48분) 가파른 능선을 올려친다. 이럴 때면 많은 땀이 나올 만도한데 바람이 더위를 식혀주니 태풍의 여진이 묘하게 작은 보탬이 되고 있다. 하지만 나무나 풀잎에 맺힌 물방울들이 이미 바지를 적시고 급기야는 신발까지 공략하고 있다. 한술 더 떠 길이 미끄러우니 나자빠지기 일쑤여서 진흙에 범벅이 된다. 그래도 몇몇 분은 나름대로의 요령으로 오버트로저를 입고(어떤 분은 여기에 스패츠까지 착용) 외부로부터 물을 차단하고 속옷을 뽀송뽀송하게 유지시키고 있다.

4시27분 한참을 낑낑대고 올라서면 근사한 정상이 있을 듯 기대하지만 좁은 공간의 작은 대리석에 갈미봉(1,210m)이라 씌어 있다. 행여 비 맞을까, 아니 비 맞을 각오를 하고 우비까지 준비해 왔지만 아직은 안개만 흩날릴 뿐 비올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대간길이 다 그러하듯 한 고개를 넘으면 다음고개가 기다리듯 1.250m 고지에 힘겹게 올라서서(5시) 잠시 가쁜 숨을 돌려본다. 이곳은 투구봉과의 갈림길이 있는 곳이다. 날이 제법 훤하게 밝아온 터라 앞으로 진행해야할 능선을 가늠해본다. 빼재에서 샘물도 떠왔는데 고지대의 찬바람에 갈증도 달아난다. 오히려 으스스 떨리기까지.... 이럴 땐 그저 걷는 게 최상이다.

한참을 내려온 후 안부인 월음령(달음재)을 지나 비탈을 오르면 지봉(1,302m)에 다다른다.(6시) 정상에는 못봉(지봉)이라 씌어 있었으며, 이곳에는 바람이 많이 불어서 오래 있을 수가 없었다. 다시 서쪽방향으로 진행하다보면 아주 넓은 헬기장이 나타난다. 여기서 다시 내리막길을 따라 35분정도 가면 횡경재(싸리등재)가 나오며 이곳은 구천동계곡, 송계사로 가는 갈림길이다. 열댓명 남짓한 사람들이 보름간격으로 대간을 하면서 친분이 아주 돈독해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1년이 넘도록 힘들기로 소문난 백두대간을 서로 격려하며 이끌어주니 왜 아니 그러하랴. 평일에도 모임을 갖는 것으로 보아 이제는 한팀이 되어 완전한 산꾼으로 변한 듯싶다. 30구간을 아직 한번도 빠진적 없이 개근하고 있다하니 그 정성이 놀랍다. 또한 이분들의 산행걸음도 예전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초반 2~3시간 걸으면 주저앉던 분들이 마지막까지도 별 힘들임 없이 걷는 것이 그러하다. 또한 나름대로의 산에 대한 경외심과 그 속에서 자라나는 동, 식물을 사랑하는 것이 그러하다.

오늘같이 일기가 불순한 경우에는 주변을 조망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간간히 바람에 구름이 흩어져서 멀리 우뚝 솟은 가야산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한다. 그리고 덕유산 주변에는 금원산, 기백산, 거망산, 황석산 등 명산이 많이 있다. 백암봉까지의 능선은 험하지 않은 완만한 능선이다. 하지만 거리가 제법 멀기 때문에 조급한 사람은 큰 봉우리가 나타나기만 하면 ‘저곳이 백암봉이겠지!’ 라고 생각하지만 이후로도 한참을 더가야 한다. 그래서 지친 일행들은 진행을 멈추고 좋은 자리를 찾아서 식사를 한다. 8시가 되어서야 백암봉(송계삼거리)에 도착한다. 여기서 북쪽으로 2km만 가면 향적봉이다. 그러나 대간은 남서쪽으로 방향을 바꾼다. 여기서 능선을 바라보면 나무가 별로 없다. 언제 사라졌는지 모르지만 민둥산이 되어버린 이곳에 하루빨리 나무들이 심어졌으면 하는 바램이다.

이곳은 덕유 종주코스로 많이 다니는 곳이라 길이 아주 잘 나 있다. 등로도 완만하여 산보하듯 걷다보면 동엽령이 나타난다.(8시52분) 이전보다는 날씨가 많이 좋아져서 가끔은 해가 살짝살짝 구름사이로 나오기도 한다. 저마다 걱정했던 것을 햇빛 한번 받고나니 절로 신이 나는 듯 하다. 그래서인지 발걸음도 가볍고 상쾌해 보인다. 10시18분 멀게만 느껴졌던 무룡산(1,491m)에 당도했다. 아직 안개가 완전히 걷히지 않아서 주변은 볼 수 없지만 오늘산행의 마지막 최고점에 도착한 것에 모두가 즐거워한다.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떡과 과일로 쏙 들어간 배를 채워본다. 이제부터는 내리막길만 있는 터라 나같이 무릎이 시원치 않은 사람에게는 자못 긴장되는 순간이다.

11시13분 삿갓재에 도착. 이제는 날씨가 개어서 햇빛이 제법 환하게 비추고 있다. 대피소 나무의자에 잠시 시름을 잊은 듯 앉아 있다가 황점 마을로 향한다. 내려가는 계단길이 너무 힘겹다. 그래도 하산길인지라 그 고통을 잊을만하다. 또한 날씨가 쾌청하니 마을 개울에서 몸을 씻을 수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기분이 좋다. 아스팔트 도로가 있는 황점 마을에 도착한 시간은 12시16분. 총산행시간 9시간16분.


* 운영자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5-03-04 14:25)